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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wonderful dream

[스크랩]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

 

 

에베레스트산 Everest山  

네팔과 티베트 사이에 있는, 히말라야 산맥의 가장 높은 산. 산봉우리에는 항상 큰 빙하가 있으며, 1953년 영국의 존 헌트(John Hunt)가 처음으로 등반에 성공하였다. 높이는 8,848미터

 

 

 

 

 

 

 

보석같은 금빛의 에베레스트

 

 

티벳의 고원 너머로 보이는 에베레스트

 

 

티벳에서본 에베레스트 (좌측 봉우리)
우측의 봉우리는 초오유(cho oyu)봉 (세계 제8의 고봉 8153 m)

 

 

인도 동북부에서본 에베레스트
맨우측이 초오유봉 (세계 제8의 고봉 8153 m)
그다음 제일높게 보이는 봉우리가 마칼루(Makalu)봉  (세계 제5의 고봉; 높이 8,470m)
그다음이 에베레스트
그다음이 로체(lhotse)봉 (세계 제4의 고봉; 높이 8.516m)

 

 

에베레스트 최초 등정자와 사건들 및 역대 오른 사람들 소개

 


에베레스트 초등은 누구인가?

에드먼드 힐라리 인가? 아니면 조지 말로리인가?
지금 세계산악계는 영국인 등으로 구성된 다국적 원정대인 말로리, 어빙 수색원정대가 1999년 5월 3일 조지 말로리의 시신을 발견한 것에 대해 이목을 집중하고 있다.
이원정대는 어떤 목적으로 결정되었을까? 그것은 영국산악회 에베레스트 4차 원정대원인 말로리와 앤드루어빙이 1924년 6월 8일 오후 12시 50분경 에베레스트(8848미터)북동릉을 따라 정상 바로 아래에 있는 능성상의 바위지대인 제 2스텝위에 도달했다는 노엘 오델의 증언 때문인데 그의 주장에 의하면 말로리일행이 에베레스트 정상에 섰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러나 에베레스트 정상 부근에서 안개속으로 사라진 그들은 그이후로 살아오지 못했다.
그들이 실제 에베레스트 정상에 섰는지 않섰는지에 대한 사실여부는 아무도 모른다. 만약 그들이 등정 했다면 그당의 배낭속에 있던 코닥 카메라에 남아있을 것이고 이 때문에 말로리. 어빙 수색원정대는 수색에 임하고 있다.
특히 카메라가 발견되고 렌즈가 깨지지 않았을 경우 코닥 관계자의 말처럼 건조한 공기와 낮은 기온 덕분에 필림이 잘 보관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따라서 말로리와 어빙이 남긴 필름 내용에 따라 에베레스트 초등 정사를 다시쓸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현재의 공식적인 기록은 1953년 5월 29일 11시 30분 에드먼드 힐라리와 텐징 노르게이가 에베레스트 정상에 우뚝서 초등의 영예를 안았다는 것이다.


에베레스트 최초 도전한 영국 산악회

에베레스트가 발견된 해는 1852년
1949년부터 영국의 식민지 인도 측량국에서 희말라야 봉우리 전체에 대해 고도와 위치를 결정하는 측량을 실시했다. 그작업은 1852년까지 계속되어그결과가 나왔는데 그이전까지 세계 최고봉은 칸첸중가(8586미터)로 알려져 있었다.
인도 측량국의 결과는 의외였다. 당시 피그15로 알려진 이봉우리는 측량 결과 8848미터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로 편명난 것이다. 그러나 이최고봉은 피크15라는 기호로만 기록 되었고 고유한 이름을 알 수 없었다. 산이름에 대해 사람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것은 당시관례였으나 이같은 관레를 깨고 전임 측량국 장관 이었던 조지 에베레스트의 이름을 빌어 피크15는 마운트 에베레스트라 명명 받게 된다. 십수년이 지나 에베레스트가 티베트 이름으로 초모랑마란 이름이 밝혀졌지만 이미 에베레스트란 이름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초모랑마란 티베트 사람들이 나라를 지키는 여신이란 뜻의 나라의 여신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에베레스트가 발견 된지 5년뒤 1857년 영국의 부르주아계층을 중심으로 영국산악회가 창립한다. 이조직의 회원들은 풍부한 재력을 바탕으로 알프스 현지의 가이드를 고용하여 알프스의 봉우리들을 초등정하는 등 활발한등반활동을 벌였다.
초등정 시대가 끝나고 등반기술력이 발전하자 머메리 처럼 더욱 어려운 루트를 가이드 없이 등반하고자 하는 전위적인 클라이머그룹이생겼다.한편 이들은 등반길이가 짧으면서도 어려운 스코틀랜드 지방의 벽으로 눈을 돌려 겨울철 등반대상지로 개발했으며 코카서스나 안데스등의 새로운 암벽대상지등으로 진출했다.
에베레스트가 등반 대상지로 떠오른 시기는 1907년 영국산악회 창립 주년 기념으로 에베레스트를 등반하자는 제안이 처음 제기 되었으나 당시 영국의 식민지인 인도 정부의 반대로 영국산악회의 의욕은 좌절되고 말았다.
1919년 3월 영국 왕립지질협의회에서는 노엘대위가 에베레스트를 비밀 여행 했던 강연이 있었다.이후 토론 시간에 영국산악회장인 파라가 영국산악회가 에베레스트에 올라야한다는 요지의 폭탄 선언을 하면서 에베레스트는 영국 국민의 관심을 끌게되었다.
때마침 티베트와 인도에 관해 풍부한 경험을 가진 영허스 번즈가 왕립지질협회장에 취임되자 그는 협회와 산악회 대표로 구성된 에베레스트 위원회를 조직해 에베레스트 원정을 구체화 시킨다.



산악계에서 인격적으로 존경받은 말로리

1920년 인도 정부의 부왕과 티베트의 달라이라마에게 입산 허가를 받은 영국의 에베레스트 1차 원정대는 인도의 다이질링으로 들어갔다. 이원정대의 목적은 에베레스트 베에스 캠프로 가는 길과 등반 루트를 정찰하는 것.
이원정대는 카라반 도중 희말라야 경험이 많은 겔라스발사가 병으로 사망했다. 다음 날 에베레스트를 발견한 원정대는 카라반을 계속해 팅그리라는 부락에 도착해 본부를 설치했다. 당시 이들 원정대 대원 4명 가운데 켈라스발사는 이미 죽고 다른 한명은 병이 들어 말로리와 볼로크만 남았다.
말로리는 영국 체셔주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케임브리지대학을 졸업하고 교사로 잠시 일했다.그는 재학시절 당대 최고의 등반가인 어빙과 홋날 영국 산악회 회장이 된 제프리 영에게 등산기술을 배워서 알프스 당산에 나섰다. 말로리는 등반 기술 뿐만 아니라 인격적으로 신뢰를 받고 있는 당시 영국 산악계에서 가장 우수한 등반가로 손꼽히는 인물로 "산이 거기 있어 산을 오른다"는 명언을 남겼다.
두 대원이 에베레스트 최하단에돌출된 로부츠빙하쪽을 정찰했으나 그윗부분이 3000미터의 수직벽이어서 등반불가판정을 내렸다. 이들은 로라라고 불리는 북서릉안부에 올라 네팔쪽 등반로와 서릉에 대해서도 등반이가능하지 않다는 판정을 내렸고 남동릉과 그출발지점인 사우스콜을 관찰하려 했으나 볼 수 없었다.
9월24일 이들은 북릉의 안부인 노스콜에 올라 정상까지 이어지는 루트를 확인하고 4개월에 걸친 대탐사를 마치고 귀한했다. 이후이노스콜은 수차례에 걸친 에베레스트 등반의 전진기지가 되었다.
1922년 등반 목적으로 조직된 영국 제 2차 원정대는 5월 1일 롱부크빙하의 하단부에 베이스 캠프를 설치하고 4캠프를 설치하고 4캠프를 노스콜에 설치해 전진기지로 삼았다. 5월 20일 새벽 4명의 대원과 9명의 셀파가 무산소로 4캠프를 출발해 5캠프를 설치했다.다음 날 등반에 나선 이들은 1명이 낙오하고 3명도 고소증세를 보여 8225미터 지점에서 돌아섰다.
5월25일 2차 공격을 실시한 흰층 일행은 산소통을 메고 노스콜을 출발해 5캠프를 더높은 곳으로 옮기고 셀파들을 내려보냈다. 그날부터 폭풍설이 휘몰아쳐 꼼짝 못하고 있던 이들의 8326미터까지만 전진하고 귀환한다.
2차 정상 공격이 실패하자 6월 5일 3차등정에 나선 원정대는 4개조로 나뉘어 노스콜을 등반하던 중 눈사태가 상단부에서 발생했다. 이때 밑에서 오르던 셀파 9명이 눈사태에 밀려 그레바스에 묻혀 7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생겨 3차 원정대는 쓰라린 패퇴를 하고 만다.
1923년 3차 원정대는 부르스 대장이 병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노튼이 대장을 맡게 되었다. 노스콜 밑까지 쉽게 전진한 원정대는 그위의 꿀르와르에 이르지 못하고 일시후퇴하는 도중 고소 포터들이 동상과 페렴, 골절등으로 급기야 2명이 사망했다.
원정대는 이들의 사기 진잘을 위해 롱부크사원의 노승으로부터 기도를 받고 전진캠프인 4캠프건성에 들어 갔지만 폭설이 내려 4명의 셀파가 4캠프에 고립되었다. 이소식을 접한 노튼 대장과 말로리, 쉬베르는 이들 셀파를 구하기 위해 헌식적인 구조에 나서 셀파 모두를 구조하는 모범을 보이기도 했다.



말로리 정상부근 안개속으로 사라져

잠시 베이스 캠프에서 휴식을 취한 원정대는 1차 공격조로 말로리와 부르스을 임명했다. 이들은6월1일 9명의 셀파를 데리고 7710미터 지점에 5캠프를 설치하고 더오르려 했으나 고소 경험이없는 셀파들이 등반을 거부하는 바람에 이들을 데리고 내려왔다 원정대는 셀파들을 장기간 설득해 4명의 셀파가 6캠프까지 짐을 올렸다.
노튼과 솜마벨은 산소도 없이 6캠프(8170미터)까지 짐을 올렸다.
노튼과 솜마벨은 산소도 없이 6캠프에서 하릇밤을 지내고 다음 날 새벽 정상 공격에 나서 옐로우 배든을 따라 등반을 계속했다그러나 12시경 꿀르와르에 다가섰을 때는 산소가 부족해 육신이 몽롱해지자 솜마벨은 뒤로 처지고 노튼 혼자 등반에 나섰다.그러나 그는 8572미터까지 전진한뒤 돌아오고 만다.
1차공격에 실패한 말로리는 옥스퍼드대학에 재학중인 어빙과 함께 등반에 나서면서 오델에게 지원을 부탁하고 코닥카메라를 베낭에 넣었다.6월6일 말로리와 어빙은 셀파 8명을 데리고 노스콜을 출발해 5캠프까지 전진했다. 5캠프에서 4명의 셀파를 내려보낸 말로리 일행은 6캠프에서 도착해 나머지 셀파를 하산시켰다. 6월8일 산소장비를 메고 정상을 출발한두사람은 그날 밤이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이들을 마지막 목격한 이는 지원을 맡은 오델 한사람뿐이었다.
오델은 말로리 일행보다 하루 늦게 노스콜을 출발 5캠프에서 하루를 자고 말로리 일행이 정상을 떠나던 날 6캠프를 향해 올랐다. 그날 아침 날씨는 맑았지만 언제부턴가 아래쪽에 안개가 끼어 있었다. 그러나 7900미터지점에 도달했을 때 갑자기 안개가 걷히면서 에베레스트 정상 부근이 한눈에 보였다.
그때 멀리 움직이는 작은 사람들이 보였는데 위사람은 피라미드 바위로 접근하고 있었고 그 뒤를 다른 사람이 따르고 있었다.잠시뒤인 오 후 12시50분경 위사람이 제2스템위에 도착했다. 오델이 이장면을 지켜보고 있는 동안 다시 안개가 끼면서 이두사람의 모습은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고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6캠프에 도착한 오델은 60여미터를 더 올라가 두사람을 큰 소리로 불렀으나 대답은 없었다. 약 2시간이 지난 뒤 에베레스트 상단부 바위가 뚜렸이 보였으나 말로리 일행은 보이지 않았다. 그다음 날에도 돌아오지 않자 두사람의 죽음은 기정 사실화 됐다.


6캠프 부근에서 발견된 말로리

원정대가 귀국하자 말로리와 어빙의 장례는 센트폴교회에서 국장으로 치루어 졌다. 이날 장례식에는 국왕을 비롯한 각계 요인이 참석해 이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했다. 이후 영국 원정대는 1933년 4차 원정대를 파견 6캠프를 떠나 1시간을 오른뒤에 어빙의 피켈로 여겨지는 한자루 피겔을 발견했다. 이들은 전진을 계속해 꿀르와르 까지 왔으나 체력이 다 떨어져 8500미터 지점에서 돌아섰다.
5월 31일 2차 공격조인 스미드와 쉽튼은 산소없이 6캠프를 출발해 8572미터인 꿀르와르까지 스미드가 진출했지만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돌아와 4차 원정대도 실패하고 말았다.
이후 영국 산악의 에베레스트 원정은 1935년 5차 원정대 실패 6,7차 원정대의 좌절을 거듭했다. 1951 년 가을 8차 원정대는 에베레스트남측의 웨스턴 쿰까지 진출해 로체 설사면을 타고 사우스콜로 가서 남동릉을 타면 정상에 설 수 있다는 확신을 안고 귀국했다.
1952년 8명의 대원과 2명의 과학자가 주축이 된 스위스 1차 원정대는 에베레스트을 처음으로 도전한다. 이원정대는 5월28일 정상도전을 위해 등반에 나서 강풍을 동반한 눈보라 속을 뚫고 등반했지만 8595미터 지점에서 돌아설수밖에 없었다.
같은 해 가을, 알프스에서 맹활약하는 가이드들로 조직된 스위스 2차원정대는 11월 19일 사우스콜에 도착 8캠프를 설치했다. 다음 날 3명의 대원이 강풍과 혹한을 뚫고 출발했으나 8100미터에서 하산해 스위스 원정대는 에베레스트 초등 기회를 영국에 물려주고 만다.
1953년 영국 9차 원정대는 5월 26일 1차 공격조인 에반스와 보디롱이 등정에 나섰으나 남봉 지점에서 돌아섰다. 2차 공격조인 할라리와 텐징은 5월 29일 오전 6시 30분경 9캠프를 출발 남봉을 거쳐 어려운 스텝(할라리 스텝)을 넘어 오전 11시 30분 에베레스트 초등에 성공했다.
영국 산악회의 에베레스트 초등은 전파를 타고 전세계에 알려졌고 영국은 축제 분위기가 며칠이나 계속 되었다.
1921년부터 줄기차게 에베레스트에 9번도전한 영국은 이로서 세계 최고 봉 에베레스트 초등국이라는 최고의 영예를 안게 되었다.
말로리와 어빙의 죽음이 다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75년 중국 에베레스트 원정대인 왕홍바오에 의해서뎠다. 그가 1975녑 에베레스트 북쪽 루트를 오른던 중 세계대전 이전의 옷차림을 한 영국인 시체를 목격했다. 그가 옷에 손을 대자 부셔졌다는 사실을 79년 에베레스트 등반에 나선 일본인 하세가와 로텐에게 알렸으나 하세가와는 다음 날 눈 사태로 사망했다. 이 때문에 말로리가 있는 정확한 위치를 알릴 수 있는 기회는 사라졌다.이번 말로리.어빙 수색 원정대가 말로리의 시체가 있는 곳으로 추정했던 지점은 1933년 엔드루 어빙의 피켈이 발견된곳. 6캠프에서 20분 거리에 있는 말로리의 시신을 발견하고 원정대는 유족의 뜻에따라 시신을 에베레스트 북쪽 능선에 안장했다고 전했으며 이들은 1999년 5월20일 현재말로리 일행이 배낭속에 넣었던 코닥 카메라를 찾고 있는 중이다.
만약 카메라에 들어 있는 필름이 온전하고 사진 판독 결과 말로리 일행의 에베레스트 정상 등정 사진이 나온다면 에베레스트 초등 정사는 다시 쓰여질 것이 분명하다. 또한 말로리에 대한 인물조명으로 세계산악계는 부산할 것이다. 그와 함께 말로리.어빙수색원정대의 업적도 빛날 것임에틀림 없다. 이번기회에 카메라가 발견되어 초등에 대한 오랜 의문이 풀리기를 기대해 본다.



■ 에베레스트(8.848m 북위 27도 59분 동경 86도 55분)

영국은 1849년부터 식민지였던 인도 북부에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히말라야산맥에 대한 광범위한 측량사업을 벌이면서 P15란 기호로 표시되어 있던 유난히 높은 봉우리에 관심을 갖고서 측량을 하게되었다.
P15봉우리가 정확하게 측량이 된 것은 그로부터 3년이 지난 1852년에 정확한 높이가 8.848m로 측량이 되었지만 그 후로도 계속 P15봉우리로 불리다가 1865년에 가서야 당시의 측량국 장관이었던 조지 에베레스트경의 이름을 따서 에베레스트란 이름으로 지금까지 불려지고 있다.
티베트 말로는 초모롱마(Chomoungma), 사가르마타 불린다.

에베레스트는 영국의 산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영국은 1919년 에베레스트위원회를 조직하여 원정을 주관하였다.
에베레스트에 대한 최초의 도전은 1921년 하워드 버리가 이끈 4명의 대원과 3명의 과학자가 참가한 정찰 원정이었다.

최초의 원정대는 1922년 인도 고르카 연대의 준장이었던 부르스대장을 포함한 12명의 대원이 7.600m에 제 5캠프를 설치하면서 세 차례의 정상공격을 감행하여 북동릉 8.326m까지 전진하는 기록을 세웠다.
이후에도 일곱 번의 원정이 있었으나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였다.

1953년 영국은 존 헌트를 대장으로 제 9차 에베레스트 원정대를 파견하여 5월29일 오전 11시 30분 드디어 에드먼드 힐라리와 셀파인 텐징 노르게이가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라섰다.
에베레스트가 세계 최고봉으로 밝혀진 지 100년만의 일이다.

1999년 9월에 발견된 조지 말로리의 시신은 세상을 다시 한번 긴장하게 만들었다.
1924년 3차 원정대원으로 참가하여 6월 27일 마지막 일기를 써놓고 조지 말로리와 앤드류 어빈은 정상을 향했고 그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1924년 그들은 정상에 섰는가? 75년 만에 발견이 된 유품 중에서 그들이 갖고 있던 코닥카메라에 관심이 쏠렸다.
그러나 사진 현상에는 실패하여 결국 의문만을 남기고 말았다.
조지 말로리는 살아서는 그 유명한 말 "산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오른다" 라는 말을 남겨서 유명했고 죽어서는 그는 과연 `올랐는가` 아니면 `오르지 못하였는가?`
끊임없는 궁금증만을 남겨 놓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에베레스트 동계 초등정은 1980년 폴란드 크리스토프 비엘리키(8.000m 5번째 완등자)와 안드레이 자바다가 세웠다.

최초의 여자 등정자는 1975년 5월16일 일본의 다베이준코가 정상에 등정했다.

최초의 부자등정은 1953년 초등자인 에드먼드 힐라리의 아들 피터 힐라리가 아버지가 37년전 올랐던 남동릉으로 1990년 5월 10일 등정해 첫 부자등정의 영예를 갖게됬다.

최연소 등정자는 프랑스의 버트란트 로슈(만17세)가 1990년 10월 7일 아버지 장노엘 로슈(40세)와 같이 등정해 두번째 부자등정이라는 기록도 같이 갖고 있다.

최고령 등정자는 1999년 미국의 레브 사키소프(60세 159일)가 세웠다.

첫 부부등정자는 1979년 10월 1일과 2일 등정한 서독의 게르하르트 슈마츠(50세)와 한넬로레 슈마츠(39세)가 해냈는데 아내는 하산도중 동사하는 아픔까지 가져야 했다.

최단시간 등정자는 1998년 10월17일 가지 셀파가 세운 20시간 24분이다.

최다 등정자는 셀파인 네팔의 앙 리타와 아파 셀파가 세운 10번의 대기록이 있다.

최초의 무산소 등정자는 1978년 5월 8일 등정한 라인홀트 메스너로 그는 이 등반으로 철인이라는 명성을 얻으면서 산소 없이도 오를 수 있다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무산소 여성 등정자는 뉴질랜드의 리디아 브래디로 등정에 대한 의문이 남아 있다.

1999년 5월 6일에는 네팔의 바부 셀파는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21시간을 체류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우리나라는 1977년 9월 15일 고상돈이 58번째, 나라로는 8번째 나라가 되었다.

박영석은 1993년 무산소 등정을 하였다.

허영호는 1987년 동계 3등과 1993년 횡단등반을 하여 2회 등정자가 되었다.

1993년 지현옥(1999년 안나푸르나에서 사망),최오순,김순주 여성대원이 올라 우리나라도 여성등정자를 배출하였다.

1988년에는 올림픽을 기념하기 위한 등반에서 6명(장봉완,남선우,장병호,정승권,엄홍길,김창선)이 올라 최다등정자를 기록하였다.

아직까지 등정이 되지 않은 미등의 루트는 동릉이다.
1982년 조 태스커와 피터 보드맨이 마지막 피너클 부분(8.400m)을 통과하지 못하고 사망한 채로 1996년 일본의 원정대에 의해서 발견이 되었다.

일본 동릉 원정대도 마지막 피너클을 통과하지 못하고 우회하여 정상에 올라 아직까지 미등으로 남아 있다.

1987년 미국-영국-캐나다합동대는 미답의 동벽 버트레스(캉슝페이스)에 신루트를 개척하며 4명이 모두 무산소로 등정하는 기록을 세웠다. 같은 해 프랑스의 브와맹은 파라판트로 활강하여 성공한다.

1989년 10월 23일 한국산악회의 정상용대원이 서릉 직등루트로 등정, 하산하였다고 발표하여 이 경이적인 기록에 세계가 놀랐다.

1979년 유고대의 초등이후 84년 불가리아대가 재등을 하였으나 같은 루트로 하산은 하지 못 했다. 유고대는 혼바인 꿀르와르로 우회하여 내려왔고, 불가리아의 등정대원은 이 루트로 하산을 강행하다 실족사하여 그 루트의 어려움을 말해준다. 명확한 자료를 제시하지 못한 한국대는 의혹을 사며 구설수에 올랐다.

1990년 한일에베레스트원정대의 김재수, 박창우, 복진영은 정상에서 2시간 30분이나 체류하는 기록을 세웠는데 이 체류로 인하여 복진영대원은 발가락 전부를 절단하는 불운을 겪는다.

1998년 5월 27일 미국의 톰 휘태커는 장애인으로서 정상을 등정하였다.

1994년 오스트리아의 마이크 라인베르거는 여섯 번의 실패를 극복하고 정상을 등정하였으나 너무 지쳐서 하산하지 못하고 정상 바로 밑 20m지점에서 비박을 하였으나 다음날 사망을 하였다. 그의 이 비박은 지구상에서 행해진 가장 높은 곳에서의 비박이 되었다.

2000년 울산연맹 김환구 대원이 45세의 나이로 정상을 등정하여 우리나라 최고령이라는 기 록을 세웠다.

2000년 5월 20일 바부 치리 셀파가 무산소로 16시간 56분만에 정상를 올라 1998년 기지 셀 파가 세운 20시간 54분의 기록을 경신했다.

2000년 10월 7일 슬로베니아의 다보 카르니카가 스키활강으로 정상에서 단 5시간만에 베이 스캠프까지 스키의 탈부착 없이 내려왔다.

1998년 네팔의 셀파 형제(바부 체링,다와)가 시즌에 두 번 정상에 오르는 기록을 남겼다.  

출처 : 사오정의 쉼터
글쓴이 : 사오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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