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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와 고대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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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노가리 유적지에서 출토된 한반도계 세형동검(사진 위)과 각종 청동기 거푸집

삼국사기에는 신라가 고대국가 단계에 진입하기 훨씬 이전부터 바다 건너 왜(倭)와 다양한 관계를 맺어왔음을 보여주는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중국이나 일본의 기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어서 12세기 당시까지 남아 있었던 옛 기록을 참조한 것으로 보인다.

왜와 관련한 가장 이른 시기의 기사는 BC 50년의 ‘왜인(倭人)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변경을 침범하려다가 시조(박혁거세)가 거룩한 덕을 지녔다는 말을 듣고 돌아갔다’이다. 신라와의 첫 접촉을 ‘침범’으로 기록하게 한 이 ‘왜인’이 정확히 어떤 세력이었는지를 알 수는 없다. ‘한서’(漢書) 지리지에 따르면 BC 1세기 당시 현재의 규슈지역을 중심으로 한 왜에는 100여개의 소국이 난립해 있었다. 따라서 당시 신라 침범을 시도한 세력은 대마도 등 한반도와 지리적으로 가까웠던 지역의 소국이거나 그들과 일정한 관계가 있었던 해상세력일 가능성이 크다.

일본의 야요이 시대는 한반도 남해안 지역 주민의 집단적 이동에 의해 열렸다. 이들이 독자적 항해능력을 가졌든, 규슈와 한반도 남해, 동중국해 해안과 도서에 근거지를 두었던 해민집단의 도움을 받아 규슈로 건너갔든, 연안 항해능력은 충분히 갖추었으리란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그런 항해 능력이 소국 난립기의 정치 혼란을 틈타 밖으로 새어 나온 결과가 잇따른 신라 침탈이었다.

삼국사기에는 왜의 항해능력을 시사하는 다른 기록도 많다. BC 20년 마한에 사신으로 파견된 호공(瓠公)에 대해 ‘종족과 성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원래는 왜인이었다. 처음에 박을 허리에 차고 바다를 건너온 까닭에 호공이라고 불렀다’고 적었다. 호공은 나중에 재상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서기 14년의 일로는 ‘왜인이 병선 100여 척을 보내 바닷가의 민가를 노략질하므로 6부의 날랜 군사를 출동시켜 그들을 막았다. 낙랑인이 나라 안이 비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금성을 공격해서 몹시 급박했다’는 기록이 있다. 다소의 과장을 감안하더라도 왜가 대규모 선단을 이루어 공격해 왔음을 알 수 있다. 또 이를 틈타 낙랑이 경주에 쳐들어 왔다는 내용은 당시 한반도의 세력 각축에서 왜의 움직임도 독립변수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더욱 상징적인 것은 4대왕 석탈해의 기사이다. 삼국사기는 ‘탈해는 본래 다파나국(多婆那國)에서 태어났는데 그 나라는 왜국의 동북쪽 1,000리 되는 곳에 있다’고 썼다. 삼국유사는 다파나국 대신 용성국(龍城國) 출신이라고 썼으나 ‘왜의 동북쪽 1,000리’라는 위치는 동일하다. 당시 왜국이 규슈를 가리켰다는 점에서 석탈해는 오늘날 간사이(關西)나 시코쿠(四國) 지역의 해양세력의 후예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신라에 귀화한 이후 그는 고기잡이를 업으로 했고 양산 아래 호공의 집을 속임수로 빼앗았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그가 해양세력을 기반으로 토착세력과 연합해 왕위를 차지했음을 암시한다. 또 삼국유사에는 ‘본래 대장장이 집안’이라고 적혀 있어 철의 해상무역을 통해 세력을 키웠을 것으로도 추정된다. 당시 철과 항해력의 결합은 무엇보다 유력한 세력 증강 수단이었다.

그의 집권 직후 신라와 왜는 우호관계를 맺는다. 삼국사기는 59년 기사에서 ‘여름 5월에 왜국과 우호관계를 맺고 사신을 교환했다’고 적었다. 관계가 호전된 것은 해상세력에 기반한 석탈해의 집권으로 신라의 해상ㆍ해안 방어력이 크게 증강된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평화는 오래 가지 않았다. 삼국사기는 ‘왜인들이 목출도(木出島ㆍ위치 불명)에 침입해 각간(角干) 우오(羽烏)를 보내 방어하게 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우오는 전사했다’(73년), ‘여름 4월에 왜인이 동쪽 변경에 침입했다’(121년)고 적었다. 이런 갈등은 ‘봄 3월에 왜국과 화해했다’는 123년에 이르러 해소되고 이후 100여년에 걸쳐 평화가 지속된다.

‘봄 3월에 죽령(竹嶺)을 개통했는데 왜인이 사신을 보내왔다’(158년), ‘여름 5월에 왜의 여왕 히미코(卑彌乎)가 사신을 보내왔다’(173년)는 데 이르러서는 돈독한 친선관계를 자랑하는 듯하다. 그 결과 ‘6월에 왜인이 크게 굶주려 먹을 것을 구하러 온 사람이 1,000여명이나 되었다’(193)는 기록까지 나오게 된다.

그런 평화는 232년 깨어진다. ‘여름 4월에 왜인이 갑자기 와서 금성을 에워쌌다. 왕이 몸소 나가 싸우니 적이 흩어져 도망했고, 무장한 날랜 기병을 보내 추격하여 1,000여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는 기록을 시작으로 ‘5월에 왜의 군사가 동쪽 변경을 노략질하였다. 가을 7월에 이찬 우로가 왜인과 사도(沙道)에서 싸웠는데 바람을 이용하여 불을 놓아 배를 불태우니 적들이 물 속에 뛰어들어 모두 죽었다’(233년)는 등의 전쟁이 이어진다. ‘여름 4월에 왜인이 일례부(一禮部)를 습격하여 불태우고는 1,000여명을 붙잡아갔다’(287년) ‘여름 5월에 왜의 군사가 쳐들어온다는 소문을 듣고 배와 노를 수리하고 갑옷과 무기를 손질하였다’(289년)는 등으로 싸움의 규모가 커진다. 295년에는 왕이 신하들에게 백제와 손을 잡고 바다를 건너 왜를 공격하자고 제의하고, 신하들이 멀리까지 가서 정벌한다면 뜻하지 않는 위험이 따를 수 있고 백제를 믿을 수 없다고 만류하는 장면까지 나온다.

이후로도 신라는 왜의 잇따른 침공에 시달리기를 수없이 거듭한다. 비교적 국력이 약했던 초기의 일이지만 해양세력인 왜와의 대결을 통해 해상력의 중요성을 깨닫고 힘을 키우게 된 측면도 있다.

끊임없이 자행된 이 시기의 왜의 신라 침탈을 두고 학계에서는 왜가 바다 건너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김해를 비롯한 남해안 일대의 가야 세력을 가리켰을 것이란 논의도 활발하다. 그러나 위에 열거한 삼국사기 기록으로 보아 가능성은 크지 않다. 그런 주장의 근거로 우선 거론되는 것이 삼국사기의 많은 기록과 달리 니혼쇼키(日本書紀)에는 비슷한 시기 ‘신라 공격’을 보여주는 기록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8세기에 편찬된 니혼쇼키가 초기에는 가야, 나중에는 백제를 주체로 한 기술을 뒤집어 편집한 것이어서 주로 신라의 남동쪽 변경을 중심으로 이뤄진 사건을 다룰 까닭이 없었다.

또 5세기 말까지는 통일국가를 형성하지 못했고, 나중에 당나라나 수나라로 사신을 보낼 때도 발해에 의존해야 할 정도로 항해능력이 뒤떨어졌다는 점을 들어 ‘100척의 병선’이 현해탄 바다를 건널 수 없었을 것이란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앞에서 밝혔듯 당시 왜의 철기 문화가 한반도 남해안 주민이 바다를 건너 간 집단이동의 결과였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당장 부정되고 만다. 이 점은 나중에 자세히 밝히겠지만 당시 왜의 중심세력이었을 가야계의 항해능력은 대한해협을 건너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다. 또한 신라 침공이 대부분 늦봄과 초여름에 걸쳐 이뤄졌다는 기록은 계절풍의 방향으로 보아서도 출발지가 규슈나 대마도 쪽이었을 것임을 추정하게 한다.

많은 사람들은 해석의 문제는 나중이고, 당장 신라가 왜의 침입으로 고통을 받은 듯한 삼국사기의 기록 자체를 부인하고 싶어 한다.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일제 식민사관이 일본의 우위를 강조하기 위한 재료로 이런 기록들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그런 무의식적 거리낌은 현재와 같은 평화론이 있을 수도 없던 당시 왜를 제대로 정벌하지 못한 데 대한 안타까움과도 이어질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모두 무의미하다. 우선은 한반도와 왜의 정세가 달라서 바다를 마주보고 있더라도 대응이 다를 수밖에 없다. 또한 차차 밝히겠지만 당시의 역사에서 우리의 역사와 일본의 역사를 가려내 보려는 태도 자체가 무리다.


황영식 한국일보 논설위원 yshwang@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