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을 걷다](11)전설의 산악인, 그 발길을 따라 가는길 ‘프랑스 샤모니②’ | |||||||||
8월7일, 푸른 하늘 아래 여름 햇살이 뜨겁게 내리쬐는 오후였다. 무거운 배낭을 멘 두 남자가 샤모니를 벗어나 보송 마을로 들어섰다. 멀리 보이는 눈 덮인 설산에 잠시 눈길을 주던 두 남자는 곧 가파른 오르막을 오르기 시작했다. 밤이 깊어서야 두 남자는 해발 2392m의 고갯마루에 도착했다. 거대한 바위 밑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
15시간의 쉼 없는 전진 끝에 오후 6시23분, 마침내 그들은 해발 4807m에 도달했다. 더 이상 오를 곳이 없었다. 1786년이었고, 알프스의 최고봉 몽블랑이 마침내 인간의 발길을 허락하는 순간이었다. 공포와 미혹의 대상이던 산이 물러서고 근대 등산의 문이 열리기 시작하는 시점이었다. 몽블랑 첫 등정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된 두 남자는 미셸 가브리엘 파카드(Paccard, Michel Gabriel1757~1827)와 자크 발마(Balmat, Jaques 1762~1834)였다. 파카드는 샤모니에 정착한 첫 번째 의사로서 자연과학에 관심이 많아 여러 산들을 두루 오른 청년이었다. 자크 발마는 샤모니의 수정 채굴꾼이었다. 샤모니를 둘러싼 수없이 많은 첨봉들의 암반 속에는 진귀한 천연 수정들이 박혀 있었다. 높은 곳일수록 더 아름다운 빛을 발하는 수정을 찾아 채굴꾼들은 장비도 없이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발마 역시 수정을 찾아 무수한 산들을 오르내린, 산에 대해 탁월한 감각을 지닌 이였다. 두 청년이 몽블랑이라는 공동의 목표로 의기투합한 데는 타고난 모험심 외에도 소쉬르라는 배경도 있었다. 26년 전인 1760년, 스위스의 자연과학자 소쉬르(Horace Benedict de Saussure)는 샤모니의 프레방(2526m)에 올랐다. 맞은편에 우뚝 선 몽블랑의 장엄함에 감동한 그는 과학자로서의 지적 열정에 불타올랐다. 이제까지 아무도 오른 적 없는 신비스러운 산의 정체를 밝히고 말겠다는. 소쉬르는 “누구든지 이 산에 처음 오르는 사람에게 상금을 주겠다”며 어마어마한 현상금을 내걸었다.(흔히 등산은 보상 없는 스포츠라고 하지만 근대 등산의 시작은 이렇듯 상금과 함께 시작되었다) 어쨌든 당시 그 지역 사람들은 산꼭대기에 살고 있는 악마가 눈사태를 일으켜 사람들을 해친다고 믿었기 때문에 현상금은 26년 동안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만큼 발마와 파카드의 도전은 당시로서는 목숨을 건 모험이었다. 변변한 장비나 지도도 없고, 기상 관측도 불가능한 시대였다. 등산이라는 말조차 없던 시대였다. 무수한 장벽을 헤치고 정상 등정에 성공했지만 발마와 파카드 역시 위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하산 길에 파카드는 설맹과 동상이 심해져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산을 내려와야 했다. 위대한 업적을 이루어낸 두 사람의 아름다운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얼마 후 발마가 몽블랑 초등의 영예를 독차지하기 위해 “파카드는 한 일이 거의 없고, 모든 일을 내가 다 했다. 정상에도 내가 먼저 올랐다. 나중에 파카드를 정상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산을 내려가 그를 데리고 와야 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으니. 과학적 열정으로 충만했던 젊은 의학자 파카드는 현상금보다는 지적 호기심으로 몽블랑에 오르기를 꿈꾸었다. 짐꾼 겸 가이드로 발마를 고용했던 그는 소쉬르의 상금도 발마에게 전액 양보하는 관용을 베풀었다. 그에 대한 대가는 중상모략으로 돌아왔다. 탁월한 용기와 모험심에 비해 스물네살 청년 발마의 성품은 비열했던 걸까. 목숨을 걸고 함께 산을 오른 동지의 발등을 내리찍을 수 있다니!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는 일은 신의가 사라진 오늘의 세태인 줄 여겼는데 면면한 전통을 가진 터였다. 들끓는 논쟁에 기름을 들이부은 건 당대의 대문호 알렉산더 뒤마였다. 그는 이 모험담에 얽힌 온갖 추문을 발마의 이야기에 기반한 소설로 구성해 세상에 발표했다. 당연히 대중은 그 이야기를 사실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발마의 중상모략으로 인해 파카드는 많은 고통을 겪은 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망 후에도 이 사건은 등반사상 가장 큰 논쟁의 하나로 남았다. 샤모니 광장에 몽블랑 초등을 기념하는 동상이 건립될 당시까지만 해도 몽블랑 등정은 발마만의 성공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결국 파카드는 제외된 채 소쉬르와 발마의 동상만 세워졌다. 파카드의 등정 의혹을 둘러싼 150년의 논쟁이 끝나게 된 것은 영국의 산악인 프레시필드(D. W. Freshfield) 덕분이었다. 진실 규명을 위한 집요한 추적을 멈추지 않은 그는 마침내 소쉬르의 증손자가 보관해 온 자료를 찾아냈다. 발마에 의해 기록된 일기에는 파카드가 발마의 도움 없이 정상에 올랐음은 물론, 그가 발마보다 정상에 먼저 올랐음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이 일기장이 공개됨으로써 마침내 등정 의혹에 대한 진실이 드러났다. 프레시필드는 소쉬르와 발마의 동상 옆에 오랫동안 멸시를 받아온 진정한 몽블랑 초등자인 파카드의 동상을 세울 것을 주장했다. 결국 그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파카드의 동상이 샤모니 광장에 들어선다. 몽블랑이 초등된 후에도 19세기 중반까지 몽블랑을 오르는 일은 대단한 고통과 위험이 따르는 등산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두 번째로 몽블랑에 오른 소쉬르는 무게가 68㎏이나 나가는 이불(1.5㎏의 거위털 침낭으로 8000m급의 산에 오르는 오늘의 시대와 비교하면 엄청난 무게다)과 불을 피울 수 있는 장작더미, 전원이 잘 수 있는 대형 천막, 크레바스를 건널 때 사용하는 사다리 등을 20명의 짐꾼에게 지게 하는 대규모의 원정대를 꾸려서야 등정에 성공했다. 초등 이후 100여년간 여전히 몽블랑 등반은 죽음을 향한 행보로 불렸다. 원정대가 ‘떴다는’ 소문이 들리면 그들을 보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줄을 서고, 성공 가능성을 점치며 원정대의 귀환을 기다렸다. 등반이 성공하는 경우에는 계곡에서 축포를 쏘았다. 물론 그들이 머물던 호텔에서도 축포를 쏘아올리고 손님의 계산서에 조심스레 첨부하기도 했다. 등반가들이 마을로 돌아오면 꽃다발과 환영 인파에 묻혀 샴페인으로 축배를 들었다. 이런 분위기는 1853년을 기점으로 끝이 났다. 몽블랑으로 향하는 길에 첫 산장이 들어서면서 등반대가 엄청나게 증가하게 되고, 자연히 사람들의 관심도 시들해져 갔기 때문이다. 몽블랑 초등 이후 220년이 지난 2007년 9월의 어느날 아침. 한 동양 처녀가 오뉴월 장마비처럼 땀을 쏟으며 산길을 오르고 있다. 지난 1주일간 샤모니에 머물며 이산 저산을 혼자 돌아다닌 그녀는 샤모니에서의 마지막 하루를 파카드에게 헌정하기로 했다. 이제는 그 의미가 시들해진 몽블랑 초등 루트를 따라 걸음으로써. 오늘날 몽블랑을 오르는 산꾼들은 케이블카를 타고 행로를 단축시키기에 이 길에는 인적이 없다.
샤모니에서부터 걷기 시작한 그녀는 보송 빙하 앞 산장에서 샌드위치를 사들고 오르막을 오른다. 계속되는 숲을 지나 정오 무렵 피라미드 산장(1895m)에 도착해 코코아 한 잔을 마시며 땀을 식힌다. 햇살은 뜨겁고 길은 끝없는 오르막이다. 장비도 경험도 없는 그녀는 몽블랑이 아닌 라 정션(La Jonction, 2589m)까지가 목표다. 지금껏 샤모니에서 걸어다닌 길 중에 가장 힘든 길이다. ‘그냥 남들처럼 케이블카나 타고 돌아다니지 왜 사서 고생이람. 발마처럼 나중에 배신해도 좋으니 동행자라도 있었으면…. 몽블랑 초등 220주년 기념 트레킹치고는 너무 초라한 거 아닌가.’ 온갖 생각으로 어지럽던 머릿속이 눈앞의 절벽 외길 덕분에 하얗게 비워진다. 가파른 절벽을 지그재그로 치고 올라오니 이제는 바위투성이 오르막이 기다리고 있다. 길을 잃을 만하면 베이지색 페인트로 동그라미가 그려진 바위들이 하나씩 나타난다. 잠시 후 발마와 파카드가 비박했다는 거대한 바위를 지난다. 이제는 ‘Le Gite a Balmat’라는 이름까지 붙은 바위다. 바위 밑을 들여다보니 누군가 비박한 흔적이 재와 함께 남아있다. 나처럼 발마와 파카드의 길을 따라간 이가 있었네. 마침내 걷기 시작한 지 다섯 시간 만에 라 정션에 도착한다. 은빛 성벽이 몽블랑을 호위하듯 감싸고 있다. 저 빙하의 성을 넘어서면 몽블랑의 정상으로 향하는 길이다. 사위는 고요하다. 가끔씩 빙하 무너지는 소리만이 들려올 뿐 침묵에 싸여있다. 220년 전의 그들은 얼음과 침묵의 벽에 둘러싸여 두렵고 막막하기도 했을까. 얼음의 성벽 저 너머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지 못한 채 그저 묵묵히 오르고 또 올랐을 그들의 용기를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다. 그리고 저 산에서 돌아오지 못한 이들과 이름을 남기지 못한 이들의 열정도. 해가 지기 전에 샤모니로 돌아가야 하는 나는 서둘러 하산을 시작한다. 기우는 오후의 햇살에 몽블랑이 하얗게 빛나고 있다. 〈김남희 |도보여행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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