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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ke a trekking

[스크랩] [펀글]유럽을 걷다 - 프랑스 샤모니

[유럽을 걷다](10)세월 건너 다시 만난 첫사랑같은 ‘프랑스 샤모니’
입력: 2007년 11월 22일 09:21:20
-전설의 산악인, 그 발길을 따라 가는 길-

낯선 도시에 첫 발을 내디딜 때면 언제나 가슴이 뛴다. 핏줄 속 모세혈관들이 일제히 깨어나 웅성거린다. 설렘보다 긴장이 앞서 몸과 마음이 함께 굳는다. 그럴 때면 잠시 호흡을 고르며 속삭인다. ‘자, 또 새로운 땅이야. 여기서도 잘해낼 수 있지? 걱정하지마. 지금까지 그래왔듯 다 잘될 거니까.’ 숙소며 물가, 내 빈약한 주머니를 노리는 사기꾼까지 온갖 것에 대한 걱정을 뒤로하고 애써 스스로를 격려한다. 그리고 조심스레 공항 밖으로, 기차역이나 터미널 밖으로 나선다. 그 첫 만남의 떨림과 긴장을 나는 사랑한다. 까탈스럽기 그지 없어 일상의 사소한 변화도 견디지 못하기 일쑤인 내가 어떻게 끝없이 낯선 땅으로 발을 옮기는 여행자의 길에 들어설 수 있었을까. 익숙한 것에 대한 그리움과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 사이에서 승리는 언제나 호기심이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풍경, 나와는 다른 얼굴을 가진 사람들, 이질적인 문화들이 언제나 나를 끌어당겼다. 대문 밖의 세상에서 만나는 나 역시 방 안의 나와는 달랐다. 옷장 속 양말들까지 줄 맞춰서 세워 놓고 살고, 먹기 싫은 음식은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입에 대기 싫어하던 내가 바깥에 나오면 풀어졌다. 어차피 까탈을 부려봤자 내 뜻대로 되는 것도 없다보니 그저 주어지는 대로 감사히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렇게 헐거워진 내 성벽 안으로 바람이며 햇살이 드나들 작은 구멍이 생겨났다. 돌아보니 여행이 내게 가르친 것은 그렇게 익숙한 것들과 이별하고 새로운 것들과 만나 사귀는 법이었다. 강퍅하고 모난 곳 투성이던 나를 의지할 곳 없는 공간 속으로 내동댕이쳐 그곳에서 만나는 것들과 몸과 마음을 섞으며 둥글어가는 법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조금 넓어지고 용감해진 나를 긍정하는 법을 여행이 가르쳐주었다. 그래서 떠난 자리로 돌아올 무렵이면 곁에 있는 것들을 더 많이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15년 전 여름,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낯선 세상과 마주쳤다. 스물셋을 갓 넘긴 나는 두 달째 유럽을 돌고 있었다. 욕심이 많던 시절이라 밤기차에서 성근 잠을 자는 날이 며칠씩 이어지기도 했다. 못 먹고, 못 자고, 행색은 꾀죄죄했지만 내 눈빛만은 인공위성이라도 쏘아 올릴 수 있을 만큼 불타고 있었다. 유럽이 2000년에 걸쳐 쌓아온 유산을 단 두 달 만에 맛보겠다는 턱없는 욕심을 부리며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철새처럼 날아가던 날들이었다. 그렇게 샤모니에 이르렀다. 스위스로 가는 길이었는데 귀가 종잇장처럼 얇던 시절이라 “샤모니 참 예쁘더라” 한마디에 덜컥 그리로 내려온 길이었다. 여름철 성수기여서 마을에 하나뿐인 유스호스텔에는 방이 없었다. 길가를 배회하던 나는 정원에서 아이들이 뛰노는 집의 문을 두드렸다.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착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여행자인데, 마을에 싼 숙소가 없다며, 당신 집에서 하룻밤 재워줄 수 있느냐고-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웃으면 세상도 내게 환히 웃어준다고 믿는 건 달라지지 않았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여긴 저희 집이 아니니 따라오세요”라며 앞장섰다. 나를 데려간 곳은 방이 둘인 작은 아파트였다. 마침 수학여행을 떠난 큰딸의 침대가 내 차지가 되었다. 그 날, 작은딸 미란다는 초록색 눈을 반짝거리며 동양에서 온 낯선 여자를 신기한 듯 내내 쳐다보았다. 다음날 아침, 가족들이 내게 에귀디미디(Alguille du Midi)를 오를 거냐고 물었다. 몽블랑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3842m의 바위산이었다. 샤모니에 오면 모두들 성지처럼 거쳐 가는 코스였다. 그렇다고 답하니 웃으며 따라오라고 했다. 그 집의 주인 아저씨는 에귀디미디의 전기기술자였다. 비싼 케이블카 비용을 굳힌 나는 첫 손님으로 에귀디미디에 올랐다. 멀리 줄을 서서 첫 케이블카를 기다리는 산꾼들이 보였다. 그곳에서 나 혼자서 잠 깨는 새벽 산을 만났다. 설산 너머로 눈부신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찬 새벽 공기 속에 벌벌 떨면서도 발길을 돌리지 못하던 내 모습이 기억난다. 가슴이 터질 것 같다고, 눈물이 날 것 같다고 중얼거리던 모습도.

긴 세월이 흘렀다. 이제는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가 아닌 양희은의 ‘내 나이 마흔에는’이 꽂히는 나이가 되어 다시 샤모니로 돌아왔다. 그 시절에 비해 몇 가지 변한 게 있다면 나는 이제 산을 사랑하게 되었고, 이곳이 산악인들에게는 성지 같은 곳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고, 마을 광장에 서 있는 동상이 누구인지 정도를 알게 되었다. 또 한때 사랑했던 곳으로 다시 돌아오는 일의 위험성도 알게 되어 기대를 품지 않는 법을 배우기도 했다. 감성의 더듬이는 조금 무디어진 대신 세상을 향한 시선은 더 따뜻해진 나이가 되었다.

제네바를 출발한 버스는 한시간 반 만에 샤모니 기차역 앞에 나를 내려주었다. 9월의 바람은 찼다. 시즌이 막 끝난 후의 샤모니는 텅 비지는 않았으나 붐비지도 않는, 여유 있는 모습이었다. 여름의 활기와 겨울의 적막 사이에 놓인 제3의 시간. 너무 빠르지도 않게, 너무 느리지도 않게 흘러가는, 내가 사랑하는 시간이다. 십수년의 세월을 건너 다시 만난 샤모니는 여전히 예뻤다. 나무로 받침목을 댄 집들마다 꽃들이 내걸려 동네가 환했다. 발 밑으로는 눈 녹은 강물이 경쾌하게 흘러가고, 눈 드는 곳마다 거대한 설산들이 파노라마로 펼쳐졌다. 이른 아침인데도 광장 주변에는 배낭을 메고, 로프를 매단 젊은 산꾼들이 가득했다. 안전벨트를 매고 프랜드와 각종 장비들-이제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을 매달고 아이스엑스를 배낭에 꽂은 산꾼들. ‘30대에 10억원 모으기’ 따위가 꿈으로 전락한 시대에 다른 꿈을 꾸는 사람들. 더 편하고 더 안락하고 더 빠른 것에 열광하는 시대에 몸으로 부딪쳐 느리게 이루어가는 성취를 즐기는 사람들. 모험이 사라진 시대에 모험을 찾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햇볕에 탄 얼굴이, 군살 없는 몸매가, 형형한 눈빛이 나를 설레게 한다. 저이들 가방에 걸린 로프 끝에 나도 매달려 함께 바위산을 오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턱없는 바람으로 넋을 잃고 젊은 청년들을 훔쳐보다가 겨우 정신을 차려 숙소를 찾아간다. 짐을 풀고 바로 숙소를 나와 케이블카를 타는 곳으로 간다. 에귀디미디를 오르기 위해서다. 중간에 한 번 케이블카를 갈아타고 정상에 들어선다. 이곳에 오니 15년 전의 여름이 살아온다. 그때 나를 재워준 집의 주인 아저씨는 아직 이곳에서 일하고 있을까? 그를 만나 뒤늦은 감사라도 전하고 싶지만 지금은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다. 산꾼들이 몽블랑으로 향하는 길에 개미처럼 열을 지어 오르고 있다. 하늘은 눈부시게 푸르고, 온통 눈으로 덮인 산은 하얗게 초가을 햇살을 튕겨내고 있다. 바람이 거세게 불어 금세 추위가 몰려오지만 나는 지겨운 줄도 모르고 한시간이 넘도록 흰 봉우리들을 바라보며 서 있다. 다시 돌아오는 것도 나쁘지 않구나, 다음에 다시 돌아오면 그때는 저 몽블랑에 올라야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유럽을 걷다](11)전설의 산악인, 그 발길을 따라 가는길 ‘프랑스 샤모니②’

8월7일, 푸른 하늘 아래 여름 햇살이 뜨겁게 내리쬐는 오후였다. 무거운 배낭을 멘 두 남자가 샤모니를 벗어나 보송 마을로 들어섰다. 멀리 보이는 눈 덮인 설산에 잠시 눈길을 주던 두 남자는 곧 가파른 오르막을 오르기 시작했다. 밤이 깊어서야 두 남자는 해발 2392m의 고갯마루에 도착했다. 거대한 바위 밑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

샤모니에서 알프스 최고봉인 몽블랑을 향해 올라가고 있는 등반객들.
여명이 밝기도 전인 새벽 4시, 두 남자는 다시 행군을 시작했다. 크레바스를 건너고, 깊은 눈을 헤치며, 악마가 살고 있다고 믿어 아무도 오른 적 없는 산을 향해 한 발 한 발 나아갔다. 그들에게는 약간의 식량과 허술한 방한복, 지팡이 등 보잘 것 없는 장비뿐이었다. 안전을 확보할 수 있는 로프도, 얼음 위에서 미끄러짐을 방지해주는 크램폰 같은 장비도 없던 시절이었다. 두 사람이 지닌 것은 오직 불굴의 의지와 용기뿐이었다.

15시간의 쉼 없는 전진 끝에 오후 6시23분, 마침내 그들은 해발 4807m에 도달했다. 더 이상 오를 곳이 없었다. 1786년이었고, 알프스의 최고봉 몽블랑이 마침내 인간의 발길을 허락하는 순간이었다. 공포와 미혹의 대상이던 산이 물러서고 근대 등산의 문이 열리기 시작하는 시점이었다.

몽블랑 첫 등정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된 두 남자는 미셸 가브리엘 파카드(Paccard, Michel Gabriel1757~1827)와 자크 발마(Balmat, Jaques 1762~1834)였다. 파카드는 샤모니에 정착한 첫 번째 의사로서 자연과학에 관심이 많아 여러 산들을 두루 오른 청년이었다. 자크 발마는 샤모니의 수정 채굴꾼이었다. 샤모니를 둘러싼 수없이 많은 첨봉들의 암반 속에는 진귀한 천연 수정들이 박혀 있었다. 높은 곳일수록 더 아름다운 빛을 발하는 수정을 찾아 채굴꾼들은 장비도 없이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발마 역시 수정을 찾아 무수한 산들을 오르내린, 산에 대해 탁월한 감각을 지닌 이였다.

두 청년이 몽블랑이라는 공동의 목표로 의기투합한 데는 타고난 모험심 외에도 소쉬르라는 배경도 있었다. 26년 전인 1760년, 스위스의 자연과학자 소쉬르(Horace Benedict de Saussure)는 샤모니의 프레방(2526m)에 올랐다. 맞은편에 우뚝 선 몽블랑의 장엄함에 감동한 그는 과학자로서의 지적 열정에 불타올랐다. 이제까지 아무도 오른 적 없는 신비스러운 산의 정체를 밝히고 말겠다는. 소쉬르는 “누구든지 이 산에 처음 오르는 사람에게 상금을 주겠다”며 어마어마한 현상금을 내걸었다.(흔히 등산은 보상 없는 스포츠라고 하지만 근대 등산의 시작은 이렇듯 상금과 함께 시작되었다) 어쨌든 당시 그 지역 사람들은 산꼭대기에 살고 있는 악마가 눈사태를 일으켜 사람들을 해친다고 믿었기 때문에 현상금은 26년 동안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만큼 발마와 파카드의 도전은 당시로서는 목숨을 건 모험이었다.

변변한 장비나 지도도 없고, 기상 관측도 불가능한 시대였다. 등산이라는 말조차 없던 시대였다. 무수한 장벽을 헤치고 정상 등정에 성공했지만 발마와 파카드 역시 위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하산 길에 파카드는 설맹과 동상이 심해져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산을 내려와야 했다. 위대한 업적을 이루어낸 두 사람의 아름다운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얼마 후 발마가 몽블랑 초등의 영예를 독차지하기 위해 “파카드는 한 일이 거의 없고, 모든 일을 내가 다 했다. 정상에도 내가 먼저 올랐다. 나중에 파카드를 정상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산을 내려가 그를 데리고 와야 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으니. 과학적 열정으로 충만했던 젊은 의학자 파카드는 현상금보다는 지적 호기심으로 몽블랑에 오르기를 꿈꾸었다. 짐꾼 겸 가이드로 발마를 고용했던 그는 소쉬르의 상금도 발마에게 전액 양보하는 관용을 베풀었다. 그에 대한 대가는 중상모략으로 돌아왔다. 탁월한 용기와 모험심에 비해 스물네살 청년 발마의 성품은 비열했던 걸까. 목숨을 걸고 함께 산을 오른 동지의 발등을 내리찍을 수 있다니!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는 일은 신의가 사라진 오늘의 세태인 줄 여겼는데 면면한 전통을 가진 터였다.

들끓는 논쟁에 기름을 들이부은 건 당대의 대문호 알렉산더 뒤마였다. 그는 이 모험담에 얽힌 온갖 추문을 발마의 이야기에 기반한 소설로 구성해 세상에 발표했다. 당연히 대중은 그 이야기를 사실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발마의 중상모략으로 인해 파카드는 많은 고통을 겪은 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망 후에도 이 사건은 등반사상 가장 큰 논쟁의 하나로 남았다. 샤모니 광장에 몽블랑 초등을 기념하는 동상이 건립될 당시까지만 해도 몽블랑 등정은 발마만의 성공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결국 파카드는 제외된 채 소쉬르와 발마의 동상만 세워졌다.

파카드의 등정 의혹을 둘러싼 150년의 논쟁이 끝나게 된 것은 영국의 산악인 프레시필드(D. W. Freshfield) 덕분이었다. 진실 규명을 위한 집요한 추적을 멈추지 않은 그는 마침내 소쉬르의 증손자가 보관해 온 자료를 찾아냈다. 발마에 의해 기록된 일기에는 파카드가 발마의 도움 없이 정상에 올랐음은 물론, 그가 발마보다 정상에 먼저 올랐음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이 일기장이 공개됨으로써 마침내 등정 의혹에 대한 진실이 드러났다.

프레시필드는 소쉬르와 발마의 동상 옆에 오랫동안 멸시를 받아온 진정한 몽블랑 초등자인 파카드의 동상을 세울 것을 주장했다. 결국 그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파카드의 동상이 샤모니 광장에 들어선다.

몽블랑이 초등된 후에도 19세기 중반까지 몽블랑을 오르는 일은 대단한 고통과 위험이 따르는 등산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두 번째로 몽블랑에 오른 소쉬르는 무게가 68㎏이나 나가는 이불(1.5㎏의 거위털 침낭으로 8000m급의 산에 오르는 오늘의 시대와 비교하면 엄청난 무게다)과 불을 피울 수 있는 장작더미, 전원이 잘 수 있는 대형 천막, 크레바스를 건널 때 사용하는 사다리 등을 20명의 짐꾼에게 지게 하는 대규모의 원정대를 꾸려서야 등정에 성공했다.

초등 이후 100여년간 여전히 몽블랑 등반은 죽음을 향한 행보로 불렸다. 원정대가 ‘떴다는’ 소문이 들리면 그들을 보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줄을 서고, 성공 가능성을 점치며 원정대의 귀환을 기다렸다. 등반이 성공하는 경우에는 계곡에서 축포를 쏘았다. 물론 그들이 머물던 호텔에서도 축포를 쏘아올리고 손님의 계산서에 조심스레 첨부하기도 했다. 등반가들이 마을로 돌아오면 꽃다발과 환영 인파에 묻혀 샴페인으로 축배를 들었다. 이런 분위기는 1853년을 기점으로 끝이 났다. 몽블랑으로 향하는 길에 첫 산장이 들어서면서 등반대가 엄청나게 증가하게 되고, 자연히 사람들의 관심도 시들해져 갔기 때문이다.

몽블랑 초등 이후 220년이 지난 2007년 9월의 어느날 아침. 한 동양 처녀가 오뉴월 장마비처럼 땀을 쏟으며 산길을 오르고 있다. 지난 1주일간 샤모니에 머물며 이산 저산을 혼자 돌아다닌 그녀는 샤모니에서의 마지막 하루를 파카드에게 헌정하기로 했다. 이제는 그 의미가 시들해진 몽블랑 초등 루트를 따라 걸음으로써. 오늘날 몽블랑을 오르는 산꾼들은 케이블카를 타고 행로를 단축시키기에 이 길에는 인적이 없다.
샤모니 광장에 서있는 발마와 소쉬르의 동상.

샤모니에서부터 걷기 시작한 그녀는 보송 빙하 앞 산장에서 샌드위치를 사들고 오르막을 오른다. 계속되는 숲을 지나 정오 무렵 피라미드 산장(1895m)에 도착해 코코아 한 잔을 마시며 땀을 식힌다. 햇살은 뜨겁고 길은 끝없는 오르막이다. 장비도 경험도 없는 그녀는 몽블랑이 아닌 라 정션(La Jonction, 2589m)까지가 목표다. 지금껏 샤모니에서 걸어다닌 길 중에 가장 힘든 길이다. ‘그냥 남들처럼 케이블카나 타고 돌아다니지 왜 사서 고생이람. 발마처럼 나중에 배신해도 좋으니 동행자라도 있었으면…. 몽블랑 초등 220주년 기념 트레킹치고는 너무 초라한 거 아닌가.’ 온갖 생각으로 어지럽던 머릿속이 눈앞의 절벽 외길 덕분에 하얗게 비워진다. 가파른 절벽을 지그재그로 치고 올라오니 이제는 바위투성이 오르막이 기다리고 있다. 길을 잃을 만하면 베이지색 페인트로 동그라미가 그려진 바위들이 하나씩 나타난다. 잠시 후 발마와 파카드가 비박했다는 거대한 바위를 지난다. 이제는 ‘Le Gite a Balmat’라는 이름까지 붙은 바위다. 바위 밑을 들여다보니 누군가 비박한 흔적이 재와 함께 남아있다. 나처럼 발마와 파카드의 길을 따라간 이가 있었네.

마침내 걷기 시작한 지 다섯 시간 만에 라 정션에 도착한다. 은빛 성벽이 몽블랑을 호위하듯 감싸고 있다. 저 빙하의 성을 넘어서면 몽블랑의 정상으로 향하는 길이다. 사위는 고요하다. 가끔씩 빙하 무너지는 소리만이 들려올 뿐 침묵에 싸여있다. 220년 전의 그들은 얼음과 침묵의 벽에 둘러싸여 두렵고 막막하기도 했을까. 얼음의 성벽 저 너머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지 못한 채 그저 묵묵히 오르고 또 올랐을 그들의 용기를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다. 그리고 저 산에서 돌아오지 못한 이들과 이름을 남기지 못한 이들의 열정도. 해가 지기 전에 샤모니로 돌아가야 하는 나는 서둘러 하산을 시작한다. 기우는 오후의 햇살에 몽블랑이 하얗게 빛나고 있다.

〈김남희 |도보여행가〉
출처 : 유월향기
글쓴이 : 유월향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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