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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송판에 서린 티베트 이야기

이름   모종혁 록일자  2004-06-21  (조회수 : 575 )
제목   九寨溝/黃龍10: 송판에 서려있는 티베트 이야기


* 사진 설명: 티베트의 수도 라사 포달랍궁 앞에 중국 군인들. 총칼로 평화로운 티베트를 짓밟은 중국은 이 시간에도 독립을 향한 티베트인들의 움직임을 억압하고 있다.('뉴욕타임즈', http://www.nytimes.com)

티베트망명정부와 중국정부의 통계 차이

1950년 10월 7일 고요한 여명을 깨고 칭하이(靑海)성, 쓰촨성 등지 접경에 집결한 수만명의 중국 인민해방군은 티베트 침공을 개시한다. 이미 20여년동안 국민당과 일본 제국주의와의 기나긴 전쟁을 통해 단련된 백전노장 인민해방군은, 공산당 중앙으로부터의 명령만을 기다리며 고산지대에서의 적응을 완벽히 끝마쳤다. 전략요충지 참도지역 공격을 개시로 물밀 듯이 진격한 인민해방군은 적은 병력에 제대로 된 무기마저 없던 티베트 보안군을 일시에 격파한다. 수도 라사(Lhasa)를 비롯하여 중국 영토의 1/4에 해당하는 거대한 티베트 영토 전지역을 중국이 점령하는데 걸린 시간은 고작 한 달이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 티베트는 그 이름도 '시장장족자치구'(西藏藏族自治區)로 변한 채, 중국의 한 일부분으로 나라 잃은 설움을 톡톡히 당하고 있다.

현재 인도 북부 히말라야산맥 기슭에 위치한 다람살라에는 달라이 라마 14세를 정점으로 하는 티베트 망명정부가 있다. '작은 라사'라고 일컬어지는 이 곳에는 중국의 핍박을 피해 티베트에서 망명한 10만 여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티베트의 언어, 역사, 종교, 문화 전반에 걸친 사회체계가 수립되어 있기도 하다. 행정-사법-입법 삼부 체제를 갖춘 망명정부는 철저한 민주집중제의 운영방식을 따르고 있는데, 이들의 주요한 목적은 티베트의 독립과 티베트인 공동체의 유지-발전에 있다. 티베트 독립의 정당성을 홍보하기 위해 망명정부가 발행하는 관련 자료에 따르면, 티베트의 면적은 220만 평방 킬로미터, 평균해발은 3,400m, 인구는 1400만명(티베트인 600만, 중국인 800만)이다. 그런데 중국정부의 공식통계에는 면적 110만 평방 킬로미터에 인구는 240만명(티베트인 210만)으로 되어 있어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어찌하여 이런 통계상의 차이가 생겼을까?

중국의 민족주체는 중화민족

이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굴절된 현대사를 거슬러 살펴봐야 한다. 1950년 11월 티베트 전역을 석권한 중국은 거대한 티베트를 두 동강내서, 티베트인이 주로 사는 시장장족자치구와 시장(西藏)성으로 분리한다. 이것은 공산화 과정 중 줄곧 소수민족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구호를 외쳤던 중국정부의 일관된 정책으로, 당시 갓 성립된 옌비엔(延邊)조선족자치구 또한 오늘날과 다른 성급 행정지이었다. 허나 1954년부터 중국 내에서 촉발된 '민족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둘러싼 논쟁을 계기로 대소수민족정책은 큰 변화를 일으킨다. 당시 관변학계는 중국을 유구한 역사기간동안 중앙집권체제를 유지했던 국가로, 민족의 주체는 곧 중화(中華)민족이라고 봤다. 이는 중화민족인 한족 이외에는 어느 소수민족도 고유한 통일국가를 형성할 민족주체가 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에 따라, '노동계급이 지도하고 노동동맹을 기반으로 한 인민민주주의 독재의 사회주의국가' 중국은 소수민족의 존재를 인정치 않고 '모두가 하나의 울타리권에 사는 중화민족 국가'라는 애매한 결론을 내리게 된다. 1954년 제정된 헌법을 계기로 변화한 중국정부의 소수민족정책에 따라, 다음 해 7월 전국인민대표회의는 시장성을 폐지하는 결정을 내린다. 비슷한 시기 옌비엔조선족자치구 또한 현급인 자치주로 강등 당한다. 시장성이 사라지면서 티베트는 자신의 지도를 다시 그려야 했는데, 참도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가 한족 성으로 편입 당했기 때문이다. 북부와 서부지역의 대부분을 칭하이성, 쓰촨성, 윈난(雲南)성에 뺏기면서, 티베트는 지금과 같은 모습을 지니게 된 것이다. 이런 연유로 티베트 망명정부와 중국정부 간의 통계에는 커다란 격차를 보이고 있다.

송판에 얽혀있는 송첸간포왕 이야기

필자가 하룻밤을 묵은 송판은 바로 과거 중국 본토와 티베트간 영역을 나눈 국경의 관문이었다. 옛 명칭이 송주(松州)로 '쓰촨 서부의 관문'으로 불려왔던 송판의 원주민은 대부분 티베트인이었으나, 지금은 끊임없이 이주해온 한족과 비율이 엇비슷해졌다. 군사적 전략지로도 중요한 곳이기에 송판의 곳곳에는 고대에 축성한 성곽이 남아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송판고성인데, 이 성곽의 유래는 13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7세기 초 봉건 노예제사회로 분열되어 있던 티베트에는 역사상 유래가 없었던 영웅이 출현하였으니 바로 송첸간포(松贊干布)왕이었다. 영민하고 비전 있는 군주였던 그는 강력한 군사력을 기반으로 전 티베트를 통합하여 최초의 통일국가를 건국했다.

당시 티베트의 인접 국가로 최전성기를 구가하던 당의 문물을 받아들여 국가기반 확립을 노린 송첸간포왕은 사신을 파견해 구혼을 한다. 하지만 파견한 사신이 당의 지방관에 의해 송주에서 억류당하자 송첸간포왕은 직접 20만 대군을 이끌고 당군을 격파, 송주를 점령한다. 이에 분노한 당 태종은 수차례에 걸쳐 군대를 파견하지만 줄곧 패배를 당하다가 간신히 송주를 되찾는 망신을 당한다. 티베트의 군사력에 놀란 당 태종은 회유책으로 문성공주를 시집 보내게 되는데, 송첸간포왕이 그 일행을 맞이한 곳 또한 송판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역이다. 문성공주를 맞이한 이후 티베트에는 종이 만드는 기술 등 중국문화가 전해지기 시작했고 불교가 전래되어 티베트 문자가 창달되고 독자적인 티베트 문화가 꽃피게 되었다.

동화의 길을 걷는 송판의 티베트인

그 옛날 티베트와 중국 본토의 국경지역이었던 송판의 티베트인들은 급속한 한족화의 길을 걷고 있다. 이는 송첸간포왕의 침입이후 중국측이 송판에 성곽을 짓고 둔전을 지으며 군대가 주둔하면서 비롯됐지만, 최근 들어 지우자이꺼우와 황롱이 관광명소로 개발되고 한족들의 이주물결이 잇달았기 때문이다. 송판 현중심지의 주민 대다수는 이미 한족으로 채워져 있고, 산간지역 또한 뚫리는 도로와 더불어 한족들의 모습이 끊임없이 눈에 띈다. 필자가 2000년 여름 송판을 찾았을 때 만난 약재판매점의 티베트 청년 롱중랑부(容中郞布, 29)씨는 "송판과 황롱 일대 티베트 주민들의 생활양식은 이미 한족과 별다른 차이가 없어졌다"고 토로했다. 그는 필자에게 "먹고살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지만, 다른 티베트인 거주지역과 달리 이 지역의 사람들의 중국어에 능한 편"이라며, "티베트인으로서 정체성을 유지시켜주는 것은 그나마 라마불교에 대한 신앙심 정도"라고 전했다.

긴 세월동안 한족의 군사 통치를 받은 때문인지, 오늘날 송판은 롱중랑부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완전히 한족화된 티베트 마을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늘어나는 한족 경영의 호텔들과 유흥업소, 사시사철 이어지는 한족 관광객들 덕분에 송판의 밤은 중국 여느 중소도시처럼 불야성을 이루기도 한다. 신비로운 종교생활 속에서 자연을 벗삼으며 살아온 송판의 티베트인을 변모시키는 한족의 물질문명. 필자가 처음 찾은 1997년보다 중국 본토화가 더 진전된 오늘날 송판의 모습 속에서, 폭풍처럼 밀려드는 한족에게 귀속된 모든 티베트인들의 미래를 보는 것 같았다. 송판고성에 얽힌 송첸간포왕의 고사와 더불어 송판의 변화한 지금 모습은 필자를 많은 상념에 잠기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