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에
대해서~~~
고흐는
인상파(Impressionism)의 대표적 화가 입니다.
그동안 화가들이 사물을 그릴때 사물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모습을 그리려 애했지만, 고흐는 화가자신이 느끼는 인상을 그림에 담았습니다.
즉 사과를 그릴때 그동안은 빨간색으로만 그렸다면
인상파 화가들은 사과가 놓여있는 상황에 따라 파랗게도 보이고, 노랗게도 보일수 있다고 생각해 화가 자신이 사과를 바라보는 당시의 상황에 따라
다른 색을 사용해 그림을 그렸습니다.
고흐와 고갱의 예술 이야기
1886년 파리, 고갱과의 만남-고흐는 고갱의 그림을 무척 좋아하여
자신의 그림 두 점과 고갱의 작은 그림 하나와 바꿀 정도였다. 그러나 고갱은 고흐를 다른 젊은 자유인들과 별반 다르게 보지 않았고, 그냥 자신을
존경하는 화가라고 생각했고, 자신의 성격대로 이기적이며 이해 타산적으로 고흐를 대하였다. 고갱의 그러한 태도를 고흐는 성공한 화가가 갖는
자신감으로 보고있었다. 1886년 1년여의 파리 생활 끝에 고갱은 파나마로 떠나게 된다. 이것은 파리에서의 가난과 배고픔을 극복하고자
함이었는데, 파나마로 가서 그림을 그린다면 큰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허상이었고, 파나마는 고갱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곳에서 노동자로 일하다가 두 달여 만에 마르티느크에서 병을 얻어 파리로 돌아가게된다. 파리에 돌아와서 슈페네커의
집에 살게 되는데 종합주의 적인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1888년 고흐와의 동거-고갱을 존경하고 그의 그림을 사랑했던 고흐는
아를을 화가들의 마을로 꾸미겠다는 결심을 하고 고갱에게 아를에 와서 살아달라고 부탁한다. 고흐는 고갱을 위해 아를에 노란집까지 빌리고, 집안
곳곳을 경쾌한 그림으로 장식하며 그를 기다렸고, 고갱이 아를에 온다면 행복해 질 것 이라고 말했다. 고갱이 정착하기 못하고 자신을 야만인이라고
말하여 섬 등지로 그림 그리러 가는 것을 고흐는 방황한다고 표현했으며, 아를에서 함께 정착하자고 표현했다. 고흐와 고갱은 서로 그림 그리는
방식이 달랐고, 무엇보다도 추구하는 것 자체가 달랐다. 고갱은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제라고 말했고, 고흐는 주제는 바로 자기 자신속에
있다라고 말했다. 아무튼 그 둘은 동거한지 두 달 되는 날 큰 싸움을 하게된다. 램브란트 그림에 관해 논쟁하던 고갱과 고흐는 서로 흥분하여
싸움까지 하게 된 것인데, 고갱은 이날 절교를 선언한다. 이 말에 화가 난 고흐는 자신의 귀를 자른다. 고갱의 회고록에 보면 고흐가 면도칼로
자신을 공격했다고 나오는데 사실은 고흐가 공격한 것이 아니고 병든 고흐를 그곳에 홀로 남겨 둔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고흐는 귀를
자르고 출혈이 심해 병원에 입원하게 되는데, 병상에서 고갱에게 자신의 잘못을 빌고 아를을 떠나지 말라고 부탁한다. 고흐는 고갱을 떠나게 만든
것이 결국은 고흐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태오에게 보낸 편지에는 고갱이 자신을 배신하고 떠났다, 자신은 버림 받았다. 나는 잘못이 없다. 라고
이야기 한다. 고갱 또한 병에 걸려 아픈 고흐를, 특히나 자신을 끝까지 가지 말라고 말렸던 그를 아를에 홀로 남겨두고 왔다는 죄책감 때문에 그
날의 사건을 확대시킨다.
고흐의 뒷 이야기
연인 고갱을 잃어버렸다는 비애가 고흐를 엄습하면서 자신이 느낀 불안과 우수의
끝을 파괴하고 싶었는지도 모를 묘한 감정이 나에게 그대로 전달된 적이 있다. 1888년 9월 17일자로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는 한 〈자화상
〉에 대한 언급이 있다. "금주 세 번째의 그림은 자화상인데, 거의 색이 없고 옅은 베로네제 녹색의 배경에 회색조로 그렸다. 모델이 없을 때에는
자기를 상대로 하는 일이 가능하듯이, 나는 꽤 질좋은 거울을 샀다. 자기의 얼굴의 색조를 묘출한다는 것은 물론 간단한 일이 아니므로, 만약
이것(자화상 그리기)이 잘 된다면, 다른 남자나 여자의 얼굴을 그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 편지에 언급되어 있는 이 자화상은 이전 뮌헨에 있던
고갱에게 준 자화상을 가리킨다. 그 후 이 작품은 또 동생에게 보낸 편지 중에도 언급된다. 테오가 아를에 보낸 모친의 사진은 그 흑백조가 고흐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나는 지금 자화상을 그리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회색조를 사용한다. 하지만 색을 사용해서 그리는 것이 아니라면,
충분히 묘출하기가 불가능하다."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 색이란 얼마나 표현의 문제에 깊이 관여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얼마 후 그는 이 자화상을
고갱의 〈레미제라블의 자화상〉과 교환할 결심을 했으며, 이로써 그는 자기 그림과 다른 사람의 그림을 비교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자기의 자화상이 고갱에 비해 뒤질 것이 없다고 확신하면서, 초상화 가운데 자기의 개성을 확대하는 것은 자기에게도 허락된다는 것.
따라서 작가의 자화상보다도 오히려 인상주의자로서의 유형을 그리려고 시도했다는 것, 따라서 작가의 자화상보다도 오히려 인상주의 자로서의 유형을
그리려고 시도했다는 것, 그리고 이 초상은 영원한 부처의 숭배자인 승상처럼 포착했다고 썼다. 고흐의 말대로 이 그림엔 전체의 회색조와 옅은
베로네제 녹색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옷은 푸른 녹색과 갈색 상의지만, 그는 이 갈색을 붉은 색으로까지 과장하고 푸른 녹색의 폭도 넓혔다. 밝은
배경에 대해서 머리부분은 명도가 높고 두껍게 칠했으며, 음영의 흩어짐이 없다. 양눈은 그의 말대로 일본 사람처럼 치켜 올라가게 그려 넣었다. 이
자화상에는 이미 불안의 기미가 퍼져 있었다.고흐는 자주 그의 그림을 친구에게 주거나 교환했다. 따라서 자신의 자화상을 고갱과 교환한 일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때로 고흐는 심지어 자신과 사이가 좋지 않고 그를 이해하지 못했던 친구들에게조차 작품을 준 적이 있었다. 이 자화상은 〈밤의
카페〉와 같은 주에 완성되었다. 그러나 〈밤의 카페〉가 밝은 색조로 녹색과 적색의 강렬한 대조를 이루어진 데 비해 자화상은 색채가 없는 회색
톤이 주조인데, 불과 일주일 사이의 이런 큰 변화는 화풍의 발전이라기보다는 심리상태의 격심한 동요를 나타낸다. 아를에서 누렸던 안정은 무너지고,
이 무렵 고흐는 평정을 잃기 시작한다. 짧게 깎은 머리, 날카로운 시선은 다른 자화상보다 더욱 그의 혼돈되고 불안정한 심리상태를 여실히 말해
준다. 이 아를 시대의 말기에 너무나도 유명한 자신의 귀를 자르는 소동이 벌어진다. 이 비극의 싹은 고흐의 희망에 의해서 1888년 10월
20일 고갱과 고흐의 아를 공동생활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두 사람의 극심한 개성 차이는 처음부터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다지 오래 가지 못했다. 2개월의 공동생활은 무위로 끝났으며, 12월 24일은 최악의 상태를 맞은 파국의 날이었다. 고흐는 절대적으로
존경해 왔던 고갱을 살해하려 했다. 그러나 실패했고, 집으로 돌아와 고흐는 자신의 왼쪽 귀를 잘라 이를 고갱에게 전했다. 이 소동이 일어나자마자
사람들은 고흐를 찾았으나 그는 이미 정신의 균형을 잃은 상태였으며, 곧 병원으로 옮겨졌다. 1월초에 그는 회복되었고 일단 퇴원했다. 그 후
고흐는 얼마 있다가 연습삼아 정물을 그리고 나서 귀를 자른 자화상 두점을 그렸다.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 중 하나는 〈담배를 피우는
자화상〉이며, 또 하나는 녹색 작업복 - 우리는 고흐의 자화상에 누차 볼 수 있는 - 을 입은 자화상이다. 이 두 자화상에 쓰여진 색채의
차이에서 마음의 진폭을 엿볼 수 있다. 고흐는 "들라크루아, 바그너, 베를리오즈의 내부에도 광기가 존재하지 않았을까"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이
작품들은 그러나 그의 발작이 그친 뒤에 그려진 듯 평온한 분위기마저 감돌고, 집중력이 화면 구석구석까지 미치고 있어 퇴원 직후에 그린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이 그림에선 자신에 대한 내적인 투사작용이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고흐는 일생동안 자화상을 통해서 끊임없이 변모하는
자신의 내밀하고 과민한 욕구에 따라서 자기 확인을 해왔다. 생 레미 시대의 고흐의 〈자화상〉은 발작 직전이거나 아니면 발작이 가라앉은 직후에
그려진 것으로 추측된다. 혼란한 필촉, 무기력하면서도 이상하게 곤두선 듯한 신경조직을 보여주는 듯한 눈초리 등에 고흐는 자신의 내면적인 혼란을
드러내고 있다. 물론 그것을 자기 스스로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볼 때, 이것은 정상적인 상태에서 그려진 작품이지만, 병적인 마음과 정상적인
마음, 그리고 그 표현에 있어서 이상과 정상을 구별하기 힘든 경계에 고흐가 위치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고흐의 자화상 중 가장 훌륭한 작품은
그가 죽기 며칠 전에 그린 그림)이다. 몇몇 정신과 의사들은 정신병자의 작품을 연상케 하는 강박적이며, 불안한 장식으로 뒤덮인 배경을 증거로
삼아 발광상태에서 그려졌다고 본다. 불꽃 같은 붓질, 일종의 흥분상태에서 행해진 듯한 구성은 강렬함을 표현해 내는 수단이자 감정묘출의 수단이다.
고흐 특유의 거칠고도 리드미컬한 필촉은 강렬한 색채의 붓놀림과 융합되어 화가의 마음 상태를 토로해 준다. 고흐의 자화상은 거의 전부가 이처럼
자기 확신이라는 무게를 간직한다. 그가 자화상을 그리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자기 확인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며, 동생 테오에게 편지로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또 회화 대상을 향해 자기 투쟁을 계속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또 자기 확인이 필요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의
자화상은 쿠르베의 자화상이 다양한 상황설정 하에서의 자신의 모습을 연출했던 것과는 달리 항상 같은 포즈, 같은 시선처리로서 거울과의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자신을 내내 탐색했음을 보여 주는데, 이것은 바로 그의 자화상이 곧 자기와의 대결의식의 산물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조형어법에서도 그의 자화상을 그릴 경우, 이제까지의 전통적인 초상화법에서 보여주었던 피부나 생김새의 불변하는 모습과 그 매혹적이고도 조심스런
분위기 묘출과는 대치하여, 과감한 색처리와 거칠고 꿈틀거리는 필선을 통해 자신이 지닌 개성을 표현코자 했다. 고흐는 이처럼 다양한 감정의 성격
묘출을 조형요소에 대한 과감한 실험행위를 통해 시도했으며, 이로써 표현주의 자화상에로의 길을 닦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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