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갈등 지도 (3)│팔레스타인] |
聖地의 ‘종교적 숙명’이 부른 55년 피의 투쟁 |
이스라엘과 주변 아랍국들 간 해묵은 갈등은 골이 매우 깊다. 양측은 팔레스타인 땅을 사이에 두고 끊임없이 전쟁과
평화협정, 암살과 테러를 되풀이해왔다. 한치의 양보도 없는 이 갈등이 해결되지 않으면 세계의 테러문제 역시 뿌리 뽑기 힘들다. 팔레스타인은
영원한 분쟁의 땅인가. |
새천년이 시작된 이후 세계를 흔들어놓은 최대의 사건은 2001년 9월11일 미국의 심장부를 강타한 9·11 테러사건이다. 세계 최강의 군사대국이자 경제대국인 미국의 허를 찌른 이 테러사건은 미국으로 하여금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케 했고, 전세계를 충격에 몰아넣었다. 왜 9·11 테러가 일어났는가, 왜 미국이 테러의 대상이 됐는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반미(反美) 감정의 뿌리를 캐는 일에 있어 다음 몇 가지 예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첫째, 9·11 테러사건이 있은 지 한 달 뒤 사우디 아라비아의 왕족 알 왈리드는 뉴욕의 사건 현장을 찾아갔다. 파드(Fahd) 국왕의 조카가 되는 그는 국제적 사업가로서 200억달러 이상의 개인재산을 소유한, 세계 10위권 내의 거부(巨富)다. 그는 애도의 뜻을 표한 뒤 복구비로 뉴욕시장에게 거금 1000만달러의 수표를 전달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그 다음에 일어났다. 수표 전달식이 끝남과 동시에 알 왈리드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러한 테러가 왜 일어났는지, 지금은 문제의 근본원인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이제 미국은 중동정책을 재수정해야 합니다. 미국은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서 좀더 균형 있는 입장을 취해야 합니다.” 이 성명의 메시지는 분명했다. 9·11 테러사건의 근본원인은 미국의 중동정책이 잘못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미국이 지나치게 이스라엘을 두둔했다는 것이다. 성명서를 전해들은 뉴욕시장은 알 왈리드에게 수표를 반려했다. 2001년 10월12일 뉴욕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성명서 내용이 아랍세계의 반(反)이스라엘 정서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알 왈리드의 성명서가 미국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자, 그의 아버지인 왕족 탈랄(Talal)은 아들을 두둔하며 이렇게 말했다. “아랍세계가 오사마 빈 라덴에 대해 심정적으로 동정하는 것은 그 행동이 옳다고 보기 때문이 아니다. 친(親)이스라엘 정책을 취하는 미국을 증오하기 때문이다.” 탈랄의 말은 아랍인들의 반이스라엘 감정,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 있는 반미 감정을 잘 말해주고 있다. 셋째, 지금은 생사가 불분명하지만, 수차에 걸친 인터뷰를 통해 전세계 TV에 그 모습을 드러냈던 오사마 빈 라덴의 성명이다. 그의 인터뷰 전문(全文)을 면밀히 살펴보면 철두철미한 반이스라엘 감정이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미국을 증오하는 주된 이유는 미국이 친이스라엘적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사마 빈 라덴이 얼마나 반이스라엘적이냐 하는 것은 그가 이끄는 조직의 이름에도 잘 나타나 있다. ‘알 카에다(Al Qaeda)’의 다른 이름은 ‘유대인과 십자군에 대항하는 성전(聖戰)의 세계 이슬람전선(The World Islamic Front for Jihad against Jews and Crusaders)’이다. 여기서 ‘유대인에 대항(against Jews)’한다는 말은 알 카에다 조직의 성격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십자군’은 미국을 뜻한다. 9·11 테러사건의 뿌리 중 하나는 분명히 이스라엘과 아랍 사이의 대결과 갈등에서 찾아야 한다. 혹자는 ‘문명충돌론’을 거론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지나치게 확대포장된 것으로 생각된다. 오늘날 팔레스타인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스라엘(유대인)과 팔레스타인(아랍인) 사이의 한치의 양보도 없는 대결과 투쟁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테러문제는 뿌리뽑히기 어렵고 테러와의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
반미 감정 뿌리는 反이스라엘 정서
오늘날 난마같이 뒤얽힌 중동문제가 본격화된 것은 지금부터 55년 전 이스라엘이 독립국가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면서부터다. 1948년 5월14일 오후 4시. 이스라엘 텔 아비브의 박물관에서 나중에 초대 수상이 된 벤 구리온(David Ben Gurion)은 전세계를 향해 이스라엘의 독립을 선포했다. “유대인 국가가 다른 나라들처럼 독립된 주권국가로 살아가는 것은 천부의 권리다. 이에 우리는 이스라엘 땅에 유대인 국가 ‘이스라엘’의 수립을 선언한다.”
40분 동안 계속된 이스라엘 독립선언식이 끝나자 숨을 죽이며 방송을 듣던 유대인들은 기쁨의 함성을 지르며 서로 얼싸안았다. 2000년 이상 나라 잃은 민족으로 설움받고 살아온 유대인들이 독립국가의 탄생을 경험하는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때야말로 ‘중동문제’라는 판도라 상자가 열리는 순간이었다. 벤 구리온의 독립 선언 낭독이 끝나기도 전에 멀리서 대지를 진동하는 포성이 들려왔다. 이스라엘 독립을 결사 반대해온 주변의 아랍국가들(이집트, 요르단, 레바논, 시리아, 이라크)이 연합해서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이다. 신생 이스라엘의 탄생은 이렇게 전쟁으로 시작됐고, 이는 앞으로 계속될 이스라엘과 아랍간의 피나는 혈투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한편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했을 때 서구 제국(諸國)들은 큰 딜레마에 봉착했다. 아랍권은 일치단결해서 이스라엘의 독립을 극력 반대했고, 서방세계는 산유국 아랍권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나라들이 머뭇거리고 있을 때 미국이 이스라엘의 독립을 승인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하자 즉각 인정성명을 내 신생 이스라엘을 승인하는 데 앞장섰다. 미국의 뒤를 이어 다른 나라들도 이스라엘 승인 대열에 동참했고 그 결과 국제적으로 승인받은 이스라엘 국가가 탄생할 수 있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이스라엘에서 건국의 은인으로 추앙받는다. 그러나 아랍권의 반미 감정은 이때그 씨앗이 심어졌다.
아랍권 패배로 돌아간 중동전쟁
기원전 6세기(BC 587년) 유다 왕국이 바빌론 군대에게 짓밟혀 멸망한 이래, 마카비 혁명으로 잠시 독립을 회복한 일이 있었으나(BC 2∼1세기) 유대인들은 줄곧 나라 없는 민족으로 살아왔다. 이스라엘 고토(故土)에서 생존을 계속한 유대인도 적지 않았지만, 대다수 유대인들은 세계 각지로 흩어져 온갖 핍박과 차별의 수모를 당하며 삶을 이어왔다. 1898년 정치적 시온주의(Political Zionism)의 아버지 테오도어 헤르츨(Theodor Herzl)이 “앞으로 50년 후 이스라엘이 독립할 것이다”는 말을 했을 때, 아무도 그것이 실현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1948년 헤르츨의 예언은 그대로 적중하여 이스라엘이 독립국가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한편 팔레스타인 땅에 살고 있던 아랍인들이나 주변 아랍국가들에 있어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한 날은 역사에서 지워버려야 할 날이었다. 서기 630년대 이슬람교도인 아랍인들이 팔레스타인 땅을 정복한 이래 아랍인들은 1300여 년 동안 실질적인 주인으로 살아왔다. 물론 그 땅엔 유대인들도 살고 있었으나, 그들은 피정복민으로서 소수자 신세로 전락한 상태였다. 그런데 20세기에 들어와 시온주의 운동의 결과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땅으로 돌아오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2차대전 후, 이스라엘이 정치적으로 독립하기에 이른 것이다. 1300년 이상 팔레스타인 땅의 주인으로 살아온 아랍인들과 이들과 동조하는 주변 아랍 국가들이 일치단결해서 이스라엘 독립에 반대하고 반기를 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솔로몬왕 때 한 아기를 놓고 두 여인이 자기 아이라고 싸웠던 것처럼, 팔레스타인이라는 하나의 땅에 주인이 둘이 됐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하자 아랍권은 곧 연대하여 신생 이스라엘에 공격을 가했다. 제1차 중동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스라엘로서도 이것은 불가피한 전쟁이었다. 국토는 국가의 구성요소로서 필수적이기에 이스라엘로서는 전쟁을 통해서라도 국토를 확보해야 할 상황이었다. 이 전쟁이 발발했을 때, 이스라엘은 공격해오는 아랍권에 비해 군비나 병력면에서 상대가 되지 않는 열세였다. 그러나 UN의 중재로 1949년 1월 휴전이 됐을 때, 전쟁의 결과는 세계를 놀라게 했다. 아랍측이 군사적으로 월등히 앞섰음에도 승리는 이스라엘측으로 돌아간 것이다. 전쟁이 종결됐을 때,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땅의 70%를 차지하는 전과를 거뒀다. 지금도 분쟁의 불씨가 되고 있는 ‘요단강 서안지역(West Bank)’과 ‘가자지구(Gaza Strip)’, 이 두 지역을 제외하고는 팔레스타인 전역을 이스라엘이 차지한 것이다.
난제로 떠오른 팔레스타인 난민
제1차 중동전에서 이스라엘의 승리는 ‘팔레스타인 난민’이란 풀기 어려운 문제를 불러왔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땅의 70%를 차지하면서, 그 땅에 살고 있던 아랍인들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하나는 이스라엘의 통치 밑에서 살기를 거부하고 주변 아랍국가로 피난한 아랍인들이다. 이들을 팔레스타인 난민(Palestinian refugees)이라 부르며, 오늘날 약 380만명에 이른다. 이들은 55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요르단·레바논·시리아 등 여러 나라에 흩어져 망향의 한을 달래며 난민촌(refugee camps)에서 비참한 삶을 살고 있다. 다른 하나는 난민이 되기보다는 이스라엘 통치 밑에서 그대로 살기로 한 아랍인들이다. 이들을 ‘이스라엘 아랍인(Israeli Arabs)’이라 부른다. 이스라엘 정부는 이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했다. 이들은 오늘날 약 120만명에 이르며 이스라엘 인구의 20%를 차지한다. 현재 이스라엘 아랍인들의 정치활동이 활발해서 이들의 정당도 3개나 된다. 지난 1월28일 이스라엘 총선에서는 아랍계 국회의원이 8명이나 선출됐다. 1956년 이집트가 주동이 되어 시리아, 요르단 세 나라가 군사동맹을 체결했다. 이스라엘은 아랍측의 군사공격이 임박했음을 직감하고 선제공격을 가했다. 제2차 중동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유엔은 곧 중재에 나섰고, 치열했던 전투는 9일 만에 종식됐다. 그런데 이 전쟁에서도 이스라엘은 일방적 승리를 거뒀다. 두 번에 걸친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완승을 거두자 팔레스타인 과격파들 사이에서는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정규 전쟁으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이들은 대(對)이스라엘 투쟁의 방법으로 ‘테러’를 감행하는 무력단체를 구성한 것이다. 1964년 아라파트(Arafat)가 이끄는 PLO(팔레스타인 해방기구)가 출범했다. PLO는 테러라는 폭력수단을 사용해서 이스라엘에 대항하고, 궁극적으로는 이스라엘을 괴멸시키겠다는 목표를 가진 테러조직이었다. PLO가 저지른 테러사건 중 가장 세계를 경악케 했던 것은 1972년 뮌헨올림픽 때 이스라엘 선수들에게 가한 테러였다. 복면을 한 PLO 테러범들이 올림픽 선수촌에 잠입해 11명의 이스라엘 선수들을 살해한 사건이다. 미국은 1980년 후반까지 PLO를 테러집단으로 규정, 그들과 일절 대화나 협상을 거부했다. 한편, 1967년 6월 또다시 팔레스타인의 판도를 뒤바꿔놓은 큰 전쟁이 일어났다. ‘6일 전쟁’으로 알려진 제3차 중동전쟁이다. 단 6일간의 전투 끝에 이스라엘은 모든 전선에서 승리해 다시 한 번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스라엘은 남부전선에서 이집트와 싸워 승리하고, 가자지구와 시나이 반도를 점령했다. 동부전선에서는 요르단과 싸워 승리하고 요단강 서안지역과 동 예루살렘(East Jerusalem)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북부전선에서도 시리아와 싸워 승리하고 골란고원(Golan Heights)을 차지했다.
제4차 중동전쟁 후 평화협정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특별히 동 예루살렘의 탈환에 최정예부대를 투입했다. 동 예루살렘은 구약시대부터 내려오는 역사적인 예루살렘 지역을 지칭하며, 유대인들의 성지 중 성지인 ‘통곡의 벽’이 위치해 있는 곳이다. 치열한 전투 끝에 이스라엘 병사들이 통곡의 벽에 이르렀을 때, 그들의 얼굴은 땀과 감격의 눈물로 범벅이 돼 있었다. ‘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완승의 꿈을 이뤘으나, 아랍세계와의 사이에 팬 갈등의 골은 끝없이 깊어만 가고 있었다. 1973년 10월6일. 이 날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수천년 동안 지켜오는 속죄일(히브리어, 욤 키풀)이었다. 여느 해와 같이 전국은 완전히 철시되고 라디오와 TV 방송도 중단된 상태에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금식하며 속죄일을 지키고 있었다. 바로 그 날, 지축을 진동시키며 불을 뿜는 대포 소리가 이스라엘 전역을 뒤흔들었다. 시리아와 연합한 이집트의 10만 군대가 이스라엘을 기습공격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네 번째 중동전쟁이 일어났다. 속죄일에 일어난 전쟁이라 해서 보통 ‘욤 키풀 전쟁’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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