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갈등 지도(5)|코소보] |
‘인종청소’ 비극 품은 발칸의 핏빛 휴화산 |
1만명이 희생된 비극의 땅 코소보. 밀로셰비치는 왜 온나라를 피로 물들이면서까지 코소보를 움켜쥐려 했을까. 또한 미국은 어떤 동기에서 코소보 사태에 개입했을까. 20세기 발칸반도의 ‘마지막 화약고’ 코소보의 내일은 어떻게 밝아올 것인가. |
1999년, 발칸반도의 좁은 공간 코소보에서 조직적인 ‘인종 청소’와 집단 강간 사태가 벌어졌다. 그에 뒤이은 보복은 ‘피가 피를 부른다’는 말 그대로였다. 코소보 전쟁은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벌어졌지만, 무려 1만명에 이르는 알바니아계 주민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가해자는 세르비아 세력. 보안군, 경찰, 준(準)군사조직인 세르비아 민병대가 합세해 저지른 행위는 추악한 전쟁범죄 그 자체였다. 그들은 ‘위대한 세르비아’를 내걸고 코소보 사태를 주도한 전 유고연방 대통령 슬로보단 밀로셰비치(현재 유엔국제전범재판소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의 ‘행동대원’들이었다. “유고연방의 위기는 코소보에서 비롯됐고, 코소보로 끝날 것이다.” 코소보 전쟁이 터지기 1년 전 영국의 역사학자인 노엘 말콤은 코소보 연구서 가운데 가장 널리 읽히는 자신의 저서 ‘코소보 略史(Kosovo, A Short History·1998)’에 이렇게 썼다. 코소보에 대한 밀로셰비치의 강경책은 결과적으로 유고연방 내의 다른 공화국들로부터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 1990년대 들어 구(舊)소련 해체 바람을 타고 슬로베니아가 평화적으로,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는 전쟁을 거쳐 유고에서 떨어져나갔다. 특히 보스니아는 밀로셰비치 정권으로부터 독립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코소보와 마찬가지로 혹독한 내전(1992∼95)을 치러야 했다. 그 와중에 20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필자는 2000년 10월 보스니아를 취재하면서 내전의 상흔을 곳곳에서 접할 수 있었다. 수도 사라예보는 1984년 동계올림픽을 치렀던 도시답지 않게 파괴된 건물과 거리들로 흉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밀로셰비치, 세르비아계 선동 발칸반도는 ‘세계의 화약고’란 달갑잖은 별칭이 말해주듯 20세기 들어 분쟁이 끊이지 않았던 지역이다. 오죽했으면 영어에 ‘balkanize(분열하다)’라는 신조어가 생겨났겠는가. 비단 20세기뿐만이 아니다. 그 전부터도 발칸반도는 언어와 종교가 다른 세르비아계, 알바니아계, 크로아티아계, 슬로베니아계 등의 종족들이 섞여 살면서 유혈 투쟁을 되풀이해왔다. 세르비아는 그리스 정교,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카톨릭이 주류고, 보스니아에는 회교도와 그리스 정교도들이 섞여 산다. 종족과 종교가 다르니 문화와 정서도 다르다. 지정학적 측면에서 보면 발칸반도는 역사적으로 열강(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 오스만 튀르크의 이슬람 세력, 러시아)들이 저마다 세력을 펴려는 각축장이었다. 그 와중에 세르비아에서 점화된 제1차 세계대전의 불씨(세르비아 청년의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 암살)가 유럽 전체로 번져갔는가 하면, 특히나 20세기의 마지막 10년 동안에는 여러 내전(크로아티아 내전-보스니아 내전-코소보 전쟁)을 겪으며 숱한 인명이 희생됐다. 밀로셰비치는 발칸반도에서 잇달아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르면서도 유고연방의 해체를 막지 못했다. 그에게 돌아온 것은 전쟁범죄자란 낙인과 세르비아 영토 안으로 밀려든 70만명의 세르비아 난민뿐이다. 코소보 전쟁은 20세기 발칸반도에서 일어난 마지막 전쟁으로 기록된다. 밀로셰비치가 1980년대 후반에 극단적인 세르비아 민족주의로 대중을 선동했고 코소보의 자치권을 유린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를 권좌로 이끈 것이 바로 코소보였다. 밀로셰비치는 코소보를 두 차례 방문한 바 있다. 1987년 첫 방문 때는 최고 권좌에 오르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당시 정치적 야심에 가득찬 밀로셰비치는 코소보의 세르비아 주민들에게 “아무도 당신들을 감히 건드리지 못한다”는 선동적인 연설로 일약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그해 세르비아 사회주의당 당권을 장악했고, 2년 뒤 세르비아 대통령에 오른 후 코소보를 방문해 또다시 세르비아인들의 민족감정을 부추겼다. 1989년 6월 코소보 폴예에서 열린 코소보 전쟁(세르비아와 오스만 튀르크의 전쟁) 600주년 기념식에서 그는 “코소보의 영웅주의여 영원하라! 세르비아여 영원하라!”고 외쳤다. 그 무렵 그는 이미 코소보의 자치권을 사실상 빼앗은 상태였다. 석 달 전인 1989년 3월 세르비아 의회는 코소보의 자치적 사법권과 경찰권을 박탈했고, 알바니아계 주민들이 이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자 세르비아 경찰이 발포, 20여 명이 죽었다. 밀로셰비치의 강압정책에 반발한 알바니아계 코소보인들은 코소보 해방군(KLA)을 조직해 무장투쟁을 벌였고, 이것이 결국 코소보 위기로 증폭됐다. “폭력만이 국제적 관심 끈다”
코소보 위기는 1990년대 초 유고연방이 분열될 무렵부터 이미 조짐을 보였다.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도 코소보 위기가 유고연방 균열과정의 일부라는 사실을 인식했다. 그러나 코소보 사태는 보스니아 내전에 가려 국제적인 눈길을 끌지 못했다. 보스니아 내전이 격화하기 시작한 1992∼93년에 코소보의 긴장을 덜어보려는 외교적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곧 보스니아 내전에 묻혀버렸다. 1995년 보스니아 내전을 끝내기 위한 데이튼 평화협상에서 코소보 문제가 다뤄지지 않자 그동안의 비폭력 저항운동이 아무런 효과를 내지 못했다고 판단한 일단의 젊은 코소보 분리주의자들은 국제사회의 개입을 이끌어내기 위해 극단적인 전략을 채택했다. 그것은 코소보 항쟁의 주역으로 ‘KLA의 영웅’이라 일컬어지는 하심 타치가 필자와의 코소보 현지 인터뷰(2000년 6월)에서 밝힌 대로 “세르비아군 및 경찰과 무장 충돌함으로써 그에 따른 코소보 알바니아인들의 희생을 국제사회의 핫이슈로 만드는 극한처방”이었다. 타치는 “폭력만이 국제사회의 관심을 끌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됐다”고 했다. 1997년부터 코소보 해방군의 주도 아래 소규모의 무력충돌이 벌어졌고, 하심 타치가 예상했던 대로 세르비아는 무자비하게 코소보 알바니아계의 저항을 진압했다. 1998년 2월 알바니아계 주민 58명이 코소보 프레카제 지역에서 무참히 학살된 사건은 코소보 내전을 본격화한 발화점이었다. 국제사회는 발칸반도에서 또다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국제정치학의 현실주의 시각에서 보면 발칸전쟁은 서유럽 국가들에게 난민 홍수와 새로운 비용 지출을 의미할 뿐이었다. 코소보 위기는 두 단계로 나눠볼 수 있다. 1단계는 1998년 2월부터 1999년 3월까지의 코소보 내전 기간, 2단계는 코소보 내전이 다국적 군사 개입을 불러일으킨 끝에 1999년 3월24일부터 6월11일까지 78일 동안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의 공습으로 코소보 전쟁이 벌어진 시기다. 1단계에서는 코소보 해방군의 무장투쟁과 이에 대한 세르비아 보안군의 강경대응이 거듭되면서 코소보 사태가 국제적인 이슈로 떠올랐다. 이 기간에 코소보 알바니아인 가운데 약 1000명의 사망자와 40만명의 난민이 생겨났다. 난민들은 세르비아 보안군의 체포와 학살을 피해 보따리를 싸들고 코소보 지역의 외딴 산으로 숨어들었다. 이들 대부분은 1998년 10월 당시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특사 리처드 홀부르크가 밀로셰비치와 긴급회담을 가진 후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세르비아 당국은 나중에 이들 중 많은 이들을 코소보 해방군 용의자나 ‘협력자’로 몰아 체포했다. 코소보 전쟁의 2단계는 코소보 알바니아인들에게 피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다. 세르비아 보안군과 준군사조직의 조직적인 인종 청소 작업으로 약 1만명이 죽임을 당했고, 보스니아 내전 때처럼 조직적 강간과 고문, 약탈이 자행됐다. 이로 인해 약 86만명의 난민이 이웃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등으로 몸을 피했고, 코소보 지역내 난민도 59만명에 이른 것으로 집계된다. 세르비아의 인종 청소는 3·24 나토 공습 뒤 더욱 기승을 부렸다. 나토는 공습에만 의존하고 지상군을 파견하지 않음으로써 코소보 알바니아인들의 고통을 한때나마 오히려 가중시켰다는 비판을 받았다. ‘인종 청소’ 촉발한 나토 공습 코소보 전쟁을 지휘한 당시 나토 사령관 웨슬리 클라크 대장의 회고록 ‘현대전쟁 벌이기(Waging Modern War·2001)’에 따르면 나토 지휘부는 공습을 할 경우 비교적 빠른 시일 안에 밀로셰비치가 랑부예 협정안(나토군의 코소보 진주를 뼈대로 한 코소보 평화안)을 받아들일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그 판단은 틀렸음이 드러났고, 공습은 무려 78일 동안 이어졌다. 공습 막판에 초조해진 클린턴 미 행정부와 펜타곤 지휘부는 미국의 지상군 파견 시기를 언제로 할 것인가를 저울질해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나토의 또 하나 잘못된 판단은 “우리가 공습을 하면 밀로셰비치의 세르비아 무장세력이 코소보 알바니아인들을 더이상 억압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공습은 세르비아 보안군과 민병대의 잔혹한 전쟁범죄 행위를 더욱 자극했다. 코소보 전쟁에서는 세르비아 쪽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 밀로셰비치는 나토의 폭격으로 2000명의 민간인이 죽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비해 나토 사령부는 공습으로 인한 민간인 사망자를 약 500명, 세르비아군 사망자를 5000명으로 추산했다. 세르비아측은 세르비아군 사망자가 576명이라고 밝혔다.
이는 나토군이 78일의 공습 기간 중 단 1명의 희생자도 내지 않은 것과는 극단적인 대조를 이룬다. 나토 사무총장 로드 로버트슨이 코소보 공습 1년을 맞아 2000년 3월에 펴낸 ‘코소보 1년, 성취와 도전’에 따르면 당시 나토군은 3만8000여 차례 출격해 1만500회의 공습을 퍼부었다. 그러면서도 사상자를 단 한 사람도 내지 않은 데 대해 ‘놀라운 업적(remarkable achievement)’이라 평가했다. 하지만 이 대목은 비판의 대상이 됐다. 코소보 문제의 해결책을 찾기 위해 조직된 독립적 민간기구인 코소보 독립 국제위원회는 ‘코소보 보고서’(기사 맨 뒤의 상자기사 참조)에서 “나토의 코소보 전쟁은 성공도 실패도 아니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공습으로 코소보에서 세르비아 세력을 몰아내고 코소보 알바니아계 주민들의 고통을 멎게 했다는 점에서는 성공이라 볼 수 있지만, 공습 후 인종 청소가 더 심해졌다는 점에서는 실패로 봐야 한다는 논리였다. 나토 군사 개입의 중요한 명분이 바로 인종 청소를 막는 데 있었으나, 오히려 이를 촉발시켰다는 비판이다. 더구나 나토가 주적(主敵)으로 삼았던 밀로셰비치는 2000년 10월 세르비아 민중혁명으로 물러나기까지 1년 반 가까이 더 권좌에 머물렀다. 밀로셰비치는 전쟁범죄자 신세로 전락했지만, 그 망령은 지금도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고 있다. 지난 3월12일 세르비아의 수도 벨그라드 정부 청사 앞에서 조란 진지치 세르비아 총리가 암살된 사건도 코소보 전쟁의 음울한 그림자다. 진지치는 2000년 10월 21세기의 첫 민중혁명에 주도적으로 참여해 밀로셰비치의 축출을 이끌었고, 나아가 2001년 봄 밀로셰비치를 헤이그 국제전범재판소에 세우는 데 앞장선 인물. 이 사건은 그에 대한 극우 세르비아 민족주의 세력의 보복이다. 진지치는 “밀로셰비치와 함께 코소보 전범으로 기소된 밀루티노비치 전 세르비아 대통령이 곧 전범재판소에 자진 출두할 것”이라고 발표한 지 얼마 안 되는 시점에 암살됐기 때문에 그 배경이 더욱 뚜렷해진다. 필자는 코소보에 세 번 다녀왔다. 첫 번째는 1999년 6월초 코소보로 진입하는 나토군을 따라, 두 번째는 그해 12월 전후 6개월간의 변화를 보러, 그리고 세 번째는 2000년 6월 코소보 해방 1년을 맞아서였다. 코소보에 갈 때마다 전쟁이 인간에게 얼마나 깊은 상처를 남기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코소보 분쟁은 ‘현재진행형’ 코소보는 올해로 해방 4년을 맞지만, 요즘 들려오는 현지 소식도 갈등, 보복과 관련된 음울한 것들이다. 코소보는 여전히 뿌리 깊은 종족 갈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 인구 230만 가운데 20만명에 이르던 세르비아인들은 대부분 코소보 북쪽의 이바르강 건너편(미트로비차 북쪽)이나 세르비아로 피란을 갔기 때문에 코소보 전쟁이 일어나기 전의 9(알바니아계) 대 1(세르비아계) 인구 비율이 무너진 상태다. 이렇듯 코소보 분쟁은 ‘현재진행형’이다. 1999년 6월 나토 병력이 주축이 된 국제평화유지군 5만 병력이 코소보로 진입한 이래 코소보에선 총성이 끊이지 않았다. 코소보 북부 도시인 미트로비차는 알바니아인과 세르비아인 사이의 갈등에서 비롯된 코소보 위기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곳이다. 시내를 남북으로 가르는 이바르강을 사이에 두고 남쪽은 알바니아계가, 북쪽은 세르비아계가 주도권을 쥐고 대치중이다. 그래서 이바르강은 ‘분단의 강’이 됐다. 남북을 잇는 2개의 다리는 프랑스군 병사들이 탱크로 중무장한 채 지키며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그동안 이 두 개의 다리를 사이에 두고 걸핏하면 충돌이 벌어져왔다. 코소보 전쟁 전 미트로비차의 인구는 10만명. 알바니아계가 다수를 차지했고, 세르비아계는 10%에 지나지 않았다. 이바르강 건너 북쪽 지역에도 알바니아계가 세르비아인들보다 많았다. 그러나 코소보에 나토군이 진입한 뒤 알바니아계의 보복을 피해 남쪽에서 넘어온 세르비아인들이 알바니아인들의 집을 불태우는 등 폭력으로 그들을 이바르강 남쪽으로 몰아내고 그 지역을 차지했다. 필자는 미트로비차 북부를 취재하면서 곳곳에 불탄 채 버려진 알바니아인들의 집을 볼 수 있었다. 그나마 성한 건물 벽에는 세르비아인들이 붙여놓은 전투적인 구호들이 눈길을 끌었다. 알바니아계를 저주하고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글이었다. 알바니아계와 세르비아계는 언어와 종교가 다르다. 알바니아계는 인도-유럽어 계통의 알바니아어를, 세르비아계는 슬라브어 계통의 세르비아어를 사용한다. 코소보는 발칸반도에서도 ‘판도라의 상자’라고 일컬어진다. 그만큼 분쟁의 뿌리가 깊고 오래 됐다. 1700년 전인 4세기의 로마제국이 동로마와 서로마로 갈라질 무렵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로마 카톨릭을 믿는 서로마제국과 그리스 정교를 믿는 동로마제국 세력이 만나는 접점(接點)이 바로 발칸반도였다. 그래서 서북부의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카톨릭을, 동남부의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등은 그리스 정교를 믿게 됐다. 여기에 이슬람교가 유입된 것은 14세기 무렵 오스만 튀르크 제국이 발칸반도를 점령한 뒤부터다.
‘성전(聖戰)’ 부추긴 정치인들
알바니아계와 세르비아계 중 어느 쪽이 먼저 코소보에 뿌리내렸는가는 논쟁거리다. 양측의 역사학자들은 저마다 그들의 조상이 먼저 코소보에 정착했다고 주장한다. 알바니아계 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코소보 원주민은 고대 일리리아인으로 지금의 알바니아와 코소보 지역에 공동체 집단을 이뤄 살았다. 일리리아인들이 쓰던 고대 일리리아어가 바로 오늘날의 알바니아 언어라는 것. 그러다 이민족인 슬라브족이 6세기 무렵 발칸반도로 들어오면서부터 갈등이 시작됐고, 12세기 들어 세르비아의 네마냐 왕조가 강력한 세력을 펴기 시작하면서 13세기경 코소보는 세르비아의 지배권 아래 놓이게 됐다. 이에 따라 코소보 지역의 비옥한 평원에 몰려 살던 알바니아인들은 산악지대로 옮겨갔다가 나중에 되돌아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세르비아계 학자들은 지금의 알바니아인들이 일리리아인의 후손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알바니아인들은 14세기 무렵 오스만 튀르크 제국이 발칸반도를 점령할 때 이주해오기 시작한 이민족이라는 게 세르비아계의 반론이다. 코소보는 세르비아인들에게 종교적 성지(聖地)로까지 여겨진다. 중세 세르비아 네마냐 왕조의 중심이 코소보였고, 세르비아인들의 정신적 구심점인 세르비아 정교회의 첫 교구가 세워진 곳 역시 코소보다. 코소보에는 유서 깊은 세르비아 정교회 건물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그러나 코소보 전쟁을 거치며 많은 교회가 파괴됐다. 밀로셰비치의 인종 청소 와중에 회교사원들이 파괴된 데 대한 보복이었다). 1389년 6월29일은 세르비아인들에게 잊을 수 없는 치욕의 날로 기록됐다. 당시 세르비아의 라자르 왕은 회교국인 오스만 튀르크군의 침략에 맞서 싸우다 코소보 폴예(Kosovo Polje·‘검은 새의 평원’이란 뜻) 전투에서 참패했다. 이 전투에서 라자르 왕과 10만명의 세르비아인 병사들이 몰사했다. 오스만 투르크의 무라트 왕마저 전사했을 만큼 격전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세르비아인들 사이엔 코소보 폴예 전투 이야기가 영웅적인 민족 서사시로 전해진다. 이런 배경 때문에 코소보는 세르비아인들에게 ‘뜨거운 심장’이자 세르비아의 성지로 여겨진다. 밀로셰비치가 전쟁 600주년 기념식에서 세르비아인들을 선동했듯이 극단적 민족주의 정치가들은 “우리 조상들이 회교도의 침략에 맞서 싸웠듯이 성전(聖戰)을 벌여야 한다”며 세르비아인들을 부추겼다. 그러나 영국 역사학자 노엘 말콤은 코소보 폴예 전투 이야기가 일종의 신화처럼 부풀려진 것으로 본다. 나아가 말콤은 폴예 전투에서 알바니아계 주민들도 라자르 왕의 지휘 아래 함께 회교도 세력에 맞서 싸웠다고 주장한다. 당시 회교세력에 맞선 것은 세르비아와 보스니아의 연합세력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세르비아 학자들은 말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2차 대전 후 속주 신세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세르비아·크로아티아·보스니아·슬로베니아·몬테네그로·마케도니아 등 6개 공화국으로 구성된 유고연방이 출범했다. 전쟁 당시 게릴라 전술로 독일 점령군을 괴롭혔던 요시프 티토의 지도력 아래 코소보의 운명은 사실상 세르비아의 준(準)자치주로 결정됐다. 코소보보다 인구가 적은 이웃 몬테네그로도 어엿한 6개 공화국 가운데 하나였지만, 코소보는 어디까지나 세르비아의 속주(屬州)에 불과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코소보에 대한 세르비아인들의 뿌리깊은 집착, 다시 말해 ‘코소보는 중세시대의 서사시적 영광이 서린 세르비아의 고향’이라는 인식이 깊이 작용했다. 1960년대 이후 코소보의 알바니아인들 사이에 유고연방내 공화국으로의 지위 격상과 실질적인 자치권을 요구하는 운동이 벌어지면서 코소보는 연방 민족 문제의 핵심 사안으로 떠올랐다. 이들의 자치권 요구는 티토의 정치적 리더십에 바탕한 1974년의 헌법 개정을 통해 상당 부분 받아들여졌다. 티토는 특유의 카리스마로 유고연방 여러 공화국들의 결속을 다져왔다. 이에 따라 코소보 알바니아계는 자치 의회와 독자적인 경찰권 등 광범위한 자치권을 누릴 수 있었다.
티토 사망 후 위기 심화
그러나 1980년 티토가 사망한 뒤 코소보 사태는 서서히 ‘위기’로 치달았다. 좀더 광범위한 자치권과 공화국 승격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티토 사망 1년 후 폭동으로까지 번졌다. 1981년 코소보 중심도시 프리스티나에서 벌어진 대학생들의 시위를 시발점으로 코소보에서는 폭력과 유혈이 그치지 않았다. 코소보의 비극이 본격화한 것은 1980년대 후반 밀로셰비치가 ‘대(大) 세르비아 건설’이라는 정치적 슬로건을 내걸고 코소보의 자치권을 박탈한 뒤부터였다. 그후 많은 알바니아계 주민이 공무원, 교사 등 공직에서 물러나고 세르비아인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코소보 인구의 90%를 차지했던 알바니아계 주민들은 밀로셰비치의 억압정책에 맞서 세르비아로부터의 독립을 요구하고 나섰다. 알바니아계 주민들은 세르비아계의 편파적인 교육정책에 맞서 나름대로 독자적인 교육체계를 세우기도 했다. 1992년에는 주민투표를 거쳐 ‘코소보 공화국’을 선포했고, 온건파 지식인 이브라힘 루고바가 대통령에 뽑혔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대로 1990년대 전반기의 코소보 문제는 발칸반도의 잇단 내전에 묻혀버렸다. 휴화산처럼 안에서 끓어오르던 갈등은 1990년대 후반 들어 국제사회의 눈길을 끌기 시작했다. 당시 클린턴 미 대통령은 밀로셰비치에게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라”고 거듭 촉구했다. 그러나 밀로셰비치는 “코소보 사태는 국내 문제”라며 개입을 차단했다. 코소보 사태 희생자가 갈수록 늘어나자 1999년 2월 국제사회는 세르비아계와 알바니아계 대표들을 프랑스 랑부예로 불러모아 회담을 열었다. 아울러 코소보 영토 안으로 국제평화유지군을 진입시키는 것을 뼈대로 하는 랑부예 평화협정안을 받아들이라고 세르비아측에 요구했다. 밀로셰비치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다. 그에게 이것은 보스니아 내전을 비롯한 1990년대의 잇단 내전으로 ‘위대한 세르비아’의 꿈이 깨진 데 이은 또 한 번의 정치적 패배를 뜻했다. 밀로셰비치는 “외국 군대를 주권국가인 유고 영토 안에 주둔시킬 수 없다”며 평화협정 체결을 거부했다. 이에 따라 그해 3월24일 나토의 세르비아 공습이 시작됐다. 코소보 전쟁은 이번 이라크 전쟁처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를 거치지 않은 채 감행됐다. 같은 슬라브계인 러시아와 중국의 거부권 행사가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국제법 학자들은 코소보 개입이 불법(illegal)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미국과 서유럽의 국제법 학자들은 “법적 요건을 갖추진 못했지만, 적법(legitimate)한 개입이었다”고 해석했다. 밀로셰비치의 세르비아 보안군과 민병대들이 알바니아계를 상대로 벌인 전쟁범죄를 막기 위한, 이른바 인도주의적 개입(humanitarian intervention)이라는 것. 나토, 자국 이익 위해 개입 나토는 무슨 이유로 코소보 사태에 개입했을까. 나토를 이끈 클린턴 행정부는 “밀로셰비치의 세르비아계가 코소보에서 저지르는 인종 청소 행위를 보다못해 군사적으로 개입했다”고 주장했다. 물론 그런 측면도 있다. 그러나 미국과 유럽 열강들이 그토록 인도주의적이라면 후투족과 투치족의 분쟁에서 80만명이 학살된 1994년 르완다 위기 때는 왜 팔짱을 끼고 바라만 보았는가. 5년 뒤 갑자기 인도주의가 부활한 것일까. 현실주의자들은 “군사 개입 당사국의 이해관계가 관철되지 않는 한 어떤 인도주의적 군사 개입도 이뤄지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한마디로 “이득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토가 코소보에 개입한 데는 인도주의적 측면과 더불어 중요한 현실적 고려 요인들이 있다. 무엇보다 안보적 측면이다. 코소보 위기를 방치하면 1990년대 발칸반도에서 일어난 여러 전쟁에서처럼 서유럽으로 난민들이 몰려오게 된다. 군사적 측면에서 보면 세르비아군이 저지르는 만행을 방치할 경우 유럽의 안보를 책임진다고 자부해온 나토의 신뢰에도 금이 간다. 이는 나토를 발판으로 유럽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패권국가 미국의 위상이 흔들리는 것을 뜻한다. 나토는 유럽에서 미국의 이익을 지키는 물리적 기반이다. 미국의 패권을 지키는 유럽의 보루(堡壘)다. 미국이 코소보에 개입한 배경에는 코소보 위기로 미국의 동유럽 시장 진출이 방해받아서는 안 된다는 미국 재계의 요구 등 복합적인 변수들이 깔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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