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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다시쓰는 '조선책략' 1


            <새연재> 21세기, 다시 쓰는 『조선책략』

 

                도자기 기술로 본 한·일 흥망사

 

            ‘백자기술 보유국’조선이 망한 까닭은?

 

   우리 서민들이 쓰던 막사발이 일본에서는 천만금을 줘도 구할
   수 없는 「환상의 도자기」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해도,
   조선의 관료들은 막사발을 소중히 여기는 일본 다이묘들을
   야만인으로 취급할 뿐 그것을 수출해서 돈을 벌 생각은 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윤덕민 외교안보연구원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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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부터 1백년 전, 동아시아는 서구 제국주의의 진출과 함께 중화(中華)질서가 여지없이 붕괴되는 질서의 대변혁기에 처해 있었다. 이른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에 조선은 철저히 실패했다. 당시 비슷한 수준에 있던 일본은 근대화에 성공했는데 왜 조선은 근대화에 실패하고 나라를 잃는 치욕을 겪어야만 했을까?
   그 부분에 대해서 지금까지 우리의 역사교육은 우리의 잘못보다는 「남의 탓」에 치중해온 감이 든다. 그동안 우리의 근대사 교육은 일제의 만행을 밝히고 규탄하는 데에 초점을  두어왔다. 그 결과 『일제가 너무도 악랄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라를 빼앗겼다』는 것이 광복 이후 교육을 통해 갖게 된 일반 국민들의 인식이었다. 이에 따라 당시 우리가 했던  일들을 합리화하고, 우리의 치부는 여전히 덮여 있는 상황이 계속됐다.
   역사교육에 있어서 일제의 만행을 낱낱이 밝히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나라를 잃었던 역사로부터 무언가 교훈을 얻으려면 당시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는가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자성이 훨씬 값진 일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21세기로 넘어가는 현 시점에 우리가 마치 19세기 말과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든다. 우리의 경제주권은 IMF에 의해 제약받고 있으며, 북한 또한  대외지원 없이는 체제를 유지하기도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19세기 말처럼 한반도의 상황을 우리가 주도하지 못하고 외세에 의해 좌우되던 어리석음을 또 다시 범해서는 안된다.
   과거는 오늘을 살아가는 지혜를 준다. 그런 점에서 1백년 전 우리가 어떻게 잘못했는지에 관한 자성은 오늘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지침이 될 수 있다.

                          백자의 비밀

   「백자」는 조선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17세기까지 백자를 만드는 기술은 요즘으로 치면 반도체 이상의 첨단 기술이었다. 임진왜란을 통해 일본이 그 기술을 얻기까지 도자기를 희게 만드는 기술은 중국과 한국만 갖고 있었다.
   그러나 백자를 만드는 하이테크 기술을 가진 조선은 백자의 진가를 인식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기술을 활용하여 국부(國富)로 연결시키지 못했다. 반면에 일본은 조선으로부터 얻은 백자기술을 활용, 도자기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했고 명치유신을 성공시키는 원동력으로 삼았다.
   도자기는 인류문화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당시의 문화와 기술 수준을 알 수 있는 한 가지 척도가 된다. 흔히 도자기라고 말하지만 도자기에는 크게 4가지가 있다. 즉 점토와 구울 때의 온도 차이에 따라 단단함, 투명성, 흡수성 등이 다른 토기(土器), 도기(陶器), 석기(火石器)로 각각 구분된다. 최초의 도자기는 진흙으로 적당히 빚어 말린 토기였지만 불을 활용하면서 도자기는 점점 단단해졌으며, 더 고온에서 도자기를 구울 수 있도록 가마도 개량돼갔다.
   토기, 도기, 석기를 거쳐 인류가 고안한 게 자기였다. 결국 도자기의 정점은 자기인 것이다. 자기는 순도 높은 백토(白土)로 모양을 만들고 그 위에 유약을 입혀 1천3백∼1천3백50도의 가마 안에서 구운 것으로, 흙과 유약이 완전히 자화(磁化)돼 반투명질의 상태가 된다.
   세계 어느 곳에서나 도기, 석기의 단계에는 일찍 도달했지만 자기를 만드는 단계에 도달한 국가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특히 한국과 중국은 그 몇 안 되는 국가 중에서도 수백년을 앞서서 자기를 만들어냈다. 요즘 세계 도자기 시장을 주름잡고 있는 일본과 유럽은 각각 17세기와 18세기에야 비로소 자기를 만드는 기술을 터득했다.
   반도체 등 첨단제품의 신소재로 널리 쓰이고 있는 세라믹이 다름 아닌 자기다. 첨단 소재인 세라믹을 우리 민족이 세계에 앞서서 개발한 셈이다. 자기 중에서도 백자는 가장 어려운 기술로, 백자를 만들 수 있게 되면 이를 바탕으로 무궁무진한 세라믹의 세계를 전개할 수 있다. 얼마 전 크리스티 경매에서 한 조선백자에 매겨진 어마어마한 가격을 보면, 우리 백자의 우수성과 예술성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당시 최첨단 기술을 갖고 있던 조선은 왜 이를 전혀 활용하지 못했을까?
   조선을 제외하고 백자제조 기술을 얻은 국가들은 모두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일본은 임진왜란을 계기로 자기를 만드는, 특히 백자를 만드는 비밀을 알아냈다. 4백년 전  일본은 조선을 침공해서 수많은 조선 도공들을 끌고 갔다. 그 바람에 조선의 도자기 산업이 엄청난 타격을 받은 것은 분명하다. 전쟁이 끝난 지 수십년이 지난 광해군 시대에 이르기까지 궁중 연례에 사용할 청화백자 항아리가 없어서 전국에 수배할 정도였다.

                조선의 천민에서 일본의 장인으로

   전쟁에 참가했던 다이묘(영주)들은 제각각 경쟁적으로 조선도공들을 끌고갔다. 그러나 일본의 다이묘들이 임진왜란중 조선 도공을 잡으려고 혈안이 됐던 것은 당시 조선 천민들이  사용했던 막사발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막사발이란 밥그릇이나 국그릇으로, 그리고 탁주를 마시던 술잔으로 사용하던 것으로 투박하고 소박한 도자기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 막사발이 일본에서는 「이토자완(井戶茶碗)」으로 불리며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비롯한 다이묘들이 다도(茶道)에서 애용했던 「환상의 도자기」였다. 막사발 아닌 이토자완은 현재 백수십개밖에 남아 있지 않고 일본에서 국보로 대접받는다. 가격도 20억엔에서 1백억엔을 호가하여 도요토미 시대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천문학적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한국 내에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어느 누구도 천민들이 쓰던 막사발을 보존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 도공 이상평은 아리타(有田)에서 백자의 원료가 되는 백토를 발견했다. 이를 사용해 일본에서는 처음으로 자기를 빚었기에 그는 도조(陶祖)로 추앙받게 된다. 일본에 끌려간 조선 도공들은 다이묘들의 극진한 지원 아래 마음껏 예술성을 살릴 수 있었다.
   천민이나 관노의 성격을 가졌던 조선 도공들이 왕실이나 관에서 요구한 것을 만들어야 하는 체제로부터 벗어나 실명으로 자신만의 도자기를 빚기 시작하면서 일본의 도자기 산업은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다. 조선 도공들은 아리타 등 규슈 지역을 중심으로 정착하여 민족의 혼을 담은 백자, 청자를 구현했으며, 당시 최첨단이었던 중국 양식도 소화하고 일본 문화의 수요에도 응하면서 도자기의 수준을 비약적으로 높였다.
   한편 조선 백자는 유교적 통제사회의 영향인 듯 거의 정형화된 틀과 문양에다, 쓰이는 색도 한정됐다. 이는 물론 이조백자의 소박한 예술성이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조선 도공들이 빚어낸 일본 백자는 주자학의 정형화된 도그마에서 벗어나 조선 일본 중국의 모든 장르를 소화하면서 때로는 소박하고 때로는 화려한 도자기 예술의 극치를 보여준다. 17세기 중반 이후, 조선 도공들과 그들의 후예들이 만든 일본 자기는 놀랄 정도의 상상력과 참신성을 바탕으로 세계 도자기의 디자인을 선도했다.
   이러한 상황이었던 일본 도자기산업에 중요한 기회가 도래했다. 17세기 중반 세계 최고의 기술을 자랑하던 중국의 경덕진요(景德鎭窯)가 명청(明淸) 교체의 내란에 휩쓸려 쇠퇴하게 된 것이다. 당시 유럽 등 세계 도자기시장을 휩쓸던 것이 바로 중국 경덕진의 도자기였다. 도자기의 영어표기가 「차이나」가 된 것도 그 때문이다.

                 명치유신은 도자기 교역의 산물

   경덕진의 쇠퇴로 질 좋은 도자기를 얻을 수 없게 된 유럽은 새로운 도자기 수입원으로 일본을 주목했다.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는 조선 도공들이 빚어낸 「아리타야기(有田燒)」를 사들여 유럽시장에 팔았다.
   아리타야기는 당장 유럽의 왕족과 귀족들을 매료시켰다. 당시 귀족들은 중요 부분으로 사용하여 경쟁적으로 귀중한 도자기를 손에 넣기 위해 재물을 아끼지 않았다. 어떤 왕은 아리타야기 하나를 6백명의 병대와 교환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당시 유럽의 왕족 귀족들은 궁전이나 저택에 도자기만 산더미처럼 진열해놓은 방(porcelain cabinet)을 두는 것이 유행이었다. 독일 드레스덴의 군주였던 작센공 아우구스트는 1천6백점에 달하는 보물급 아리타야기를 수집했을 정도였다.
   이런 결과로 일본의 규슈 지역은 유럽과 도자기 교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사쓰마, 죠오슈, 사가 등 규슈 지방이 강력한 에도의 도쿠가와 막부체제에 도전해 이를 무너뜨릴 수 있었던 것은 결국 도자기 교역을 통해 얻은 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조선 도공들의 손길에서 시작된 일본 백자가 일본의 역사를 바꾸는   명치유신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
   조선의 백자기술은 일본을 거쳐 유럽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앞서 언급한 작센공 아우구스트는 백자에 매료된 나머지 백자의 독자적 개발을 명하기에 이르렀다. 아리타야기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모방을 거쳐 드디어 1710년 유럽 최초의 자기가 독일 마이센에서 완성됐다. 이후 유럽 자기는 동양에서 발명된 자기에 서양적인 장인정신과 합리성을 가미하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특히 귀족의 전유물이었던 백자가 일반에게까지 널리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근대화와 산업혁명을 이끈 유럽의 합리주의에 힘입은 바 컸다. 우리가 항상 애용하는 접시, 커피잔 등  식기들도 원류는 동양이지만 유럽인들이 개량한 것이다. 유럽 도자기들은 일본과 함께 오늘날 세계의 고급 도자기시장을 석권하고 있다.

               왜 조선은 백자를 활용하지 못했나

   이렇듯 조선 백자를 원류로 둔 일본과 유럽의 도자기들이 세계시장을 석권하면서 막대한 부를 축적할 동안, 조선은 백자라는 첨단기술과 상품을 전혀 국가의 번영에 활용하지 못했다. 여기서 조선이 1백년 전 질서의 대변혁기에 철저하게 실패한 원인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주자학에 입각한 조선의 정치경제 시스템 자체에 중대한 결함이 있었다. 조선은 건국 이래 주자학을 지배 이데올로기로 삼아 공자 맹자의 왕도정치 이념을 통해 체제유지를 꾀했다. 성현들의 말씀을 옮긴 교양지식의 집적에 불과했던 유학을 체계화해서 유교로 승화시킨 것은 주자학을 창시한 주희였다. 주자학은 유학에 강렬한 가치관 내지는 형이상학성을  도입했다.
   주자학은 「대의명분」을 중시하고 왕조의 정통성에 집착했다. 사실 주자학은 시대상황의 산물로 이민족에게 부단히 위협받던 중국 송대의 왕조체제 유지를 위한 지배논리에 불과했다. 조선도 그래서 주자학을 지배 이데올로기로 삼았다고 볼 수 있다. 중국과 조선의 과거시험은 주자학의 해석에 따라야만 했다.
   그 결과 5백년 가까운 긴 세월 조선, 중국, 일본은 주자학의 도그마에 지배당했다. 일본의 저명한 소설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는 『형이상학이라는 것은 이치를 따지는 학문이다. 시대적 상황이 변하면 그것은 억지가 돼버린다. 그 억지이론이 오랫동안 동아시아를 지배했던 것이다. 소위 「아시아의 정체」의 핵심은 주자학이라고 생각한다』고 지적한다.
   물론 현대에 들어서 동아시아의 급속한 성장을 두고 유교적 전통에서 그 원인을 찾는 전문가들이 많다. 분명히 유교의 몇몇 덕목들, 예를 들어 높은 교육열, 예절 등은 아시아 성장의 주요인의 하나임에 틀림없지만 유교 전체의 도그마성은 아시아 정체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조선 건국 초기 주자학은 왕도정치에 입각한 이상사회를 지향하는 건국의 기초를 닦는 데에는 매우 유익했다. 그러나 중기 이후, 특히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을 겪으면서 왕조사회에는 사회 각 분야에 부정 부패가 만연하고 민란과 반란이 줄을 잇는 가운데 통치시스템이 기능하지 못하는 상황이 초래됐다.
   조선은 17세기 이후 사회의 변화를 반영한 정치경제 시스템의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했다. 당시 조선에 필요한 것은 합리적인 법률 정비, 토지정책과 조세제도, 상공업의 육성 등이었지만 공허한 관념론인 주자학이 그런 것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할 리 없었다. 주자학은 합리적 수습책을 제시하기는커녕 명분론 강화를 통해 당쟁을 심화시켰다. 지배관료층은 오히려 주자학의 명분론을 강화해 민중을 통제하고 자신들의 권력기반을 유지 혹은 획득하기에 급급했다.
   전쟁 이후, 요즘 말로 수많은 정권 교체가 있었지만 왕가의 복제문제, 왕위계승의 적서문제에 대한 주자학의 해석을 빌미로 지역이나 파벌적 이해를 바탕으로 한 정권교체였을 뿐,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정책 대립이 원인이 된 적은 전혀 없었다.

                      과거제도와 고시제도

   조선의 관료들은 인류역사상 가장 어려운 과거시험을 통해서 채용된 수재들이었다. 일단 과거에 급제하면 가문의 영광으로 본인 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도 대대로 부와 명예를 누릴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과거시험의 내용이었다. 수험생들은 주자학의 해석에서 조금도 벗어날 수 없었다.
   신학이 성경 해석에 매달리듯이 주자학도 일종의 신학이었다. 과거에 붙으려면 주자학에 관한 고전을 통째로 암기하고, 그 바탕 위에서 정해진 형식에 따라 답안을 써야 했다. 시바  료타로는 조선의 과거제도와 관련 『이렇게 훈련된 사람은 좋은 두뇌를 가지고 있지만 별로 부러울 게 없다. 이런 두뇌는 인류유산을 만들어 가는 두뇌가 아니다. 정말로 중국과 조선은 쓸데 없는 일을 해온 것이다』라고 통렬하게 꼬집는다.
   주자학의 도그마만을 통째로 암기한 조선의 수재 관료들이 인간 사회의 선악을 논하는 데는 우수했겠지만 경제를 일으켜 국부를 쌓고, 도로와 다리를 건설하고, 의료시설을 확충하는 등 사회의 현실문제를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역사가 말해준다.
   1876년 강화도 조약에 따라 조선은 쇄국정책에서 벗어났다. 두고두고 불평등 조약으로 일컬어지는 일본과의 강화도조약 체결협상에 있어서, 사실상 그 핵심은 개항에 즈음하여 조선의 경제적 이익을 어떻게 지키고 증진시키는가 하는 문제였다.
   당시 조선측 대표인 신헌(申櫶)은 일본이 조약의 핵심 부분인 화폐제도에 대해 설명하려 하자 『사대부는 덕치(德治)에 대해서나 생각하지 통상문제와 같은 천한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라고 하면서 너희가 알아서 하라는 식의 태도를 취했다. 이렇게 체결된 불평등 조약에 대해서 우리는 과연 남을 탓할 자격이 있는가?
   18세기 청나라를 방문하고 온 일련의 조선 학자들이 가장 놀라고 부러워한 것은 바퀴였다. 정비된 도로를 따라 화물들이 바퀴 달린 수레로 이동한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놀라운  일이었다. 조선 건국 2천년도 훨씬 전에 로마 사람들이 이미 고속도로를 만들고 수레를 이용해 대제국을 건설했다는 사실을 그들이 알았더라면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조선이 「은자(隱者)의 나라」로 일컬어지게 된 것은 물류, 유통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었던 조선 관료의 탓인지도 모른다.
   과거제도의 문제점은 오늘날 우리의 고시제도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과거시험과 마찬가지로 현실과 유리된 채 수많은 시험 과목을 통째로 암기해야만 합격할 수 있는 고시제도를 통해서 충원된 우리 관료들이 현대사회가 필요로 하는 각 방면에 걸친 전문성을 어떻게 충족시킬 수 있을지 의문이다.
   조선은 주자학에 입각한 일종의 이상사회였다. 조선사회에는 관료와 농민만 존재할 뿐 상업경제는 거의 도외시되었다. 철저한 신분사회로서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서열에 따라  상·공은 천대받았다. 도공들은 뛰어난 장인이었지만 조선의 사회구조 속에서는 천민이나 관노들이었고 그들의 천재성은 세계적인 도자기를 발명해냈지만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 우리들은 뛰어난 백자들을 볼 수 있지만 그 백자들을 어떤 도공이 빚었는지는 알 수 없다.

                조선의 실패는 「시스템」의 실패

   반면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도공들은 비록 조국에서는 살 수 없었지만 존경을 받으며 자신이 빚은 도자기에 이름을 새겨 넣을 수 있었다. 정확히 4백년 전 남원에서 끌려간 어느 조선 도공은 10여대를 이어오면서 「심수관」이란 이름을 자랑스럽게 사용해왔다.
   조선의 3대 기본정책으로 흔히 억상(抑商) 정책, 쇄국(鎖國) 정책, 농본주의 정책을 든다. 당시 최첨단 상품인 백자가 있었지만 조선은 도대체 외국과 교역을 통해서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사회가 아니었다. 상업을 억제하고 외국과의 교역을 금지하는 상황에서 아무리 최첨단 상품이 있은들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조선은 철저한 쇄국정책을 통해서 국민들의 외국  진출을 엄격히 통제했으며, 그 결과 민간상인들이 해외 무역활동을 할 수 있는 길이 봉쇄됐다. 왕실이나 양반계급이 필요한 외제품은 소위 「조공무역」을 통해 수입했다.
   우리 서민들이 쓰던 막사발이 일본에서는 천만금을 줘도 구할 수 없는 「환상의 도자기」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고 해도 조선의 관료들은 막사발을 소중히 여기는 일본 다이묘들을 야만인으로 취급할 뿐 막사발을 수출해서 돈을 벌 생각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백자가 아무리 우수하더라도 그것이 세계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체제가 「은둔의 나라」 조선에는 없었던 것이다.
   조선은 건국시 주자학에 입각한 왕도정치의 이상향을 지향했다. 농본주의를 강조해서 표면적으로는 농민을 우대했지만 사실상 철저히 관 주도의, 좀 심한 표현을 쓰면 관료들을 위한 사회였다. 농민이 주가 된다고 했지만 극심한 조세 및 양역 부담만이 농민의 몫으로 관료들의 가혹한 수탈대상이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재정파탄에 직면한 조선정부는 조세 수입을 늘리기에 급급했다. 관료층은 자신의 부담은 가볍게 하는 반면 그 대부분을 가난한 농민들에게 떠넘겼다. 많은 수의 농민들이 과중한 조세부담을 피해서 유민이 됐다. 조선 말기에는 전국 각지에서 민란과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조선은 분명 유교의 관습이 사회 구석구석에 미친 수준 높은 문명국이었다. 그러나 공허한 관념론인 주자학의 도그마에 물든 조선의 정치경제 체제와 지배관료층은 도저히 변화하는 사회에 적응할 수 없었다. 그것이 서세동점의 시대에 조선이 실패한 가장 큰 이유가 아닌가 생각한다. 조선백자 이야기는 그것을 뒷받침하는 한 예일 것이다.

                     19세기 말과 20세기 말

   조선이 실패한 이유로 조선 자체의 문제점이 핵심적 이유라는 점에는 의문이 없지만 실패를 가속시킨 요인으로 국제적 변수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조선은 중국의 속국으로  내치는 독립이 인정됐지만 대외정책은 사실 독립적인 권한을 갖고 있지 못했다. 외교권이 없는 조선으로서는 조공무역에 만족할 뿐 현실적으로 대외무역을 개척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조선이 백자를 가지고도 해외교역을 추진할 수 없었던 또 하나의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하는 과정은 역사교육을 통해 우리에게 철저히 인지돼 있다. 반면 중국이 조선의 내정에 간섭해서 우리의 근대화에 좌절을 안긴 사실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9세기 말 조선의 정치경제 시스템은 한계에 도달했고 제국주의 세력은 호시탐탐 조선을 노리고 있었다. 그런 형국에서 철저한 개혁을 통한 근대화만이 거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김옥균 등 개화파는 1884년 일본의 근대화를 모델로 쿠데타를 일으켜 보수파 요인들을 제거하고 개혁정부를 수립했다. 비록 일본이라는 외세를 끌어들여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점에서 한계가 느껴지지만, 보수정권에 개혁을 기대할 수 없었던 당시 상황에는 부득이한 일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개혁정부는 중국의 무력개입으로 3일천하로 끝났다. 중국은 1882년 임오군란에도 개입해서 왕권을 회복시킨 바 있으며, 동학농민전쟁 시에도 일본과 함께 파병해 이를 진압했다. 이러한 사실들을 볼 때 『조선은 속국이지만 내치외교에 있어서 자주독립』이라는 중국의 주장에는 조선에 대한 외세의 영향력 확대를 견제하고, 조선에 대한 자신의 종주권을 유지하려는 속셈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중국은 조선의 현상을 유지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점에서 조선을 식민지화하려고 했던 일본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러나 중국은 조선의 개혁을 방해함으로써 조선의 패망을 촉진했던 것이다.
   조선이 패망한 이유 중에 일본 등 외세의 책동이 중요한 요인이었다는 점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가 근대화를 이루지 못한 것은 결국 우리의 책임이며, 그 점에  대해서는 철저한 자성이 필요하다.
   사실 구한말 시대는 한반도를 둘러싸고 외세들이 호시탐탐 노리기는 했어도 강대국간에 세력균형이 비교적 잘 형성돼 있던 시기였다. 일본 러시아 청나라 영국 등 어느 한 쪽도  한반도에서 절대적 우위를 가지고 있지 못한 시점이었다. 갑신정변의 배후에 일본이 있었어도 이를 청나라가 견제했으며,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겨도 러시아가 일본의 주도권을 좌절시켰다.
   결국 이러한 국제환경을 활용했다면 근대화를 이룰 수 있었던 짧지 않은 시간이 우리 민족에게 있었다. 을사보호조약 체결을 강행하던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조선의 각료와 원로대신들에게 『조선은 지난 10년 동안 도대체 나라의 생존유지를 위해서 필요한 시설 하나 못만들지 않았는가』라고 몰아붙였다.
   이토 히로부미의 이 모욕적 언사의 이면을 곱씹어야 하는 의무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