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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다시 쓰는 조선 책략 3

[연재]21세기, 다스쓰는 조선책략③

 

‘모 택 동 중국’

 

반제(反帝)혁명 성공과 몰락 통해본 21세기 대안

 

윤덕민 외교안보연구원 교수·정치학

 

지금까지 100년 전 서세동점의 시대에 실패한 조선과 성공한 일본에 대해서 다뤘다. 조선, 일본 외에도 서구 제국주의의 표적이 됐던 동아시아 국가들 중에는 동아시아의 맹주였던 노(老)제국 중국이 있다. 중국은 어떠했는가? 당시 중국은 근대 국민국가를 이루어 식민지화를 막을 수 있었던 일본과, 완전히 실패해 후발 일본의 식민지가 됐던 조선의 중간 정도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중국은 아편전쟁에서 패한 이후 거의 100년간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그리고 일본에 전 국토를 유린당했다. 하지만 조선처럼 식민지로 전락하지는 않았다. 한 나라가 삼키기에 중국은 너무도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이 조선과 결정적으로 달랐던 점은 100년 동안 침략과 내란을 겪으면서도 결국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했다는 점이다. 일본은 서구 자본주의를 받아들여 근대 국민국가를 이뤘던 반면, 중국은 사회주의라는 길을 통해 국민국가를 달성했다. 이번 글에서는 동아시아의 맹주 중국이 서양에 굴복하게 된 이유, 그리고 그 굴욕을 극복한 모택동의 사회주의 혁명을 평가한다.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반쪽 개혁」

프란시스 베이컨은 인쇄술, 화약, 그리고 자석에 의해 세계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 세 가지 모두 중국에서 발명된 것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활약하던 시기에 중국에는 공자와 맹자가 있었다. 중국의 한(漢)나라는 동 시대에 존재했던 로마제국보다 거대했다. 저명한 경제사학자 알버트 포이어워커는 16세기까지 『세련된 관료제나 문화적 성취는 말할 것도 없고 농업생산성, 산업기술, 상업, 도시의 부와 생활수준 등 어떤 면에서 비교해도 유럽은 절대로 중국과 대등한 수준에 있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중국은 분명 세계최고의 문명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1842년 아편전쟁에서 힘없이 무너질 때 중국의 명성도 무너졌다. 인류 최고의 발명과 세계 최고의 문명을 보유한 중국이 왜 근대에 무너졌는가? 더욱이 중국은 어떻게 했기에 비교할 수도 없었던 후진국 일본에조차 굴욕적인 수모를 겪어야 했는가?

중국에 있어 근대화에 가장 큰 장애는 유교로 지탱해온 자기중심적 사상이었다. 유교적 세계관은 중국을 중심으로 한 자연적, 윤리적 질서였다. 중국인들은 중국을 인류문명의 진수로서 모든 문화, 덕, 그리고 예의 원천으로 보았다.

중국은 그런 자신이 왜 변화해야 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 상당 시간이 필요했다. 아편전쟁에서 패하고 태평천국의 난을 힘겹게 진압한 청조(淸朝)는 지방 한인 관료들을 중용하고 열강의 조약체계를 받아들여 다소간의 활력을 가까스로 되찾는다. 소위 「동치중흥(同治中興)」을 전기로 중국은 1860년 이후 청일전쟁 직전까지 수십년간 부국강병을 위해 절치부심했다.

한족과 만주족의 지도층이 생각한 것은 가치는 중국의 것을 유지하면서 도구로서 서양식의 무기와 기계를 들여다 「자강(自强)」을 이룬다는 것이었다. 이른바 「동도서기(東道西器) 중체서용(中體西用)」이었다. 이는 요즘을 사는 우리들도 공감할 수 있는 대응이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전근대적인 가치관의 개혁 없이 새로운 서구식 제도와 기계가 제대로 작동할 리 없다. 소프트웨어의 개혁 없는 하드웨어만의 반쪽 개혁이었지만, 그것조차도 제대로 실행될 수 없었다.

중국의 자강운동은 조선에서도 보았듯 배외적인 사대부층의 저항에 부딪혔다. 중국의 근대화 노력은 사사건건 유교적 사대부의 무지와 편견 때문에 방해받았다. 예를 들면, 1872년 120명의 학생들을 최초로 미국으로 유학보내는 과정에 과거시험을 준비하게 할 목적으로 구식(舊式) 교사와 유교적 도덕이 훼손되지 않도록 감시할 학자를 동행시켰다. 과거시험에 붙으려면 주자학 고전을 통째로 암기하고, 주자학의 바탕 위해서 정해진 형식에 따라 답안을 써야 했다(주자학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98년 6월호 참조). 「중체서용」의 뜻은 알겠지만, 서양의 최신 문물을 배워야 할 학생들에게 성질이 다른 토끼 두 마리를 잡으라고 한 것은 결국 이도저도 아닌 결과를 초래했다고 할 수 있다. 그나마 유학사업 자체도 1881년에 폐지되고 말았다.

몰락의 첫걸음, 청일전쟁

청일전쟁은 중국의 참담한 실패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청일전쟁은 중국이 반식민지로 전락하는 분수령이었다. 청일전쟁은 가치관은 유지하되 도구만 서양 것을 들여온 중국과, 가치관과 도구 모두 서양화한 일본의 싸움이었다. 물론 청일전쟁은 가치관의 차이로 승패가 결정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근대적 국민국가체제와 전근대적인 봉건국가체제는 전쟁수행 능력에 있어서 분명한 차이가 존재했다.
중국은 자강운동을 통해 서양의 기계와 무기를 도입했다. 중국은 1870년대 이후 해군건설에 착수하여 영국과 독일로부터 당시로서는 최신식인 철제 중순양함을 도입했다. 1894년 동학혁명을 계기로 청일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중국 해군은 군함, 주포 등 하드웨어 면에서 일본보다 우세했다.

그러나 결과는 참패였다. 청일전쟁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놀랍게도 이홍장(李鴻章)의 사병과 일본의 국민군대 간 전쟁이었다. 승리를 예상한 중국은 전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최정예인 이홍장의 북양함대가 일본 해군과 격렬히 싸우고 있을 동안 남양함대 등 여타 중국 함대는 뒷짐을 진 채 구경만 하고 있었다. 그나마 이홍장도 자신이 군함을 한 척이라도 잃게 되면 국내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잃게 될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북양함대 사령관인 정여창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기지인 위해위(威海衛)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좁은 공간에서 발빠른 소형함 위주의 일본함대에 철저히 당하고 만다.

국가의 운명이 걸린 중대한 전쟁을 마치 지방의 국경분쟁을 다루듯 지방관에게만 맡겨 놓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근대적 국민국가를 이룬 일본이 총력전을 펼친 반면, 전근대적인 봉건국가인 청조는 무기력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북양함대 중순양함들의 거대한 함포가 거의 무용지물이었다는 사실이었다. 포탄이 없었고, 그나마 있는 포탄에는 화약 대신 모래가 가득 차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해군에 가야 할 자금이 서태후의 여름궁전인 이화원(?和園)을 짓는 데에 들어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동서고금을 통해 볼 때 내부 부패는 천명을 잃고 왕조가 붕괴하는 최대 요인이다. 부패는 또 외부 침략을 유발한다. 19세기 말 중국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화원 호수에는 대리석으로 된 유람석 모양의 커다란 석조물이 있다. 그것이 예정대로 중국 해군의 군함으로 태어났다면 청일전쟁의 결과는 달라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

청일전쟁의 패배는 중국에는 사형선고와 같은 것이었다. 이후 중국은 제국주의의 희생물로 전락해서 1949년 모택동의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할 때까지 반세기 이상 침략과 내란의 혼돈에서 수많은 목숨과 재산을 잃어야 했다.

청일전쟁의 결과는 반쪽짜리 자강운동으로는 서세동점의 시대에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줬다. 중국은 전근대적인 가치관을 버리고 근대 국민국가로 전환해야 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중국의 유교는 사회체제 그 자체였으며, 이것을 하루 아침에 부정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강유위(康有爲)는 지배계급의 신앙인 유교를 부정할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해 공자는 옳지만 유교 경전들은 후세에 대부분 위조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들을 버려야 한다는 우회적인 논리를 펼쳤다.

중국이 유교적 도그마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던 것은 청조가 몰락한 후 1919년 5·4운동에 의해서였다. 『광인일기(狂人日記)』의 노신(魯迅)은 유교문화가 『다수의 불행을 대가로 승리를 거둔 주인에게 봉사하는 문화』라고 지적했다. 노신의 생각은 당시 학생과 지식층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베이징대학 학생지도자들은 『공자의 말씀은 나라를 멸망시킨다. 유교는 노예에 대한 모럴이다』라고 하여 유교적 가족제도의 구속을 노예제도에 비유, 신랄히 비난하면서 개인주의의 가치를 찬양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국난을 수습하기에는 이미 시기를 놓쳤다.

동아시아의 왕조사, 특히 중국의 왕조사는 일정한 패턴에 입각한 흥망성쇠의 반복이었다. 왕조는 군주가 하늘(天)로부터 백성의 통치를 명받아 성립한다. 그러나 왕조는 전성기를 구가하고 수백년의 수명이 다하여 쇠약해지면서 통치능력을 잃게 된다. 이 시기에는 거의 예외없이 관리가 부패하여 가렴주구가 성행하며, 결국 많은 농민들은 농지를 버리고 유민이 된다. 더욱이 기아로 유민 수가 폭증하면, 도처에 유민단이 형성돼 식량이 풍부한 지역으로 흘러간다. 굶주린 약탈자들의 집단인 셈이다.

최후의 승자, 모택동

유민단이 커지면서 지도자가 나오며 그가 바로 난세의 영웅이다. 항우와 유방, 삼국지의 유비,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 등이 모두 이런 부류의 영웅이었다. 유민들이 영웅에게 바라는 일은 먹는 일을 해결해주는 것이다. 그것을 못하면 영웅이 아니다. 여러 유민단의 영웅 중에서 약탈 차원에서 벗어나 유민들을 잘 먹이고 규율을 만들어 공평하게 잘 다스린다는 소문이 퍼지면 민심을 얻게 되고 그 세가 불어나 결국 천하를 잡게 되는 것이다.
청나라 말기의 상황도 이와 유사했다. 청조의 부정부패는 민란과 외세 침입을 불렀으며, 청조 붕괴 후 반세기 가까이 내란에 처해 도처에서 영웅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영웅들의 각축은 오랜 내란과 혼란 속에서 장개석과 모택동, 두 영웅의 싸움으로 좁혀졌다. 항우와 유방의 예에서도 그랬듯이, 모든 면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했던 국민당의 장개석은 민심을 얻는 데에 실패한 반면 공산당의 모택동은 유방처럼 중국 국민의 민심을 얻어 천하를 취했다.

모택동의 방법은 사회주의로 표방됐지만, 중국 고래의 방법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스탈린과 중국의 정통 공산주의자들은 공장 노동자와 도시를 중심으로 혁명을 추진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모택동은 생각이 달랐다. 마르크시즘 책보다 중국 역사서를 탐독했던 모택동은 중국 역사의 원동력이 농민봉기에 있음을 깨닫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중국의 반란은 농촌에서 시작됐다. 전제정권을 쓰러뜨린 것은 대부분 농민들이었다. 이렇다 할 산업시설도 없고 전근대적인 중국사회를 볼 때, 중국역사를 만드는 자는 농민이지 지식인이나 공장 노동자가 아닌 것은 자명했다. 모택동은 20세기 중국혁명의 원동력 역시 농민이라는 점을 확신했다.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 관점과는 달리, 코민테른과 중국 공산당 지도부의 지침과도 달리, 모택동은 농촌을 거점으로 삼아 혁명을 시도했다.

모택동의 방법은 간단했다. 농민의 희망과 요구에 따르는 정책을 취한 것이다.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에게 분배하고 가혹한 세금과 부채를 없애줌으로써 농촌을 자신의 강력한 지지기반으로 만들어갔다. 모택동은 장사(長沙)의 깊은 산속에서 농촌 근거지를 만들어 장개석군에 대한 게릴라전을 펼치는 동시에 농민의 지지기반을 확대하면서 착실히 「해방구」를 넓혀갔다. 모스크바의 지령에 따라 도시중심의 공작에 집착하던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장개석의 강력한 토벌로 사실상 붕괴됐으며, 그 기반은 모택동의 농촌 외에는 남지 않게 됐다.

중국 공산당이 장개석에 의해 괴멸적 타격을 입고 대장정의 굴욕을 당하면서도, 궁극적으로 승자가 된 것은 중국 국민의 95%를 점하는 농민들의 민심을 장악했기 때문이었다. 어디서나 농민은 모택동의 편이었다. 이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승리가 아니라 중국 역사의 다이내미즘을 이해한 모택동의 승리였다. 모택동은 중국의 고전적 혁명노선에 따라 거의 1세기 동안 폭정과 외세침략, 그리고 내란으로 신음하던 중국 인민을 구했다. 그리고 중국의 독립과 주권을 회복시켰다. 그것은 일본의 명치유신에 버금가는 모택동 혁명이었다.

1949년 10월1일 천안문 광장에 선 모택동은 중화인민공화국 성립을 선언하는 사자후를 토해냈다. 모택동의 뒤에는 그와 함께 중국혁명을 이룩한 역전의 용사들이 서 있었다. 주덕, 주은래, 유소기, 팽덕회, 등소평 등이었다. 중국 인민들은 어느 누구도 신생 공화국의 희망찬 미래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희망은 빗나갔으며, 그것은 또 다른 재앙의 시작이었다.

혁명을 달성하는 데에 있어서 모택동은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49년 이후 중국이 필요로 하는 신중국 건설을 추진할 지도자로서는 적절한 인물이 아니었다. 모택동은 타고난 혁명가이자 반란의 명수이며 선동가였다. 그러한 그에게 신중국이 요구하는 행정, 경제, 문화상의 기술적 문제들에 대한 이해가 있을 리 없었다. 그는 신중국 건설의 모든 문제를 대중의 지지를 동원해 기존 질서를 파괴하는 반란으로 해결하려 했다. 신생 공화국은 출범했지만, 중국에는 공업과 농업생산이 정체하고 좀처럼 경제성장을 이루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됐다.

헐벗은 「무소유 공산사회」

신중국 건설의 선두에 선 모택동은 인민을 총동원해 난국을 돌파하는 특유의 혁명적 방법을 동원했다. 소련이 수년 내 공업생산력에서 미국을 따라잡게 될 것이라는 흐루시초프의 허풍에서 힌트를 얻은 모택동은 1958년 15년 내에 영국을 따라잡겠다고 선언했다. 소위 「대약진운동」의 시작이었다. 대약진의 광기가 중국을 지배할 무렵, 15년이라는 목표는 4년으로 단축됐다.
모택동의 대약진 운동은 특유의 대중동원을 통해 노동력을 집중적으로 투입해서 공업과 농업 생산력을 비약적으로 향상시켜 봉건적 후진사회인 중국을 빠른 시일내에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는 구상이었다. 우선 농업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농촌에 대규모 집단농장인 「인민공사」를 설치했다. 인민공사는 완전한 평등주의에 입각한 농업공동체로 농민의 사유재산은 모두 공사의 것이 되며, 막사에서 공동생활을 하고 식사도 같이 하는 한편 모든 수입은 평등하게 분배한다는 것이었다.

중국농촌 풍경은 하루 아침에 변했다. 펄벅의 『대지』에서 보았던 전통적 중국 농촌과 가족의 해체였다. 5억의 중국 농민은 조상 대대의 재산을 처분하고 2만6천여개의 인민공사에서 공동생활을 하게 됐다. 갖고 있던 모든 것을 처분했다. 살고 있던 집들도 부수고 그 재목으로 공동막사를 지었다. 무소유의 이상적인 「공산사회」가 마르크스와 레닌이 상상도 하지 못했던 가난한 중국농촌에서 한때 실현됐던 것이다. 모택동은 한 메모에서 『레닌은 뒤떨어진 나라일수록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어렵다고 말했다. 현재 보는 바와 같이 이것은 올바르지 않다. 경제가 뒤떨어질수록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수월하며 사람은 가난할수록 혁명을 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중국 농촌에서 실현된 무소유의 공산사회는 진정 파라다이스였는가?

한편 공업생산에서는 우선 철강의 비약적 생산 증대를 추진했다. 특히 1년내 철강생산을 두 배로 늘린다는 목표가 잡혔다. 이를 위해 모든 마을에 원시적 용광로인 토법로(土法爐)를 만들게 했다. 불과 3∼4개월만에 100만개 이상의 토법로가 건설됐다. 중국 전역은 붉게 타오르는 용광로 불빛으로 밤마다 장관을 이뤘다.

또 한 가지, 대약진 운동에서 모택동은 도시와 농촌의 「4해(害)」, 즉 파리 모기 쥐 참새를 퇴치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이 운동에는 모든 국민이 동원됐다. 왜 참새가 포함됐는지는 모르지만, 참새잡이 모택동 전술은 기발함을 넘어서 소름이 끼친다. 전국민이 전국적으로 총동원돼 참새가 땅에 앉지 못하도록 쉴새없이 소리를 쳐서 쫓는다. 앉지 못하고 하늘을 빙빙 돌던 참새는 그만 지쳐 떨어져 최후를 맞게 된다. 대약진운동 중 유일하게 성공한 것이 「4해 퇴치운동」이었다.

4300만명을 굶겨 죽인 대약진운동

대약진 운동의 효과는 즉시 나타났다. 1958년 가을 들판에는 곡식이 넘쳐 대풍이 들었고 용광로에서는 엄청난 철이 쉴새없이 생산됐다. 이대로 간다면 15년이 아니라 4년 내에 영국을 따라잡는 것도 가능해보일 정도였다. 그런데 분명히 대풍이라고 했지만, 인민공사에서 제공하는 음식의 질과 양은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떨어지기 시작했다. 도시에도 물품과 식량부족이 초래됐다. 그리고 겨울부터 재앙이 찾아왔다. 1958년 중국에서는 너무도 많은 것이 잘못되고 있었던 것이다.
1958년은 풍년이었다. 그러나 곡식들은 대부분 거둬들이지 못한 채 썩어갔다. 건장한 마을 청장년들은 모두 용광로에 매달려야 했다. 부녀자들과 어린이들이 허리가 휘도록 일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지방 지도자들은 모택동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생산량을 부풀려 보고했다. 생산량에 따라 세금이 정해졌기 때문에 농민들은 엄청난 세금을 치러야 했다. 심지어 어떤 지역에서는 생산된 곡식을 모두 세금으로 내는 바람에 먹을 것이 하나도 남지 않은 곳도 있었다.

더욱이 세금으로 거둬 들인 곡식은 빚을 갚기 위해 소련으로 보내졌다. 심각한 식량부족으로 기근이 초래되는 와중에도, 모택동은 곡식을 소련으로 보냈다. 자신의 인민공사가 실패했다는 사실을 흐루시초프가 아는 것이 두려웠던 탓이다. 그러나 가장 큰 잘못은 인민공사 자체에 있었다. 인민공사에서 농민들은 일할 의욕도 생산량을 늘릴 열의도 가질 수가 없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일하지 않는 옆사람과 동일한 수입밖에 얻을 수 없는 상황에 누가 열심히 일하겠는가? 생산량은 급속히 줄어갔다.

마을마다 만들어진 용광로는 사실상 무용지물이었으며 화근이었다. 토법로는 철광석을 제련하여 철을 얻는 것이 아니었다. 철을 녹여 철을 만드는 용광로에 불과했다. 인민들은 냄비, 주전자, 칼, 수저, 난로, 도끼, 삽, 가래, 금고, 자물쇠, 심지어 트랙터까지 모든 철을 용광로 속에 던져버렸다. 여기서 얻은 철은 거의 사용할 수 없는 쇳덩어리에 불과했다. 용광로를 지피기 위해 집집마다 가구와 문짝을 태웠고 급기야 숲을 태워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의 산이란 산은 모두 민둥산으로 변했다.

실로 중국 농촌은 자멸을 향해 매진했으며, 중국은 철기시대에서 석기시대로 퇴화했다. 농민들은 밭을 일굴 농기구가 없었다. 대기근이 찾아왔다. 인재였다. 아프리카에서 보던, 뼈만 남고 배가 불룩한 어린이들과 굶어죽은 시체를 1959년의 중국에서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다. 도시도 예외가 아니었다. 너무도 많은 사람이 굶어죽었다. 아마도 인류역사상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은 적은 없었을 것이다. 2차 세계대전에서 죽은 사람보다도 모택동의 대약진운동에서 굶어죽은 사람의 수가 훨씬 많았다. 최소한 3,000만명, 많게는 4,300만명이 죽었다는 추정도 있다. 한국 국민이 모두 굶어 죽은 셈이다. 그 끔찍함은 이루 표현할 수 없었다. 그러나 모택동은 눈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혁명의 대의를 위해 생명은 희생돼야 한다』고 했다. 6억 국민을 대상으로 한 그의 실험은 5∼7%의 인구를 희생하면서 철저한 실패로 끝났다.

공포의 문화혁명

대약진 운동이 실패한 이후 모택동은 또 하나의 혁명을 꾸몄다. 바로 「문화대혁명」이다. 유소기, 등소평 등 모택동의 충실한 부하들은 보스가 초래한 미증유의 혼란을 잡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초토화된 농촌과 중국경제를 살리기 위해서 그들은 광적인 성장목표를 정상화시키고 농업집단제를 대폭 완화하여 농민들에게 땅을 되돌려주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갔다.
그러나 모택동은 인민들이 잠시도 평화롭게 지내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인민들이 겨우 먹을 수 있게 된 단계에서 그는 생산체계를 다시 뒤죽박죽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의 충직스러운 부하들을 대상으로 끔찍한 인간사냥에 나섰다.

문화혁명은 1965년 11월 강청(江靑)의 수하인 상해의 이론가 도문원이 「문회보」에 쓴 『해서파관(海瑞罷官)을 평한다』에 의해 시작됐다. 「해서파관」은 북경 부시장 오함(吳?)이 쓴 희곡이다. 해서는 명대의 충신으로 폭군이었던 황제의 잘못을 용감하게 직언하고 충성을 다한 인물로, 모택동은 해서를 본받으라고 장려하기까지 했었다. 오함도 해서를 본받으라는 모택동의 지시에 따라 해서파관을 썼다.

그러나 그것은 모택동이 친 덫이었다. 모택동은 과거에도 「백화제방 백가쟁명」을 주창하여 지식인들로 하여금 정적들을 비판하도록 하여 그들을 숙청하는 데 활용한 적이 있었다. 충신 해서가 황제에게 직언하고 고초를 당했듯이, 팽덕회도 대약진운동의 문제점을 지적하여 모택동에 의해 숙청당한 바 있었다. 많은 당간부들은 팽덕회가 해서와 같은 인물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때가 온 것이다. 모택동과 강청 일파는 「해서파관」은 우익분자 팽덕회를 숙청한 모택동을 해서에 빗대 비난하는 것이며, 그 배후에는 유소기 등소평 등 당 지도부가 연루돼 있다고 뒤집어 씌웠다.

모택동이 그의 충직한 당 지도부를 파괴하기 위해 동원한 것은 9살에서 18살에 이르는 초중고의 어린 학생들, 소위 「홍위병(紅衛兵)」이었다. 「백가쟁명」 때 지식인들은 정적들을 비난해주었지만, 모택동도 비난했다. 그러나 청소년들은 그럴 염려가 없었다. 그들은 사리를 판별할 눈이나 비판능력도 없으며 단지 맹목적이었다. 모택동은 이 점을 활용했다. 그는 젊은이들이 가장 믿을 만한 동지이며, 이들만이 낡은 정치세력과 싸울 수 있는 용기를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모택동은 1966년 가을 천안문에 여덟차례나 오르며 전국에서 모여든 수천만의 홍위병들에게 반란을 획책했다. 모택동은 홍위병에게 사구(四舊), 즉 낡은 사상, 낡은 문화, 낡은 풍습, 낡은 습관을 타파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사령부를 폭파하라』는 제하의 대자보를 통해, 당 중앙과 지방정부의 「어떤」 동지들은 부르주아 독재를 강화하고 문화혁명을 무너뜨리려 한다고 지적하면서 당 사령부를 폭파하라고 했다. 모택동은 정상적인 당 및 정부조직을 무시했고, 무정부 상태가 도래했다.

중국 전역에서 학생들이 당 사령부와 사구를 폭파하기 위해 쏟아져 나왔다. 위대한 모주석이 지지하는 그들은 더 이상 선량한 학생들이 아니라 지옥에서 온 야차들이었다. 그들은 거리를 휩쓸고 다니면서 닥치는대로 파괴와 폭행, 그리고 살인을 일삼았다. 관리나 부유한 자, 지식인의 집에 난입하여 폭행과 살인을 저질렀다. 누구든지 외국이나 지성의 냄새가 나면 구타당하고 심문을 받아야 했다. 재수가 없으면 목숨을 잃는 것이 다반사였다.

농촌의 경우는 더욱 심각했다. 홍위병들은 옛 지주 소실의 자식이거나 금을 숨기고 있다고 의심되는 자, 이웃이 허위로 흑색분자로 고발한 자 등 아무 죄가 없는 마을사람들을 자본주의체제 부활을 노리는 중죄인으로 분류해 가차없이 사형에 처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국가조직은 완전히 와해됐다.

제2인자로 국가주석이었던 유소기는 백주에 사무실에서 홍위병들에게 붙잡혔다. 경호원들도 못본 체했다. 등소평도 붙잡혔다. 부인과 자식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소위 「비투대회(批鬪大會)」에 끌려가 굴욕적인 자세로 자아비판을 해야 했다. 유소기는 결국 모진 고문 속에 살해됐다. 등소평의 장남은 북경대에서 홍위병들에게 고문을 받다가 4층에서 던져져 평생 장애인으로 살고 있다.

홍위병의 만행

서방인들은 공산세계에서 사람들이 범하지도 않은 죄를 왜 자백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북한의 박헌영, 이강국도 자신이 미국의 스파이라고 자백했다. 서방의 궁금증은 스탈린 사후 흐루시초프에 의해 풀렸다. 『bei, bei, bei』, 즉 『때려, 때려, 때려』였다. 매에는 장사가 없는 법이다.
중국 문제에 정통한 저널리스트 해리슨 솔즈베리는 모택동 홍위병의 잔학성을 가리켜 『히틀러의 나치 친위대도, 아르헨티나의 파시스트도, 스탈린의 비밀경찰도 모택동의 홍위병에게는 발밑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독재자들은 자신의 지지기반으로 청소년들을 종종 동원했다. 히틀러의 유겐트도 홍위병과 마찬가지로 지도자를 숭배하고 그가 바라는 대로 무엇이든 했다. 그러나 그들은 유태인이나 일반인들을 폭행하고 공포 분위기를 만들었지만, 살인은 하지 않았다.

한편 낡은 것을 없애라는 모택동의 지시에 따라, 문화재들은 파괴되고 책은 불태워졌다. 심지어 중국 고전극인 경극의 가면과 의상도 불태워지고 배우들도 형용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 얼마나 많은 인류유산이 문화혁명 중에 파괴됐는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다.

시간이 감에 따라 모택동조차도 홍위병을 통제할 수 없는 사태가 초래됐다. 국가주석이 백주에 붙잡히는 판에 국가기관이 무사할 리 없었다. 홍위병들은 중국 외교부를 점령 폭파했다. 그들은 외교문서를 철저히 파괴했으며 소련, 영국 등 외국 대사관에 침입해 방화했다. 외교부장 진의는 자아비판을 해야 했으며 고문을 당해 결국 죽었다. 외교부를 점거한 그들은 해외의 중국 대사관들이 혁명을 선전하고 지역 공산주의를 선동하는 역할을 하도록 지시했다. 그로 인해 중국대사들은 대부분 소환됐고 몇몇 국가들은 중국과 단교했다. 대외 무역은 급격히 감소했다. 중국의 대외정책은 다른 부문들과 마찬가지로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다.

모택동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인민해방군을 동원했다. 그리고 68년 7월 홍위병을 해산시키고 1000만 홍위병을 모두 농촌으로 하방(下放)시켰다. 홍위병 세대는 지금도 중국의 골칫거리다. 오십줄의 그들은 한창 공부할 나이에 농촌에서 똥거름을 치며 지냈다. 홍위병이 제거된 이후에도 76년 9월 모택동이 죽을 때까지 문화혁명의 광기는 계속됐다.

약 1억의 중국인이 문화혁명 때에 모진 고초를 당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는 대약진 운동과 마찬가지로 모른다. 모택동으로서는 국가를 공포정치하에 둠으로써 반대세력을 압살하고, 절대권력을 확보한다는 목표만 달성된다면 몇백만, 몇천만의 무고한 민중이 죽어도 문제되지 않았다.

모택동은 현대의 진시황이었다. 그는 대부분의 날들을 커다란 침대 위에서 중국 고전들을 읽거나 10대 소녀들과 섹스를 하면서 살았다. 임표의 불발 쿠테타 발기문에는 모택동을 가리켜 『인민이 부여한 신임과 지위를 남용해 마침내 현대의 진시황이 됐다. 마르크스―레닌주의자도 아니고 공산주의의 허울을 빌려 진시황의 법을 집행하는 중국사상 최대의 폭군』이라고 했다. 모택동 연구의 권위자 런던대의 스튜어트 슈람은 모택동을 다음과 같이 평한다.

『모택동은 영원한 반역자이며, 신의 법이든 사람의 법이든 자연법이든 마르크스주의 법이든 얽매이는 것을 거부하면서 인민을 30년간에 걸쳐 하나의 비전 추구로 이끌었다. 그 비전은 처음에는 웅대했지만, 점차 망상이 되어 드디어 악몽이 되었다. 용두사미이며 무참한 결말이다』

모택동이 초래한 상처 투성이 중국을 회복시킨 것은 등소평이었다. 그는 참으로 오뚝이 같은 정치인으로 문화혁명의 와중에도 끈질기게 살아남아 권력을 잡았다. 『검정 고양이든 하얀 고양이든 쥐를 잘 잡는 고양이가 좋은 고양이다』라는 그의 유명한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에 따라 시장원리와 자본주의 제도를 도입하여 모택동 때문에 초토가 되고 뒤죽박죽이 된 중국을 되살렸다. 무엇보다도 인민들을 배불리 먹을 수 있게 했다. 그야말로 중국 역사에서 보는 진정한 영웅인 셈이다.

사회주의는 대안 아니다

21세기를 향한 우리의 책략을 모색하는 글에 필자가 왜 장황하게 모택동의 사회주의 혁명을 다루었는지 의문이 들 것이다. 그것은 사회주의의 길이 혹시 21세기 우리의 선택이 돼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지 않을까 해서다. 중국의 비극을 모택동 개인의 성격 탓으로 돌릴 수도 있지만, 사회주의를 택한 나라들에서 비극은 보편적 현상이 아닌가 생각한다. 소련의 비극은 스탈린 개인의 문제이고, 캄보디아의 비극은 폴 포트의 개인 문제만은 아니다.
공산주의 사회주의는 사실 비인간적인 자본주의의 「안티 테제」로서 휴머니즘의 발로에서 비롯된 것으로 세계의 수많은 이들을 매료시킨 사상이다. 20세기는 흔히 공산주의의 광기가 지배한 시대라고 한다. 인류역사상 공산주의만큼 불과 한세기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내에 각광받아 세계의 절반 이상을 지배하는 동시에 엄청난 희생을 강요했고, 마침내 열병처럼 극적으로 사라진 사상은 없었다. 우리도 그 열병으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엄청난 희생과 고통을 겪었다.

사회주의는 왜 단명했는가? 그것은 사회주의의 출발이 휴머니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서 인간성을 저버렸기 때문이다. 비인간적이던 자본주의는 인권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법과 제도를 통해 이를 보장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진화된 반면, 인간적이어야 할 사회주의는 공포와 테러를 통해 퇴화해버렸다. 사회주의 북한에서도 200만의 동포가 기아로 죽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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