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예술가도 감히 인정하거나 혹은 생각할 수 없었던,’예술은 사기’ 라는 유명한
명제를 남긴 우리시대의 천재 작가가 2006년 1월 29일 우리 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그를 위한 마지막 퍼포먼스의 잘려진 넥타이들과 함께
그가 마지막까지 가보고 싶어했던 한국과 그의 예술 인생에 관련되었던 미국, 독일 등의 나라로 나뉘어 예치 된다고 한다.
위대한 예술가의 장례식은 어떻게 다를까 하는 기대에 가득 차 있었던 나에게 그의 장례식은
하나의 축제처럼 다가왔다. 이날 장례식엔 약400여 명이 조문객이 참석했는데, 그의 평생의 예술 협력가였던 구겐하임의 수석 큐레이터 존 한할트,
센트럴파트의 ‘게이트’ 설치미술로 유명한 환경작가 크리스토, 장 클로드 부부, 독일 브레멘 미술관의 볼프 헤르첸고라트 관장, 오노 요코, 비디오
아티스트 빌 비올라, 스미소니언 박물관 ‘베스티 부룬’ 관장, 경기도 문화센터의 송태호 관장까지 예술계에 종사하는 많은 유명한 사람들의 그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담긴 조사(弔詞)들은 그를 추모하는 언어의 축제였고, 그리고 마지막 순서로 그의 조카 켄 하쿠타가 나와 백악관에 초대되어
한창 르위스키 스캔들로 심기가 불편하던 빌 클린턴 대통령 앞에서 속옷 없이 바지가 벗겨진 이야기가 다분히 ‘의도적’이였음을 시사하면서부터는 그를
보내는 안타까움에 조용했던 장례식장의 분위기가 순간 웃음바다로 변했다. 그리고 마지막 순서이자 장례식의 하이라이트는, 그의 조카가
1963년 그가 쾰른의 마리 바우어마이스터의 아틀리에 퍼포먼스 <피아노를 위한 습작(Étude for Pianoforte)>에서
백남준이 그의 예술적 아버지로 여기는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잘랐던 것처럼, 모든 넥타이를 메고 온 하객들에게 넥타이를 자를 것을 요구한
것이다.
순간 당황했지만 사람들은 곧 거장의 마지막 길에 기꺼이 자신의 넥타이를 바쳤고, 마침내 그의
장례식에서는 손님도 그의 장례식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 그가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잘라 처음 예술가와 관객이 하나로 소통되는 순간을 만들었던
것처럼, 그의 장례식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넥타이를 자르면서 그에 대한 존경을 표시했고 그리고 한참 웃을 수 있었다. 넥타이 퍼포먼스로 마감된
그의 장례식, 마침내 그의 죽음도 완벽하게 마감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쉬울 수는 없는 예술가의 삶 속에, 장례식조차도 예술로서 완성된
그의 삶, 나는 감히 그가 행복한 삶이었다고 단정짓고 싶다.
백남준은 1932년 혼란했던 한국에서 태어났다. 다행히도 매우 부유했던 그는 재능이
있었던 피아노를 어려서부터 배울 수 있었고, 한국전쟁을 피해 일본으로 가서 동경대에서 미술사를, 독일에서 음악을 공부했다. 그는 진정으로 예술을
사랑했던 예술가이자, 시대를 꿰뚫어 볼 수 있었던 철학자였다.
지금은 과학이 없는 예술을 생각할 수도 없을 만큼 과학과 예술은 밀접한 관계를 이루고
있지만, 1960년 대 당시 사람들은 과학과 예술의 결합을 쉽게 연관 짓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백남준은 과학이 예술을 그리고 우리 생활을 윤택하게 할 것임을 예견하고 그것을 텔레비전이라는
매체를 통해 자신의 작품 속에 투영시킴으로써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기리 남게 된 것이다. 또한 사람들이 과학의 발전에
있어서 두려움과 기대를 동시에 가지고 있던 시기에 그는 과감히 기술이 인간을 지배하고 망칠 것이라는 조지 오웰의 ‘1984년’을 풍자한 기술이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해 줄 것이라는 '굿모닝 미스터 오웰 (Good Morning, Mr.Orwell)'을 통해 그의 천재성을 다시 한번
증명시켰다.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인공위성을 통해 전세계에 생중계된 작품으로 그는 진정으로 세계를 아우르는 작품세계를 펼쳐 보인
것이다.
뮤직 비디오가 없는 오늘날의 삶을 상상할 수가 없듯이, 현대 사회의 영상 미디어 매체의 발달과 함께
백남준의 작업은 더욱더 빛을 발하고 있다. 엘리자베스 브룬 (美 스미소니언 관장) 관장은 어쩌면 "르네상스에 미켈란젤로를 기억하듯 20,
21세기에는 백남준을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라는 평가를 내렸다. 백남준은 수 천 년을 이어온 전통적인 작업방식-종이를 기본으로 한 평면작업이나,
조각을 기본으로 한 입체작업-에서 완전히 벗어나, 예술을 시간, 공간, 움직임, 그리고 음악을 함께 어우를 수 있는 복합 분야로서 새롭게 재
창조시킨 천재이기 때문이다. 완전히 다른 예술 패러다임을 제시한 백남준이 세계적인 작가로서 추앙 받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다.
올해 경기도 용인에서 착공한다는 ‘백남준 뮤지엄-백남준의 오래 사는 집’에서 다시
한번 백남준 작가를 만날 생각을 하니 그의 작품들을 통해 그의 에너지와 창조성이 우리 젊은 예술가들에게 오래도록 전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세계적인 작가로 일컬어진 백남준과 동시대를 살았고, 그가 오래 사는 집을 가지게 된 행운을 가진 우리가 그의 업적을
기리는데 동참하고 즐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백남준의 최후의 전시회가 된 뉴욕의 한국문화원에서 개최중인 ‘MOVING
TIME’ 전시회에 대한 짧은 소개로 이번 기사를 마칠까 한다.
이 전시회는 젊은 30여명의 세계 여러 나라의 비디오 아티스트들이 함께 모여 백남준의 예술작품을
기린다는 의미로 개최되었다고 한다. 전시는 30명의 아티스트들을 10명씩 3 그룹으로 나뉘어 2006년 1월 20일부터 2006년 2월
24일까지 전시되고 있는데, 우연찮게도 백남준의 마지막 전시회는 그를 닮기 원하는 30인의 젊은 비디오 아티스트들과의 공연으로 마무리
되었다.
이것은 아마도 그의 명성이 그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젊은 예술가들을 통해
꽃피울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 그가 휘트니 미술관 앞에서 로봇이 부서질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메디슨
애비뉴를 건너게 만들어 과학의 예기되지 않은 사고에 미리 대처해야 할 법을 가르쳐 준 것처럼, 그의 마지막 전시회 조차도 그가 만들어 낸 환상의
조합 같다는 생각을 뒤로 하고 백남준에 대한 나의 추모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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