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경인TV방송

[스크랩] [뉴스메이커][특집]“우리의 희망은 꺼지지 않는다”

[특집]“우리의 희망은 꺼지지 않는다”
[뉴스메이커 2005-10-14 10:33]


경인방송 전 조합원 양규철씨… 방송 복귀할 날 손꼽아 기다려

 

인천직할시 주안공단에 위치한 한 프레스 공장. 바깥은 완연한 가을날씨이지만 공장 안은 170도가 넘는 여러 대의 프레스 기계가 뿜어내는 열기로 한증막이 따로 없다. 이 공장 한편에서 작업복이 땀으로 흠뻑 젖은 채 일에 몰두하고 있는 30대 남자는 경인방송 희망조합원 양규철씨(36)다. 1년 전만 해도 경인방송에서 보도영상편집기자로 일했던 사람이다.

 

“창준위 창립을 위해 밤낮으로 뛰던 5월이었어요. 두 아이 키우며 살림만 하던 아내가 돈을 벌겠다고 하더군요. 저도 지쳐 있는 상황이라 내심 고맙게만 여겼죠. 그런데 아내가 이틀을 나가 일하더니 밤새 끙끙 앓더라고요. 특별한 기술이 없다보니 사무실 청소부로 취업했던 거였어요. 이게 아닌데 싶었죠. 내가 이 사람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장담하며 데려왔는데… 함께 싸우며 버텨온 희망조합 동료들에겐 미안했지만 이튿날로 돈벌이에 나섰어요.”

 

만수동의 3000만 원짜리 전셋집에서 네 식구가 사는 양씨 가족은 당장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궁핍했다. 퇴직금은커녕 회사대출금 상환을 위해 오히려 은행에서 600만 원을 대출받아야 했던 터라 생활은 쪼들릴 대로 쪼들렸다. 올 초 경인방송 법인은 전세비를 위해 회사를 통해 대출을 받은 직원들에게 ‘대출금을 상환해야 다른 직원들의 퇴직금을 지불할 수 있다’고 통보했다고 한다. 양씨는 “저로 인해 다른 동료들이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불안감이 들어 서둘러 은행 대출을 받았다”고 말했다.

 

생활고 때문에 야간근무도 자청

 

막상 막노동이라도 해서 돈을 벌겠다고 작심했지만 취업이 쉽지 않았다.

 

“처음에 인천 남동공단에 이력서를 들고 찾아가 뭐든지 하겠다고 했는데 여섯 군데에서 모두 거절당했어요. 아마도 경인방송 경력이 마이너스가 됐던 거 같아요. 이런 곳에서 일할 사람이 아니라고 판단했나봐요. 그러다가 지금 일하고 있는 공장의 사장님을 만나게 된 거예요. 정말 열심히 하겠다고 간청했죠. 일당 6만 원짜리 아르바이트로 4개월간 일해왔는데 실제로 쉰 날은 단 사흘뿐이었어요.”

 

공장에서 일한 지 열흘 만에 그는 야간근무를 자청했다. 저녁 8시부터 다음날 아침 7시 30분까지 계속되는 야간근무는 주로 파키스탄, 중국 등 동남아시아 노동자들이 한다. 양씨가 야간근무를 자원한 것은 식대 3000원을 포함해 일당 1만5000원을 더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봐야 한 달 200만 원이 채 안 되는 돈이다. 양씨는 이 일을 하며 체중이 무려 20㎏나 빠졌다.

 

본업을 살려 영상편집회사 등에 취업할 수도 있으나 그는 “끝을 봐야 한다”는 신념으로 버티고 있다고 말했다.

 

“고생한 사람은 저뿐만 아니죠. 그동안 조합원 중에 신용불량자도 속출했어요. 화병 때문인지 부모님 상을 당한 동료도 유난히 많아요. 하지만 200여 조합원들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신념으로 자기 밥그릇까지 포기해가며 싸워왔는데 이 싸움의 끝을 내야 하지 않겠어요? 우리가 희망하던 건강한 방송을 꼭 보고 싶어요.”

 

이는 힘든 육체노동에 밤낮까지 바뀐 터라 육체적 피로가 극심한 가운데에도 양씨가 총회 등 창준위가 하는 행사엔 빠짐없이 참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양씨를 비롯한 경인방송 전노조원들은 지난해 11월 9일부터 지배주주의 주식출연으로 공익재단을 설립하는 방식으로 소유구조를 개선할 것과 사장 추천 공모제 등 ‘공익적 민영방송’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다. 그러다가 12월 12일 경인방송 경영진이 직장폐쇄를 결정함에 따라 회사 밖으로 쫓겨났다.

 

“이후 경영진으로부터 복귀명령이 있었지만 조합원 중 그들의 요구에 응한 사람은 40여명에 불과했죠. 저한테도 각종 회유전화가 왔지만 흔들리지 않았어요. 정의는 승리한다고 믿었거든요.”

 

그의 아내는 행여 그가 프레스 기계를 다루다 다칠까봐 늘 전전긍긍이다. 실제 지난 4개월간 그의 팔뚝에는 수많은 데인 상처자국이 생겼다.

 

“한번은 휴대전화를 놓고 다른 자리에서 일을 하고 돌아오니 아내가 여러 차례 전화를 걸었더라고요. 무슨 일인가 싶어 전화를 했더니 제 목소리를 듣자마자 엉엉 우는 거예요. 제가 전화를 받지 않자 무슨 큰 사고라도 난 줄 알았다는 거예요.” 그래도 그가 지금까지 버텨온 것은 누구보다 가족의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게 양씨의 얘기다.

 

“아이들에게 건강한 민방 주고파”

 

“지난 5월 21일 오후 6시에 인천대공원에서 발기인대회를 했어요. 도착하기 전까진 내심 조마조마했는데 막상 가서 보니 많은 분들이 모여 계시더라고요. 가슴이 벅찼어요. 가족들도 경인지역 새방송이 생기긴 생기나보다며 함께 기뻐했죠. 지난 겨울 동료들과 함께 수원, 인천, 부천, 부평, 강화 등에 흩어져 13만 명의 서명을 받아내고 촛불모임행사를 하며 울고 웃던 시간들이 결코 헛된 게 아니었구나 하는 감회도 들었죠.”

 

그는 하루 빨리 방송에 복귀할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고 했다. 방송을 하던 그 시절을 돌아보는 그의 마르고 검은 얼굴엔 어느새 미소가 번졌다.


“갑자기 대형 사고가 터지면 기자들이 서둘러 취재해온 오디오와 비디오 화면을 가지고 순식간에 1분 30초짜리로 편집을 해야 하죠. 그땐 방송테이프가 편집실과 뉴스부조 사이를 날아다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시간이 없으니까요. 뉴스할 때 앵커멘트 나가면서 테이프가 들어갈 때도 있는 등 아주 급박한 상황이죠. 그래도 그때가 그리워요. 대선 개표방송 등 큰 이슈가 있는 생방송을 밤새도록 한 이튿날 선·후배들과 조촐하게 소주 한잔을 기울이던 시간도 행복했죠. 전 방송인이니까요.”

 

양씨의 딸의 이름은 ‘민영’이다. 그가 아이들과 함께 어느날 경인방송 사옥 앞을 지날 때였다. 딸아이는 양씨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아빠. 나 주려고 건강한 민영방송 만드는 거야? 정말 좋은 방송 만들어서 다시 올거야?”라고. 양씨는 “두 아이에게만은 궁극적으로 아빠가 옳은 길을 걸어왔다는 것을 확인하게 해주고 싶다”며 “반드시 인천·경기 지역민들에게 사랑받는 공익적 방송으로 거듭 태어날 수 있도록 미약한 힘이나마 최선을 다하겠다”며 밝게 웃었다.

 

<박주연 기자 jypark@kyunghyang.com>

출처 : 희망의 새 방송을 준비하는 사람들
글쓴이 : 오늘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