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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다시보는 京畿山河 - 안성] 만세고개 '救國의 온기' 아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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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성에서 일어났던 구국의 항쟁을 대변하고 있는 안성 3·1운동기념관의 벽
화는 지금도 민족의 분노와 일제 식민지배의 폭력성을 생생히 들려주고 있
다.



21세기 문화의 거리 뒷골목을 ‘세계화’의 유령이 배회하고 있다. 일제에
의한 자원 약탈의 이름 ‘태백산맥’의 팍팍한 역사의 굽이를 돌아, 누천
년 우리네 삶의 젖줄 압록강·두만강·한강·낙동강을 나누는 늠름한 ‘백
두대간’을 되살리며 다시 한 세기를 꺾어지르고 있는 창조의 시대인데 말
이다. 견우·직녀·옹기쟁이·유기쟁이·갖바치 어우러져 수원장·안성장·
누원점·송파장 키워내고, 상쇠·버꾸·무동·어름사니·덧뵈기 얼크러져
난장 벌이며, 반계·성호·다산 대를 이어 경세치용과 실사구시 숨 고르던
한강·임진강·안성천·한남정맥·한북정맥·경기만이 모두 우리 경기 산하
인데 말이다.

그래서 다시 지금 여기에 선다. 한반도의 등뼈 백두대간, 그 한 가운데 속
리산에서 가지 하나 벌려 한남금북정맥, 그 맥이 기호지방을 가로질러 다
시 작은 두 가지로 나뉘어지는 곳 덕성산, 여기서 칠현산 쪽으로가 경기남
부의 등뼈를 이루는 한남정맥이다. 그 초입, 지난 세기 내내 제국주의 약탈
적 성장의 접경과 주변이어서 더 컸던 시련만큼 구국의 횃불이 드높았고 그
러면서도 모두를 대승적으로 끌어안으며 창조적 균형을 향한 더 큰 평안함
을 추구해 온 땅 안성, 거기에서 이제 문화의 세기 경기 산하를 다시 보는
첫 발을 내딛는다.

가팔랐던 근대로의 길목에서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외세에 의해 강요된 개
항으로 식민지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했을 때 안성은 그동안 고이 길러오던
근대로의 자주 역량이 더 강했던 만큼 받는 상처 또한 더 아릴 수밖에 없었
을 것이다.

지금은 평택 땅에 속해 있지만, 안성천의 소사벌을 지키고 있는 대동법(大
同法) 시행 기념비는 신라·고려·조선 왕조로 이어져온 봉건적 조세제도
의 금납화와 상품화폐경제 발전을 향해 가던 당시의 경기·호서지역을 중심
으로 한 보편적 정세를 알리는 이정표로 우뚝 서 나그네의 눈길을 끈다. 부
패한 봉건관료를 농락하며 민중의 가슴을 끌어안던 칠현산 칠장사의 임꺽정
과 그의 스승 갖바치, 서운산 청룡사의 장길산, 바우덕이와 남사당패, 그리
고 그 숱한 미륵들…. 그들은 로빈 후드, 와트 타일러의 난, 집시, 마르틴
루터에 익숙한 우리의 귀를 부끄럽게 한다. 유기다, 꽃신이다, 농기구다 하
여 설이 많은 만큼 더 안성맞춤인 안성 장시야말로 숨막히는 양반 신분 질
서를 무너뜨리고 허생이 돈을 벌어들이던 ‘자유를 만드는 도시’의 신선
한 공기 생산공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외세에 의해 강요된 국제무역항으로서의 인천의 개항은 조선봉건왕조 내부
에서 자라나오던 상품화폐경제를 바탕으로 한 자립적 국민경제 구축으로의
지향을 왜곡시키기 시작했다. 이때까지 지방 장시와 포구를 중심으로 국지
적 시장권에서 전국적 시장권으로 성장해가던 자주적 흐름이 거친 세계 시
장의 격류에 무차별하게 알몸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안성천을 끼고 한남정맥의 초입에 서서 삼남으로의 교통 요충을 이루어 자
립적 국민경제의 한 거점을 형성해가고 있던 안성장은 위상의 변화와 더불
어 상대적 위축을 피할 수 없었다. 거기다 경인·경부선의 철도 개통으로
기존의 수운 중심 교통체계가 육로 교통체계로 혁명적으로 재편되면서, 그
추세는 가속화되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했던가? 전쟁과 교류가 빈번
한 접경지대여서 유달리 강한 배타성을 가지면서도 그 성과를 무섭도록 자
기 내화하는 현실성과 유연성을 보여주는, 이 상충되는 기질의 배후가 궁금
해진다. 반식민지와 식민지의 길목에서 갑신정변으로, 갑오농민전쟁으로,
의병전쟁으로 지사적 혁명의 분위기가 전국을 휩쓸 때, 그 상처가 남다르
지 않았던 안성민은 극기적인 구도자의 자세를 보여주고 있었으니 말이다.

양평 화서 이항로의 사대주의적 명분과 오랑캐에 대한 결사항전, 안성 석
농 오진영의 자주 의식과 구도적 자세, 이 차이는 어디서 온 것일까? 양촌
권근이 극적루기(克敵樓記)에서 ‘극적’과 ‘극기(克己)’를 연결시키며
홍건적에 대해 보여준 태도와도 일맥상통한다. 이 점은 이 시기 외래종교
인 천주교 콩베르 신부를 받아들이면서 근대 민주주의의 도장 안법학교를
열고 포도농장을 일구어내며 뒤에 개발독재 시대 반독재 투쟁의 한 축을 이
루었던 가톨릭농민회로 이어지는 과정에서도 비슷하게 발견된다. 낙동강 상
류의 교류와 전략 요충지이자 퇴계 성리학의 근거지인 안동에서 천주교가
수용되고 정착해 가는 양상과 비교되어 흥미롭기도 하다.

식민지에 대한 일제의 약탈적 성장정책이 노골화되자 이에 대한 전민족적
반격이 시작되고, 역사는 이제 창조적 균형을 향한 새로운 시대로의 진입
을 예고하게 된다. 천덕산 성은고개로 상징되는 구국의 횃불은 그렇게 타오
르기 시작했다. 학생·농민·상인·기생·악사를 비롯한 전체 민중들이 학
교에서, 들과 산에서, 마을에서, 거리에서, 시장에서 들고 일어나 주재소
와 우편소를 불태우며 식민지배의 폭력성을 만천하에 폭로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파괴를 넘어서는 새로운 창조의 선언이기도 했다.

이 시기 ‘정가(正歌)구락부’는 우리 전통 음악대를 이끌고 민족적 정서
를 고취하는 한편, 예술적 창의성을 한껏 드높였다. 그 결과 생존을 위해
장시를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었던 바우덕이의 후예 남사당패도 일제가 식민
지 농업수탈정책의 선전용이나 기방의 눈요깃거리로 전락시켜 가는 괴멸적
상황 속에서도 예술적 기량을 다듬으며 이후 민족문화의 자양분을 제공하
는 소중한 자산으로 살아남게된 게 아닌가 싶다.

전설적 무용가 최승희의 남편으로 프롤레타리아 리얼리즘론을 주도한 안
막, 해와 하늘로 상징되는 자연 감각으로 민족의 현실을 체화한 시인 박두
진, 고독한 시의 나그네 조병화 등도 만세고개 횃불의 온기를 받아 발화한
것이 아닐까? 정병호·박범훈·노동은·임헌영 등이 활약하는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이 안성에 자리잡은 것이 참으로 우연이 아닌 것 같아 가슴 찡하기
도 하다.

일제에 항거한 원곡·양성의 3·1운동이 안성인 기질의 한 측면인 배타성
을 혁명운동으로 승화시킨 것이라면, 그 기질의 다른 한 측면인 현실성과
유연성을 발화시킨 사례로 우리는 안성공립농업학교 설립을 빠뜨릴 수 없
다.

설립자 박필병은 비록 조선총독부 도의원으로 일제의 조선 경영에 참여하였
지만,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으로 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확산되어 가던 상황
에서 10만원이란 거금을 쾌척하여 자기 고장 안성 산업의 근본을 이루어
온 농축산업 관련 인재 양성의 기틀을 마련해주었다.

현재 안성공단의 주요 업종도 화학·의약·식품 등 환경친화적 속성을 가지
고 있으므로, 경기도 유일의 국립대학인 한경대학으로 재정비한 이 학교에
서 첨단 생명공학을 특화하여 창조적 균형 체제를 지향하는 민족경제의 일
익을 담당하도록 배치하면 어떨까 하는 꿈을 꾸어본다.

해방과 분단, 6·25를 거치면서 북위 37도선에 연한 안성은 또 한번 세계
냉전체제의 접경 지역으로서 막대한 인명과 재산의 피해를 보았다. 그러면
서도 4·19 이후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에서 부정부패의 상징이었던 자유당
출신 후보 오재영을 상경투쟁으로까지 끌고 가면서 낙선시킨 민족적 저력
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어진 개발독재 과정에서 경부·중부 양 고속도로가 안성의 양 날
개를 가로지르게 되면서, 경부선 중심으로 운영되던 천안·안성 간 경기선
이 폐쇄되고, 또 다른 중앙집중적 약탈적 성장의 주변지로 재편되어 허둥지
둥 떠밀려왔다. 천편일률적인 새마을 운동, 무분별한 개방 농정으로 농촌
은 신음하고, 축산농가의 폐수로 안성천은 오염되어 왔다. 이런 가운데 가
톨릭 농민회에 이어 안성천 살리기 시민모임이 결성되어 창조적 균형도시
안성 건설에 일조하며 또 하나의 희망을 심어가고 있다.

민족 예술, 첨단 생명공학, 시민 환경운동이 어우러지는 창조 도시 안성.
가파른 근현대사의 언덕을 넘어 만세고개에서 지핀 구국의 횃불이 이제 자
주적 통일민족국가 건설의 완수를 향해 새로운 불씨 하나로 모여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활활 타오를 것이다. <윤한택 (기전문화재연구원)>
2002-04-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