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직도 옛날의
번창함을 잃지 않고 있는 안성장의 모습. 5일마다 2·7장이 서면 온갖 과일·야채·생선과 각종 생활물품들이 거래된다.
안성시민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필자에게는 ‘안성장’과 ‘사당 패’ 그리고
‘돌미륵’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역사시대의 안성 이미지다. 필자가 안성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도 여기에 있다. 서로 밀접한 연관
속 에 있던 이 세 가지를 통해 안성에 살았던 과거 민중들의 삶을 되짚어보고 자 한다.
역사속에서 안성장에 대한 기록을
찾다보면 재미있는 대목이 발견된다. 영 조 23년(1747) 12월에 경기어사 이규채가 임금에게 경기민들의 실상을 아뢰 는 중에
안성에 대해 언급한 내용인데 다음과 같다.
“안성 장시는 규모가 서울 시전보다 커서 물화가 모여들고 도적 떼들도 모 여듭니다.
안성을 도적의 소굴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本郡場 市 大於都下市肆 物貨所聚 盜所集 安城之稱賊藪 蓋以此也.)”(영조실록
권 66)
영조 4년(1728)에 일어났던 이인좌의 반란 때 안성은 최대의 격전지였기 때 문에 임금 또한 아픈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번창했던 안 성장에 대해서는 기원 유한지(兪漢芝) 선생을 만나러 안성에 들렀던 연암 박지원 선생도
한 마디 한 적이 있다. 참고로 기계(杞溪) 유씨(兪氏)는 안 성의 유력한 반성(班姓)의 하나다.
장터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므로 임금이 내리는 윤음(綸音)이나 성지 (聖旨)를 널리 알리는 데 시장이라는 공간이 이용된다. 역모를 꾀하다가 잡 힌 역적들의
목을 베어 시장 바닥에서 매달았던 것도 장터가 가지고 있는 이러한 특성을 고려한 것이다.
시장이 전통시대에 일어났던 각종
민란의 배후지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마찬 가지 원리에서다. 숙종 때인 17세기말부터 안성을 포함하여 진위·양성·죽 산·천안·직산
일대는 농민군이 자주 결집되던 지역이었다. 안성은 삼남으 로 통하는 길목이고 장인들이 많이 모여 사는 수공업도시여서 민란 때마다
안성장의 비중은 더욱 컸다. 뿐만 아니라 농민군은 안성을 비롯한 부근 고 을에서 한 달에 여섯 번 열리는 장시를 이용하여 연계를
맺어왔다.
안성으로 사람과 물자를 모으고 안성장을 번창하게 했던 배경에는 사통팔달 (四通八達)하던 육로 못지 않게 중요한
역할을 한 안성천이 있다. 물론 현 재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옛날에는 아산만과 평택, 그리고 안성이 안성천을 따라 뱃길로
연결되어 있었다. 수로를 통한 강상교역의 중요성은 기차와 자동차가 생기기 전까지는 거의 절대적인 것이다.
사당패의 성격을
핵심적으로 표현하는 단어는 ‘유랑(流浪)’, 즉 정착생활 을 못하고 떠돌아다닌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기록에는 ‘거사당(居士黨)’
‘거사배(居士輩)’로 나오는 이들은 그 시대에서 가장 열악한 삶을 살았 던 민중들이다. 농경사회의 특징은 거주의 안정성에 있고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높은 농업생산력이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자작은 물론 소작할 땅조 차 주어지지 않았으므로 그러한 혜택을 받지
못하고 떠돌지 않을 수 없었 던 것이다.
떠도는 사당패들에게 던져진 것은 오로지 의심의 눈초리였다. 실록의 기사 중에는
거사당이 규모가 작으면 명화적(明火賊), 즉 도적이지만 크면 역모 (逆謀)를 꾸민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정조실록 권21, 정조
10년) 이들이 공연을 하기 위해 찾아다니는 곳은 특별히 정해져 있지 않았다. 그 들의 공연을 보기 위해 일부러 찾아오는 관객 또한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러 므로 안성장처럼 사람들로 북적대는 장터는 서로에게 좋은 장소가 된다.
안성남사당 기능보유자인
김기복(73)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안성 남사당들은 멀리까지 돌아다니지는 않았다. 안성시장이 먹여 살릴 정도로 컸었기
때문이다.”
마을에 들어가 공연할 때 교섭하는 남사당 단원을 ‘식화주’라고 한다. 식 화주는 마을 이장 등 책임자에게
굽실거리고 간사하게 굴어 공연허락을 얻 어낸다. 허락이 떨어지면 같이 들어간 전령이 소고(小鼓)로 “따당 따 당…” 들어오라는 신호를
보낸다. 먼저 마을 유지 마당에서 한바탕 놀아 신명을 보여주면 이집 저집에서 마당을 밟아달라고 한다. 마을에서 하룻밤 을 자게 되면
한바탕 크게 공연을 열어 수입을 더 올릴 수 있다. 공연보수 로 받은 쌀은 마부를 붙인 마차로 안성읍 석정동 본부에 있는
영좌(領座)에 게 보낸다. 본부와 멀리 떨어져 있어 쌀을 보낼 수 없을 때는 시장에 내다 팔아 현금으로 마련하는데, 시장 장사꾼들은
고사쌀이 재수가 있다고 하여 잘 사갔다고 한다.
그러나 겨울이 되면 공연할 곳이 없으므로 이들에게도 모여 살 수 있는
장 소가 필요하다. 안성 남쪽 서운산에 있는 청룡사(靑龍寺) 부근이 사당패들 의 집단거주지가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사방
각지에 흩어져 있던 동 지들이 어느 한 곳으로 모여야 할텐데 이곳은 지금도 3개 도, 즉 경기도, 충청남도, 그리고 충청북도가
맞닿은 곳이기 때문이다. ‘세종실록지리지’ 를 인용하면 서운산에서 동쪽으로 13리를 가면 충청도 죽산(竹山)이 나오 고, 서쪽으로
양성(陽城)까지 15리, 남쪽으로 충청도 직산(稷山)까지 24 리, 북쪽으로 양지(陽智)까지 12리가 된다.
그러면 세 번째
주제, 즉 돌미륵과 앞서의 두 주제와는 어떤 관계에 있을 까. 다른 지역에 비하면 안성에는 미륵이 많은 편이다. 그 미륵들은
안성시 내 아양동의 남녀 미륵과 양성면 대농리, 그리고 교통중심지였던 죽산현 관 내에 위치하고 있다. 삼죽면 기솔리에 있는 미륵사의
쌍미륵과 그 위 국사 봉의 소위 궁예미륵, 그리고 죽산현 관아터의 동편인 죽산면 매산리의 태평 미륵이 그것이다. 태평미륵은 원래
대평미륵으로 불렸다고 한다. 규모로나 교통의 요지로나 그 밑의 광혜원과 맞먹는 대평원(大平院)에 있던 미륵이 란
뜻이다.
미륵이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곳에 서 있다면 그것은 곧 미륵이 행인들의 신앙대상이었다는 증거다. 그렇다면 그곳을
자주 왕래하던 자들은 누구였을 까. 이들을 조선사회라는 배경에서 찾는다면 과거시험을 보러 가는 양반 들, 행상인과 짐꾼들, 사당패들,
그리고 그 자리에 미륵과 미륵신앙을 심었 을 풍수잡술가들이 떠오른다. 참고로 칠장사의 나한(羅漢)은 특히 과거시험 객들로부터 큰
인기가 있었으며 그 인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대평원은 원래 죽산현(竹山縣)의 분행역(分行驛)에 딸린 원이다. 미륵 앞 을
지나가는 구(舊) 도로에 이 분행역이 있어 위로는 용인·백암·양지·이 천·여주로, 아래로는 장호원과 광혜원으로 가는 중심 길목 역할을
하였 다. 이 중에서 용인의 김령역에서 분행역을 거쳐 광혜원의 무극역으로 가 는 길이 조선시기의 6대로(大路)로서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동래로(東萊 路)의 하나다.
그러므로 미륵을 이해하려면 이에 앞서 지금의 안성이 1914년 이전에는 양 성과 죽산
등 세 덩어리로 나뉘어 있던 땅이라는 점과, 특히 안성과 죽산 은 각기 강상로(江上路)와 육로의 중심지로서 서로 경쟁하던 지역이었음을
상기해야 한다. 지형으로 볼 때도 안성은 세 덩어리다. 서해로 나아가는 안 성천의 흐름과는 달리 일죽면과 죽산면, 삼죽면 일부는
오히려 한강 유역권 에 속해 있고, 죽산면 칠장사 밑을 흐르는 칠장천은 금강 유역권에 속한다.
그런데도 안성과 죽산 두 고을은
죽산에 있는 죽주산성을 유지하기 위한 필 요성 때문에 합쳐지기도 하고 이에 반대하는 안성사람들의 상언(上言)으로 나누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강상로와 육로가 서로 상승작용 을 일으켜 안성과 죽산 두 고을에는 끊임없이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되었 다.
영조 임금 때 좌의정 홍치중이 안성과 죽산 사이에 의심스러운 사람들 이 많다고 말한 것도 이러한 맥락이었을 것이다.
안성은
이상과 같은 상업중심지로서의 배경을 토대로 수공업에서도 중심지 로 발전하게 된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유기(鍮器)나 갓신 제조가 그
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품목도 있는데, 그 중에 특기 할 만한 것이 종이공장과
인쇄소다.
19세기에 이르면 우리 문화는 대중화 단계로 들어간다. 대중화의 척도는 질 보다는 양의 증가다. 인쇄 부문에서는
19세기 후반에 개인사업자가 이익을 목적으로 찍어내는 방각본(坊刻本)이 등장하였는데 서울, 전주와 함께 안성 이 대표적인 곳이었다.
안성 보개면 기좌리에는 종이공장이 있었고, 여기 서 나온 종이로 읍내 동문리에서 '춘향전' '홍길동전'과 같은 대중소설들 을
방각본으로 출간하였다.
민중들이 모여들어 민중문화를 꽃피우던 안성은 일제에 들어와 교통체계가 바뀌면서 쇠퇴의 길로 접어든다.
이미 그 이전인 정조 임금 때 새 대로로 지정된 ‘수원로’로 인해 위축된 바 없지 않으나 경부선 철로가 그 수원로 로 깔리게 되면서
안성이 가지고 있던 지리적인 이점들은 그 많던 민중문화 와 함께 점차 사라져간 것이다. <정승모 (지역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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