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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다시보는 경기산하 - 안성] 민중의 꿈 '평화와 평등세상'

by 인천싸나이 2006. 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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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와 충청도를 가르며 금강북쪽 능선을 이루고 있는 금북정맥의 서운
산 석남사에는 벼랑 바위에 돋을새김으로 조성한 마애불이 있다.



백두대간의 속리산에서 갈라져 나온 한남금북정맥이 다시 한남정맥과 금북
정맥으로 갈라지는 덕성산(520m) 어름에 칠장사가 있다. 이 덕성산을 예전
에는 칠현산으로 부른 듯 한남금북정맥과 한남정맥, 금북정맥이 나뉘는 삼
거리를 칠현산이라 하였고, 칠장산에 있는 칠장사도 칠현산 칠장사라 하였
다.

덕성산에서 칠현산(516m)을 거쳐 칠장산(492m)으로 가는 도중에는 중고개라
고 부르는 안부(鞍部·산마루가 움푹 들어간 곳)가 있는데 이 고갯길은 칠
장사에서 안성읍으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오늘날에는 골프장이 들어서 있
고 철조망을 둘러쳐서 여의치 않지만 너른 안성 평야를 굽어보며 탁발하러
가던 스님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벽초 홍명희 선생이 쓴 소설 '임꺽정'에는 칠장사에 있는 갖바치 병해대사
가 임꺽정의 정신적인 지주로 나온다. 소설 속의 의적 임꺽정이 걸었을
길, 아니 적어도 충북 괴산 사람인 작가 벽초 선생이 걸었을 한남정맥은 여
기서 강화도 코 앞의 문수산까지 이어진다.

칠장사는 그 입구부터 범상치 않다. 한 줄로 길게 늘어선 부도들이 있는 산
모퉁이를 돌아들면 경기도에서는 하나 밖에 없는 철당간이 높게 솟아 마디
마디 위용을 뽐낸다.

인목대비가 당쟁의 와중에서 희생된 아들 영창대군과 친정아버지 김제남의
명복을 빌기 위한 원찰로 삼았던 곳도 칠장사다. 그래서인지 대웅전에 오르
는 계단 양 옆 소맷돌에는 하늘에 떠가는 구름 한 조각을 멋지게 새겨 놓았
고 대웅전의 기단에 가로로 긴 줄을 여러 겹 새겨 천상의 세계에나 있을 법
한 격식으로 꾸몄다. 안성 평야를 닮은 듯한 대웅전은 기둥이 짧고 기둥 사
이는 넓어 백제계 건축 양식을 보이고 있다.

늙은 소 힘쓴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老牛用力已多年)
목덜미 쭈그러들고 가죽은 헤져서 졸립기만 하고 (領破皮穿只愛眠)
쟁기질 다 끝나고 봄비 또한 넉넉한데 (●●已休春雨足)
주인은 어찌하여 또 채찍을 든단 말인가. (主人何苦又加鞭)

인목대비가 자신의 심정을 담아 쓴 친필 족자의 내용인데 지금도 칠장사에
보관되어 있다.

고려 문종에게서 혜소국사라는 시호를 받았던 정현(鼎賢·972~1054)의 비석
과 귀부, 이수 등 일습이 원통전 위 언덕에 보관돼 있어 고려시대 번창하였
을 칠장사를 짐작케 한다. 더구나 그는 한남정맥에 할거하던 일곱 도적을
제도하여 현인으로 만들어 칠현산이 되게 하였다고 하니 '임꺽정'의 배경
과 무관치 않을 듯하다.

한남정맥의 칠장산을 지나면 야트막한 야산 줄기로 이어지는데 정맥이라는
이름이 실감날 정도로 능선이 뚜렷하여 양 옆으로는 제법 낭떠러지도 길게
이어진다. 오른쪽은 한강수계로, 왼쪽은 안성천으로 흘러들며 두 계통의 어
느 물길로도 이어질 수 있는 것이 한남정맥이니 분수령이면서 또한 대동맥
인 것이다. 칠현산에서 북상하던 한남정맥은 삼죽면 근처에서 38번 국도에
의해 끊어진다. 정맥만 끊어진 것이 아니고 동물들의 이동로도 끊어진 셈이
어서 더욱 아쉽다. 환경 생태 다리라도 놓아서 정맥의 상징적인 연결과 야
생 동물들이 이동할 수 있는 길을 확보해주면 좋겠다.

삼죽면에서 동쪽으로 가면 죽산이 나오는데 이곳엔 죽주산성이 있고 죽주산
성 아래에 태평리 미륵과 봉업사터가 있는 곳이다.

죽주산성은 신라말 진성여왕 때 이 지역 호족인 기훤(箕萱)이 근거지로 삼
았던 곳이다. 궁예가 몸을 의탁하려고 하였으나 기훤의 냉대로 인해 북원
(원주)의 양길에게로 갔고 양길에게 인정을 받아 세력을 키운 궁예가 다시
죽주를 손아귀에 넣었다.

고려는 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고 난 초기에 강력한 왕권을 과시할 상징이 필
요하였다. 논산의 관촉사 은진미륵이나 죽산의 태평리 미륵은 그래서 공통
분모를 갖게 되었다. 과거 고려 정부의 통일 작전에 방해가 되었거나 적성
국가 본거지에 있는 유민들은 아직 의식의 전환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
이었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태평리 미륵불의 얼굴이 혹시 왕건이나 그
자손의 얼굴이 아닐까 하고 성급한 견해를 조심스레 내비치기도 한다. 어쨌
거나 이 태평리 미륵불의 존재로 인해 안성지방에는 여기저기에 미륵불이
생겨난다. 미륵의 고향이 되어 이상향을 지향하는 것이다.

미륵불은 석가모니 부처의 교화시대가 다 가고 난 다음 이 세상에 출현하기
로 약속되어 있는 미래불이다. 미륵의 시대가 되면 이 세상은 평화와 기쁨
이 넘치고 살기 좋은 유토피아가 전개된다고 한다. 비록 현실은 어렵고 힘
들더라도 미래는 밝으리라는 희망의 세계인 것이다. 그래서 혼란기에 많이
조성되는데 조선 후기에는 부처의 격식마저도 뺀 동네 할아버지나 할머니
모습을 닮기도 한다. 세우는 장소 또한 마을 어귀나 정자나무 옆에 세우기
도 하여 생활 신앙의 한 존재로 자리잡아 간다. 그러면서 현실속에서 이상
향을 구현하거나 앞당기려는 것이다. 이상향은 꿈이 아닌 현실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태평 미륵이 있는 곳은 '태평원'이라는 원이 있던 곳이라고 한다. 인근의
장호원이나 광혜원과도 맞아 떨어지는 옛 교통로였고 지금도 중부고속도로
의 일죽인터체인지가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땅마다 제 역할이 따
로 있는 것인지 각지위주(各地爲主)라는 말이 실감나는 곳이다.

태평 미륵을 고려 초기의 유물이라고 여기는 이유는 논산의 은진미륵과 닮
은 외모 뿐만 아니라 서쪽에 있는 봉업사(奉業寺) 터와의 관련 때문이다.

봉업사는 언제 창건되고 폐사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고려 태조 왕건의 진영
(眞影)을 봉안한 절이라는 기록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온다. 개성의 봉
은사, 논산의 개태사 등과 함께 죽은 왕의 진영을 모시고 위업을 기리며 명
복을 빌었던 진전사원(眞殿寺院)이었던 것이다.

봉업사의 규모는 꽤나 컸던 듯 죽주산성 남문 아래에도 석불과 3층 석탑이
있고, 당당하게 서 있는 당간지주도 옛 영화를 대변하거니와 상승감이 뛰어
난 5층 석탑은 고구려 계통의 건축미마저 느끼게 한다. 백제계 건축의 특성
이 너른 평야를 닮아 있다면, 고구려 계통 건축에서는 산악지대를 닮아서
기둥은 길고 기둥과 기둥 사이는 좁아 상승감을 나타낸 특징이 보인다. 이
봉업사터 5층 석탑에서는 고구려 양식을 계승한 고려의 건축미를 한껏 느
낄 수 있는 것이다.

삼죽면에서 서북쪽으로 방향을 잡은 한남정맥은 국사봉(438m)에 다다른다.
보개면과 삼죽면 일대의 너른 평야가 한눈에 들어오는 정상 바위에는 전통
신앙의 흔적인 대형 성혈(姓穴)이 오목렌즈처럼 둥그렇게 파여 있고, 아래
에는 쌍미륵과 궁예미륵 등 5기의 미륵을 세워놓고 구봉산(465m), 쌍령산
(505m)을 거쳐 용인 땅으로 흘러든다. 용인으로 흘러들기 직전에 미리내라
는 이름이 말해주듯 은하수 같은 물줄기를 이루게 하는데 이곳이 바로 천주
교 미리내 성지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신부와 죽음을 무릅쓰
고 김 신부의 유해를 지게에 지고 온 신도 이민식, 김 신부의 어머니 묘 등
이 있는 곳이다.

1866년 천주교 박해가 있을 때 안성지역의 신자들이 많이 순교한 까닭에 안
성에는 천주교 성당이 일찌감치 설립되었다. 1901년에 안성천주교회 본당
이 공안국(孔安國·R. Antonio A. Combert)신부에 의해 설립된 것이다. 공
신부는 본국인 프랑스에서 포도나무 3그루를 가져다 심었는데 오늘날 안성
포도의 조상이 되는 셈이다. 1922년에 지은 구포동 성당은 그래서 안성의
천주교 역사를 대변하면서 성당 건축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도 중요한 위
치를 차지한다.

안성은 교회의 설립에 있어서도 빠른 편이어서 1902년 안성읍교회(안성제일
장로교회)가 설립된다. 그리고 똘똘 뭉친 기독교 신앙으로 일제에 과감히
저항하는 특징을 보인다.

안성 지역에 만연된 미륵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안성 사람들은 미래의 이상
향을 적극적으로 개척하려고 노력하였다. 3·1만세 운동때에 안성지역 각
종교 지도자들이 후원하거나 앞장 선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경기도 안에
서 가장 극렬한 만세 운동을 벌인 곳도 안성이었다. <염상균 문화재전문답
사가>
2002-0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