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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aly

[스크랩] 로마 볼것

[유럽 음악 기행]이탈리아 로마


베드로 성당 위에서 내려다본 로마 전경. 타원형 베드로 광장에서 테베레 강으로 뻗은 길 끝 왼쪽에 원통 스타일의 ‘거룩한 천사의 성’이 보인다. 사진 정태남 씨
캄피돌리오 언덕 남동쪽으로 펼쳐진 포로 로마노(Foro Romano). 마치 고대 로마 건축의 공동 묘지인 것처럼 돌무더기가 널려 있지만, 2000년 전에는 로마 세계의 화려한 중심가였다. 그 너머 보이는 콜로세움은 서기 80년에 세워진 로마 사상 최대의 원형 극장. 지금은 3분의 1밖에 남아 있지 않으나 당시 로마 제국의 위용을 과시하던 건축이었다.
콜로세움이 세워진 지 거의 60년이 지난 뒤, 캄피돌리오 언덕 북서쪽 테베레 강변에 또 다른 웅장한 건축물이 세워졌다.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자신과 후대 황제를 위해 거대한 영묘를 건설한 것이다. 로마 제국의 영토를 최대로 넓힌 트라야누스 황제의 후계자인 그는 예술과 문화에 심취해 영토 확장보다 정복된 땅을 다지는 데 역점을 두었다.
○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영묘에서 푸치니 오페라 무대로
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 이탈리아는 1870년 통일될 때까지 끊임없이 외세의 지배를 받거나 교황과 유럽 각국 간의 갈등으로 시달려 왔다. 하드리아누스의 영묘는 로마의 역사와 함께 기능도 여러 차례 바뀌었다. 로마 제국 말기에는 방어용 보루, 10세기에는 바티칸 궁전을 방어하는 요새가 됐다. 12세기에는 ‘거룩한 천사의 성’(Castel Sant'Angelo)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 성은 1527년 독일 용병들이 로마를 약탈할 때 교황의 피신처가 됐고, 그 후에는 정치범들을 수감하거나 처형하던 감옥이 되기도 했다.
이 성은 푸치니의 오페라 ‘토스카’ 중 3막의 무대가 된다. 이 오페라는 프랑스의 극작가 빅토리앙 사르두가 1800년 격변하는 로마의 정치 상황을 배경으로 쓴 희곡 ‘라 토스카’를 푸치니가 오페라로 만든 작품이다. 오페라에서는 종교와 정치가 얽히는 원작의 내용이 많이 사라졌지만 사랑의 비극은 훨씬 더 극적으로 처리됐고 극의 짜임새와 음악이 절묘하게 맞물렸다.
오페라의 여주인공 토스카는 노래와 사랑으로 살아가는 순수한 가수. 그녀의 연인 화가 카바라도시는 친(親)프랑스파이며 공화정을 부르짖는 혁명가다. 한편 사르두의 원작에 등장하는 나폴리왕 페르디난도 4세의 왕비 마리아 카롤리나는 무능한 왕을 제치고 실권을 잡는다. 왕비는 당시 자유의 상징이던 나폴레옹 세력을 견제하면서, 국내 친프랑스파를 탄압하다가 1798년 나폴리가 프랑스군에 함락되자 시칠리아로 도망간다.
그 사이 로마와 나폴리에는 공화정이 선포되나 얼마 후 프랑스가 패하자 나폴리와 로마 공화국이 무너지고, 다시 권력을 잡은 왕비는 무자비한 복수극을 벌인다. 로마 총경감 스카르피아는 바로 그녀의 하수인이다.
1800년 6월 14일 오스트리아와 프랑스가 이탈리아 북부 마렝고에서 격돌하는데, 전투 초기에는 오스트리아가 압도해 로마에는 오스트리아가 승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프랑스가 역전승을 거둔다.
오페라 ‘토스카’는 프랑스가 패한 줄 알고 성당지기가 기뻐하며 성당 안으로 달려 들어오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이 오페라의 시간 배경은 전황이 전해진 6월 17일 낮부터 다음날 새벽까지인데, 줄거리는 3명의 주역들이 모두 하룻밤 사이에 죽는 것으로 끝난다.
이 오페라에서 압권을 이루는 아리아는 ‘별은 빛나건만’(E lucevan le stelle…). 화가 카바라도시는 연인 토스카와의 사랑의 추억을 간직하고 먼동이 트는 로마의 하늘을 배경으로 이 아리아를 부른 뒤 총탄에 맞아 쓰러진다.

캄피돌리오 언덕에서 내려다 본 포로 로마노의 유적. 멀리 콜로세움이 보인다.
○성 굽어보는 미카엘 천사상… 제국의 흥망사 간직
별이 빛나는 하늘 아래, 로마의 흥망사를 지켜본 테베레 강은 유유히 흐른다. 불 밝혀진 미카엘 천사상은 신의 은총을 구하는 자들을 내려다보는 듯한 시선을 별빛 어리는 강 위에 던진다.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영묘가 ‘거룩한 천사의 성’으로 불리게 된 것은 옛 전설 덕분이다. 서기 509년 교황 그레고리우스는 로마를 휩쓸던 페스트를 퇴치하기 위하여 기도하던 중 영묘의 꼭대기에 서서 칼집에 칼을 넣고 있는 미카엘 천사의 환상을 보았다고 한다. 즉 신의 은총이 내려졌다는 뜻이다. 그 후 이를 기념하여 미카엘 천사의 형상이 세워졌다.
오늘날 거룩한 천사의 성 안에는 교황의 방과 감옥 등이 그대로 남아 있어 지난날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그런데 로마제국의 광대한 영토를 지키고 내실을 기했던 문화황제 하드리아누스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신의 묘소가 후손들의 부끄러운 역사를 상징하는 곳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정태남 재이탈리아 건축가 www.tainam-jung.com
▼연인의 총살형에 충격…토스카, 성벽아래 투신▼
토스카의 무대가 된 ‘거룩한 천사의 성’ 야경. 이 성은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영묘였다.
오페라 토스카: 카라바도시가 탈옥한 정치범을 성당 안에 숨기자 경찰들이 갑자기 들이닥친다. 토스카는 그날 저녁 스카르피아의 집무실이 있는 파르네제 궁에서 열린 승리 축하 음악회에서 노래한다. 카바라도시는 탈옥범 은닉 혐의로 연행돼 고문당한다. 그때 프랑스가 이겼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다급해진 스카르피아는 그를 처형하도록 한다.
토스카는 연인을 구하기 위해 스카르피아의 성적(性的) 유혹을 받아들이고, 스카르피아는 그 대가로 두 연인에게 통행증을 써준 뒤 심복에게 카바라도시를 가짜로 총살하라는 듯한 눈짓을 한다. 그 사이 토스카는 집무실 책상 위의 칼을 들고 있다가 스카르피아가 다가오자 그의 가슴에 꽂는다. 다음날 새벽, 토스카는 사형을 기다리는 카바라도시에게 달려가 죽는 시늉만하라고 귀띔한다.
그러나 총성이 울리고 카바라도시가 피를 흘리며 쓰러진다. 토스카는 속았음을 알고 절규한다. 그녀는 경찰이 자신을 체포하러 오자 성벽 아래로 몸을 던진다.

 
 
 
 
 
카타콤베와 아피아가도 (고대로마인의 고속도로) & 코뮤네광장

고대로마시대에 집중적으로 완성된 카타콤베는 로마의 4대 볼거리 중에 하나랍니다.수없이 많은 전세계 관광객들과 성지순례자들로 인해서 인산인해지만 정작 가이드가 없으면 투어가 불가능합니다.특히 로마시 외곽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일반여행자들이 이곳을 찾는데에도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저희 자전거나라 지식가이드팀은 초등학교부터 카톨릭식 교육을 받은 전문지식가이드가 합류해서 이곳 카타콤베의 유래와 순교자이야기,상상을 불허하는 지하세계의 건축비밀들을 로마의 역사적인 스토리와 매치시켜 모든 여행자들이 정확히 이곳을 이해할수 있도록 도와드리고 있습니다.(투어시간 1시간 20분)
 
쿼바디스 성당

베드로 성인이 박해를 피해 로마를 벗어나 달아나던 중 이 길(Via Appia Antica)에서 예수를 만났던 곳에 쿼바디스성당이 세워줘 있다.
베드로 성인이 예수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Quo Vadis Domine?)라고 묻자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러 간다'라는 말을 듣고 베드로 성인은 발길을 돌려 로마로 돌아가 순교하였다
.
 
 
콜로세움(Colosseo)

콜로세움은 고대 로마시대의 유적으로는 가장 규모가 큰 원형극장으로 72년에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네로 황제의 궁전인 도무스아우레아가 서있던 늪지대에 세웠다. 표면에는 쇠붙이 장식을 뺀 흔적인 구멍이 많이 나 있어서 마치 총이나 포탄에 맞은 전쟁의 상처인 것처럼 흉하게 보였다. 황제는 보통 동물서커스로 쇼를 시작하게 하였고 그후의 두명의 검투사가 나타나서 한사람이 죽을 때까지 싸움을 한다.
 
심하게 부상을 입은 검투사는 황제에게 자신의 운명을 물어볼 기회가 주어지며 엄지 손가락이 내려지면 죽었다. 당시는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많은 동물들이 실려왔다. 제2차세계대전때도 로마와 파리는 세계적인 유적지이므로 폭격을 하지 않기로 약속을 하여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당시엔 이 그라운드 위에 나무바닥을 깔고 무대를 꾸몄으며 지하의 방에 검투사, 사형수, 맹수들이 들어가 있었다고 한다. 즐어가는 문이 80개, 나가는 문이 24개 공연이 끝나면 입장객이 사방으로 순식간에 퇴장할 수 있는 현대식이 구조로 되어 있다. 그리고 그 위에 물을 가두어 모의 해전을 했다고 하니 그 규모나 시설이 얼마나 훌륭한지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18세기에 접어들면서 교황의 명으로 그리스도교의 수난의 현장으로 수복되어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건립 기술로 말하자면 아담하고 조촐했던 그리스의 건축방식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웅장하고 정교한 것이다. 콜로세움의 내부에 들어가 보면 경기장 바닥이 마치 미로처럼 복잡하게 펼쳐진아. 아마도 이미로같은 공간에는 경기를 준비하는 모든 시설들이 있었을 것이다. 검투사를 비롯한 배우 대기실, 맹수 우리, 무대 장치 창고 등등... 그러자면 그 공간은 마루바닥처럼 두꺼운 목재로 덮여있었을것으로 여겨진다. 이곳의 건축기술은 분명 빛나는 문명이라 할 수 있지만...
*아치의 발명-그리스 시대에는 아치형식이 없었다. 로만인들은 그리스의 석재기술에 덧붙여 아치를 발명함으로써 대현교량은 물론, 각종 건축물에서 공간의 혁명을 이루었다. 또한 아치를 길이로 즐여 놓은 보울트(vault)기술을 발전시킴으로써 구조물의 공간은 실로 놀라운 변화를 가져온다.
*건축재료-누구나 상식적으로 콜로세움은 돌로 지은 것이라고 여긴가. 하지만 여기에는 석재, 벽돌과 함께 콘크리트가 주요 건축재료로 사용되었다.
 
 
 
캄피돌리오 광장(Piazza del Campidoglio)

CAPITAL(영어단어에서 수도)의 어원이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교황바오로 3세로부터 위임받은 미켈란젤로가 1538년 설계함. 진척이 느려서 미켈란젤로는 세나토리오 궁전 출입구의 층계 몇개만 만들어지는 것을 보고 눈을 감아야만 했다. 건물의 완공은 그의 사후에 완성됨. 광장은 17세기에 만들어 졌는데 대부분 원형그대로 남아있다. 좌우의 건물은 투시법을 이용하여 비스듬히 배치함. 평행이 아님. 이 광장은 실제보다 더 넓어 보이며 감싸는 느낌.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시에나의 팔리오광장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들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옛부터 종교와 정치의 중심지로 로마의 일곱언덕중에서 가장 신성한 언덕으로 여겨짐.
'코르도나타'계단: 이 계단은 이교도들을 물리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스페인의 카를5세의 1536년 로마입성을 위하여 미켈란젤로가 설계함. 이 언덕은 진흙투성이었으며 당시 교황 바오로3세는 미켈란젤로에게 광장에 새길을 내고 콘세르바토리궁정과 세나토리오궁전을 재건축하도록 하였다. 시작부분은 이집트의 사자상이 지키고 있고 끝부분엔 카스트로와 풀룩스신이 말에서 내려 서있는 모습을 한 거대한 석상이 있다. 이들은 로마가 기원전497년 라틴족을 레질루스 호수에서 격파했을때 승리의 소식을 처음으로 로마에 전한 쌍둥이 형제이다.
-우측의 콘세르바토리궁 내부의 카피톨리오 미술관에는 루벤스, 베로네세, 카라바지오들의 16,17세기의 걸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중앙에는 몇년전까지만 하더라도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 청도ㅗㅇ기마상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이 청동상은 천여개를 헤아리고 있던 고대 로마황제의 기마상 중에서 유일하게 폐기의 위험을 모면했는데 그 이유는 원래 라테란의 산 지오반이 대성당앞에 세워져 있던 것을 사람들이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대제로 착각하고 이 광장으로 옮겨와 소중히 보존하였기 때문이다. 이 청동상의 원작은 현재 우측의 박물관에 보존되고 있다. 한편 기마상의 대리석 받침대는 미켈란젤로의 작품이다. 정면에 보이는 세나토리오궁은 12세기 경부터 로마 원로원으로 쓰이다가 현재는 로마시장의 사무실로 쓰이고 있고 계단 아랫부분에는 개선의 로마여신상이 손에 큰 구슬을 들고 있는데 세계를 지배하는 로마를 상징한다. 그리고 양쪽의 석상은 케베레강과 나일강을 상징한다. 후면의 종탑은 1579년에 세워졌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때 이래로 캄피돌 언덕 정상에는 십자가가 세워져 있는데 이 종탑이 완성된 이 후에는 종탑위에 십자가가 세워졌다. 그런데 이 십자가는 20세기 초반에 교회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당시의 로마 시장에 의 철거되었다가 1924년에 다시 제자리에 돌아오는 수난을 당하기도 하였다.
 
 
포로 로마노(Foro Romano)(로마 공회장)

카피톨리오 언덕과 팔라티노 언덕 사이의 저지대로 이곳은 고대로마의 정치, 경제, 사법, 입법, 행정의 중심지로써 18세기부터 발굴이 시작되어 지금까지 발굴이 계속되고 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아치와 새 텐신전 기둥은 지하에 반쯤 묻혀 있었다. 아직 제작연대가 밝혀지지 않은 유물들도 많다. 

로마에서 가장 하일라이트인 관광지입니다. 이곳만 정확히 관광을 하셔도 로마를 왜 방문했는가를 스스로 자각하게 만들어 드립니다..
이곳은 신전, 바실리카(공화당) 기념비 등의 건물들로 구성된 도시의 공간으로 공고앵활을 수용하는 기능을 지니고 있었다. 이 지역은 원래 비가 오면 물이 괴는 늪지대였는데 하수시설을 확충하여 도시생활의 구심점을 이루는 장소로 개발되었다. 또한 주변의 언덕들이 무주치는 곳이어서 각 언덕에 사는 시민들이 모이기가 용이하며 시민들의 경제행위를 수용하는데 매우 이상적인 곳이었다. 그래서 이곳에는 상가를 비롯 신전, 바실리카 등의 공공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하였고 아울러 시민회의, 원로원회의, 판사선거,행정, 종요,예식등이 행하여지는 곳이 되어 나중에는 정치, 경제,종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 후 로마제국이 강대해지자 공회장 하나만으로 불충분하여 다른 공회장들이 부근에 새로 세워지게 되었다. 기원후 283년에는 이 공회장은 화재로 파괴되었고 후에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에 의해 복구되었다. 그 후 수차례에 걸친 야만족의 약탈로 공회장은 완전히 황폐화되었고 중세 이후로는 별장,성당,요새등을 축조하기 위하여 공회장의 건물들을 헐어 건축자재로 쓰이기도 하였다. 폐허로 남은 이 공회장은 나중에는 양치기 하는 곳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 후 수세기가 지난 다음 이 지역에 대한 고고학적인 관심이 고조되어 1871년에 드디어 발굴작업이 본격화되었다. 현재 로마에 남아있는 유적지중 가장 중요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콘스탄티노 개선문(Arco di Constantino)

재원 : 높이 21m, 폭이 25m로 3개의 아치로 구성된 로마에사 가장 큰 개선문 밀비오다리에서 정적 막센티우스와의 전투에서의 승리를 기념하여 315년에 원로원과 로마제국 국민들이 세운것임. 현재까지 보존상태가 완벽함.

콘스탄티누스는 310년경부터 태양신을 숭배하고 있었는데 부친과 마찬가지로 기독교에 대하여 관대하였다. 황제자리 쟁탈전에 가담한 막시미아누스의 아들 막센티우스와 격전을 벌이기 위하여 로마로 향한다.
 
 
그런데 로마로 진군하다가 대낮에 갑자기 하늘에 십자가와 또 '이것으로 이기리라'라는 문구가 나타났다. 이 광경은 그의 군대도 보아다. 그리고 그날밤 꿈에도 똑같은 광경을 보았다. 이로써 신의 계시를 받은 콘스탄티누스는 십자가 군기를 앞세우고 테베레강의 말바오다리에서 그의 정적 막센티우스를 맞아 결전을 벌였는데 막센티우스는 이 전투에서 대패하여 강에 떨어져 죽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원로원과 로마시민의 환영을 받으면서 로마에 입성하였고 다음해에 밀라노에 칙령을 발표하여 기독교를 공인하였다. 그는 22년후 죽기전에 세례를 받았다. 또한 이 개선문에는 아폴로를 비롯한 이교도의 신들이 보인다. 파리의 개선문은 이 개선문을 모델로 하였다.
 
 
베네치아 광장(Piazza Venezia)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 기념관 : 광장 전명의 백악관이 이탈리아 초대통일 국왕인 바리오 엠마누엘레 2세를 기념하기 위해 1885년-1925년 사이에 지어진 건물(웨딩 케잌, 타자기, 흰코끼리)등의 모욕적 별명이 붙여진 건물. 1861년에 초대 국왕이 됨.
-베네치아 궁전- 광장 우측의 르네상스 시대의 초기에 지어진 건축물로써 1455년-1464년 사이에 후에 교황 바오로2세가 된 베네치아늬 바브로 추기경을 위해 지어졌다. 1797년 오스트리아 점령하에 들어가기 전까지 로마교황의 거처로 사용되기도 하였고 로마의 베네치아 대사관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1916년에는 군중에게 연설을 하기도 하였다. 리니가 이곳에 본보를 두고 중앙 발코니에서 군중에게 연설을 하기도 하였다. 이태리는 나폴레옹 통치당시 통일을 이루는 듯하다가 1815년 다시 여러 개의 작은 주로 갈라졌고 교황통치권이 로마에 반환되었다. 이후 마치니, 가리발디를 비롯한 여러 애국자들이 이후 50년에 걸쳐 이태리를 통해 자주국가로 이룩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1848년 잠시 공화국을 선포하였지만 가리발디의 군대가 프랑스군에 의해 쫓겨났다. 1860년까지 주세페 가리발디는 천여명의 추종자들을 이끌고 나폴리와 시실리등을 정복하여 이태리 반도내 대부분의 지역을 외국의 통치에서 벗어나게 했는데 그때까지도 로마는 문제로 남아 있었다. 이에 그는 '로마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선언했다. 1870년 9월 20일 군대를 앞세워 로마의 교황지배에 종지부를 찍었다. 군대는 포르타피아 부근의 성벽을 부수고 교황은 물러났으며 로마는 이태리의 수도가 되었다. 이곳은 많은 거리들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로마에서 가장 복잡한 곳 중의 하나..
 
비토리오 엠마누엘2세 국왕기념관

1871년 이탈리아를 통일한 엠마누엘 2세를 기념에서 건설되었으며, 1911년에 완성된 네오클래식양식의 건물로 유명하다. 엠마누엘 2세국왕의 기마상아래에는 제1차 세계대전의 무명전사의 묘가 있다. 왼쪽에는 베네치아 궁전이 있으며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판테온(Pantheon)(그리스 수학 + 로마 공학 = 건축의 기적)

기원전 27년에 초대황제 아우구스트의 사위인 마르크스 아그리파의 지휘에 따라 사상 최초의 원통형 돔건물이 탄생되었고 2000 여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그 위용을 당당히 자랑하고 있는 판테온은 모든 신들에게 바치는 신전의 용도로 지워졌다.
 
 
지름과 높이가 각각 42.2 혹은 42.3인 이 건축물은 오늘날 세계문화재 보호위원회로 부터 가장 오래된 돔건물 가운데 보존상태가 가장 좋은 건물로 지정관리되고 있는 인류문화유산이다.
르네상스시대의 거장 미켈란젤로는 이 건물을 두고 '신이 설계한 것인지 인간이 설계한 것이 아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건물은 원래 BC.27년, 아그리파가 올림푸스의 모든 신에게 바치려고 건립한 만신전이었다. 그런데 AD.80년 화재때문에 파괴된것을 AD.117년,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복원했다. 들어가는 입구의 전면은 마치 불꺼진 파르테논신전과도 같았다. 그러나 안으로 방을 들여놓는 순간 마치 거대한 진공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처럼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동시에 까마득한 천장에서 빛이 소리없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린다. 아무리 비신자라고 해도 이런 순간에는 일종의 종교적 신비감이 전율처럼 온몸을 감쌀것이다. 고대 건축들이 그렇지만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빛은 단순히 실내를 밝혀주는 조명의 역할만 한 것은 아니다. 특히 신의 공간인 판테온 신전에서 빛은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신의 계시처럼 느껴질것이다. 판테온은 로마 건축 가운데 용도변경하지 않고 여태껏 종교적 기능을 수행하는 유일한 보기다. 물론 처음에는 모든 신들을 모시다가 나중에 기독 유일신을 섬기게 되었다는 차이는 있다. 기원전 608년 비잔틴 황제 포카스가 판테온을 교황 보니파티우스 3세한테 선물했다. 그 덕택에 요행히 교회로 변신해서 파괴되지 않았다. 로마시민들은 로마 공화장에 포카스 기념주를 세워 황제의 호의에 답례했다고 한다. 609년 교황 보나파티우스 4세는 수레에다 기독교 순교자들의 유골을 싣고 와서 판테온에다 놓은후 신전도 판테온이라 부리지 않고 '성모 마리아와 모든 순교 성자들의 교회'라고 이름을 새로 붙였다. 유골을 뿌려놓은건 이교의 신들을 누르고 마침내 승리하는 기독교회의 면모를 과시하려는 의도였다. 새 교회 봉헌일 11월 1알 그후 이날은 카톨릭 만성절 축일이 되었다.
보카 델라 베리타 광장(Piazza Bocca della Verita)

테레베 강의 파라티나 다리 동쪽에 있는 광장. 광장 정면에 있는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Santa Maria in Cosmedin)교회의 입구 왼쪽에 그 유명한 '진실의 입(Bocca dellaVerita)'이 있다. '진실의 입'은 석판에 바다의 신 트리톤의 얼굴을 새긴 원반으로 거짓말쟁이가 그 입에 손을 넣으면 트리톤의 입이 다물어진다는 전설이 있다. 따라서 중세 십자군 원정시엔 배우자의 진실을 시험하는 곳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BC4세기경 만들어진 이 진실의 입은 하수구 코브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진실의 입

해신 트리톤의 얼굴을 새긴 원형 석판으로 원래 로마 시대에는 하수였다고 한다.
입에 손을 넣고 거짓말을 하면 입을 닫아 손목을 잘라버린다는 전설이 있다.
영화 로마의 휴일을 통해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치루쿠스 막시무스(대전차경기장)-(Circo Massimo)

한때 고대로마의 가장 큰 전차 경주 대경기장이었다. 4세기에 세워졌으며 첫경기는 549년에 열려 계속해서 새롭게 단장되고 확장되었다. 25만명을 수용, 4륜마차경기, 경마, 운동경기, 야수싸움 등이 열렸다

경기장 한가운데를 가로 지르는 달걀모양의 7개의 물체가 있으며 말이 달릴때 몇바퀴인지 세기위한 것이였다. 포폴로광장 중앙에 있는 오벨리스크는 원래 이 경기장의 중앙을 장식하고 있었다. 이 곳에서는 수 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피를 흘린 곳이기도 하다. 길이 664M, 폭 123M

 
 
해골의 사원(Chiesa di Santa Maria della Concezione)

바르베리니 광장에서 베네토 거리 있는 카프치니 수도원(1624년)이다. 이 곳의 지하 경당들은 수백 년 동안 모은 4,400 여 명의 유골들이 교회벽면과 제단등을 장식하고있다. 1626년 성베드루성당이 완공되던 시기의 교황 우르바노8세의 형 안토니오 바르베리니는 추기경이자 카푸치니수도원의 수도사였다.
 
 
1626년에 이곳에 교회를 세웠다. 그는 죽은 후 다른 추기경들과는 달리 커다란 대리석관에 묻히지 않고 제단옆의 관석밑에 묻혔다. 관석의 비문에는 라틴어로 '여기 한줌의 먼지와 재와 허무가 묻히다'라고 적혀 있다. 죽음에 대한 이러한 암울한 인식은 교회 지하실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카푸치니의 수도사들이 죽은 동료들의 뼈와 두개골을 이용하여 5개의 볼트가 있는 예배당벽을 장식해 놓았다. 총 4400여개의 유골로 장식되어 있으며 어릴때 죽은 바르베리니 가문의 공주유골은 원형대로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 출구에 라틴어로 새겨진 글귀는 "what you are now we used be, what we are now you will be' '당신의 지금의 모습은 우리의 과거의 모습이고 우리의 현재모습은 당신의 미래의 모습이다."라는 글귀가 있다...
 
 
나보나 광장(Piazza Navona)

86년에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조상한 길이 240m, 폭 65m의 전차 경기장 유적지다, 코르소 거리와 테베레 강 사이에 있으며, 차가 들어갈 수 없는 이 광장은 로마의 어떤 광장보다도 안정감이 넘친다. 광장에는 3개의 분수가 주위의 건물과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는데 광장 남쪽의 것이 <무언의 분수>, 북쪽의 것이 <넵튠의 분수>, 중앙에 있는 것이 <강의 분수>다. 특히 <강의 분수(Fontana dei Fiumi)>는 베르니니가 만든 것으로 바로크 조각의 걸작으로 꼽힌다.
                                                
 
오벨리스크 아래에 다이나믹한 4명의 남성상이 있는데 이는 나일강, 갠지스 강, 도나우강,라프라타강을 의인화한 것이다. 이중에서 베일을 쓴 나일의 거인은 그의 경쟁자이자 라이벌인 보로미니가 디자인한 근처의 산타그네세 인 아고네 교회에 대한 그의 혐오감을 나타내고 있다는 일화가 있다. 로마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로크 양식의 이 광장은 3만명을 수용할 수 있었던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전차경기장의 옛터에 세워졌다. 로마의 광장중에서 가장 매력과 낭만이 넘치는 곳이다.
-피우미 분수는 교황 이노센트 10세 팜필리를 위해 만들어졌으며 광장의 중앙에 장식하고 있었다. 1651년에 제막식이 있었다. 오벨리스크는 아피아가도의 막센티우스 경기장에 서 있었던 것. 피라미드 모형의 바위는 교황의 문장인 비둘기, 베르니니가 디자인했는데 로마당국은 그에게 지불할 제작비를 확보하기 위해 생필품에 높은 세근을 매겼다.
-모로분수:1653년 베르니니에 의해 모로이를 위해 조각되었다.
 
 
트레비 분수(Fontana di Trevi )

1732년 -1762년에 설계 공모전에 당선된 젊은 건축가 니콜로 실비에 의해 완성됨. 설계는 베르니니가 이미 해두었던 것을 참조하였다. 분수가 세워지기 전엔 처녀샘이라 불리우는 조그만 샘이었다. 목마른 로마병정들 앞에 한 소녀가 나타나 물이 있는 곳으로 그들을 인도한데서 유래한다.
 
 
 
(오른쪽 상단부조)조각군을 살펴보면 태양의 신 오케아누스(넴툰)이 있고 아래로는 바다의 신 트리토네가 이끄는 두마리의 해마는 각각 잔잔한 바다와 격동의 바다를 상징한다. 이 분수의 물은 기원전 19년 아그리파에 의해 출조된 비르고수로를 통하여 오는데 이의 완공을 기념한 조각이다. 완쪽 상단부의 부조가 아그리파의 축조에 관한 사실을 담고 있다. 로마의 분수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분수로 꼽히는 바로크 양식의 트레비 분수는 교환 클레멘스13세가 모집한 분수설계 공모전에서 당선된 니콜라 살비(Nicola Salvi)의 작품으로, 1732 착공,1762년에 완공되었다. 폴리 궁전의 벽면을 이용한 조각은 이 분수의 아름다운 배경이 되고 있는데 바다의 신 넵튠이 트리톤이 조종하는 두마리의 말을 타고 가는 모습은 박력이 넘친다. 이조각은 브란치의 작품으로 바로크 후기 미술의 걸작으로 꼽힌다.
 
 
스페인 광장(Piazza di Spagna)

스페인 광장이라고 이름이 붙여진 이유는 17세기때 바티칸 주재 스페인 대사관이 있었기 때문. 영화 '로마의 휴일'의 주무대가 되었던 스페인 광장의 137계단을 올라가면 트리니타 데이 몬티 교회가 있으며, 광장의 중앙에는 건축가 베르니니의 부친이 바로크 양식으로 만든 <조각배 분수(Fontana della Barcaccia)>가 있다.

로마의 홍수가 지나간 후 이곳에 조그만 조각배가 하나 남아 있었는데 그는 이 조각배에서 영감을 얻어 이 분수를 만들었다. 광장의 137계단은 18세기 프랑스 대사의 기부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당시 이 지역은 로마 교통의 중심지로 외국인들을 위한 호텔과 상점들이 즐비해 있었다. 스탕달,발자크,리스트,바그너 등 유명한 예술가들도 즐겨 찾았으며, 그 옆에는 키츠와 셸리의 기념관도 있다.

1722년에 건립되어 언덕위의 삼위일체 성당을 연결한다. 마데르노가 완성한 것이다. 계단의 오른쪽에는 영국시인 키이츠와 셀리가 살던 건물이 있는데 그들이 살던 방은 현재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천사의 성(Castle Sant'angelo)
-천사의 다리는 베르니니와 그의 제자들이 제작한 천사의 석상들이 늘어서 있다. 이 성은 원래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자신의 묘소로 쓰기 위해 130년에 세운 거대한 영묘였다. 다리 또한 로마와 영묘를 잇기 위한 다리였다. 12세기부터 천사의 성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유래는 590년 교환 그레고리우스는 당시 로마를 황폐화하던 페스트를 퇴치하기 위하여 기도하던 중에 천사의 환상을 보게 된다. 천사는 영묘의 꼭대기에 서서 칼을 칼집에 집어넣고 있었는데 이는 신의 은총이 내려진 것을 뜻한다. 이 거룩한 천사를 기녑하여 예배당이 세워졌고 이어서 천사의 모습이 대리석으로 조각되어 세워졌다. 성안엔 교황의 방, 감옥등이 그대로 남아있고 각가지 무기가 진열된 무기 박물관이 남아있었다. 대천사 미카엘 조각상이 있다.
 
2006.02.23
출처 : ♡스위스쮜리히대학원♡
글쓴이 : 친절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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