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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 피플

"손들고 항복하는 사람도 기관총 사살"

"손들고 항복하는 사람도 기관총 사살"



[동아일보]

1945년 초. 미국 침략의 전초기지로 활용됐던 남태평양 마셜제도 내 밀리 환초의 일본군 부대에도 미군의 잇따른 폭격과 굶주림으로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밀리 환초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 군속 800여 명이 총알받이로 내몰리고 있었다. 이때 밀리 환초 내 첼퐁 섬에선 조선인 군속 실종사건이 잇따라 발생했고 이들의 시체에선 한결같이 살점이 도려내져 있었다.

61년 전 밀리 환초에선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당시 밀리 환초로 끌려갔다 천우신조로 살아 돌아온 이인신(83) 씨가 1995년 집필한 수기를 토대로 당시 일제의 만행과 조선인 집단 학살 상황을 재구성했다.

○조선인의 실종과 공포

1945년 2월 초 첼퐁 섬에 있던 조선인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일본인을 따라간 동포 한 명이 증발하듯 사라져 버린 것.

당시 첼퐁 섬엔 일본인 148명과 조선인 군속 184명이 있었다. 조선인들은 일본인 감독관의 눈을 피해 몇 명씩 조를 짜 실종된 조선인을 찾아 나섰다. 하지만 몇날 며칠이 지나도 그 조선인의 행적을 알 수 없었다.

어느 날 조선인 몇 명이 식량을 구하기 위해 첼퐁 섬 인근 무인도를 갔다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실종된 조선인의 시체를 발견했는데 허벅지살이 포를 뜬 것처럼 도려내져 있었다.

이들이 더욱 경악한 것은 며칠 전 일본인들이 선심을 쓰듯 건넨 고래고기 때문이었다. 당시엔 모처럼 먹는 고기 맛에 포만감을 느꼈지만 그 고기가 고래가 아닐 수 있다는 생각에 온몸이 전율에 휩싸였다. 아무런 장비도 없는 일본인이 고래를 잡아다 조선인에게 줄 리 없었던 것.

그리고 며칠 뒤 조선인 군속들이 잇달아 실종됐다. 그들 역시 포가 떠진 채 발견되자 조선인들은 밀려드는 공포감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인육(人肉)으로 주린 배를 채우다니….’

○첼퐁 섬의 비극

몇 명의 조선인이 나섰다.

“일본인에게 잡혀 먹히나, 굶어 죽으나 죽기는 마찬가지다. 맨주먹으로라도 싸워야 한다.”

당시 밀리 환초 주변은 미군 군함으로 완전히 포위돼 일본 본국으로부터 보급이 끊긴 지 1년이 넘었다. 콩잎 등 풀잎으로 죽을 쒀 먹으며 연명하던 이들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섬을 탈출해야 했다. 섬 주변엔 미군 군함이 있어 일본인들만 없애면 구조를 요청할 수 있었다.

1945년 3월 18일 밤 드디어 조선인들이 들고일어났다. 일본인 7명을 죽이고 탈출을 시도하려는 순간 기관총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한 조선인이 걸어서 1시간 거리에 있는 루코노르 섬으로 가 일본군에 조선인 반란을 밀고했던 것. 루코노르 섬에서 중무장한 일본군 토벌대 50여 명이 삽시간에 첼퐁 섬으로 들이닥쳤다.

이들은 굶주린 맹수처럼 닥치는 대로 조선인들을 학살했다. 손을 들고 항복한 조선인에게도 가차 없이 총알 세례를 퍼부었다. 쓰러진 조선인에겐 총검이 날아들었다.

항거를 주동한 조선인 5, 6명은 무리한 계획으로 동포를 죽게 했다는 자책감에 서로 껴안고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려 자폭했다.

조선인 17명은 일본군에 생포돼 인근 루코노르 섬으로 끌려갔다. 순종하면 살려준다고 했지만 이들 역시 바로 다음 날 총살돼 구덩이에 파묻혔다.

첼퐁 섬 학살 당시 야자수 꼭대기로 올라가 살아남은 박종원(2000년대 초 작고) 씨는 조선인 180여 명 가운데 부상자 2명을 포함해 15명 정도만이 살아남았다고 이 씨에게 전했다.

○61년간 악몽에 시달려

학살사건이 일어난 지 열흘쯤 뒤에 일본군은 첼퐁 섬 주변에 있던 조선인 군속들을 시켜 첼퐁 섬으로 가 시체를 치우도록 했다. 하지만 남태평양의 높은 기온으로 심하게 부패한 시신을 처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핏빛 바다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시신, 코를 치르는 악취, 엄지손톱만 한 파리 떼…. 첼퐁 섬은 죽음의 섬이었다.

이 씨는 수기에서 당시의 참혹한 기억을 이렇게 묘사했다.

‘혈통이 같은 우리 민족이 살인마의 불법 만행에 분격(奮擊)해 의(義)로서 생사를 초월해 항거했는데 우리 동지들만 혼백(魂魄)도 돌아오지 못할 이역(異域)에서 천추의 한을 품고 처형당하고 말았다. 고향에 있는 부모형제들은 무사히 살아 돌아오기만을 빌었는데 어디서 죽었는지조차 모르니 비통함을 말로 다할 수 있으랴.’


이 씨는 인터뷰에서 “인간이 어디까지 인간성을 잃을 수 있는지 몸으로 느껴보지 못한 사람은 그 끝을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며 몸서리쳤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이재명 기자 egij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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