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훈/산은 편을 가르지 않는다
글 김선미 기자·사진 남영호 기자
의정부시 호암초등학교 운동장에 선 엄홍길 동상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다.
“도봉산은 우리 학교 뒷산이다.
산악인 엄홍길은 우리 학교에서 배우고 도봉산에서 자라나 세계에서 가장 높은 히말라야 에베레스트 산에 올랐다.
우리는 모두 높고 푸르고 힘차다.
멀고 높은 곳에 우리는 오를 수 있다.
” 소설가 김훈이 쓴 글이다.
우리 시대 최고의 문장가라는 높은 곳에 오른 그가 배우고 자라난 뒷산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도요새에 바친다’를 읽고 ‘산사람 김훈’을 처음 알았다.
그의 <자전거 여행> 1권에 실린 글이다.
“…낭가파르바트 북벽에 부딪히는 새들은 화살처럼, 총알처럼, 바람처럼 죽는다.
그것들의 시체 위에서 날개 달린 몸으로 태어난 그것들의 꿈은 유선형으로 얼어붙어 있고, 그 유선형의 주검은 죽어서도 기어코 날아가려는 목숨의 꿈을 단념하지 않은 채, 더 날 수 없는 날개를 흰 눈에 묻는다.
낭가파르바트를 동행 없이 혼자서 오르는 과묵한 등반가들이 눈 속에 박힌 새의 시체를 눈물겨워 하는 것은 그 유선형의 주검에서 자신의 운명을 읽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 냄새가 났다.
단지 뛰어난 작가의 화려한 수사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그가 중학교 때부터 인왕산에서 줄을 묶고 바위를 타던 산 사람들과 ‘한 종족’이란 사실을 알기 전이었다.
그리고 엄홍길의 책 <8000미터의 희망과 고독>을 덮기 전 다시 김훈의 글을 만날 수 있었다.
“히말라야 설산에는 길이 없다.
길이란 어디에도 없고, 가야 한다는 생명의 복받침만이 있다.
인간의 앞쪽으로 뚫린 길은 없다.
길은 몸으로 밀고 나간 만큼만의 길이다.
그래서 길은 인간의 뒤쪽으로만 생겨난다.
그리고 그 뒤쪽의 길조차 다시 눈 속에서 지워지는 것이어서 길은 어디에도 없고, 길은 다만 없는 길을 밀어서 열어내는 인간의 몸속에 있다.
몸만이 길인 것이다.
그래서 엄홍길은 제 몸을 밟고, 제 몸을 비벼서 나아간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의 산이 궁금했다.
처음 전화를 건 것은 1년 전이었다.
<자전거 여행>을 펴낸 출판사 측은 그가 해외 출장 중일 것이라고 했지만 그냥 수화기를 들고 벨이 끊어질 때까지 울리도록 내버려두었다.
한 스무 번쯤 울렸을까. 어떤 질긴 놈인지 목소리나 들어보자는 심정인 듯한 사내의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미안하지만 제가 지금 부척 바쁘거든요. 좀 있다가 만나죠…한 1년쯤 뒤에.”참 싱거운 거절 방법이라 느낄 수도 있었다.
그 뒤로 그는 계속 일산에 있는 집에서 임진강가의 노을을 향해 자전거 페달을 밟았고, 나는 이 산 저 산 걸어서 오르내리면서 그를 잊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하루에도 몇 번씩 그의 얼굴과 마주쳐야했다.
북악산을 등에 지고 큰 칼 옆에 차고 광화문 차로에 홀로 선 이순신 동상 주위를 누비는 버스 광고판 속에 그가 있었다.
심지어는 지하철 집표기 위에서도 어김없이 그의 날카로운 눈과 마주쳐야했다.
대통령이 탄핵 당시 읽었다는 소설 <칼의 노래>가 다시 한번 인기가 치솟으면서 출판사의 공세적인 광고가 이어진 것이다.
희끗희끗한 머리카락 위로 모자를 눌러 쓴 그의 얼굴이 아주 익숙해지고 있었다.
거의 일년이 다 되었다는 생각에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그의 집으로 가는 흔들리는 전동차 창가에서 김훈이란 사람에 대해 생각했다.
‘한국문단에 쏟아진 벼락같은 축복’이니 ‘모국어로 쓰인 산문문학의 진경’이라는 요란한 찬사들이 쏟아지는 그의 문장 앞에 기자 명함을 내미는 일은 불편하다.
그는 가장 잘 나가는 소설가라는 ‘직업’ 이전에 기자로 꼬박 27년간이나 ‘지겹게 밥벌이’를 했던 사람이다.
그리고 <시사저널> 편집국장을 지낼 때 동종 매체인 <한겨레21>의 ‘쾌도난담’이란 인터뷰 코너에서 거침없이 내뱉은 말들 때문에 여성계의 비난이 쏟아지자 돌연 사표를 내던지고 소설을 썼다.
그랬던 사람이 한겨레신문사 사회부 기자로 입사해 다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곳에서 1년 간 사건 현장을 신입기자들처럼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 다녔다.
그의 나이 쉰다섯 전후의 일이다.
산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산 아래 일은 굳이 들추어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는 산 말고도 궁금하게 많은 사람이었다.
그가 인왕산에서 정발산으로 간 이유 김훈은 일산에서 8년째 살고 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그가 일산으로 이사를 하면서 일상의 뒷산도 인왕산, 북한산, 도봉산이 아닌 정발산으로 옮겨졌다.
그 산의 높이는 88m다.
그것은 단순한 공간의 이동 그 이상이었다.
일산 시내의 한적한 주택가에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의 집과 마주보이는 건너편 건물 지하에 작가 김훈의 작업실이 있다.
철문이 있는 지하 계단을 내려가 다시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서자 제일 먼저 바닥에 펼쳐진 ‘사레와’제 다운 침낭이 눈에 띄었다.
조금 전까지도 그 속에 들어가 누에고치처럼 편안하게 웅크리고 있었을 그를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바위 산 모양으로 돌멩이를 붙인 한쪽 벽면에는 자전거와 오래된 등산 장비들이 장식품처럼 늘어서 있다.
벽에는 피켈 두 자루가 바위를 찍는 모양으로 걸려 있었다.
낡은 것은 그의 손때가 묻은 것이고 새것에는 엄홍길의 사인이 있었다.
그냥 마구잡이로 쌓아 놓은 것 같아 보이지만 실은 그의 이미지를 한눈에 보여주는 잘 짜여진 풍경화의 구도다.
김훈의 산은 지하 작업실 벽면에 그렇게 박제된 채로 있는 것일까. 왜 걷지 않고 굳이 자전거를 타는지 물었다.
그는 <자전거 여행1·2>란 책을 통해 이미 두 발과 바퀴가 한 몸임을 이야기한 사람이다.
마치 조지 말로리에게 왜 산에 오르냐고 물은 것과 같은 질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전거가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지는 않았다.
“등산은 산이 있는 데까지 가야하지만 자전거는 문을 나서면서부터 바로 시작할 수 있어서 좋아요.”이제는 산도 자전거를 타고 넘는다.
일산에 이사 와서 자전거를 처음 배우고는 “이제 회사 안 다니고 자전거로 밥 벌어 먹고 살겠다”고 선언까지 했다.
그리고 자장면을 나를 거냐 아니면 신문배달을 할 거냐고 걱정하던 아내에게 충직하게 약속을 지켰다.
<자전거 여행> 1권의 인세로 300만 원짜리 자전거 ‘Rocky Mountain’, 2권으로는 800만 원짜리 ‘Treck’까지, 넉넉한 보너스도 챙겼다.
“옥인동 뜀바위, 인왕제색도에 나오는 바로 그 바위에서 처음 바위를 배웠어요. 에코클럽이라고 동네아이들끼리 만든 모임인데, 그 시절엔 산에 다닌다 하면 에코클럽이라고 이름 부치는 게 유행이었어요.”소년 김훈에게 산은 그런 놀이터였다.
입시를 앞둔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도 매주 산을 찾아 다녔다.
바위에 붙으면 따뜻하고 마음이 편안했다.
반대로 무서움이 일면 절대 바위에 달려들지 않는다.
그것은 자전거를 탈 때도 마찬가지다.
비 오는 날이나 무섬증이 느껴지면 절대 길을 떠나지 않는 게 그의 방식이다.
소백산에서 백두대간을 넘어갈 때는 풍기경찰서에 미리 입산 신고를 하고 출발했을 정도다.
칠레를 자전거로 종단하는 게 꿈이지만 이 역시 무서워서 절대 혼자서는 못 떠난다고 했다.
누구에게나 두려움은 있다.
그러나 두려움을 말로 표현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는 글쓰기 역시 지겨운 밥벌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피할 수 없는 밥벌이는 무섭다.
산이 두렵고 밥벌이가 지겹고…. 너무나 명백한 이야기가 그의 언어로 말해질 때 전혀 낯선 것이 된다.
요즘 젊은이들이 국적까지 포기하면서 피해 가려고 하는 군 생활 역시 그에겐 산이 있어서 좋았다.
동쪽 바다가 보이는 산속에서 보초를 서는 일은 행복했다고까지 말한다.
그래서 변하는 산의 빛깔과 향기에 취한 스무 살 청춘은 제대하기도 싫었다.
그만큼 산 아래 일상이 두렵고 견디기 어려웠던 걸까. “산은 우리한테 도덕이나 윤리적 기준을 들이대지 않잖아요. 어떤 기준으로 편을 가르지도 않아요.”‘스스로 그러한 것’이라는 산의 단순함이 그의 마음을 잡아끄는 이유다.
문든 그의 산문집 제목 <너는 어느 편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가 떠올랐다.
그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어느 편이냐고 묻지 마라. 그 질문은 너무 폭력적이다”라고.그러고 보면 기자란 직업은 늘 그렇게 세상에 칼을 들이대는 일인지도 모른다.
당신은 어느 편이냐고 끝없이 추궁하면서서도 자신은 절대 어느 편이라고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는 직업. 왜 기자를 그만두고 소설을 쓰는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기자로서 다 표현하지 못하는 게 앙금처럼 남아 있었어요.”그가 한겨레신문에 썼던 ‘김훈의 거리의 칼럼’은 원고지 2.8매였다.
동인문학상을 수상한 장편소설 <칼의 노래>는 1200매,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단편소설 <화장>은 180매였다.
이제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충분히 쏟아내고 있는 걸까.
인간이란 무엇인가
글로 ‘밥을 벌어먹고’, 글로 이야기 하는 사람. 김훈의 글은 이미 최고의 상품이다.
국내 시장을 넘어 프랑스 갈리마르 출판사와 일본 신조사로도 팔려나갔다.
그의 글에 대한 세상의 반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대뜸 “날 싫어하는 사람도 많아요”라는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보수적이다, 남성 우월주의의 가부장적인 마초다, 희망이 없다, 허무주의자다… 그 말 다 맞아요. 그렇지만 나는 그걸 고칠 생각이 추호도 없어요. 어디 내 한계가 그것뿐인가. 나는 수백만 개의 한계 앞에서 매일 같이 엎어지고 고꾸라지는데….”자신에게 칼을 들이대는 말들은 까마귀보고 왜 까마냐고 욕하는 것과 똑같다고 했다.
갑자기 칼날 같이 번뜩이던 그의 눈빛이 불에 덴 상처 때문에 화들짝 놀라는 어린 짐승 같았다.
“난 인간의 삶이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당위에는 관심 없어요. 오로지 인간이 무엇이냐, What is it? 이것에만 매달릴 뿐이에요. 그런 면에서 나는 아주 협소한 작가지.” 그리고는 거대 담론을 다루는 광활한 문학은 이문열이나 황석영씨가 하면 되는 거라고 덧붙였다.
등산으로 치자면 그는 온갖 휘장을 휘날리며 극지법으로 히말라야를 오르는 대규모 원정대의 대장보다는 뜻 맞는 파트너와 달랑 배낭 하나 챙겨들고 거대한 암벽에 매달리는 요세미티의 자유로운 클라이머들을 닮았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높이보다는 눈앞에 직면한 암벽의 작은 바위 돌기와 미세한 틈새에 매력을 느낄 뿐이다.
거대한 벽 앞에 매달려 고작 한 뼘의 높이로 자신의 몸을 끌어올리기 위해 머릿속이 서늘해지도록 아찔한 상태에서 진땀을 쏟아내는 것처럼, 그도 그런 고통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원고지를 메운다(그는 컴퓨터 자판 연습을 ‘미나리’ 수준에서 포기할 정도의 ‘기계치’라고 했다). “산은 꼭대기만 보면 질려서 절대 못 가요. 삶이란 원래 고단한 것이라 생각하면서 밑을 보면서 묵묵히 가면 언젠가 정상에 닿아있어요.”걷거나 자전거를 타거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거벽에 매달린 클라이머들은 결국 자신이 넘어서고 싶은 벽은 인간 내면의 장애물임을 깨닫는다.
그들의 등반이 참선과 수련에서 큰 힘을 얻는 이유가 거기 있다.
문학에 대한 그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산은 본래 그러한 것이지만 등산은 분명 인간의 의지가 개입하는 행위다.
때문에 정상은 하나지만 어떻게 오르느냐에 따라 길이 갈라진다.
그래서 산 아래 세상의 편 가름이 등산의 세계에도 있다.
그러나 김훈은, 역시 어느 편도 들지 않았다.
저마다의 산을 각각의 개별적인 산으로써 존중했다.
호사가들 사이에선 등정주의와 등로주의로 대변되는 엄홍길의 산과 박정헌의 산도 모두 존중한다.
그는 새로 나온 박정헌의 책 <끈>에도 추천의 글을 썼다.
“산악인 박정헌은 수직의 벽에 붙어서 몸으로 길을 열어나간다.
그 길은 마음의 길이고 땅 위의 길이다.
몸은 마음의 길과 땅위의 길을 잇는 또 다른 길이다.
몸의 길과 마음의 길과 땅위의 길. 그 세 갈래의 길을 잇대어 가면서 그는 조금씩 위로, 앞으로, 옆으로, 아래로 나아간다.
합쳐졌던 길을 열어 내는 순간이 그의 자유다… 길은 거기에 몸을 갈아 바칠 때만 길이다.
”쉰일곱 살의 김훈 역시 자전거 페달 위에, 원고지 위에 몸을 갈아 바친다.
◇ 우리 시대 최고의 문장가로 평가 받는 소설가 김훈. 그는 오랜 기자 생활 끝에 편집국장까지 지냈고, 여행 작가와 소설가라는 직함에서도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그런데 최근 나온 산악인 박정헌의 책에 추전의 글을 쓰면서 자신을 '자전거 레이서 김훈’이라고 적었다. |
의정부시 호암초등학교 운동장에 선 엄홍길 동상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다.
“도봉산은 우리 학교 뒷산이다.
산악인 엄홍길은 우리 학교에서 배우고 도봉산에서 자라나 세계에서 가장 높은 히말라야 에베레스트 산에 올랐다.
우리는 모두 높고 푸르고 힘차다.
멀고 높은 곳에 우리는 오를 수 있다.
” 소설가 김훈이 쓴 글이다.
우리 시대 최고의 문장가라는 높은 곳에 오른 그가 배우고 자라난 뒷산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도요새에 바친다’를 읽고 ‘산사람 김훈’을 처음 알았다.
그의 <자전거 여행> 1권에 실린 글이다.
“…낭가파르바트 북벽에 부딪히는 새들은 화살처럼, 총알처럼, 바람처럼 죽는다.
그것들의 시체 위에서 날개 달린 몸으로 태어난 그것들의 꿈은 유선형으로 얼어붙어 있고, 그 유선형의 주검은 죽어서도 기어코 날아가려는 목숨의 꿈을 단념하지 않은 채, 더 날 수 없는 날개를 흰 눈에 묻는다.
낭가파르바트를 동행 없이 혼자서 오르는 과묵한 등반가들이 눈 속에 박힌 새의 시체를 눈물겨워 하는 것은 그 유선형의 주검에서 자신의 운명을 읽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 냄새가 났다.
단지 뛰어난 작가의 화려한 수사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그가 중학교 때부터 인왕산에서 줄을 묶고 바위를 타던 산 사람들과 ‘한 종족’이란 사실을 알기 전이었다.
그리고 엄홍길의 책 <8000미터의 희망과 고독>을 덮기 전 다시 김훈의 글을 만날 수 있었다.
“히말라야 설산에는 길이 없다.
길이란 어디에도 없고, 가야 한다는 생명의 복받침만이 있다.
인간의 앞쪽으로 뚫린 길은 없다.
길은 몸으로 밀고 나간 만큼만의 길이다.
그래서 길은 인간의 뒤쪽으로만 생겨난다.
그리고 그 뒤쪽의 길조차 다시 눈 속에서 지워지는 것이어서 길은 어디에도 없고, 길은 다만 없는 길을 밀어서 열어내는 인간의 몸속에 있다.
몸만이 길인 것이다.
그래서 엄홍길은 제 몸을 밟고, 제 몸을 비벼서 나아간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의 산이 궁금했다.
처음 전화를 건 것은 1년 전이었다.
<자전거 여행>을 펴낸 출판사 측은 그가 해외 출장 중일 것이라고 했지만 그냥 수화기를 들고 벨이 끊어질 때까지 울리도록 내버려두었다.
한 스무 번쯤 울렸을까. 어떤 질긴 놈인지 목소리나 들어보자는 심정인 듯한 사내의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미안하지만 제가 지금 부척 바쁘거든요. 좀 있다가 만나죠…한 1년쯤 뒤에.”참 싱거운 거절 방법이라 느낄 수도 있었다.
그 뒤로 그는 계속 일산에 있는 집에서 임진강가의 노을을 향해 자전거 페달을 밟았고, 나는 이 산 저 산 걸어서 오르내리면서 그를 잊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하루에도 몇 번씩 그의 얼굴과 마주쳐야했다.
북악산을 등에 지고 큰 칼 옆에 차고 광화문 차로에 홀로 선 이순신 동상 주위를 누비는 버스 광고판 속에 그가 있었다.
심지어는 지하철 집표기 위에서도 어김없이 그의 날카로운 눈과 마주쳐야했다.
대통령이 탄핵 당시 읽었다는 소설 <칼의 노래>가 다시 한번 인기가 치솟으면서 출판사의 공세적인 광고가 이어진 것이다.
희끗희끗한 머리카락 위로 모자를 눌러 쓴 그의 얼굴이 아주 익숙해지고 있었다.
거의 일년이 다 되었다는 생각에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그의 집으로 가는 흔들리는 전동차 창가에서 김훈이란 사람에 대해 생각했다.
‘한국문단에 쏟아진 벼락같은 축복’이니 ‘모국어로 쓰인 산문문학의 진경’이라는 요란한 찬사들이 쏟아지는 그의 문장 앞에 기자 명함을 내미는 일은 불편하다.
그는 가장 잘 나가는 소설가라는 ‘직업’ 이전에 기자로 꼬박 27년간이나 ‘지겹게 밥벌이’를 했던 사람이다.
그리고 <시사저널> 편집국장을 지낼 때 동종 매체인 <한겨레21>의 ‘쾌도난담’이란 인터뷰 코너에서 거침없이 내뱉은 말들 때문에 여성계의 비난이 쏟아지자 돌연 사표를 내던지고 소설을 썼다.
그랬던 사람이 한겨레신문사 사회부 기자로 입사해 다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곳에서 1년 간 사건 현장을 신입기자들처럼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 다녔다.
그의 나이 쉰다섯 전후의 일이다.
산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산 아래 일은 굳이 들추어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는 산 말고도 궁금하게 많은 사람이었다.
그가 인왕산에서 정발산으로 간 이유 김훈은 일산에서 8년째 살고 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그가 일산으로 이사를 하면서 일상의 뒷산도 인왕산, 북한산, 도봉산이 아닌 정발산으로 옮겨졌다.
그 산의 높이는 88m다.
그것은 단순한 공간의 이동 그 이상이었다.
일산 시내의 한적한 주택가에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의 집과 마주보이는 건너편 건물 지하에 작가 김훈의 작업실이 있다.
철문이 있는 지하 계단을 내려가 다시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서자 제일 먼저 바닥에 펼쳐진 ‘사레와’제 다운 침낭이 눈에 띄었다.
조금 전까지도 그 속에 들어가 누에고치처럼 편안하게 웅크리고 있었을 그를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바위 산 모양으로 돌멩이를 붙인 한쪽 벽면에는 자전거와 오래된 등산 장비들이 장식품처럼 늘어서 있다.
벽에는 피켈 두 자루가 바위를 찍는 모양으로 걸려 있었다.
낡은 것은 그의 손때가 묻은 것이고 새것에는 엄홍길의 사인이 있었다.
그냥 마구잡이로 쌓아 놓은 것 같아 보이지만 실은 그의 이미지를 한눈에 보여주는 잘 짜여진 풍경화의 구도다.
김훈의 산은 지하 작업실 벽면에 그렇게 박제된 채로 있는 것일까. 왜 걷지 않고 굳이 자전거를 타는지 물었다.
그는 <자전거 여행1·2>란 책을 통해 이미 두 발과 바퀴가 한 몸임을 이야기한 사람이다.
마치 조지 말로리에게 왜 산에 오르냐고 물은 것과 같은 질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전거가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지는 않았다.
“등산은 산이 있는 데까지 가야하지만 자전거는 문을 나서면서부터 바로 시작할 수 있어서 좋아요.”이제는 산도 자전거를 타고 넘는다.
일산에 이사 와서 자전거를 처음 배우고는 “이제 회사 안 다니고 자전거로 밥 벌어 먹고 살겠다”고 선언까지 했다.
그리고 자장면을 나를 거냐 아니면 신문배달을 할 거냐고 걱정하던 아내에게 충직하게 약속을 지켰다.
<자전거 여행> 1권의 인세로 300만 원짜리 자전거 ‘Rocky Mountain’, 2권으로는 800만 원짜리 ‘Treck’까지, 넉넉한 보너스도 챙겼다.
“옥인동 뜀바위, 인왕제색도에 나오는 바로 그 바위에서 처음 바위를 배웠어요. 에코클럽이라고 동네아이들끼리 만든 모임인데, 그 시절엔 산에 다닌다 하면 에코클럽이라고 이름 부치는 게 유행이었어요.”소년 김훈에게 산은 그런 놀이터였다.
입시를 앞둔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도 매주 산을 찾아 다녔다.
바위에 붙으면 따뜻하고 마음이 편안했다.
반대로 무서움이 일면 절대 바위에 달려들지 않는다.
그것은 자전거를 탈 때도 마찬가지다.
비 오는 날이나 무섬증이 느껴지면 절대 길을 떠나지 않는 게 그의 방식이다.
소백산에서 백두대간을 넘어갈 때는 풍기경찰서에 미리 입산 신고를 하고 출발했을 정도다.
칠레를 자전거로 종단하는 게 꿈이지만 이 역시 무서워서 절대 혼자서는 못 떠난다고 했다.
누구에게나 두려움은 있다.
그러나 두려움을 말로 표현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는 글쓰기 역시 지겨운 밥벌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피할 수 없는 밥벌이는 무섭다.
산이 두렵고 밥벌이가 지겹고…. 너무나 명백한 이야기가 그의 언어로 말해질 때 전혀 낯선 것이 된다.
요즘 젊은이들이 국적까지 포기하면서 피해 가려고 하는 군 생활 역시 그에겐 산이 있어서 좋았다.
동쪽 바다가 보이는 산속에서 보초를 서는 일은 행복했다고까지 말한다.
그래서 변하는 산의 빛깔과 향기에 취한 스무 살 청춘은 제대하기도 싫었다.
그만큼 산 아래 일상이 두렵고 견디기 어려웠던 걸까. “산은 우리한테 도덕이나 윤리적 기준을 들이대지 않잖아요. 어떤 기준으로 편을 가르지도 않아요.”‘스스로 그러한 것’이라는 산의 단순함이 그의 마음을 잡아끄는 이유다.
문든 그의 산문집 제목 <너는 어느 편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가 떠올랐다.
그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어느 편이냐고 묻지 마라. 그 질문은 너무 폭력적이다”라고.그러고 보면 기자란 직업은 늘 그렇게 세상에 칼을 들이대는 일인지도 모른다.
당신은 어느 편이냐고 끝없이 추궁하면서서도 자신은 절대 어느 편이라고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는 직업. 왜 기자를 그만두고 소설을 쓰는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기자로서 다 표현하지 못하는 게 앙금처럼 남아 있었어요.”그가 한겨레신문에 썼던 ‘김훈의 거리의 칼럼’은 원고지 2.8매였다.
동인문학상을 수상한 장편소설 <칼의 노래>는 1200매,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단편소설 <화장>은 180매였다.
이제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충분히 쏟아내고 있는 걸까.
◇ 소설 <칼의 노래>를 쓴 그의 책상 한 귀퉁이에 있는 펜이다. 그는 언젠가 모 잡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세상에 펜이 어떻게 칼보다 강할 수 있어. 칼 쥔 놈들은 칼이 강하다고 말 안 해. 왜냐면 본래 강하니까.” 그의 펜은 광화문 네거리 이순신의 무뚝뚝한 무쇠 칼을 한 없이 부드럽고 섬세하게 노래하는 칼로 만들어 사람들 가슴 속에서 울게 했다. |
인간이란 무엇인가
글로 ‘밥을 벌어먹고’, 글로 이야기 하는 사람. 김훈의 글은 이미 최고의 상품이다.
국내 시장을 넘어 프랑스 갈리마르 출판사와 일본 신조사로도 팔려나갔다.
그의 글에 대한 세상의 반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대뜸 “날 싫어하는 사람도 많아요”라는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보수적이다, 남성 우월주의의 가부장적인 마초다, 희망이 없다, 허무주의자다… 그 말 다 맞아요. 그렇지만 나는 그걸 고칠 생각이 추호도 없어요. 어디 내 한계가 그것뿐인가. 나는 수백만 개의 한계 앞에서 매일 같이 엎어지고 고꾸라지는데….”자신에게 칼을 들이대는 말들은 까마귀보고 왜 까마냐고 욕하는 것과 똑같다고 했다.
갑자기 칼날 같이 번뜩이던 그의 눈빛이 불에 덴 상처 때문에 화들짝 놀라는 어린 짐승 같았다.
“난 인간의 삶이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당위에는 관심 없어요. 오로지 인간이 무엇이냐, What is it? 이것에만 매달릴 뿐이에요. 그런 면에서 나는 아주 협소한 작가지.” 그리고는 거대 담론을 다루는 광활한 문학은 이문열이나 황석영씨가 하면 되는 거라고 덧붙였다.
등산으로 치자면 그는 온갖 휘장을 휘날리며 극지법으로 히말라야를 오르는 대규모 원정대의 대장보다는 뜻 맞는 파트너와 달랑 배낭 하나 챙겨들고 거대한 암벽에 매달리는 요세미티의 자유로운 클라이머들을 닮았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높이보다는 눈앞에 직면한 암벽의 작은 바위 돌기와 미세한 틈새에 매력을 느낄 뿐이다.
거대한 벽 앞에 매달려 고작 한 뼘의 높이로 자신의 몸을 끌어올리기 위해 머릿속이 서늘해지도록 아찔한 상태에서 진땀을 쏟아내는 것처럼, 그도 그런 고통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원고지를 메운다(그는 컴퓨터 자판 연습을 ‘미나리’ 수준에서 포기할 정도의 ‘기계치’라고 했다). “산은 꼭대기만 보면 질려서 절대 못 가요. 삶이란 원래 고단한 것이라 생각하면서 밑을 보면서 묵묵히 가면 언젠가 정상에 닿아있어요.”걷거나 자전거를 타거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거벽에 매달린 클라이머들은 결국 자신이 넘어서고 싶은 벽은 인간 내면의 장애물임을 깨닫는다.
그들의 등반이 참선과 수련에서 큰 힘을 얻는 이유가 거기 있다.
문학에 대한 그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산은 본래 그러한 것이지만 등산은 분명 인간의 의지가 개입하는 행위다.
때문에 정상은 하나지만 어떻게 오르느냐에 따라 길이 갈라진다.
그래서 산 아래 세상의 편 가름이 등산의 세계에도 있다.
그러나 김훈은, 역시 어느 편도 들지 않았다.
저마다의 산을 각각의 개별적인 산으로써 존중했다.
호사가들 사이에선 등정주의와 등로주의로 대변되는 엄홍길의 산과 박정헌의 산도 모두 존중한다.
그는 새로 나온 박정헌의 책 <끈>에도 추천의 글을 썼다.
“산악인 박정헌은 수직의 벽에 붙어서 몸으로 길을 열어나간다.
그 길은 마음의 길이고 땅 위의 길이다.
몸은 마음의 길과 땅위의 길을 잇는 또 다른 길이다.
몸의 길과 마음의 길과 땅위의 길. 그 세 갈래의 길을 잇대어 가면서 그는 조금씩 위로, 앞으로, 옆으로, 아래로 나아간다.
합쳐졌던 길을 열어 내는 순간이 그의 자유다… 길은 거기에 몸을 갈아 바칠 때만 길이다.
”쉰일곱 살의 김훈 역시 자전거 페달 위에, 원고지 위에 몸을 갈아 바친다.
출처 : 백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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