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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 피플

[스크랩] 장애인과 소외된 이웃을 향해 헌신하는 성공회 대학교 총장 김성수 주교

장애인과 소외된 이웃을 향해 헌신하는 성공회 대학교 총장 김성수 주교


목소리를 높이지 않아도 울림이 큰 사람이 있다. 김성수(78)총장은 바로 그런 사람이다. 언제나 만면에 웃음을 띠고 다가가 손을 내미는 사람, 소외된 이웃인 장애인들의 대부이자 우리 시대의 큰 스승, 총장직에서 은퇴하면 장애인들과 함께 여생을 보내고 싶다면서 자신의 욕심마저 덜어낸 김성수 총장의 삶은 언제나 싱싱하기만 하다.

글_ 최병일 기자 사진_ 조준원 기자

제대로 심술 한번 내지 못하고 지나가 버린 겨울을 딛고 어느새 봄의 기운이 대지를 뒤덮던 2월 중순. 작지만 아늑한 교정에 김성수 총장이 서 있다. 언제나 그의 미소는 싱그럽다. 벌써 고희(古稀)를 넘어 산수(傘壽, 80세)에 가까운 나이가 되었지만 세월의 흔적은 하얗게 새어버린 머리카락에만 머물다 사라진 듯 보였다. 봄이 성큼 다가온 성공회대 교정을 천천히 산책하는 김 총장은 얼핏 숨이 차는 듯하다.
“혈관이 막혀서 혈관 속에 피가 잘 통하는 수술을 한 지가 몇 달 정도 되었는데도 기운이 없고 다리가 후들후들해요. 아무래도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봐”

학생들에게 ‘할아버지’라고 불리는 총장
단발머리를 한 귀여운 여학생이 멀리서 그를 보더니 “할아버지 안녕하세요”라고 한다. “어, 그래 공부하러 왔구나.” 진짜 손녀인가 싶지만 그럴 리는 없고 아는 사람이냐고 하자 학교 학생이란다. “총장님 하면 거리가 느껴지고 내가 싫으니까 그냥 할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했어요. 거리감도 없고 좋잖아.” 그러고 보니 살짝 장난기까지 느껴지는 미소. 종합대학치고는 작은 학교라는 미덕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교정을 도는 동안 청소하는 아줌마도, 교직원도, 학생도 인사를 안 하는 이가 없다. 그럴 때마다 김 총장의 얼굴도 환하게 밝아진다.
집무실은 1층의 후미진 곳에 위치해 있다. 총장과 부총장실이 맞붙어 있고 두 분의 업무를 돕는 비서가 한 사람 있다. 총장실의 문은 아주 특별한 업무를 보는 것이 아닌 이상 언제나 열려 있다.
“이렇게 총장실 문을 열어놓고 학생들을 기다리는데 잘 오지 않아요. 그래서 교정이나 식당에서 내가 먼저 인사를 하지요. ‘재미있었니?’, ‘밥 맛있었니?’ 묻지요. 우리 기성세대가 모범을 보여야지요. 끼리끼리의 사랑이 아닌 더불어 사는 사랑, 공유할 수 있는 정의를 먼저 실천해야지요.”
그는 총장의 권위를 부려본 적이 없다. 자식 같은 아이들을 위해 군대 간 학생들을 찾아가고, 함께 롤러 블레이드를 타며 학생들에게 다가갔다.
“요즘 세상에서는 돈만 잘 끌어오면 좋은 총장이지만 나는 그런 재주가 없어. 그보다는 사람을 가르치는 총장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우리 학교 교육 이념이 ‘열림·나눔·섬김’인데 학생들 보면 걱정할 거 없어요. 학생 중에는 1년에 자원봉사를 7백 시간 한 학생도 있고, 3년 동안 한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꾸준히 아르바이트한 아이도 있어요. 이런 아이들이 세상을 바꾸는 거지.”
김성수 총장의 고향은 강화도다. 1889년 영국인 선교사가 처음으로 들어와서 활동했던 곳이기도 하다. 당시 드물게 개방적이었던 할아버지가 성공회에 귀의하면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종교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했다. 당시 강화읍에 성공회가 하나 있었는데 새벽 4시에 바가지에 밥을 싸들고 성당을 걸어 다니던 기억이 아직도 선하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는 교육에 대해 지대한 열정을 가진 이였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유치원에 다닐 수 있었던 것도 어머니의 정성 덕분이었다. 초등학교 들어오면서 유명한 개구쟁이였던 김 총장은 공부는 뒷전이었고 특별활동이 중심이었다. 덕분에 보이스카우트와 군사 훈련 대대장까지 특별활동을 했다.

18세 때 폐결핵 앓으며 자연스럽게 목회의 길 걸어
“ 배재중학교 입학 후 해방이 되고 친구들과 아이스하키부를 만들어 창경원 특설 링에서 시합을 했어요. 당시 김구 선생이 자주 경기를 구경하셨는데 기골이 장대하셨고 하얀 두루마기에 중절모를 쓰신 모습이 가슴속에 남아 있어요. 그런 기억 때문인지 나는 아직도 40년이 넘게 중절모를 쓰고 다닙니다.”
승승장구할 것 같던 김성수 총장에게 인생의 큰 시련이 닥쳐온 것은 그의 나이 열여덟 때였다. 배재중학교 졸업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불행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아이스하키 경기 도중 갑자기 각혈을 하고 쓰러진 것이다. 폐결핵 3기였다. 거의 10여 년 동안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쉬게 되었다. 다행히도 온 가족의 정성어린 기도 덕분에 김 총장은 점차 회복되었다. 그렇게 10년이 흘러갈 무렵 어머니는 “네가 아무리 아파도 회복기에 들어섰고, 앞으로는 대학교 졸업장이 없으면 세상에서 아무것도 못 할 거다”라며 공부를 권하기도 했다.
그 당시 그는 성공회 교회의 빈 방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그 교회가 운영하는 고아원이 있었다. 그가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모습을 보고 일하는 아주머니들이 “시몬은 신부님이 되면 좋겠다”고 말하곤 했다. 그 말이 그의 운명을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연세대 신학과를 수료한 후 그는 성공회 신부가 되기 위해 ‘성미가엘 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성미가엘 신학교’에 재학 중 탄광촌과 영산강 간척사업 현장을 찾았다. 노동자의 삶을 알기 위해 위장 취업을 한 것이다.
이후 그는 성공회대학교 내 정신지체장애 어린이학교인 ‘성베드로학교’를 맡게 됐다. 이들이 졸업한 뒤 오갈 곳이 없게 되자 선친으로부터 받은 강화도 온수리 땅에 정신지체장애인 직업생활공동체인 ‘우리마을’을 만들게 되었다. 장애인과의 삶은 이때부터 본격화되었다. 그는 “‘성베드로학교’ 교장과 ‘우리마을’ 원장을 맡아 10여 년 동안 정신지체장애인들과 함께 생활할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운이었다”고 당시를 회고하기도 했다.
평생 동지인 아내 프리다 여사와는 1964년 성공회 신부 서품을 받고 일본에 갔다가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당시 프리다 여사는 영국에서 온 선교사였다.
“일본도 올림픽을 하기 전까지는 우리랑 사정이 거의 비슷했어요. 시골 청년들을 교회로 불러모으고 예수를 믿게 하고 편의시설도 제공하고 그랬죠. 거기 가서 청년 문제 세미나를 하다 만나게 되었지요. 그때는 영어를 잘 못해서 그야말로 손짓 발짓 다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어떤 분은 우리 두 사람 사이의 로맨스를 생각했는데 솔직히 그때는 결혼할 생각도 없었고, 이성으로 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별 느낌이 없었어요. 프리다는 일본 사람들이 키가 작아서 모두 눈 아래로 보였지만 내가 처음으로 자기 눈 위로 보여서 선택하게 됐다고 웃곤 하지요.”

영국 선교사였던 아내와의 운명적인 만남
김 총장은 원래 결혼하지 않는 수사가 되려고 했다. 일본 수사원에서 한국에도 수사원을 만들자고 하다 거절당했고 결국 프리다 여사를 만나는 계기가 된 것이다. 프리다 여사는 일본에서 오랫동안 선교사 생활을 했지만 과연 한국에서 결혼해서 살 수 있을까 고민이 되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 김 총장과 프리다 여사는 고향인 강화도 전등사의 조그만 방에 머물렀는데 절이라 화장실도 꽤 멀고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의외로 프리다 여사는 별로 불평불만을 가지지 않고 다 좋다고 선선히 말했다는 것이다.
“나중에 결혼해서 영국 장인어른 댁에 가보니 웬체스터에서도 멀리 떨어진 작은 소읍이었어요. 버스가 하루에 두 번 들어오는 곳이었고 서양인데도 바깥에 변소가 있는 집이 제법 있는 그런 동네였죠. 그러다 보니 한국에서의 삶이 그렇게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 같아요.”
당시로서는 드문 국제결혼이다 보니 양쪽 집안에서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지만 두 사람이 사랑하는 것을 알고 결국 진정이 돼서 정동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의 결혼식에는 평소부터 알고 지내던 연예계 동생들인 조영남, 송창식, 윤형주 등이 와서 축가를 불러주기도 했다.
그렇게 동양남자와 서양여자가 만나 알콩달콩 살아온 지 벌써 30여 년. 하지만 그는 가정에서 훌륭한 남편과 아버지는 되지 못한 것 같다고 겸연쩍어 했다.
“여러 번 이야기한 적이 있지만 난 가정교육은 빵점이에요. 집사람? 거기도 빵점이지. 우리는 동서가 합친 가정인데, 좋은 게 있는 반면에 그만큼 나쁜 것도 있어요. 전통적인 한국 개념으로는 아이들 과외도 좀 시켜야 되고, 공부하라고 잔소리도 해야 되는데 아내는 왜 그런 걸 시키느냐고 하는 거야.”
정신지체아를 위한 ‘장난감도서관’으로 유명한 ‘레코텍’을 연 프리다 여사는 우리나라 특수교육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의 큰 어른과 특수교육의 선구자와의 결합이지만 아무래도 교육과 관련해서 조금은 삐걱거렸나 보다. 하지만 결국 아들 용이(34) 씨와 딸 빛나(33) 씨 남매의 교육 문제에서 승리를 거둔 쪽은 프리다 여사였다. 김 주교는 아침 6시에 미사를 준비하고 밤 12시 통금이 되어서야 집에 들어오니 교육은커녕 아이들을 제대로 볼 시간조차 없었던 것이다.
“한창 여러 가지 일로 바쁠 때였는데 아들 녀석이 그러더라구요. ‘아버지, 집이 여관인 줄 아세요?’하하하. 그만큼 해야 할 일들이 많았지만 한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합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아이들이 ‘혼혈’이라는 것이었다. 용이 씨는 군 입대 신체검사에서 탈락했다. 김 총장은 그제야 비로소 아이들이 겪었을 어려움을 짐작했다.

“장애인들의 재활 돕는 병원 건립이 남은 꿈”
“사춘기에 혼혈아라는 게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됐을 거예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가와서 아이들을 만져보기도 했으니까. 아버지가 데리고 나가서 자장면도 사주고 다독거리면서 아이들 얘기를 듣고 했어야 하는데…. 모든 문제는 나한테 있었던 거예요.”
사실 용이 씨는 고등학교 시절 부모 속을 심하게 태운 케이스였다. 학교를 주름잡는 요즘 말로 일진격인 ‘주먹대장’에다가 선생이 싫으면 교과목도 싫어서 공부를 안 하는 고집쟁이기도 했다. 그러다 한번은 큰 사고를 치고 말았다. 용이 씨가 한 아이의 뺨을 한 대 쳤는데 그만 고막에 이상이 생겨 아이 어머니가 치료비를 받으러 온 것이다. 어지간한 김 총장도 이때만은 화가 나서 회초리가 부러지도록 호되게 야단을 쳤다.
그러면서도 공부에 대해 무어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자신을 닮아 놀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부모의 믿음만큼 커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면서 변화의 계기가 찾아왔다. 언제나 꼴찌를 도맡아 하던 용이 씨가 우연히 상위권의 성적을 받더니 그때부터 작심해서 공부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학교에 제일 먼저 나오고 밤늦게 들어가니까 수위 아저씨가 ‘용이 학생, 좀 천천히 와’ 할 정도였대요. 그렇게 1년 동안 열심히 하더니 연세대 체육과에 붙어서 결국 교수가 됐고…. 그런 걸 보면 집사람이 나보다 더 아이에게 믿음이 많았던 게지.”
이후 용이 씨는 모 대학의 교수를 역임하는 등 학자의 길을 걸었다.
“착실하게 교수로서 살아갈 줄 알았더니 이 녀석이 골프장의 매니저로 들어갔어요. 하하하. 워낙 자신만의 길을 고집하니까 아버지로서 조금 아쉽지만 어쩌겠어요. 자신이 좋아한다는 데야 말릴 길이 없죠.”
활달하고 외양적인 성격 같지만 김 총장은 지금까지 아내에게 살갑게 다가가 ‘사랑한다’는 말을 해준 기억이 없다고 한다. 표현하기를 좋아하는 프리다 여사의 유일한 불만이 그 부분이라고 한다.
“밖에서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다 보니 집에 오면 막상 말이 없어져요. 이제 나이도 들고 했으니 아내에게 사랑한다는 말도 많이 해줘야지요.”
벌써 인생의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그는 아직도 자신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지난 시절 크게 양심에 꺼리는 일을 저지르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겸손해한다.
“앞으로도 그래요. 나이 들어 다른 이들에게 책 잡히는 일 하지 않고, 좀더 겸손해졌으면 좋겠어요. 1백40만 장애환자를 위한 푸르메재단이 준비하는 재활전문병원을 세우는 것이 남은 삶의 목표 중 하나입니다. 병원이 세워지면 장애환자들이 마음놓고 생활할 수 있게 되겠지요.”
총장실 너머에서 기웃거리던 햇살이 어느새 안까지 들어와 김 총장의 얼굴을 감쌌다. 푸근한 미소 사이에 깃들인 햇살처럼 그가 소망하는 아름다운 세상이 온 세상에 퍼지기를 기원해본다.

출처:  퀸

출처 : 꿈 꾸는 정원에서
글쓴이 : 희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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