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문주장군의
지휘로 1236년 몽고군의 제3차 침입을 격파한 죽주산성은 국 사봉으로 이어지는 한남정맥의 요충지에 자리해 있다.
안성의 역사와 문화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는 그 치열한 우국충정의 발원지 를
살펴보기 위해 역사탐방 산행을 하였다. 한남정맥이 시작되는 한남금북 정맥의 분기점 덕성산을 시발점으로 칠현산, 칠장산, 도덕산을 종주하는
데 는 4시간 여의 시간이 걸린다.
신라말 후삼국의 정립기, 새로운 민족사의 여명 고려 태동의 역사적 당위성 을 되짚어
음미하며 걷다 보니, 수려한 안성의 산하를 말해주는 금광저수지 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한남정맥의 모유(母乳)를 고스란히 간직한
금광저수 지는 안성평야를 적시는 안성천의 발원지일 뿐 아니라 안성인 저항정신의 옹달샘이다. 이어 저 멀리 죽주산성이 시계에 잡힌다.
국사봉으로 이어지 는 한남정맥의 요충 죽주산성! 신라말기 농민봉기를 주도한 안성인 기훤(箕 萱)의 호탕한 웃음이 들리는 듯
하다.
신라 중앙정부의 세금 독촉에 시달리다 못한 안성 일원의 농민들이 죽주에 서 이들의 억울함을 달래주고 있는 기훤의 처소로
몰려든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어느덧 수천의 무리를 이루니 그도 당당한 반란의 주역이 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상주지방의
원종과 애노, 원주의 양길, 완산의 견훤, 죽주의 기훤이 반란군의 두목이 되는 역사적 전환기였다. 죽주지역 농민 저 항을 주도한
기훤에서 엿볼 수 있듯이, 역사의 격동기마다 그 안성인들은 치열한 저항정신으로 살아 있는 민중의 애환을 터트려왔다. 송문주 장군의
죽주산성 전투에서 안성인은 또 한번의 저력으로 몽고군의 침략을 저지했 고,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의병 항쟁지로 그 절정을 이루었는가
하면, 일제 강점기 드디어 구국의 횃불로 타오른 안성인의 3·1운동으로 승화되었다. 고려말기 13세기로 거슬러 올라가 몽고의 제
1차 침입때 몽고군 총수 살리 타이가 거느린 침략군을 귀주에서 저항한 안성인 박서(朴犀)의 모습을 떠올 려
본다.
1231년(고종 18) 몽고군은 오늘날 장갑차와 유사한 루차를 만들어 소가죽으 로 덮어씌우고 그 안에 군사를 감추어 성
밑에서 터널을 뚫어 공격을 했 다. 박서 장군은 이에 적들의 계획을 손바닥 보듯 꿰뚫어 용광로에서 펄펄 끓는 쇳물을 쏟아부음으로써
저들의 장갑차를 불태워 무용지물로 만들었 다. 귀주성 포위 30일의 항전, 적들이 기진맥진으로 물러감으로써 승리를 장식한 박서
장군, 그의 고향이 안성이다.
귀주성 항전 후 5년이 경과한 1236년(고종 23) 9월, 만추의 햇살이 눈부신 죽주산성
성곽위에 방호별감의 깃발이 서북풍에 나부끼고 있다. 몽고군의 제 3차 침략은 죽주산성을 지키는 송문주 장군에 의해서 또 한번 좌절의
고 배를 맛보아야 했으니 안성인, 그 치열한 우국충정의 현장 죽주산성의 전투 를 보자.
충주로 직충하는 그들의 주력부대가
전략적 요충인 죽주산성을 철통같이 포 위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 죽주산성을 포위한 몽고군의 치열한 공격은 귀주성 전투와 흡사하게
전개된다. 몽고군의 남진을 예고한 송문주 장군의 지휘로 죽주지역 백성들은 식량과 수성 장비를 가지고 죽주성으로 속속 모 여든다.
때는 비록 9월이라고는 하나 노염(老炎)이 기승을 부리는 늦더위 가 한창이다. 공격은 어려우나 수성에는 느긋한 계절이다. 남부지역의
교통 요지로 일찍부터 상업이 발달한 고장, 물산은 풍부하고 주민들은 씩씩했 다. 적의 침공로를 눈 아래 조망하는 죽주성의 위치는 가히
천험의 요새 다. 적의 주공격 지점인 동문은 가파른 계곡에 철옹성으로 버티어 있고 남 문 역시 죽주현을 손바닥 보듯 내려다보는 곳에
역시 험준한 벼랑을 방패삼 듯 난공불락의 요새다. 여기에 성내는 양식이 풍부하고 샘물이 철철 넘쳤으 니 한판승부를 겨루어 볼만한
전략적 기지다.
때를 기다리는 송문주 장군의 여유와 일사불란, 전투를 지원하는 안성인의 투지가 성내의 분위기를 압도하는
죽주성 동문루에서 공격신호를 알리는 방 호별감 송문주 장군의 깃발이 펄럭인다. 몽고군의 대포 공격과 고려군의 수 비전황은 순식간에
고려군의 공격과 몽고군의 수비로 전환, 포성은 진동하 고 문루는 불길에 싸인다. 고려군의 맞포격이 불을 뿜는 가운데 수성장비 로 쌓아
두었던 암벽이 폭포수처럼 가파른 계곡을 강타하면서 삽시간에 적 진을 유린한다.
귀주성 전투에서 당한 몽고군의 전력이다. 저들은
공성의 비책인 기름을 준 비하여 짚에 뿌리고 불을 놓아 화공을 시도한다. 그러나 성중에는 풍부한 샘물로 화공을 제압할 만반의
대비책이 있었으니 바로 진흙을 물에 개어 던 지는 진흙 방화작전이었다. 불길을 잡는 기민한 안성인의 저항에 속수무책 일 수밖에 없는
몽고군, 결국 그들은 끈질긴 안성인의 저항정신에 지칠 대 로 지쳐 15일간의 공격을 스스로 포기하고 퇴각하기에 이른다.
갑옷을
풀어헤치고 흐르는 땀을 식히는 병사들의 휴식이 한창일 때 소리없 이 다가가 등을 두드리는 송문주 장군의 미소, 샘물 가에서 군졸들의
갈증 을 풀어주기 위해 막걸리를 거르는 안성 아낙네의 바쁘게 돌아가는 손길에 서 안성인의 저항정신은 죽주성의 샘물처럼 마르지 않고
생명의 물줄기를 이룬다. 그리고 256년 후인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드디어 도도한 의 병 정신으로 용솟음쳐 안성
산하를 적신다.
“선묘충신 조 통훈대부병조정랑 증숭정대부의정부우찬성겸판의금부사오위 도총부도총관홍자수지려-상지즉위 이십오년
임진명정(宣廟忠臣 朝 通訓大夫 兵曹正郞 贈崇政大夫議政府右贊成兼判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洪自修之閭- 上之卽位
二十五年壬辰命旌)” 임진의병장의 생애가 400여 년 변함 없이 역사에 푸르게 숨쉬고 있는 안성 시 미양면 갈전리 홍자수 충신정려각의
현판이 옛 모습 그대로 과거의 역사 를 의연하게 증언하고 있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고향을 지키고자 분 연히 의병을 모집하여 내
고장을 수호한 의병장 홍자수 선생의 우국충정 절 절한 호소를 보자.
“부사직으로 있었던 나 홍자수는 통곡하면서 호서열진 여러
장군들의 휘하 에 널리 애원한다. 나라의 운명이 불행하여 섬나라 왜놈들이 내륙에 쓸려 들어오고 서울을 수호치 못하여 임금은 서쪽으로
가시고 <중략> 자수는 비 록 들에 사는 촌사람이나 나라의 환란을 당하여 분함과 치솟는 원한으로 마 음이 터질 듯하여 우리
아이들과 생질 이덕남으로 더불어 의병 천명을 모 아 나라의 수치를 씻고 강토를 회복코자 하니 힘을 합하여 원수 갚기를
원 하노라.”
임진년 초여름 고향인 서운면 양촌리에서 아들 4형제 진(震), 제(霽), 전 (電), 뢰(雷)와 서자인
계남(季男) 그리고 외생질인 이덕남(李德男)을 거느 리고 나무를 깎아 기를 만들고 가마솥을 녹여 병기를 만든 다음 격문을 인 근에
전하여 의병을 모집하니 15일 못되어 수천의 의병이 운집하였다.
1592년 4월, 부산에 상륙한 왜군중 충주에서 합세한 소서행장과
가등청정 의 부대는 곧바로 진천을 거쳐 호서의 요충인 안성을 유린한 후 용인을 지 나 서울로 직충할 계획이었다. 홍자수, 그는
누구인가. 남양 홍씨의 후예 로 안성지역 선비의 표상이었다. 무용이 출중한 서자 계남으로 하여금 왜적 이 통과하는 협곡인 진천~안성간
엽둔고개에서의 기습요격을 위해 서운산 정상에 산성을 축조토록 한다. 그리고 외생질인 이덕남에게는 왜적이 통과 할 수밖에 없는 양성면
덕봉리(지금의 미양면 구수리)에 토성을 구축하도 록 해, 서운산성과 기각지세를 형성하는 전투태세를 마련한다.
“병사로 서운산
정상에 산성을 쌓아 안성, 양성방면의 여러 읍을 내려다보 는 곳에 의병을 배치 적진을 살피며 동서로 유격전을 전개 무수한 적을
참 살했다(兵築壘於項府臨陽安數邑之地屯兵何賊東西擊多斬殺賊-國朝寶鑑)”
엽둔고개에서 북상하는 적을 대파한 여세를 몰아 지금의
서운면 목촌에서 밀물처럼 밀려드는 적을 막아내며 안성지방을 보전했던 초야의 선비 홍자 수 선생은 끝내 격전의 현장에 몸을 던져 생질
이덕남과 함께 장렬한 전사 로 생을 마감한다. 또한 비록 격전의 현장은 달리했으나 안성군 고삼면에 서 의병을 일으켜 죽산 전투에서
전사한 김충수(金忠守) 의병장과 그의 아 들 김함(金涵)의 생애 역시 우국충정이 끓어 넘치는 안성인의 기질이다. 4 형제와 서자,
외생질을 함께 거느리고 의병항쟁을 주도한 홍자수 선생의 정 신과 김충수의병장 부자에서 우리는 안성인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그 치열 한
우국충정, 애국의 열정을 오늘에 재음미하는 소중한 역사의 향훈에 젖 어 본다. <강대욱 (경기문화재단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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