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인지역
사람들이 예전부터 신성시하던 곳으로 보개산 또는 석성산이라고 하는데 정상에 올라서면 서쪽으로 신갈과 수원이 한눈에 들어오면서
석성산 성 일부와 정상 부근에는 화성의 봉돈과 연결되는 봉수대 터가 있다.
◇마애불이 바라보는 미륵들판
안성의 칠현산에서 시작된 한남정맥은 삼죽면의 국사봉에서 북쪽으로 방향 을 틀어
용인의 백암면과 경계를 이루며 서북쪽으로 나아간다. 경기 남부 의 등뼈를 상징하듯 굵고 확연하게 이어가던 한남정맥은 그러나 여기에서
능선을 놓치게 한다. 안성의 어느 공원묘원 납골당 조성 공사로 능선 자체 가 흐지부지해진 까닭이다. 드넓은 묘원 중 하필이면 정맥에
납골당을 앉히 는 이유가 무엇인지, 능선을 훼손하여도 명당이 되는 것인지, 복잡한 머리 를 정리하다 보니 구봉산을 거쳐 용인 원삼면에
이른다.
원삼면 소재지에서 서쪽으로 10리쯤 떨어진 곳에 한남정맥 문수봉이 있다. 여기서 동북 방향을 바라보면 건지산이
보인다. 건지산성과 봉수가 있어 용 인을 지켜주던 곳이다. 지금은 골프장과 스키장 등이 들어서 생활에 찌든 현대인의 때를
벗겨주리라.
또한 문수봉과 건지산 사이에는 맹리토성(행군리토성)이 있는데 만약의 경 우 이 고장 사람들의 은신처가 되었겠다.
이 주변엔 제법 너른 들이 펼쳐 져 있어 생산력이 높았을 것이고, 그래서 지명도 미륵들판이라는 미래 지향 적인 이름으로 불렀다.
거대한 석불입상(4.3m) 때문에 생긴 지명일 터인 데 유식하게는 미평리(彌坪里)라고 한다. 안성 지역에 산재한 미륵들과의 연관성도
생각하게 하는데 설명판에는 '…얼굴은 신체에 비해서 큼직한 편 이며 비만스럽게 보이고… 지방 장인의 미숙한 솜씨가 보인다'고 하였다.
과연 그럴까? 불상의 얼굴은 인체와 비례할 수 없다. 더구나 거대한 불상 일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불상 아래에서 절하고
일어나면서 우러러 볼 때 를 계산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불상의 발을 별도로 조성한 것과 고 개를 오른쪽으로 약간 꺾어지게
조성한 것에 있다고 할 것이다. 지방 장인 의 미숙한 솜씨가 아니라 한 단계를 뛰어넘는 수준이 아닐까? 가뜩이나 엄 숙하고 신성한
불상인데다가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이 없다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 불상이 불상으로 머무르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불상 에 공덕을 드리고 한 바퀴 돌다 발을 보면 그만 불상의 비밀을 알게 된다. 또 머리가 삐딱한 것이 꼭 사람 같다. 이후로는
왠지 이 불상이 자신의 모 든 소원이나 하소연을 들어줄 것처럼 만만해진다. 엄숙해야 할 종교적 신앙 이 생활 속으로 파고드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문수봉 정상 아래에는 2구의 마애보살입상이 있다. 마애보살 아래쪽에 절터 가 있고 시원한 샘물이 나오는데 문수사
터라 한다. 그렇다면 지혜의 보살 인 문수보살을 바위에 양각한 것일까? 불교 유적이 많기로 유명한 경주 남 산에 내놓아도 손색 없을
마애불들이다. 나란히 서서 미륵뜰과 맹리토성, 건지산을 바라보고 있으니 정맥 지킴이라도 되는 듯하다. 특히 오른쪽 마애 불은
희미하지만 지적인 얼굴과 그윽한 분위기를 띠고 있어 뭇 사내들의 마 음을 꽤나 사로잡았을 것 같다. 사람이 바위를 쪼아서 만들어낸 것이
아니 라 바위 속에 들어 있는 부처가 밖으로 나온 듯이 자연스러우면서 아름다 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이 마애불들은 한남정맥에 있으나
금북정맥의 안 성 석남사 마애불과는 산길로 이어지고 있다. 백두대간의 속리산에서 한남 금북정맥으로 뻗어 오다가 안성 칠현산에서 두
갈래로 갈라져 하나는 한남 정맥, 하나는 금북정맥으로 나뉘었으니 결국 같은 등줄기인 셈이다.
용인시내 용인대학교 뒷산이
부아산이다. 한남정맥이 용인시내 남쪽을 낮 게 흐르다가 우뚝 솟은 산인데, 이 산 남쪽에 고려자기 가마터로 유명한 이 동면 서리가
있고 서리에서 또 남쪽으로 내려가면 남사면이 되는데 이 면 에 고려 때 몽고군을 물리친 처인성이 있다. 용인이라는 땅 이름 중
'용'자 는 용구현에서, '인' 자는 처인현에서 따 왔으니 용인을 말하는 데 있어 빼 놓을 수 없는 고을이다. 더구나 몽고군의 거센
말발굽을 저지시킨 곳이어 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곳이다. 그러나 역사의 자취는 이렇게 쓸쓸해야만 하 는 것일까? 여기저기 나뒹구는
쓰레기가 오늘을 대변하고 있다. 다만 처인 성을 주제로 한 연극을 하는 등 최근 들어 불고 있는 '처인 바람'에 한 가 닥 희망을
걸어본다. 미래에 되새길 용인의 정체성은 '처인'의 항몽 정신에 서 큰 줄기를 찾아야 할 것 같기 때문이다.
◇신성한 산
석성산의 봉수와 성
한남정맥은 부아산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용인의 진산인 석성산을 만들 어 놓았다. 영동고속도로 마성터널이
있는 곳이다. 이 산을 보개산(寶盖 山) 또는 성산(聖山)이라고도 하는데 이 지역 사람들이 예전부터 신성시 하 였던 산이라고 한다.
이 산에 묘를 쓰면 가뭄이 들거나 재앙이 닥친다고 하 여 묘를 쓰지 못하게 했는데, 어쩌다 심한 가뭄이 들면 누군가가 몰래 묘 를 쓴
탓이라고 하여, 주변 마을 사람들이 횃불을 밝혀서라도 온 산을 샅샅 이 뒤져 암장한 묘를 파헤쳤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보개산성은 석축이며 주위는 2천529척이었는데 지 금은 모두 무너졌다'고 쓰여 있다.
그래서인지 동문으로 보이는 흔적과 통 화사 경내에 성벽의 일부가 남아 있을 뿐이다.
석성산 정상에 올라서면 서쪽으로 수원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 언저리에 봉 수대가 있었다는데 지금은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안성의 망이산에서 용인 의 건지산을 거치고
석성산에서 성남의 천림산을 경유, 서울로 가던 봉수로 라는 기록이 '세종실록지리지'에 있다. 이는 부산의 동래를 출발하여 서울 에
닿는 제2로의 직봉 가운데 하나였다. 또 조선 후기에 화성이 건설되면 서 석성산 봉수는 화성의 봉돈에 전달되는 중요한
봉수였다.
이 산은 사주팔자를 그렇게 타고났는지 정상 옆에 국군 통신대가 자리하고 있어서 예나 지금이나 통신 수단으로
요긴하게 쓰이고 있다. 정상에서 50여 m쯤 내려오면 돌샘이 있고 주변에 석축을 쌓아 대지를 마련한 제법 넓은 터전이 나온다.
봉수군들이 거처하는 집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이 석성산에서 북쪽으로 건너다 보이는 산속에 노고성이 언뜻언뜻 보인다.
할미산성 혹은 노고성(老姑城)이라고도 부르는데 에버랜드 인터체인지 바 로 옆 산에 있다. 석성산성과 협력하면 적들을 충분히
제압할 수 있는 요새 라 할 것이고 병자호란 때 경상감사 심연(沈演) 등이 적들을 제압한 것으로 도 이 요새는
증명되었다.
◇산 많고 물길 많은 고장
안성에서 뻗어온 한남정맥은 용인에 이르러 사방으로 갈라진다. 여주로 가 서
북성산이 되고, 광주로 가서 남한산이 되는가 하면, 주맥은 용인·수원 의 광교산을 거쳐 북으로 청계산과 관악산, 서쪽으로 수리산과 소래산을
이 루게 하면서 김포 문수산을 향해 달린다. 그래서 경안천, 탄천, 오산천 등 의 발원지가 되는 곳도 용인이다. 이는 곧 용인땅의
대부분이 여러 구릉으 로 짜여졌다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구릉이 많다 보니 두 가지 특이한 현상 이 발생되는데, 하나는 전통시대
사거용인(死去龍仁)을 낳게 한 묏자리의 발달이요, 또 하나는 개발시대를 연 골프장의 발전이다. 수도와 가깝고 교 통이 편리하다는 점
외에도 골프장이 들어설 만한 입지를 지니고 있어서인 지 전국 지방자치단체 가운데 가장 많은 골프장을 보유한 곳도 용인이다.
그러나 요즘엔 난개발 시비를 불러일으키는 것에서 보듯이 아파트와 전원주 택이 많이 들어서고 있어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산천을
느낄 수 있다. 또 한 어차피 시대에 따라 변화해야 하는 것이 산천의 순리라면 보다 발전적 인 방향으로 변화해가는 용인을 기대해
본다.
<특별취재반> 글=염상균·문화재답사 전문가 사진=조형기기자 강대욱·경기문화재단
편집위원 윤한택·기전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 정승모·지역문화연구소장 박상일기자 유주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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