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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다시보는 경기산하 - 용인] 역사의 굴곡·상처 보듬은 '안식의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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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가 한반도의 중심부라면 용인은 경기남부의 중심부라 칭할 수 있다. 오
산천과 탄천 등 6개의 주요하천이 젖줄처럼 뻗어가는 고향같은 곳, 그 곳
용인의 중심지 김량장리가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더니 경기 산하에 몸을 실은 한남정맥 탐사반의 발
걸음에 속도가 붙기 시작하였다. 국사봉을 뒤로 하고 가현치를 가로질러 천
주교 수원교구 공원묘원이 까뭉개버린 347.2m 봉우리 정상을 에돌아 달기봉
을 거쳐 구봉산에 선다. 이 지점에서 왼쪽으로 한천, 오른쪽으로 청미천,
다시 문수봉에서 왼쪽으로 진위천, 오른쪽으로 경안천, 계속하여 석성산에
서 왼쪽으로 오산천, 오른쪽으로 탄천이 흘러 왼쪽으로는 서해바다로, 오른
쪽으로는 남한강으로 들어간다. 그 입지로 보아 경기가 한반도의 중심부라
면 용인지역은 경기남부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하여 한남정맥은
이 구간을 뼈대로 하여 주요 6개의 하천이 젖줄처럼 뻗어 있고 그 군데군
데 고삼저수지, 어비리저수지, 이동저수지, 신갈저수지, 사암저수지 등 수
원지를 이루면서 안성, 평택, 오산, 수원, 광주, 이천, 여주 등 방면으로
그의 넉넉한 생명수를 공급하고 있다. 그러니 용인은 경기 남부 이웃 고을
의 어머니, 고향 같은 곳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조선후기 용인은 이 길로의 선구적 구도자와 탁월한 경륜가 한 사람씩을
그 대지에 품으며 약탈적 성장의 마지막 구비를 향한 사활적 경쟁에 돌입하
였다. 구봉산의 지맥인 조비산 아래 엎드려 계신 실학의 비조 반계 유형원
선생과 문수봉의 북쪽 평야 경안천 상류의 언덕배기에 누워 못 다 이룬 꿈
몰아 쉬고 계신 번암 채제공 선생이 그 분들이시다.

개항, 청일전쟁, 노일전쟁으로 이어지는 거센 외세의 도전 앞에서 두 분의
전망과 노력이 차츰 빛을 잃어가는 가운데 그 불씨를 지켜가던 갑오농민전
쟁, 의병전쟁 과정에서 용인지역도 그 대오에서 빠지지 않았다. 동학 직곡
접주 이용익, 김량접주 이삼준, 죽산부 농민 우성칠 등 농민군과 양지군
전 농상공부 주사 임옥여, 죽산부 농민 정주원, 모현면 해직군인 이익삼이
이끄는 의병부대가 국권 수호를 위해 투쟁하였다.

거족적 항쟁도 헛되이 강도 일본 앞에 굴욕적으로 무릎을 꿇던 날, 임오군
란·명성황후 시해사건으로 그 영욕을 이어오던 민씨 가문의 대신 민영환
이 자결로 봉건 세도가의 죄값을 치르고 석성산 아래 탄천 벌에 뼈를 묻었
다. 반면 그의 식객이던 송병준은 갑신정변의 주모자 김옥균의 자객으로 도
일했다가 친일파로의 길을 잡은 뒤 마침내 을사오적으로 일제 하에서 부와
명예를 도둑질하였다. 그렇게 그의 주군이 묻힌 용인 땅안 지척거리인 양지
면에 호화별장을 짓고 부끄러운 한 세대를 보냈겠거니 하며 바라보니 지금
도 30여개의 행랑채가 남아있고, 무슨 호화 요정으로 쓰였을 법한 경내에
는 교회와 연립주택이 들어서 묘한 느낌을 자아내고 있다.

이후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으로 의병의 씨를 말리고 ‘토지조사사업’
으로 수탈을 위한 정지작업을 마치면서 일제의 식민지 지배는 노골화되어
갔다. 용인 지역에서도 구 황실 재정원이었던 궁장토, 역둔토를 조선총독부
가 강탈하여 동척, 가토 농장 등 일본인 대지주에게 불하하였다. 그런 가운
데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 쟁탈 전쟁이 제1차 세계대전으로 폭발하자 러시
아에서는 소비에트 권력이란 새로운 세계사적 실험이 시작되고 이어 식민
지 민족해방투쟁이 고양되어갔다.

3·1운동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 아래서 터져 나왔고, 용인군내 전체 지역에
서도 민족대표, 지식인, 종교인, 청년학생, 농민, 노동자, 소부르주아지,
양반 유생 등 다양한 계층이 참여하였다. 그 결과 국내에서는 ‘문화통치’
란 기만 전술이 유포되는 가운데, 김혁 등은 만주로 싸움터를 옮겨가고 있
었다.

제국주의 진영이 세계대공황을 맞자 일제는 다시 제2차 세계대전을 도발함
으로써 이를 돌파하려 하였고 농민, 노동, 청년 운동은 신 사조의 도입, 적
색 농노조의 결성 등 혁신의 길을 모색해갔다. 동척농장에서의 소작료 불납
동맹 결성을 통한 투쟁, 용인수리조합 노동자·경동철도(수여선) 노동자 투
쟁, 백암청년회를 비롯한 각 청년단체의 야학 운동 등이 이러한 추세를 반
영한 용인 지역에서의 대표적 사례다. 적산불하와 농지개혁을 통하여 용인
지역에서도 농지 분배가 이루어졌지만, 절반 정도가 농지 분배 대상에서 빠
졌을 뿐 아니라 가격 정책, 조세 정책의 실패로 농가 경제는 악화 일로를
걸어갔다. 게다가 분단과 한국전쟁을 통하여 전 민족적으로 막대한 물적,
인적 피해를 당한 가운데 용인에서도 인구의 14%에 달하는 전쟁 재해민이
발생하였다.

일제, 미군정, 이승만 정권의 깊고 깊은 수렁을 헤치고 창조적 균형을 향
해 나아온 자주적 통일민족국가 건설의 꿈은 4·19 혁명과 5·16 쿠데타에
의해 또 한 굽이의 우회로를 거쳐가게 된다. 중앙집중화가 심화되고 수출주
도형 경제성장 정책이 추진되면서 용인 지역에서도 영세농가가 대량으로 이
농하게 되고, 제조업 인구의 증가 현상이 나타났으며 경부고속도로, 영동고
속도로 개통으로 땅 투기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상징적으로는 세원의 중심지가 진위천 유역의 쌀 생산지 남사들에서 산업
의 쌀이라 불리는 반도체를 생산하는 오산천 유역의 기흥읍 농서리로 이동
하였다. 또한 탄천 유역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아파트 단지와 향린 동산, 원
삼면 제일리 등의 호화 전원주택 단지들이 들어서는 한편에서는 구석구석
들어선 중소기업체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이 생존과 생명의 위험을 일상적으
로 안고 고단한 몸을 누이고 있었다.

그날 그 일요일 한남정맥 용인 초입 구봉산 기슭 태영 골프장, 둥지 마을
을 거쳐 원삼면 죽릉리 청룡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어스름이 기어들고 있었
다. 가게 앞에 사과 궤짝으로 임시 술상을 차린 뒤 근처 텃밭에 물을 주고
있던 지천명의 동네 아저씨를 불러 막걸리 한 잔 건네며 골프장 건설 반대
투쟁 때의 일화를 듣는 동안 초등학교 3학년 짜리 늦둥이 외동아들은 안주
로 놓인 고구마깡이 먹고 싶어 주위를 빙빙 돌고, 가게 앞에 걸린 공중전
화 박스에선 연변에서 왔을 법한 두 아가씨가 타향 아닌 타향에서 고향 아
닌 고향의 가족들과 주린 정 나누느라 수화기를 놓을 줄 모르고 있었다.
살아서는 황금의 우상, 죽어서는 종교의 우상으로부터 소외된 우리네 이웃
들, 바로 그러하기에 찬 이성, 더운 가슴으로 밖에 남을 수 없는 구국의 혼
이 되어 용인 하늘 아래를 하염없이 떠돌리라. 왔던 넉넉한 어머니 품으로
되돌아가는 그날까지. <운한택 (기전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
2002-0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