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장면, 화교의 검은 한숨과 하얀 희망 한 그릇 |
차이나타운
중국집 원조 공화춘(共和春) 일가의 후손을 만나다 |
김진아 기자
, 2005-10-08 오후
3:11:43 |
하루 700만 그릇이 팔린다는
자장면. 많은 이들에게 자장면은 아련한 어린시절 추억의 한 귀퉁이에 자리하고 있겠지만, 화교들에게는 좌절과 숙명이면서 지켜야할 그 무엇으로
남아있다.
“한국에서 사는 화교들이 할 수 있는 게 딱 세 가지 있어요. 지금 삼십대쯤 된 젊은 화교들은 크면서 항상 같은 얘길
듣고 자랐어요. 너희들이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자장면을 만들거나, 한의사가 되거나 가이드가 돼야 한다고요. 가이드 같은 경우는 최근 중국과의
여행도 자유로워지고 사례비가 늘면서 생겨난 말이지만 전에는 대부분 중국집 주방장이 되거나 조금 똑똑한 애들은 한의사가 되는
거죠.”
‘자장면 100주년 축제’의 첫날인 7일, 인천차이나타운에서 신승반점을 운영하는 우유주(35)․왕애주(34) 부부로부터
들은 얘기다. 이것은 혹독한 현실을 견뎌낸 부모세대들이 3, 4세대의 화교들에게 주는 일종의 ‘생존지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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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씨는 고등학교를 마친 후 곧장
중화요리를 배웠고 16년째 이 일에 종사하고 있다. 두어번 다른 일을 시도한 적이 있다. 화교들도 자장면 만드는 일 말고 다른 일도 할 수 있는
걸, 사업도 잘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두 번 다 실패했고 돈만 날렸다. 그리고 그는 중국집 주방으로 돌아와 춘장을 볶고
있다.
“한국에서 대학도 나오고 번듯하게 직장도 다니던 친구가 있었어요. 처음엔 잘 나갔죠. 그런데 승진이 안 되는 거예요.
화교라는 이유로 승진도 안 되고 회사에서 각종 불이익도 당하니까 결국 몇 년 만에 직장을 관두고 중국집 주방장 되려고 중화요리 배우기
시작했어요. 대기업 다니던 또 다른 친구도 마찬가지에요. 같은 이유로 직장을 그만뒀고요. 화교들에게 자장면은 가장 벗어나고 싶은 대상이지만
한편으론 숙명 같은 것이기도 해요.”
중국집을 하다 보면 자장면과 화교들에 대한 비하의 뉘앙스를 담은 ‘짱께’란 말에도 속이
상한다.
“중국집 하다보면 여러 번 겪는 일인데, 손님들이 주문할 때 ‘짱께’하나 줘요, 그래요. 한번은 대학생이 와서 ‘아저씨
짱께 하나 주세요’라고 그러는 거예요. 화가 났죠. 그래서 물었어요. 짱께가 무슨 뜻인 줄 알고 쓰냐고 그랬더니 모른다더군요. 제가 말했죠.
학생이라면서 자신이 쓰는 용어가 어떤 의미인지 왜 그런 말을 쓰는지 모르면서 써서야 되겠냐고.”
사실 ‘짱께’란 말은
‘장궤(掌櫃)’라는 말에서 연유했다는 게 우씨의 말이다. 장궤란 ‘주인장, 사장’을 뜻하는 말이고 흔히 중화요리점에서 중국인들끼리 “사장, 나
왔어”라며 인사할 때 들리는 ‘장궤’라는 단어를 한국말로 ‘짱께’라고 부르게 됐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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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씨의 부인 왕애주씨는 인천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만으로 건너가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도 했었다. 하지만 2년 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어머니가 하던 중화요리점을
물려받기 위해서였다.
“번듯한 직장, 같은 민족이 사는 대만에서의 생활을 접고 왜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느냐”는 질문에 “나의
근원과 뿌리가 있는 곳이므로”라고 답했다. 짧고 명확했다. 부모가 이곳에 뿌리를 내렸고 자신 역시 그러하므로 이 곳으로 돌아오는 일은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고향이죠. 제 2의 고향. 내 핏줄은 중국 사람이지만 한국 역시 나의 고향이에요. 우리 부모들이 그랬고 나
역시 한국이 고향이라고 생각하니까.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운영하시던 중화요리점을 이어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도리고 해야 할
일이니까요.”
왕씨는 지난 1905년 ‘공화춘’을 연 우희광씨의 외손녀다. 공화춘은 자장면의 원조로 알려진 집이다. 올해가 ‘자장면
100주년’이 된 것은 공화춘이 문을 연 때로부터 계산한 것이다. 우희광씨의 막내딸인 왕씨의 어머니가 차이나타운에 신승반점을 연 것은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출가한 딸이니 공화춘을 이어받을 수는 없었고 공화춘 근처에 중화요리점을 열고 가업을 이어왔다. 20여년 전 공화춘이
문을 닫아 그 맥을 이어가는 유일한 끈이 신승반점이다.
공화춘 이야기가 나오자 왕씨는 울컥 울음을 터뜨렸다. 그 동안 가슴에
‘꾸욱’ 눌러놓았던 서러움이 북받쳐 올랐던 것이다.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있는데… 다들 공화춘 후손이 대만에 있다거나 죽었다고들 하니까. 제발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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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차이나타운 입구에서
곧장 올려다 뵈는 전망 좋은 자리에 번듯한 운영하는 중화요리집이 들어섰다. 그런데 이름이 ‘공화춘’이었다. 왕씨는 충혈 된 눈으로 “최소한,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되뇌었다. 그러면서도 “한국인들과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는 않다”고 말했다. “여기는 한국이고 우리는 화교니까…
문제가 일어나면 피해를 보는 것은 언제나 화교들이었기 때문에 크게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다”는 거였다.
“처음에는 ‘공화춘’이란
이름을 쓰지 못하도록 얘기도 해봤고 소송도 해 봤어요. 그런데 소용이 없더라구요. 비록 백년 가까이 공화춘을 운영했어도 할아버지나 그 후손들은
상표등록 같은 거 해야 하는지는 몰랐거든요.”
옛 ‘공화춘’이 문을 닫은 것은 24년 전. 공화춘을 처음 세운 우희광씨의 손자인
우신진씨가 세상을 뜬 후 그 몇몇 후손들이 공화춘을 이어갔지만 더 이상 유지하는 일은 힘겨웠다. 그 사이 한국 사람들이 공화춘이란 이름으로
상표등록을 했고 그 이름으로 영업을 하는 것이니 법적으로 어쩔 도리가 없었다.
“화는 나죠. 가슴도 답답하고. 하지만 화교들은
법에 대해 잘 몰라요. 더구나 외국인으로 분류돼 있으니까…. 하지만 다른 건 다 몰라도 같은 차이나타운에서 이렇게 중화요리점을 하고 있고
후손들도 살아있는데 한국 사람들이 함부로 이름을 도용하고 후손들이 운영하는 것인 양 장사를 하는 건 정말 참을 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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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씨는 백여년간 지켜져 왔던
‘공화춘만의 음식 맛’이 훼손되는 것을 우려했다. 또 왕씨의 할아버지가 청요리를 들여와 한국 사람들에게 선 보이고 그 맛을 지키려고 했던 그
모든 역사들이 왜곡돼서는 안된다고 했다.
그는 얼마 전 ‘자장면은 한국음식’이란 이야기에도 섭섭함을 감추지 않았다. 한 TV방송에서
‘알고 보니 자장면은 한국음식’이란 주제로 방송을 내보낸 후 한국 사람들과 언론에 대해 크게 실망했다고 말했다.
“자장면이
한국음식이라는 건, 마치 김치가 일본음식이다 라고 하는 것과 같은 거예요. 김치는 한국의 특징적인 음식이고 거기에 정신도 담겨 있잖아요.
한국인의 특성, 개성, 역사까지도.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자장면은 한국땅에 정착한 화교들의 삶과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건데 그게 결국 한국
사람이 만든 거다, 이러면 백여년이나 정착하고 살았던 우리 화교들의 선조들이나 그 자장면을 만든 우리 할아버지의 노력과 공화춘의 역사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그가 지키려는 ‘공화춘’과 ‘자장면’에 대한 애정은 한 가족의 역사 그 이상이었다. 인천에 차이나타운이 생기고
‘자장면’이란 음식이 탄생된 후 그것은 줄곧 화교들의 주된 삶의 터전이었기 때문이었다. 왕씨에게 공화춘과 자장면 역사의 단절은 곧 화교들에겐
역사의 훼손이었고 나아가 자신의 정체성과 자부심을 단절시키는 일이었다. 자장면은 이미 화교들의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숙명이고 고향인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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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씨가 운영하는 신승반점에는
노인 손님이 많다.
“내가 저 공화춘 문 열고 있을 당시부터 와서 잘 알아요. 4,50년 전부터 드나들었는데, 음식 맛 좋았지.
거기가 자장면의 역사이기도 하고 여기 사장이 산 증인이기도 하고. 공화춘 문 닫은 다음에 좀 섭섭했지. 그래도 여기라도 오니까. 옛날 맛
그대로고 여기 오면 그 때 생각도 나고 좋아.”
중국 산동지역의 자장면을 옮겨와 ‘한국화 된 자장면’으로 만들어내고 터를 잡았던
공화춘 일가 사람들. 지긋지긋해 벗어나고 싶었지만 어느새 그들의 역사가 된 자장면. 그 자장면의 빛깔은 이 땅 화교들의 100여년 검게 탄 속을
닮았다. 그러나 신승반점 부부처럼 그 아픔의 역사를 간직하고 지키려는 사람들이 있어 자장면은 다음 세대 화교들에겐 자긍심의 상징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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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춘(共和春)과 자장면, 그 역사 속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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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장면을 처음 개발한 것으로 알려진 공화춘이 처음 인천 차이나타운에 자리를 튼 것은
1905년이다. 공화춘을 처음 세운 우희광씨가 스물두살의 젊은 나이에 ‘산동회관’(山東會館)이란 이름으로 시작을 했다.
당시
산동회관은 우리가 생각하듯 단순한 ‘중국요리점’이 아니었다. 개항장이었던 인천항을 오가는 온갖 무역상들이 오가면서 기거하고 음식을 먹는
장소였다. 일종의 호텔에 가까웠던 것. 산동회관이 공화춘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 것은 1911년. 공화춘(共和春)이란 이름엔 당시 중국의 역사와
맞물린 각별한 의미가 있다. 공화춘을 처음 세운 우희광씨의 손녀 왕애주씨는 공화춘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당시 공화춘이라고
이름을 바꾼 것은 청나라가 중화민국으로 바뀌던 역사적 사건과 관련이 깊어요. 당시 중화민국으로 바뀌면서 아시아 최초로 공화국이 됐으니 매우 기쁜
일이며 ‘봄’이란 한 해의 시작이고 청춘의 활기와 희망을 담고 있으니 ‘공화춘(共和春)’이란 이름으로 바꾸자고 했던 거죠. 그 때가
1월15일이었어요.”
그리고 왕씨는 "자장면을 처음 만들게 된 것은 6·25전쟁 이후. 1950년이 지나면서"라고 말했다. 이전에
산동지방에서 춘장에 면을 말아먹던 '중국식 자장면'이 아니라 양파와 고기를 넣고 춘장을 좀 더 묽게 만들어 '한국식 자장면'으로 보급하게 된
것이 바로 그 무렵이라는 얘기다.
당시 인천 부두에 있던 어시장을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오갔고 당시 인천항은 모든 무역과 상권의
중심이었다. 그리고 공화춘에서는 인천 어시장을 중심으로 생활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청나라 요리를 소개하고자 자장면을 팔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워낙 시대가 어렵다보니 양도 많고 빨리 만들 수 있으며 값싸게 제공하기 위해서 지금의 자장면을 선택했다는 것이 왕씨가
전하는 말이다. 그렇게 시작된 자장면이 우리가 즐겨먹게 된 자장면의 처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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