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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특집

[도시, 미래로 미래로]<19>인도네시아 수라바야

[도시, 미래로 미래로]<19>인도네시아 수라바야



아이들 맘껏 뛰노는 골목으로
예전의 골목길은 지저분하고 허름했지만 이제는 동네가 환하고 깨끗해졌다. 주민들은 진흙탕 길에 보도블록을 깔고 집집마다 화분을 내놓았다. 오른쪽 사진은 수라바야 시 크라잔 쿠팡 캄풍의 주거환경개선사업 이전 모습. 사진 제공 ‘11월 10일 대학’
집집마다 훤히 열려 있는 현관문, 집 앞마다 내놓은 화분들, 옹기종기 모여 일감을 매만지는 아낙네들, 자전거든 오토바이든 바퀴 달린 탈것에서는 모두 내려야 한다고 적힌 골목 입구의 안내판, 골목을 뛰어다니며 노는 아이들…. 골목길은 마당이고 놀이터고 또 일터다. 우리에게는 흑백사진과 함께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1970, 80년대의 골목 안 풍경이 천연색의 현재 진행형으로 벌어지고 있는 곳. 인도네시아 제2의 도시 수라바야다.

○ 대도시 수라바야의 그늘에서 핀 꽃, 캄풍

죽죽 뻗은 키 큰 나무들과 곳곳에 솟은 고층 건물들, 그리고 넓은 도로. 사진으로 본 수라바야는 아름다운 자연 속에 자리 잡은 우아한 근대 도시의 전형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항공사진 속의 모습일 뿐 이 도시를 실제로 메우고 있는 것은 혼돈이다.

무법자처럼 차로를 휘저으며 달리는 자동차, 시커먼 매연을 뿜는 오토바이들. 도로변 개천에서 나는 악취는 매연과 범벅이 되어 콧속을 후벼 팠다. 넓은 길과 높은 건물로 대변되는 근대 도시의 원형은 마치 몸에 맞지 않는 옷을 걸친 것처럼 수라바야에서 실패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근대적 풍경의 도심이 수라바야의 전부는 아니다. 혼돈의 정글 같은 거리 사이로 얼굴을 내비치는 캄풍의 골목길은 이 도시의 또 다른 얼굴이다. 한국의 달동네처럼 인도네시아의 저소득층 주거지역을 일컫는 단어, 캄풍(Kampung). 수라바야 시민 300만 명 중 약 63%가 이곳에 살지만 거주 면적은 시 전체의 7%에 불과할 정도로 인구밀도가 높다. 현재 수라바야에는 70여 곳의 캄풍이 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의 동네인 캄풍의 골목길은 놀랍게도 냄새부터 다르다. 대도시 수라바야의 겉만 번지르르한 빈곤이 캄풍에서는 청빈한 공동체의 풍요로움으로 바뀌었다. 이 평화로운 풍경은 ‘캄풍개선사업’의 결과물이다.

“우리는 최소한의 재원으로도 도시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국립 ‘11월 10일’ 공과대 건축학과 해피 산토사(65·여) 교수의 목소리는 나직하지만 단호했다. 그는 조한 실라스(70) 교수와 함께 캄풍개선사업의 주역이다.

수라바야에서 1977년에 시작돼 현재 2단계 진행 중인 캄풍개선사업의 원리는 간단하다. 사업집행구역으로 지정된 캄풍에서는 최대 20가구가 한 단위가 되어 공동체를 구성한다. 이 공동체가 주거 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예산 집행 계획을 제출하면 정부는 지원금을 준다. 예산 집행은 공동체 스스로 하고 정부는 집행을 감독할 뿐이다.

2004년 수라바야에서 캄풍개선사업에 집행된 사업비 총액은 3억 원 정도다. 배정되는 예산은 재료 구입비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마을 사람들이 직접 나서 하수구를 만들고 골목길을 포장한다.

○ 공동체가 마을 환경 개선의 주체

수라바야 캄풍개선사업은 주민들이 경제적 자활을 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준다. 개선사업의 ‘순환기금’을 얻은 주민들은 주거지 인근 시장에 조그만 상점을 내 자신들이 빌려 쓴 돈을 갚아 나간다. 사진 제공 ‘11월 10일 대학’
2002년 개선 지역으로 지정된 크라잔 쿠팡 캄풍의 한 집을 찾았을 때 이 캄풍의 대표 드위 마완(29) 씨와 작업 근로자 3명을 제외한 6명의 관계자는 모두 동네 부녀자들이었다. 마완 씨는 “토론과 주민 독려는 물론 공사 감독, 모니터링, 조경수 구입, 작업 근로자에 대한 음식 제공까지 모두 여성들이 무보수로 맡아 일을 진행한다”며 “주거 환경을 개선하려는 그들의 노력이 지금의 크라잔 쿠팡 캄풍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캄풍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서로를 믿는 것과 달리 정부와 캄풍이 서로를 신뢰한 것은 아니었다. 중재자로 나선 것은 대학이었다. 대학은 각 캄풍의 현황을 조사해 예산집행계획을 보완하게 하고 구성원 간의 갈등이 생기면 조정했다.

캄풍개선사업의 슬로건은 ‘주민에 의한, 주민을 위한, 주민의 공동체’다. 이 사업은 이슬람 국가에 주는 최고의 건축상인 에이가칸상, 유엔환경상, 그리고 월드해비타트상을 수상했다.

수라바야의 캄풍개선사업은 도시의 변화에서 공동체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준다. 이 사업이 수도 자카르타에서는 성공하지 못한 것도 결국 사업을 이끌고 나갈 공동체가 제대로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수라바야의 캄풍 골목길을 뛰어다니는 어린이들은 깔깔거리며 사진기 앞으로 몰려들곤 했다. 소박하지만 공동체가 건설한 안전한 공간에서 자라난 이들이 만들 미래의 도시는 낯선 사람이 말을 걸면 모른 척하라는 교육을 받으며 자라난 어린이들이 만들 도시와는 분명 다른 모습일 것이다.

수라바야(인도네시아)=서현 한양대 건축학부 교수

▼지원금 어떻게 쓰이나▼

‘캄풍’ 주민들의 경제적인 형편은 한국과 비교하자면 생활보호대상자와 차상위 계층의 중간 단계쯤이다.

캄풍개선사업의 특징은 이것이 단지 마을의 생활환경을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주민들의 삶을 ‘리디자인’ 한다는 데 있다.

지원된 예산 중 마을 환경개선사업에 사용되는 비용은 전체의 20% 정도다. 나머지 예산은 각 가구의 사업 종자돈으로 사용된다. 새로 고친 집에서 살 수 있도록 경제적 자활의 발판을 마련해 주는 것이다.

기금의 운영방식은 우리의 계와 거의 비슷하다.

우선 공동체의 한 가구에 약 3만 원의 예산이 지원된다. 넉넉한 것은 아니지만 캄풍에 사는 사람들로서는 노점이 아닌 사업을 시작할 수 있을 만한 금액이다.

약간의 이자와 함께 석 달 안에 갚는 이 기금은 다음 가구에 지원된다. 불어나는 기금은 계속 다음 가구에 지원되기 때문에 캄풍개선기금의 이름은 ‘순환기금’이다.

지원을 먼저 받으면 먼저 받아서 좋고 나중에 받으면 더 많이 받을 수 있어서 좋다. 자신이 기금을 갚지 못하면 공동체의 다른 사람들이 나누어 갚아야 한다. 이사를 갈 때는 기금에 진 부채를 모두 청산해야 하고 이미 설정된 기준에 동의하는 가구가 새 구성원이 된다.

수라바야=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