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교, ‘반쪽’으로 살아가는 우리 안의 이방인 |
[르포]인천
차이나타운…법과 제도는 풀렸지만, 편견과 배타성은 여전 |
김진아 기자
, 2005-10-05 오전
7:41: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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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열차의 종착역인 인천,
인천역입니다.”
스피커에서 방송이 나오고 전철의 문이 열리자 한무더기의 사람들이 플랫폼으로 쏟아져 나왔다. 삼삼오오 짝을 지은
생기발랄한 10대에서부터 서로 팔짱을 낀연인들, 선글래스에 모자까지 갖추고 나들이에 나선 50대의 부부까지 주말분위기를 풍겼다. 개찰구를
빠져나오자 길 건너의 화려한 ‘패루(牌樓)’가 눈에 들어온다.
“엄마, 저게 뭐야?” “응, 저거 ‘패루’라는 건데 여기 중국
사람들이 모여 사는 데라고 표시해 주는 문이야. 되게 크지?” “근데 왜 대문이 없어?”
대여섯살쯤 돼 보이는 사내아이는 난생
처음 본 ‘패루’가 무척이나 신기한 모양이었다. 호기심 가득 찬 아이의 얼굴 위로 가을 햇살이 쏟아졌다.
살아나는 인천
차이나타운?
인천역에서 차이나타운을 찾는 일은 매우 쉬웠다. 길 건너의 ‘패루’ 덕분이었다. 페루는 중국 북방식의 복층
구조물이다. 중국인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차이나타운을 상징한다는 패루는 미국과 일본의 차이나타운에서도 볼 수 있다. 특히 인천의 패루는 인천
중구와 자매결연을 맺은 중국 위해시에서 직접 만들어 기증했다고 한다.
인천 차이나타운에 세워진 패루는 총 3개. 차이나타운 입구에서
먼저 만나게 되는 제1패루의 중앙에는 ‘中華街(중화가)’라는 황금빛 글씨가 선명하게 빛났다. 하늘을 향해 끝이 말려 올라간 화려한 중국식 단청과
붉은 기둥은 차이나타운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제1패루를 지나 차이나타운 안으로 들어서니 중국풍으로 신축하거나
개축중인 건물들이 눈에 띄었다. 차이나타운 안에 위치하고 있는 북성동 동사무소까지도 황금빛 용 조형물을 세우고 중국풍으로 리모델링돼 있다.
차이나타운 대부분의 상점들은 ‘중국집’으로 불리는 중국음식점. 약 80%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그밖의 것들은 중국에서 건너온 각종 기념품들을
파는 곳. 중국 전통의상인 치파오(旗袍)나 전통차, 월병 등 중국의 고유한 물건들이 다양하게 구비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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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서울의 명동만큼은 아니지만 주말 오전 차이나타운은 ‘관광지’의 활기를 엿볼 수 있다.사람들이 많이 찾는 만큼 이곳에 사는 화교들의 삶도 나아졌을
것 같은데 중국 기념품 가게를 하고 있는 손미숙(57, 대만계)씨 말은 달랐다.
“너무 어려워요. 지금 한국도 경제적으로 먹고 살기
어렵잖아요. 똑같죠 뭐. 얼마 전부터 차이나타운에 투자 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조금 늘어난 건 사실인데 거의 주말장사예요. 주중에는 사람이 없죠.
그것도 자장면이나 먹으러 오는 거죠. 되는 데는 되겠지만 이런 기념품 상점은 그냥 유지하는 정도죠.”
손씨는 장사가 하도 안되 가게
앞에 물건을 내놓고 팔고 있다. 그냥 있으면 손님들이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자와 얘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몇몇 사람들이 상점 앞을 기웃거렸다.
물건을 사가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간혹 중국 전통 과자인 월병이나 몇개씩 사갈 뿐이었다.
손씨의 가게를 지나 좀더 걸어들어가자
사람들이 줄을 선 가게가 보였다. 중국식 꽃빵과 만두를 파는 가게였다. 연신 만두와 꽃빵을 쪄내느라 분주한 가운데 주인 장선영(48,
가명)씨에게 말을 붙였다.
“예전 얘기하면 좀 좋아졌다는 건 인정해요. 하지만 먹고사는 정도지, 차이나타운 개발 이후에 특별히
좋아진 건 없어요. 솔직히 말해 차이나타운 개발이다 동남아 거점도시다 해서 길 닦는데만 투자하는거지, 여기 화교들 먹고사는 거랑은
상관없어요.”
최근 인천시가 동북아 거점도시를 표방하면서 새로운 차이나타운 건설을 위해 내놓은 청사진에 대해 장씨는 비판적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건물이나 거리는 화려해졌는지 몰라도, 화교들의 경제적 삶이나 수준이 크게 달라진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태화관이라는
중화요리집을 운영하는 손덕수(53)씨 역시 “중국인들에 대한 인식이나 법적인 처우는 좀 나아졌는지 몰라도 생활수준은 크게 나아진게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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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적인 제재도 풀리고…
예전에 비하면 살기 좋아졌어.”
경제적인 생활수준에 대해서는 여전히 “어렵다”를 토로하면서도 많은 화교이 하나같이 입을
모으는 것은 “중국인에 대한 인식도 좋아지고 법적 제재도 없어서 살기 좋아졌다”는 점이다. 태화관의 사장 손씨의 말이다.
“내가
지금 화교 2세란 말이죠. 우리 애들이 3대째고. 우리 부모는 말할 것도 없고, 그전엔 중국인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어요. 놀리는 건 말할
것도 없고. 그런데 진짜 문제는 화교들에 대한 법적인 제재가 심했다는 거죠. 비자도 그렇고 부동산 관련된 재산 소유 문제도 그렇고. 하지만 최근
들어 많이 풀려서 아주 어려운 부분은 많이 사라졌죠. ”
중국식당에 해산물을 납품하는 필영호(45, 가명)씨 역시 “몇년에 한번씩
갱신해야 했던 비자 문제가 힘들었는데 얼마 전 영주권을 받을 수 있게 됐고, 재산 소유도 제한이 없어져서 많이 편해졌죠. 요즘엔 직접 부딪치는
부분은 크게 없어요. 뭐 몇 가지 더 있긴 하지만 사람 욕심이 끝이 있나.”
화교들이 대부분 좋아졌다고 말하는 부분은 화교들의
신분증과 다름없는 비자와 재산 소유의 제한에 관한 내용이다. 한국에 거주하는 화교들은 출입국관리법의 관련 규정에 따른 ‘외국인’으로 최근
영주권제도가 도입되기 전까지는 임시방문이나 단기체류가 목적인 다른 외국인들과는 달리 ‘거주자격’을 의미하는 ‘F-2'비자가 부여됐다. 물론
장기적인 거주를 보장한다는 점에서는 다른 외국인에 비해 큰 특혜일 수 있지만 5년에 한번씩 연장 갱신을 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고 특별한 실수나
사정 때문에 이 갱신기간을 놓칠 경우 거주자격을 상실하는 일도 종종 벌어지곤 했다.
지난 2002년 4월, 출입국관리법이
개정되면서 만 5년이상 한국에 합법적으로 거주한 사람과 미성년 자녀에게는 영주권 즉 ‘F-5’비자를 부여받을 수 있게 됐다. 말 그대로 몇대에
걸쳐 한국에서 살면서도 몇 년에 한번씩 비자를 갱신해야 하는 철새 신세를 면하게 된 것이다.
또 하나 개선된 점은 ‘재산과 토지
소유에 관한 것’. 1970년 제정된 ‘외국인 토지 취득 및 관리에 관한 법’은 화교들에게 ‘1가구 1주택 1점포만이 허용되고 주택면적도
200평 이하, 점포는 50평 이하로 제한함으로써 재산 소유가 철저히 제한됐다. 이것이 98년 5월 외국인토지법의 개정으로 풀린 것이다.
영주권을 발급받을 수 있게 되자 화교들은 비자 갱신을 위해 발을 동동 구를 필요가 없어졌다. 또 점포나 주택 소유에 제한이
없어지자 화교들의 경제활동이 훨씬 자유로워졌다.
또 하나의 변화가 있다면 화교에 대한 인식의 전환. 92년 중화수교를 통해
중국과의 문화, 경제적 교류가 활발해지고,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화교에 대한 인식도 크게 달라졌다.
2년전부터 기념품과 슈퍼를
겸한 가게를 운영하는 장희용(39, 가명)씨는 “어려운 거 없죠. 예전 어릴 때 생각하면 지금은 정말 좋아진거예요. 옛날에는 많이 놀렸지.
장꼴라, 장꼴라 하면서 놀렸는데. 우리 아버지 자장면 판다고 하는 게 창피해서 얘기도 못했죠. 그거 비하면 요즘 애들은 일단 그런거는
없으니까”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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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쪽짜리 자유, 근원적인
문제 어떻게 풀까
그러나 화교들이 아무리 “살기 좋아졌다”를 외쳐도 그들에게 남아있는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간 화교에
대한 정부의 정책과 제재가 심했기 때문에 화교들이 ‘상대적인 자유’가 크게 느껴질 뿐, 여전히 삶을 제한하는 문제들이 남아 있다.
중화요리집을 운영하는 손득수(53, 가명)씨는 “지금도 불편함은 없지만 몇가지 문제를 덧붙이자면”이라면서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예를 들어 은행에서 대출받을 때, 신용과 관련된 부분이에요. 우리 애들도 핸드폰 개통할 때 주민등록번호 말고는 신용조회가
안되니까 황당한 경험을 한 적이 있어요. 또 인터넷 같은 거 할 때도 주민등록번호 중심이니까 외국인등록번호 같은 건 별 쓸모가 없어요. 그럴 때
불편을 느끼지요.”
손씨의 말처럼 화교들은 여전히 출입국관리대상인 ‘외국인’이다. 2,3대에 걸쳐 한국에서 태어나고 생활했지만
여전히 ‘외국인등록번호’만이 주어진다. 대부분의 신용, 금융, 인터넷 시스템을 이용하려면 주민등록번호가 필수적이기에 불편함을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화교협회와 외국인 단체들이 새로운 인증시스템 도입을 줄기차게 요구하여 법무부가 ‘외국인 인식 시스템’
을 대대적으로 구축했지만 여전히 많은 부분에서 외국인 실명확인이 어려운 실정이다.
취업과 승진에서도 여전히 걸림돌이 많다. 대개
한국에서 대학을 마치고 취업하는 일은 쉽지 않은 형편이다. 기업들이 여전히 ‘화교’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또 외국인도 일반
공무원이 될 수는 있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얘기다. 또 인맥과 학연, 지연 중심으로 돌아가는 한국 사회에서 화교들이 들어설 자리가 별로 없다.
한국에서 대학을 나오고 한국여성과 결혼해서 직장에 다니고 있는 30대 화교의 말이다.
“사실 우리 스스로는 한국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중국말도 쓰고, 중국인 피는 흐르지만, 한국 친구들이 더 많죠. 하지만 뭔가 완전히 섞일 수 없는 게 있어요.
화교라는 사실이 걸림돌은 되지만 도움이 안돼요. 그렇다고 중국에서 환영받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고…. 사실 화교들은 한국인도 중국인도 아닌
이방인이에요.”
그 밖에 또 하나의 문제로 지적되는 것은 화교들의 교육 문제. 대학에 진학할 때 외국인으로 등록돼 있는 화교들도
‘재외국민 및 외국인 특별전형 모집요강’의 대상이 되는데 부모 모두 외국인이어야 한다는 기준 때문에 한쪽 부모가 한국인인 경우는 그 대상에서
배제된다. 이런 제한 때문에 99년 한해만 해도 자녀를 한국 대학에 입학시키기 위해 약 80쌍의 화교 부부가 가짜로 이혼수속을 밟았다고 한다.
또 화교들에게 그간 선거권이 주어지지 않는 문제(2002년 실시될 지자체 선거에서 외국인에게 지방선거권을 주는 법안이 1999년
11월 국회에 제출됐다)나 한중수교 이후 급격히 밀려드는 중국인들과 화교들 사이의 갈등, 절반 이상의 화교들이 요식업에 종사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2003년 ‘국내거주 화교 인권실태조사’ 취업자 546명중 53.4%인 293명이 요식업에 종사) 등 풀어야 할 숙제가 남아 있다. |
차이나타운에서 발견한
희망과 숙제
오는 7일부터 인천차이나타운에서 ‘중국문화축제’가 열린다. 3일간 열리는 축제는 시민들에게 중국 문화를 소개하는
한편 자장면 100주년을 기념하는 다채로운 행사도 준비돼 있다. 이를 앞두고 차이나타운에서 상점을 운영하는 화교들은 다소 들떠 있었다. 5년
전부터 중화요리 전문점을 시작했다는 송명희(42, 가명)씨는 “그나마 이런 행사가 있어서 사람들이 찾아주면 반짝 장사지만 좋긴 좋지요”라며 활짝
웃는다.
인천항에 내린 화교들이 둥지를 틀고 거주하기 시작한지 1백30년이 되는 인천 차이나타운. 화교에 대한 정부의 제한 위주
정책과 제도로 고통 받던 화교들에게 최근의 제도 개선은 확실히 ‘희망적’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문제들이 화교들의 삶과 인권의
발목을 잡고 있다.
이에 대해 “그럼 귀화하면 될 것 아니냐”, “외국인이 다른 나라에서 살아가려면 당연히 겪는 문제 아니냐”
하는 식으로 냉소할 수도 있다. 하지만 ‘중국인의 핏줄로 태어나 한국인으로 살아가는 화교’들이 받고 있는 고통과 소외는 우리 사회의 혈통주의과
편견, 배타성 등이 작용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된다.
이 세상의 어떤 인간도 국가나 성별, 나이와 피부색과 조건들로 차별받아서는
안된다는 명징한 진리를 떠올려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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