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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aly

화산재 속에서 고대유적을 보는 폼페이 ( 이태리 로마 )

[ 유럽여행 ] 화산재 속에서 고대유적을 보는 폼페이 ( 이태리 로마 ) 와우

'이태리에 가서 뭘 하시게요?' 누군가 물으면 대답할 말은 하나, '고대인들의 생활을 보러가죠.' 그리고 덧붙여 한마디 더하면 '살아있는 고대인들의 모습을 정녕 보기 원한다면 폼페이로 가야겠지요.' 유물 유적을 오늘에 되살려 음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때의 그 모습이 재현되는 현장을 만나기 위해 중부 이태리에서 여정을 끝낼 순 없었다.

아침 일찍 로마를 출발했다. 가는 길에 나폴리를 둘러보리라 작정했다. 세계 3대 미항중 하나인 나폴리 항구가 때어나는 아침 모습을 기대하며 남으로 뻗은 고속도로를 달렸다.

A1 도로. 여러 가지 우리 나라와 비슷한 부분이 많은 이탈리아에서 이 길은 말하자면 경부고속도로 같은 길. 일찍부터 떠오른 한 여름의 태양을 향해 달리며, 정말 미친 듯이 질주하는 페라리도 몇 대 스치며 나폴리에 도착했다.

파란 바닷물, 파란 하늘, 찬란한 태양 아래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해안선 곳곳에는 비치 파라솔을 세워놓은 해수욕장, 아니면 생각보다는 많지 않은 배들이 정박해 있는 항구였다. 대형 선박은 보이지 않고 거의 소형 어선이거나 유람선 보트들, 그 중에는 타보고 싶은 하얀 색, 멋진 유람선도 눈에 띄었다. 그러나 멀리 보이는 산세와 잘 어울리는 해변가의 멋진 풍광이 아니라면 나폴리는 전반적으로 낙후된 도시, 별로 볼만한 것이 없는 것 같았다. 참고로 필자는 가보지 못했으나 나폴리 국립 고고학 박물관에는 폼페이 유적지의 예술품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어 볼만 한단다.

북쪽 국경선을 넘어 대표적인 몇 개 도시를 둘러보며 남부 이 곳에 오기까지 이탈리아라는 이 나라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참 복잡하다. 조상과 함께 살아가는 이태리 사람들, 요즘 말로 환경친화적으로 산다고나 할까, 그들은 고대인의 기상에 눌려 야심없는 사람처럼 낙천적으로 소박하게 삶을 향유하고 있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이태리 전역에 널린 어머어마한 유물 유적들은 보는 사람을 압도하여 그 이상의 의미나 현실을 곧잘 잊게 만들었다. 그러나 로마를 보고 나폴리를 거쳐 폼페이에 와서 비로소 그 어떤 실체를 본 것 같아 많은 의구심이 사라지게 되었다.

그렇다. 로마의 대목욕탕 앞에서는 거대한 건축물의 규모에 놀라는 것이라면 폼페이에서의 목욕탕은 규모와 관계없이 그 곳에서 행해진 자연스런 생활 모습 때문에 모든 것을 한꺼번에 다 알아버린 기분, 그런 것이었다. 폼페이는 그렇게 당시 사람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곳이었다.

베수비오산은 변함없이 맑은 하늘 아래 은은한 자태를 자랑한다. 이미 몇 번의 화산 분출로 주목을 받은 산이지만 해안선 너머로 보이는 베수비오산은 기품있고 우아해 보인다. 폼페이 유적지 근처에는 많은 음식점과 기념품 가게들이 줄을 이었다. 세계 각국어로 된 폼페이 사진첩 등 여러 팜플렛에는 한글판도 전시되어 있었다. 두고두고 볼 요량과 이해를 위해 한글판 설명서 한 권을 먼저 샀다.

유적지 입구에는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대기하고 있었다. 입장권을 구했어도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의 줄이었다. 실업이 많은 나라에서 많이 사용되는 고용 문제 해결의 한 방법으로 당국에서 인정하는 자국 안내인을 반드시 동반하여야만 입장하도록 하는 것 때문이었다. 줄 선 여행객 순서대로 안내인이 붙었고 그들의 이끌림대로 폼페이 유적 관광은 질서정연하게 손상되지 않고 이루어지는 것 같았다.

입구를 따라 다소 아래쪽으로 돌아 내려가자 앞이 확 트인 폼페이 유적지가 나타난다. 한 편으로 이 곳의 출토품들을 모은 기념관이 있었고 조금 가서 직선으로 쭉 뻗은 길이 보였다. 2000년 전에 벌써 우마차가 다니기 편리하게, 비가 오면 사람들의 발이 젖지 않도록 길을 만들었다. 폼페이라는 고대 도시에 들어서면서 과거의 역사 속으로 빠져들려는데 잠시 이 현장을 볼 수 있게 된 내력을 설명해준다. 우연히 우물을 파려다가 화산재에 파묻힌 세 개의 여인상을 발견하게 되고, 그 후 30년이 지나 우물 바닥에서 수직으로 뚫고 내려가 극장 등 몇 개의 건물이 발견되고..

"그러나 저기 멀리 보이는 언덕이나 이렇게 잔해처럼 보이는 것들은 아직 다 발굴되지 않고 복원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가이드가 설명해준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에도 놀라움과 경이로움에 말문이 막히는데, 번성했던 한 도시의 모습 그대로 발굴, 재현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까 정말이지 상상이 잘 되지 않는다.

AD 79년 여름은 그 어느 해 보다 유난히 더웠다. 8월 24일 새벽, 날이 밝아와야 할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칠흑같은 어둠, 그리고 불안한 건물의 흔들임이 있었다. 전에도 지진은 있었지만 그때와는 전혀 달랐다. 열어젖힌 창문 너머로 베수비오산이 불꽃을 번쩍이고 타는 듯한 유황 냄새와 연기로 호흡이 어렵고, 날아드는 죽음의 재로 공포와 절망의 두려움를 느낀 순간 그대로 폭발해버린 용암 불덩어리와 화산재 속에 사라져 버렸다. 불과 서너 시간만에 폼페이와 인근의 작은 도시 에르콜라노는 잿더미속에 파묻혀 그 자취를 감추었다. 이 죽음의 도시에 대한 이야기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차츰 잊혀져갔다. 이 지역 일대을 가르키는 말로 옛날 도시가 있었다는 뜻의 '라 치타(도시)'라는 무의미한 이름이 남았을 뿐 폼페이는 기억의 저 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1500여년이 지난 1594년 헤르쿨라네움의 폐허가 처음으로 발견되었으나 당시에는 조각상이나 벽화등을 약탈해가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보물찿기를 하기 위해 이 곳에 몰렸고1754년 명문의 발견으로 이 지역은 본래의 이름 폼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폼페이의 명성은 높아져갔고 뜻있는 사람들은 체계적인 발굴과 보존을 주장하며 이 곳에 깊은 관심을 나타내었다. 1770년에서 1815년 사이 나폴리 왕과 왕비의 후원으로 발굴은 활발히 진행되었으나 당시 유럽의 정치적 혼란속에서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발굴을 여전히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세계적 문호 괴테는 <이탈리아 여행기>에서 도적같은 자들에 의해 함부로 파헤쳐져 고대의 예술품이 다량으로 파괴 또는 분실되었다고 쓰고 있다.

1860년 이탈리아의 새로운 왕은 젊은 고전연구가 주세페 피오넬리를 발굴책임자로 임명함으로 비로소 합리적인 발굴 시대가 도래하였다. 그는 매일매일의 일지 기록은 물론이고 집집마다 고유번호를 매겨 여러 지역을 체계적으로 구획화했으며 죽는 순간의 폼페이 사람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기 위해 석고로 본을 뜨는 방법을 고안하기도 했다. 이후 금석학자 줄리오 데 페트라, 고고학자 비토리오 스피나촐라, 아마메오 마이우리 등 열정적인 많은 이들이 발굴 작업에 참여하였고 전임자의 뒤를 이어 더욱 체계적인 발굴과 복원을 시도했다. 기원전 10세기부터 형성되어 번영을 누렸던 도시 폼페이는 점차 그 실체를 드러내게 된 것이다. 폼페이인들의 낭만과 예술, 경제 생활, 종교 의식 등 드디어 역사의 한편으로 살아났다.

기념관 안에서 볼 수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그 날의 참변을 말해준다. 양편으로 늘어서 있는 것은 대부분 가재도구들로서 그릇이나 화로 같은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중앙에는 순간적으로 화석이 되어버린 사람들의 모습이 드문드문 진열되어 있었다. 엎드려 있는 모습, 누워 있다 일어나려다 굳어진 모습, 무릎을 껴안고 웅크린 모습, 재난을 피해보려고 두 팔로 머리를 감싸안고 엎드려 웅크린 모습 등...집안에서 혹은 거리에서 만난 재난의 순간이 상상만 해도 소름끼친다.

기념관을 나와 곧 볼 수 있는 것은 오른 쪽의 비너스 신전과 법정 역할을 했다는 바실리카, 그리고 왼쪽의 아폴로 신전이었다. 바닥과 벽면, 원주의 건축물과 여기에 남아있는 조각, 그림으로 그들의 종교생활을 짐작케한다. 아마도 이들은 광범위한 종교 의식을 행하지 않았을까, 로마의 법 제도적인 영향으로 기강도 바로 서있었을 뿐 아니라 낙천적인 그들의 기질 로 신과 더불어 즐기는 생활의 질서도 확립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됐다. 해시계, 물시계에 의해 근무 시간을 맞추고 법정의 개정 시간을 공고했다는 설명은 이를 뒷받침한다. 또한 신전 뿐 아니라 원형 경기장이나 목욕탕 등의 공공건물은 폼페이 시민 전체가 연희를 함께 즐기는 태평 성대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으리라 생각됐다.

재미있는 것을 보여주겠다는 가이드를 따라 간 곳은 '비극 시인의 집'이었다. 입구에 '맹견주의'라는 말과 함께 개 한 마리가 모자이크되어 있다. 별로 맹견같아 보이진 않지만 지금과 다를 바 없는 이런 생활이 시공을 초월하는 역사의 한 현장을 느끼게 한다. 이어 찾아간 '베티의 집'은 어떤가. 오늘날 술집과 전혀 다르지 않다. 입구의 남근을 재는 그림이나 부엌의 남녀 정사 장면은 지금 보아도 외설스럽다. 그러나 폼페이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성(性)과 사랑의 그림들은 어떤 면에서 더 솔직 담백한 그들의 유흥, 성(性)에 대한 낭만과 해학도 엿볼 수 있다. 한 술집에서는 그대로 놓여있는 술병 항아리와 쪽방을 볼 수 있었는데 그들의 생활 일면을 그대로 설명하는 것이어서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다 발굴되려면 아직도 멀었다고 하지만 발굴된 것을 다 둘러보겠다는 의욕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접근하지 못하도록 일정한 코스를 따라가기도 하지만 그 넓은 곳을 걷는 일도 지치는 일이었다. 중앙대광장 목욕탕을 둘러 보면서는 목욕하고 쉬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온탕세면대 위 둥근 천창에서 햇빛이 쏟아지고 벽면의 직사각형창에서는 은은한 빛이 안을 비춰주고 있다. 온탕을 나와 차가운 물이 뿜어져 나온다는 대리석탕, 사철 꽃이 피는 이 지역 기후로 보아 목욕탕은 정말 필수적인 시설물이었으리라 생각된다. 길가에는 그 옛날에 설치되었다는 수도시설을 이용한 식수대가 곳곳이 있어 목마르고 피곤한 여행자에게 그나마 시원한 한 모금의 물로 기운을 추스리게 했다.

폼페이가 발굴되는 몇 백년 사이 많은 이들이 이 곳을 다녀갔고 이 곳을 소재로 한 많은 글과 그림을 내놓았다. 그리고 지금도 엄청난 인파가 이 곳을 다녀가고 이렇듯 글을 쓰는 사람이 있다.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그들의 예술품, 다른 어느 곳에서 찾아 볼 수 없는 그들의 붉은 프레스코화, 화폐 단위와 가격까지 다 알려주는 기록물들, 폼페이는 하루 여정에서 끝나는 도시가 아니라 관련 서적과 자료를 통해 더 탐구되어야만 했다. 그러다가 순간의 생각에 글을 멈춘다. 폼페이를 추모하되 그들이 훼손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섣부르게 판단하지도 말고 조용히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