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Media Forum

제작현장에서 바라본 PD 저널리즘을 말한다

구수환 프로듀서(現 KBS 제작본부 시사정보팀 <추적 60분> 책임 프로듀서 겸 MC)

올해로 방송생활을 시작한 지 19년이 됐다. 보통 이 정도 경력이면 현업에서 손을 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이도 그렇고 방송국 분위기 때문이다. 필자는 지난해 가을 <추적 60분>을 총괄하는 책임 프로듀서 겸 MC를 맡기 전까지 현장을 뛰어다녔다. 누가 시켜서도 아니고 직장의 위기감 때문도 아니다. PD는 자신의 프로그램을 가지고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을 때만이 존재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번에 <제작자가 본 PD 저널리즘>에 대한 원고 청탁을 받았다. 사실, PD 저널리즘은 방송 관련 토론회가 있을 때마다 단골 메뉴처럼 등장하곤 했다. 그때마다 개인적으로는 과연 토론 내용이 PD 제작현장의 현실을 얼마나 제대로 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저널리즘이란 무엇인가? 국어사전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시사 문제에 대한 보도와 논평·해설 등의 활동이나 이러한 활동 분야.’ 몇 년 전부터 방송국 사내에서 PD에게 시사 문제를 맡기면 안 된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PD는 객관성과 판단력이 결여됐다는 것이 그 이유다.’ 물론 직종 간의 밥그릇 싸움이라는 시각도 있지만, 왜 그런 비판이 나오는지에 대한 고민과 반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PD 저널리즘은 무엇인가             

저널리즘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감추어진 진실을 세상에 드러내 사회정의를 추구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저널리스트는 개인적인 희생과 사명감은 물론, 말보다는 항상 실천을 우선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PD 저널리즘을 대표하는 시사고발 프로는 PD들 사이에서 3D 프로그램으로 전락한 지 오래됐다. 그래서 개편 때만 되면 PD 인원 채우기에 급급한 실정이다. 물론 이런 분위기도 일면 이해가 간다. 회사에서 특별한 지원을 해주는 것도 아니고, 속칭 물 좋은(?) 프로그램에 가면 위험하거나 힘들지도 않고 상 탈 기회도 많은데 무엇 때문에 시사 프로그램에 가서 사서 고생을 하느냐는 것이다.  

이제는 사명감이니 성취감이라는 이야기는 꺼낼 수도 없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인기 있는 프로그램은 지원자가 많아 난리이고 그렇지 못한 프로그램은 PD 확보를 위해 후배에게 사정까지 해야 할 형편이다.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PD 사회에도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추적 60>분은 지난해 가을 개편 당시 한 명의 PD도 지원하지 않았다. 결국 고민 끝에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 시사 프로를 반드시 거치도록 한 PD 경력제를 근거로 가까스로 인원을 채웠다. 그런데 본사에서 시사고발 프로 경력이 없는 것도 문제였지만 더 큰 걱정은 본인이 원해서 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마음은 떠나 있는데 어떻게 팀을 꾸려갈 수 있겠는가. 필자는 그들을 외인구단이라 부르며 우선 자신감을 찾아주는 것에 주력을 했다. 그리고 내 자신부터 기득권을 버렸다. 1주일의 4~5일을 편집실에서 후배 PD와 먹고 자며 강행군을 했다. 결과는 빨리 나타났다. 시청률이 예전보다 2~3배나 높은 12~16%를 기록한 것이다. 정말 무서운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개인보다는 12명을 한 팀으로 운영함으로써 서로를 도와주는 분위기는 팀의 능률을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지난해 12월 말 동남아시아를 휩쓸었던 지진해일 피해가 있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네 명의 PD가 현장으로 달려갔다. 신정 연휴에도 한국인 시신을 찾는 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 1월 1일 한국 정부도 찾지 못한 한 여성 희생자의 시신을 PD가 찾아내 가족에게 인계했다. 그리고 사고대책반의 무성의를 고발했다. PD들의 노력은 방송 후 700여 건에 달하는 네티즌들의 격려 글, 19.2%라는 높은 시청률로 나타났다. 외교통상부가 허위방송을 했다고 언론 플레이를 하자 PD들은 다시 태국 현지로 날아가 외교통상부의 거짓 주장을 밝혀내는 집요함도 보였다. 이 프로그램은 분기별 시상을 하는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했다. 생전 처음 시사 프로를 하는 PD들의 취재 능력도 하루가 다르게 향상됐다. 

지난 4월 봄 개편이 있었다. 12명의 PD 중 두 명을 제외하고 모두가 남겠다고 했다. PD 저널리즘은 제작 여건보다는 PD 개인의 의지와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 것이라 생각한다.    
 

PD 저널리즘과 시청률 전쟁 

필자는 요즘 후배 PD들에게 이런 충고를 많이 한다. “프로그램을 말로 설명하지 말고 화면으로 설명해라.” 최근 시사 프로그램은 현장취재보다는 인터뷰 위주 구성이 많다. 쉽고 편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물론 인터뷰 프로그램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확한 답변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질문이 날카롭거나 깊이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프로그램이 재미있는데 왜 시청률이 잘 나오지 않는 거지.’ 방송 다음날 많이 듣는 이야기다.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거나 깊이 있는 프로그램은 반드시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다. 그러나 시청자를 가르치려 하거나 인터넷을 통해 알고 있는 수준의 내용을 보여주면 시청률은 여지없이 3~5% 정도다. 그래서 필자는 후배들에게 시청률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 

지난해 11월부터 <추적 60분> 시청률을 분석한 결과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통상적으로 선정적인 주제는 시청률이 잘 나올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얼마나 깊이 있는 내용과 생생한 현장 화면을 확보했는가에 따라 시청률의 변화 폭이 컸다. ‘90년 만에 드러나는 소록도의 진실’(2004. 11. 10, 14.6%), ‘지진해일 참사현장을 가다’(2005. 1. 1, 19.6%), ‘한국인의 두 얼굴 어글리 코리아’(2005. 1. 19, 14.6%), ‘노숙자 보고서 서울역 25시’(2005. 2. 23, 15.7%), ‘은둔형 외톨이 실태보고’(2005. 4. 13, 15.3%), ‘세상에 두 번 태어난 사람 나는 트랜스 젠더다’(2005. 5. 11, 18.3%). 대부분 특별한 논리나 무거운 주제보다는 시청자가 접하지 못한 현장 기록 내용들이다. 그렇다고 보여주는 것에만 그친 것이 아니다. 모두가 인권문제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시청률 문제는 인터넷의 발달로 많은 정보를 접하는 현실에서 단순한 정보 제공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아이템의 선정보다는 깊이 있는 취재와 PD들의 끈질긴 노력이 그 어느 때보다도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PD는 프로그램으로 말한다

참으로 쉬운 말 같으면서 실천하기 가장 어려운 말이 아닌가 싶다. 방송생활20년에 접어들지만 요즘 들어 방송이 무엇인지를 조금 알 것 같다. 취재 방법부터 카메라 앵글, 편집 기법, 원고작성까지, 그래서 현장을 떠나는 것이 너무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필자가 PD 저널리즘이 무엇인지를 배운 것은 분쟁지역을 취재하면서다. 1996년 미얀마 분쟁지역을 시작으로 동티모르, 체첸, 남미, 팔레스타인, 레바논, 아프가니스탄, 이라크까지 대부분 분쟁지역을 다녀왔다. 현장에서 만난 세계적인 종군기자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느낀 몇 가지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어느 분쟁지역이든 국적도 모르는 수백 명의 저널리스트들이 활동을 한다. 면도를 하지 않아 턱수염이 더부룩한 모습, TV라는 글자가 새겨진 방탄복을 입고 있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항상 미소를 머금고 있다.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전쟁터를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이 그들에게 커다란 힘을 주는 것일까. 

지난 2003년, 필자는 을 통해 종군기자라는 프로그램을 제작 방송한 바 있다. 당시 방송을 제작하게 된 이유는, 미군의 바그다드 입성이 이뤄진 뒤 기자들이 머물던 팔레스타인 호텔에 미군의 포격으로 로이터 TV 카메라 기자와 알자지라 TV 기자가 숨진 사건 때문이다. 필자는 2001년부터 모두 10차례에 걸쳐 중동지역 취재를 했다. 그 덕분에 세계적인 종군기자들을 알게 됐다. 그런데 안면이 있던 기자가 피살된 것이다. 전쟁터에는 항상 가슴 아픈 사연이 있게 마련이다. 피살된 기자는 알자지라 TV의 타리크 기자와 로이터 TV 테라스 카메라 기자다. 두 사람은 요르단 태생으로 친구 사이였다. 2003년 4월 8일 새벽 5시경, 미군의 바그다드 진입이 시작됐다. 알자지라 TV의 타리크 기자는 생방송 리포터 준비를 시작했다. 그런데 그곳에 미사일이 떨어졌다. 이 모습을 멀리서 카메라에 담은 사람이 바로 로이터 테라스 기자다. 그런데 그 역시 곧바로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12층 높이에서 촬영 중인 테라스 기자에게 포탄이 날아든 것이다. 

바그다드로 날아가 두 사람의 마지막 테이프를 보았다. 그리고 타리크 기자가 피살된 곳에 찾아가 그가 마지막으로 전쟁의 비극을 알린 그 자리에 앉았다. 총알이 오가는 상황에서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동료기자들은 미군 진입을 알리기 위해 며칠 전부터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고 한다. 카타르 도하에 있는 알자지라 TV 본사를 찾아갔다. 뉴스센터 입구에는 타리크 기자의 사진이 동료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동료들은 이라크에 자원을 했다. 참변을 당했다며 미국에 대한 분노를 표시했다. 필자는 그곳에서 또 한 사람의 종군기자 만났다. 미군의 아프가니스탄 공격을 유일하게 현장에서 전 세계에 알린 종군기자 타이시니 울루니였다. 그는 오 사마 빈 라덴을 특종 인터뷰한 후 미국 정보기관의 감시를 받아왔고, 2003년에는 스페인에서 테러 단체와 연관이 있다며 체포되기도 했다. 타이시니 울루니는 전쟁터를 찾아다니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대답했다. 

“저널리스트는 평가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 현장에서 일어나는 사실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저널리스트는 사건의 현장을 떠나서  는 안 된다.”

이라크전 당시 바그다드에는 수백 명의 종군기자가 있었지만 그곳에서 상주한 한국 기자와 PD는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도 국내방송에는 이라크전 보도가 계속 나왔다. CNN 등 미국 언론매체의 화면을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시각에서 전쟁을 보도한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저널리스트는  사건의 현장을 지켜야 한다는 기본 원칙마저 저버린 것이다. 개인적으로 깊은 반성과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끼게 한 프로듀서가 있다. 그 주인공은 코소보 APTN 지국장 겸 프로듀서인 엘리다라는 여성이다. 한 아이의 엄마인 그녀가 종군 PD를 택한 것은 남편의 죽음 때문이다. 남편은 코소보의 영웅으로 불리는 종군기자 케럼 로턴이다. 케럼은 마케도니아 국경에서 취재를 하다 사망했다. 케럼이 사망한 마을 한가운데에 그의 무덤이 있었다. 그곳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포탄이 떨어져 두려움에 떨던 그날 우리 곁에는 단 한 사람이 있었다. 캐 럼 로턴이다. 우리는 그를 존경한다. 그는 항상 우리 마음속에 있다.

주민들로부터 존경받는 케렘 로턴은 어떤 사람일까. 비석에 씌어진 글을 읽어 내려가면서 숨이 멎는 듯했다. 장례식이 있던 날 4만여 명의 주민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고 한다. 엘리다는 남편이 사망 한 후 스스로 종군 PD의 길을 택해 남편의 못 다한 일을 이어가고 있다. 그녀가 들려주는 한마디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전쟁은 모든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일이다. 그래도 이 일을 하는 것은 다른 누구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전장을 향하는 기자들에게 왜 그런 무모한 일을 하느냐, 죽을 수도 모른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느냐고 말한다. 하지만 내가 이 일을 하는 이유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되고 싶기 때문이다. 저널리스트라면 끝까지 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종군기자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역사의 현장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서다. 그리고 때로는 그들이 역사의 기록으로 남기도 한다. 필자는 이 프로그램을 제작하면서 그 동안 방송생활에 대한 깊은 반성을 했다.   

2002년 베들레헴을 취재했을 때다. 당시 베들레헴은 이스라엘군이 길목을 완전통제하고 팔레스타인 저항단체 요원 색출작업을 하던 중이었다. 베들레헴에 잠입하기로 하고 저항단체의 도움을 받아 한 병원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이스라엘군 총에 맞아 숨진 여성들의 시신이 있었다. 방탄복을 착용하고, 방탄복에는 TV라는 글자를 종이를 잘라 붙였다. 현지 안내인과 함께 마을로 들어섰다. 길거리에는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았고, 도로에 널려 있는 탄피는 열기가 남아 있었다. 안내인은 도로 중앙으로 걷도록 했다. 이스라엘 저격병들이 곳곳에 있는데 차라리 중앙으로 가는 것이 안전하다는 것이었다. 마을로 들어서자 참혹한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휴지조각처럼 구겨진 차량, 주택가 벽은 온통 총탄 자국뿐이다. 한 가정에 들어가자, 보름째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해 굶어죽을 지경이라며 도움을 요청했다. 마을에서 이동 중 갑자기 이스라엘군의 목소리가 들렸다. 죽기 싫으면 빨리 떠나라는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수십 발의 총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순간 주변에 있던 호텔로 황급히 몸을 피했다. 이스라엘군의 수색이 시작됐다. 호텔 옥상으로 피신했다. 주민들은 전쟁에 익숙한 듯 총소리가 계속되는데도 식사를 계속했다. 본사에 연락을 취했다. 국내언론사로는 유일하게 현지상황을 전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노트에 중요한 내용을 메모한 뒤, 밤 12시에 생방송으로 진행 중인 시사 프로에 연결이 됐다. 가까스로 그곳을 빠져 나왔다. 그런데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다. 함께 있다 다른 지역을 취재한다며 떠난 프랑스 기자가 총을 맞아 사망한 것이다. 몇 시간 전만 해도 환하게 웃던 그의 모습을 생각하니 정말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동안 분쟁지역을 돌아다니며 많은 어려움도 있었지만 정말 운 좋게 위험을 피해 나갔다.

1998년 국제 마약조직이 한국을 노린다는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국내에 쿤사 조직의 마약이 적발돼 비상이 걸렸기 때문이다. 마약수사는 국정원에서 제공하는 정보를 토대로 검찰, 세관 등 수사기관이 적발한다. 그러나 단발성이 대부분이다. 현지 정보가 없기 때문이다. 동남아 마약의 유통경로를 추적하기 위해 태국과 미얀마 국경을 찾아갔다. 사실 동남아 마약조직은 세계적인 폭력조직 홍콩의 삼합회가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보통 위험한 취재가 아니었다. 당시 마약 왕 쿤사는 미얀마 정부의 보호 아래 있어서 만나지 못했다. 태국 국경에 숨어 있던 쿤사 조직 2인자인 쿤두안과 연락이 닿았다.

그에게 아는 한국인이 있냐고 묻자 사진을 보여주며 성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한국을 드나드는 책임자 사진도 보여주었다. 한국에 마약을 공급하는 책임자라는 확신이 드는 순간 사진을 어떻게든 확보해야 한다는 생각에 앨범을 들고 화장실로 갔다. 3장의 사진 빼냈다. 그리고 산길을 전속력을 내달렸다. 혹시라도 추격을 해올까 봐 6시간 동안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태국 취재를 무사히 마친 뒤 마약조직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와족 마을을 찾기로 했다. 중국 남부 쿤밍에서 차로 16시간을 달려 중국 미얀마 국경지역으로 이동했다. 중국 경비대의 삼엄한 경비는 물론 모든 마을 사람들이 자동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외국인이 나타나자 신분확인을 했다. 그런데 위기의 순간에서 필자를 구해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인 마약상이다. 마을 주민들은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김・박・최’라는 성을 이야기하며, 얼마 전에도 다녀갔다고 했다. 강 건너가 와족의 거점인 팡상 마을이라고 했다. 세계 최대 마약조직의 본거지 앞에 와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국경은 너비 70미터의 남카 강이 흘렀다. 밤이 되자 국경 다리 마을에 환한 불빛이 새어나왔다. 밀림 산속에서 어떻게 저런 불빛이 새어나오는 것일까. 너무나 궁금했다. 그러나 중국 경비병의 감시 때문에 국경을 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틀 동안 궁리하다 강을 건너 마을에 진입하기로 했다. 함께 간 태국 카메라맨은 절대 갈 수 없다고 버텼다. 하는 수 없이 직접 촬영하기로 하고 밤늦게 마을 주민을 따라 나섰다. 그런데 강을 헤엄쳐 가는 도중 문제가 발생했다. 수영이 미숙한 필자가 물살이 센 곳으로 건너다 100미터 가량 떠내려간 것이다. 순간, 이제는 죽었구나 하며 가족들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나 천만다행으로 수심이 낮은 곳으로 떠밀려 살아남을 수 있었다. 

말도 통하지 않는 중국 안내인이 달려왔다. 그들에게 무조건 팡상 마을로 가자고 했다. 잠시 후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깊은 산중에 호텔은 물론 길거리에는 매춘여성이 줄지어 서 있고, 대형 스크린에서는 할리우드 영화가 상영되고 있었다. 더더욱 놀란 것은 카지노였다.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로 가득했다. 몰래 카메라로 정신없이 현장을 담았다. 한 시간이 지났을까. 신고가 들어갔는지 공안들이 달려왔다. 중국 안내인은 무조건 달아나라는 시늉을 했다. 잠시 후 세퍼트 짖는 소리, 오토바이 소리가 귓전에 점점 가까이 들려왔다. 중국 안내인은 무조건 강물로 뛰어들라는 표정을 지었다. 안내인에게 카메라와 테이프, 신분증을 맡겼다. 만일 있을지도 모를 불상사에 대비해서였다. 앞만 보고 헤엄을 쳤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중간 지점에 왔는데도 바닥이 발에 닿는 것이다. 이제 살았다는 생각에 너무나 기뻤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3일 동안 몸살 때문에 꼼짝달싹 못했다. 취재내용은 모두 국가정보원, 검찰, 세관에 제공했다. 그리고 6개월 뒤 방송에서 제기했던 신종 마약을 국내에 유통시킨 조직이 검거됐다는 연락이 검찰로부터 왔다.  
        

PD는 프로그램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  
 
PD 저널리즘의 효시라면 <추적 60분>을 꼽을 수 있다. 1982년 첫 방송을 시작한 <추적 60분>은 지난 3월 16일 700회를 맞았다. 필자는 700회 특집방송을 준비하면서 20여 년 전 테이프 전체를 다 봤다. ENG 카메라가 무엇인지도 모르던 시절, 시민들은 TV 화면에 소문으로만 들어왔던 충격적인 장면과 비리현장이 고발되자 열광했다. ‘한국판 몬도가네-몸에 좋으면 뭐든지’(2회), ‘인신매매의 현장’(19회), ‘긴급취재 고리대금, 그 함정은’(48회) 방송이 나간 다음날, <추적 60분> 프로그램 내용을 모른다면 간첩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만큼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생전 처음 TV에 출연한 PD들은 기자의 리포터와 달리 대화 형식으로 이끌어 자연스러워 보였고, 방송 원고도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직설적이고 인터뷰 내용도 파격적이었다. 군사정권 시절 언론 통제하에서 어떻게 이런 방송이 나갈 수 있었는지 참으로 궁금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당시 군사정권이 사회고발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방송에 압력을 가하기보다는 이용하려 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것이 1984년 학원민주화가 한창일 즈음 ‘대학가의 검은 덫-지하 서클’이라는 프로그램이다. 방송내용은, 대학 서클에 불순세력이 침투해 학생소요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정권의 압력은 프로그램의 신뢰도에 엄청난 타격을 주었다. 그리고 1985년 갑자기 편성표에서 사라졌다. 

<추적 60분>이 다시 시청자에게 돌아온 것은 1994년 2월 27일이다. 이 당시는 시사다큐 프로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아마도 이때만큼 시사 프로의 전성기도 없었던 것 같다. 아마도 이런 분위기는 문민정부가 출범하면서 민주화 바람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당시 KBS는 베테랑 PD 8명을 투입하고 최고의 제작비 지원을 한다며 <추적 60분>을 부활시켰다. 필자는 운 좋게 8명의 멤버에 뽑혀 시사 분야에 발을 들여놓게 됐다. 그때 분위기를 소개한다면 전쟁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것 같다. 매주 일요일 밤 9시 정각에 편성을 해놓는 바람에 KBS, MBC 양 방송사 메인 뉴스와 타 방송사 기자들이 만드는 시사 프로와 처절한 시청률 경쟁을 벌여야 했다. 회사의 편성은 적중했다. 뉴스에 익숙한 시청자들에게 말로만 듣던 현장을 보여주는 것은 큰 반응을 몰고 왔다. 평균 시청률은 20~30%, 지금과 비교하면 상상할 수 없이 높은 것이었다. 메이저 신문 사회면, 사설에서도 종종 방송내용이 소개됐다. 시간이 갈수록 영향력이 커지자 반대로 방송을 막기 위한 로비, 압력 또한 대단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제정구 의원과 건설업체 비자금을 추적하던 중 국내 굴지의 ◯◯ 건설회사 비자금 장부를 입수했다. 당시 장부에는 건설사로부터 돈을 받은 100여 명이 넘는 공무원 언론인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간부진으로부터 갑자기 방송을 낼 수 없다는 지시가 떨어졌다. 몇 차례 강력한 항의를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얼마 후 모 메이저 신문과 타 방송에서 비자금 내용을 보도해 특종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10여 년 동안 시사 프로그램에 전념하면서 가정은 물론 친구, 개인생활 등 모든 것을 잊어버려야 했다. 주위로부터 일에 미쳤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시사 프로는 사회의 비리나 불법행위를 고발하는 것이다. 따라서 취재 대상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들의 잘못을 감추려 할 것이고, 만일 적발되면 모든 방법을 동원해 방송을 막으려 할 것이다. PD는 수사관이 아니다. 따라서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는 피나는 노력이 요구된다. 상대방보다 덜자고 더 뛰어다녀야 한다. 

어느 날 알지도 모르는 사람이 갑자기 전화를 걸어오면 그것은 대부분 방송을 빼 달라는 청탁전화였다. 초등학교 동창생을 찾아내 전공세를 하는가 하면 회사직원을 통해 빼 달라는 요청도 한다. 이것도 저것도 안 되면 PD 개인 집으로까지 찾아오기도 한다. 협박전화는 다반사다. 집 앞에 수상한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어 승용차는 항상 다른 아파트 주차장에 세워놓고 다닌 적도 있다. 한번은 국제 여권위조 조직이 한국 여권을 노린다는 정보가 있어 태국으로 날아가 조직 내부사정을 잘 아는 조직원을 만나 인터뷰를 하고, 모자이크 음성 변조를 해서 방송했다. 그런데 3일 후 그 조직원이 피살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필자한테도 앞으로 태국에 들어오지 말라는 편지가 날아왔다. 문제는 이 모든 위험을 PD 스스로 이겨내야 한다는 것이다. 회사에서는 고생한다는 말뿐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PD는 외롭다고 하는 것일까.          

PD 저널리즘과 관련해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이야기가 있다. 회사는 공영성 확보라는 차원에서 시사 프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리고 높은 시청률과 광고 확보까지 요구한다. 그런데 인력이나 예산지원은 일반교양 프로와 똑같이 배분한다. 지원을 통한 프로그램 경쟁력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PD들 몸으로 때우라는 이야기다. 그래도 PD들은 자존심 때문에 참고 견뎌낸다. 이러한 현실은 또 다른 문제를 낳고 있다. 시간에 쫓긴 제작시간은 소송을   불러오는 원인이 되곤 한다. 시사 프로그램은 정확성과 객관성의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최근 들어 법적 소송 문제 때문에 언론사마다 골치를 앓고 있다. 필자도 그 동안 형사고소 1건, 민사소송 2건, 언론중재위 제소 2건의 명예훼손 소송을 당했다. 민・형사 소송은 모두 이겼고, 반론보도는 한 번 내준 적이 있다. 그런데 소송을 당한 PD들은 이중삼중의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회사측에서 지정한 변호사가 있지만 소송 준비를 직접 해야 한다. 필자의 경우, 증거 확보는 물론 상대방의 잘못에 대한 문구 작성을 며칠 밤을 새워 직접 작성했다. 고통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소송을 당했다는 이유만으로 마치 잘못된 방송을 한 것처럼 눈총을 받고, 반론보도라도 내주면 PD는 죄인이 돼버린다.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서는 PD 스스로 철저한 사실 확인을 하는 것만이 현실적인 대안일 수밖에 없다. 얼마나 기가 막힌 현실인가. 

요즘 PD가 작가에 너무 의존한다는 비판이 있다. 이런 이야기가 나오기까지는 개인적으로 PD들의 잘못이 크다고 생각한다. 시사 프로의 경우 사전에 충실한 사전 답사를 한 다음 현장 취재를 하고, 이를 근거로 편집 콘티를 짜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사전 답사는 고사하고 취재한 내용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편집을 하고, 원고를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참으로 위험한 일이다. 내용파악도 제대로 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정확한 원고가 나올 수 있겠는가. 그래서 후배 PD에게 꼭 권하는 말은 시사 프로만큼은 PD들이 직접 구성하고, 원고를 집필하라는 것이다. 남의 잘못을 고발하는데 취재한 사람말고 누가 그 문제에 대해 더 잘 알고 있겠는가. 최근 시사 프로그램의 원고 집필을 하는 PD가 늘어 참으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PD 저널리즘의 위기인가-탐사보도의 등장

기자와 PD의 다른 점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기자는 사건의  사실 확인을 우선하지만 PD는 진실을 찾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대답한다. 사실과 진실의 차이는 무엇인가. 사실은 나타난 현상을 말하는 것이지만 진실은 사건의 원인 배경을 말한다. 그 동안 PD와 기자 직종을 하나로 묶어 활용하는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번번이 실패했다. 그런데 최근 인터넷의 영향력이 커진 이후 기자들의 탐사보도가 부쩍 늘고 있다. KBS의 경우 탐사보도 팀까지 만들었다. 올 봄 개편 때는 일요일 아침 시사 프로그램을 기자에게 내주었다. PD 저널리즘의 최대 위기를 맞고 있는 것 같다. 기자 저널리즘이라는 이야기는 없는데 왜 PD 저널리즘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비록 취재 방식은 거칠지만 현장의 진실을 숨김없이 보여주는 독특한 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취재내용뿐만 아니라 편집에서도 나타난다. 같은  화면을 가지고 많은 의미를 전할 수 있는 것이 PD만의 강점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PD 저널리즘의 향상을 위해 필요한 대책은 무엇일까. 

전문가 양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한 분야에서만큼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PD가 배출되어야 한다. 예전에는 양적인 승부였다면 이제는 질로 승부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문가 육성이 활발할 때만이 미래의 불확실성 때문에 고민하는 후배 PD들에게 희망을 주고, 이런 분위기는 질 높은 프로그램을 만드는 데 크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PD 저널리즘을 언급하면서 제작비, 인력부족 등 회사측에 대한 강한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다. 경영 문제로 어려움을 안고 있는 회사측에 기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PD는 시청자에게 군림하는 직업이 아니다. 시대의 아픔과 억울함을 대변하고 국가와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이다. PD 정신은 그 시대의 정신을 이야기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PD 저널리즘의 못 다한 이야기   

프로그램 제작을 하는 PD로서 가장 가슴 아픈 일은 제작한 프로그램이 불방되는 경우다. 개인적으로 그런 뼈아픈 경험이 두 번 있다. 

1998년 <모 신문을 해부한다>라는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당시 제기했던 내용은 권언 유착, 신문의 안보상업주의, 신문사주의 문제, 정기간행물법 개정의 필요성 등이다. 당시 이 프로그램이 주목을 받았던 것은 밤의 대통령이라고 할 만큼 막강한 언론 권력에 처음으로 도전장을 내밀었다는 점 때문이다. 그러나 무모한 용기는 신문사가 아닌 회사측의 방해로 큰 상처만 남긴 채 끝이 났다. 이후 필자는 깊은 좌절과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진급의 불이익은 물론 문제 PD로 낙인 찍혀 왕따를 당하기도 했다. 그런데 7년 후 정권이 바뀌었다. 대통령이 나서 그 신문사에 대한 비판을 시작했다. 그러자 신문사를 비판하는 방송이 줄을 이었다. 그러나 그 신문사의 영향력은 더 거세지는 느낌이다.  

7년 전 그 신문사와 정면 승부를 벌였다면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까. 두고두고 아쉬움이 남는다. 방송자료실에 있는 불방 테이프는 앞으로도 세상의 밝은 빛을 보기가 힘들 것 같다. 

PD 저널리즘은 진실을 말해야 한다. 진실은 부당한 권력, 자본에 철저히 가려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진실을 밝히는 것은 끈질긴 노력, 희생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 PD에게 돌아오는 대가는 무엇인가. 아무것도 없다. 단지 빽 없고 억울한 사람들이 프로그램을 보고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에 즐거워하는 것이 PD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