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Media Forum

방송 저널리즘의 기본 가치와 역사적 변화

이재경(이하여자대학교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

1. 서론


방송 저널리즘의 역사는 이제 80여 년이 되었다. 

1920년대 라디오 방송의 탄생이 방송 저널리즘의 시작이다. 길게 잡아 4백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신문과는 비교하기 어렵다. 그러나 전자와 매체 기술의 발전 속도가 빨라 지난 80여 년 사이 방송 저널리즘의 모습은 몇 차례 혁명적 변화를 겪었다. 또 이러한 변화의 추세는 어찌 보면 디지털 시대를 맞아 더욱 가속화하는 느낌도 있다. 

기술이 촉발하는 변화는 크게는 라디오와 텔레비전, 케이블TV, 위성방송, DMB 등 방송매체의 변화에서부터 공영과 상업방송 등 제도의 변화와 저널리즘의 가치나 프로그램 양식 등 콘텐츠와 관련된 변화들까지를 모두 포함한다. 변화를 촉발하는 요인들에는 민주화와 세계화 등 정치・사회적 조건들도 포함되는 것은 물론이다. 

이 글은 이처럼 급격히 변화를 거듭하는 방송환경과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한국 사회의 민주화와 다원화 과정을 염두에 두면서 크게 두 가지 문제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첫째는, 방송 저널리즘의 기본적 가치는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는 작업이다. 이 작업은 특히 최근처럼 가치관의 갈등이 첨예하게 드러나는 시기에 인터넷을 통한 개인 미디어의 영향까지 겹쳐 저널리즘 철학에 대한 기본적 합의가 무너지는 상황에서 긴요한 일이라 판단된다.

두 번째 주제는, 한국 방송 저널리즘은 지난 80여 년 동안 어떠한 과정을 거쳐 발전해왔는가를 되짚는 작업이다. 여기서는 물론 방송 저널리즘의 모든 측면을 정리하는 게 아니라 기본적 제도나 양식의 변화 흐름을 구조적으로 관찰하려 한다. 또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치는 의미 있는 요소들의 등장에도 주목하고자 한다. 방송 저널리즘이 진화해온 역사적 과정을 짚어가다 보면 자연스레 방송 저널리즘의 기본적 가치들에 대한 논의가 포함될 것으로 판단한다.

2. 방송의 영향력과 방송 저널리즘의 기본 가치들
 
텔레비전은 현대사회의 가장 강력한 문화기관이자 교육기관이다. 거브너(Gerbner, 1996)는 텔레비전이 과거 종교가 차지했던 정신적 지도자 역할의 대부분을 빼앗아 왔다고 말했다. 그는 심지어 조부모나 부모가 담당했던 옛날이야기해주기를 통한 후세들에 대한 훈육의 기능도 TV가 넘겨받은 지 오래라고 강조했다. 포스트먼(Postman, 1985)은 텔레비전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현대 대중문화의 핵심 가치를 즐거움 또는 오락이라고 주장하며, 현대인은 지나친 오락 추구로 의식상실에 이르게까지 된다고 주장했다. 너무 강력해진 방송의 의식 장악력을 비판하는 주장이다. 

그런가 하면, 부르디외(Bourdieu, 1998)는 텔레비전은 현대사회의 상징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강력한 도구라고 말했다(p. 16). 그는 또 오늘날 존재한다는 것은 텔레비전에 의해 인식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도 말했다(p. 14). 역시 일상생활을 지배하는 방송의 힘을 지적하는 말이다. 

텔레비전이 강력한 힘을 갖는 주요 근거로는 거의 100%에 달하는 수상기 보급률이 제시하는 보편적 메시지 전달 능력과 영상과 소리를 결합한 현실성 높은 메시지 구성 방식을 들 수 있다. 거기에 특별한 노력이 필요하지 않은 수용의 편리성까지 겸비해 텔레비전은 전 세계적으로 신문이나 라디오, 잡지 등 다른 매체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해온 지가 적어도 50여 년에 이른다.

한국 방송의 위력에 대해 최정호는 한 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영구 권력, 임기도 없는 제왕적 권력으로부터 마냥 자유롭다 할 수 있을 것인가. 대통령 이상으로 온 국민의 일상생활의 공간과 시간에 개입해 들어와서 그들의 행동과 의식을 지배하는 또 다른 권력이 있으니 말이다. 이 권력 앞에는 야당도 없고, 의회의 견제도 없고, 언론의 비판도 없다. 대통령이 바뀌고, 정권이 수직적・수평적으로 교체되고, 그 권좌에 군부정권에 빌붙은 사람이 앉건 민주화 대열에 섰던 사람이 앉건, 이 무한 권력의 행태에는 변화도 차이도 없다. 우리나라의 TV 방송을 두고 하는 말이다(동아일보, 2002. 11. 25.).

그는 같은 글에서 ‘우리는 오늘날 TV를 통해 노동의 강제수용소가 아니라 소비와 낭비, 사치의 강제 수용소에 갇혀 있다’고까지 주장했다. 최정호는 TV를 ‘제왕적 교사’요 ‘시민의 문화생활과 언어생활, 소비생활을 지배하는 제왕적 주재자’라고까지 묘사했다. 물론 최 교수의 말은 수사적 과장으로 포장돼 있다. 그러나 이 글은 현대사회에서 텔레비전이 행사하는 힘에 대해 지식인들이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를 비교적 구체적으로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한국언론재단이 2004년에 실시한 수용자 의식조사 결과를 보면, 한국 사회에서 텔레비전이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하는지를 체계적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우선 국민의 매체 이용 시간 비교를 보면 신문은 하루 평균 34.3분을 읽는다고 답한 데 비해 텔레비전은 155.2분을 보는 것으로 드러났다. TV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신문 보는 시간보다 4.5배나 많다는 뜻이다.

2년마다 실시하는 이 조사의 결과는 신문의 경우, 1996년에는 43.5분에서 1998년 40.8분, 2000년 35.1분, 2004년 34.3분으로 독자들의 접촉 시간이 지속적으로 줄고 있음을 보고한다. TV의 경우도 1990년대와 비교하면 172분(1996년), 193.6분(1998년), 174.1분(2000년), 163.7분(2002년), 155.2분(2004년)의 변화를 보여 소폭이지만 시청 시간이 줄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감소 폭이 크지 않아 비교적 안정적인 시청행태가 유지되고 있음을 알려준다. 다음은 같은 수용자 조사에서 매체의 속성별 평가를 다룬 내용이다. 신문과 TV만을 중심으로 다시 표를 구성했다.




이 표를 보면 역시 텔레비전의 매체력이 각 부문별로 얼마나 강력하게 유지되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중요성과 영향력 분야의 지표가 시간이 지나며 현격하게 강화되고 고정되는 상황이 눈길을 끈다. 상대적으로, 신문의 통계수치는 급격히 퇴조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1996년 48.5%이던 신문의 영향력은 2000년 15.6%, 2004년 11.2% 수준으로 급격히 줄어든 데 비해, TV의 영향력 수치는 1996년 40.8%에서 2000년에는 73.1%로 두 배 가까이 확장됐다가 2004년에는 63.6%대로 유지됨을 알 수 있다.

텔레비전의 전반적 힘이 아니라 TV 뉴스의 영향력 부분을 따로 조사한 자료 역시 지속적으로 강화되는 TV의 정보제공 기능을 입증한다.




<표 2>의 통계를 보면, 뉴스의 소비에 있어서도 기사의 종류에 관계없이 텔레비전 매체의 영향력은 지속적으로 강력하게 유지되고 신문의 힘은 크게 줄고 있는 추세를 확인할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을 살펴보면, 정치 뉴스는 1996년 신문 48.6%, TV 49.3%로 두 매체의 정보원으로서의 비중이 비슷하게 나타났었다. 그러나 이 균형은 2000년 35% 대 60%로 크게 격차가 벌어졌고, 2002년 조사에서도 32%(신문) 대 54%(TV)의 차이를 유지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러한 추세는 경제 뉴스와 사회 뉴스에서도 같은 경향을 보이는데, 특히 사회 뉴스의 경우 TV 매체의 상대적 위력이 더 크게 드러남을 알 수 있다. 평상시 주중 공중파 TV 3사인 KBS와 MBC, SBS 저녁 종합 뉴스의 누적 시청률은 45% 전후를 기록한다. 전 국민의 절반 가까운 사람들이 매일 TV 뉴스를 보고 세상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한다는 뜻이다. TV 매체의 국민의식 장악력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지표이다.

이렇게 보면 방송 저널리즘은 인터넷 매체에 의해 부분적으로 도전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정치와 경제, 사회 뉴스는 물론 심지어 문화 관련 정보의 전달에서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물론 KBS나 MBC, SBS 등 개별 방송사의 영향력은 케이블 방송과 위성방송,  DMB 등의 등장에 따른 채널의 증가로 상대적으로 감소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YTN과 시민 채널, 지역 채널 등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으로서의 방송 저널리즘의 힘은 더욱 강화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방송 저널리즘의 기본 가치들 

1920년대 라디오 방송이 시작된 이래, 방송 저널리즘을 지탱해온 중심 가치는 공공성(public nature of broadcasting)과 공익성(public interest)이다. 이것은 물론 신문 저널리즘의 기본적인 가치이기도 해왔다. 따라서 공공성과 공익성은 매체의 특성과 관계없이 모든 저널리즘 활동의 기본 가치라고 이해해도 크게 무리가 없다. 

그러나 매체를 사유화할 수 있고, 취재와 제작 과정에 공공재가 개입할 여지가 적은 신문, 더 크게는 인쇄매체와 달리 제한된 주파수대를 갖고 있는 공중파(airwave)라는 공공의 자산을 사용해 정보를 전달해야 하는 방송의 경우는 그 작동 방식 자체가 신문이나 다른 인쇄매체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다시 말하면, 공중파를 사용하는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은 공공의 자산인 공중파 주파수를 배정받지 못하면 아무리 많은 자본을 투입해도 존재할 수 없다는 뜻이다. 또, 그렇기 때문에 공중파 라디오와 텔레비전은 사회 구성원 전체의 동의를 바탕으로 존재하는 기관으로 규정됐고, 사회 구성원들의 공동 이익을 대변하는 의무를 갖게 된 것이다. 방송, 특히 공중파를 사용하는 방송의 경우는, 방송 산업을 규정하는 제도가 공영인가 상업방송체제인가와 관계없이, 모두 이러한 원칙에 따라 작동한다.

영국의 BBC 초대 사장이었던 존 레이트(John Reith)는 이러한 원칙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주파수의 희소성 때문에 방송은, 정부나 기업의 직접적인 영향에서 자유로운 상태에서, 사회 안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정보와 교육 서비스 그리고 오락 프로그램을 제공해야 한다(Crisell, 1999).” 레이트의 말에서 특히 강조되는 부분은 사회 안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방송 저널리즘의 이념은 그 뒤로 지속적으로 되풀이해서 강조된다. 미국의 CBS 기자였던 와일리(Max Wylie, 1939)는 1939년 라디오 뉴스에 관한 교재를 펴냈다. 이 책에서 그는 “방송 네트워크들은 일반대중(the public at large)들에게, 하나의 거대한 공동체로서 그들 전체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는,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들에 관한 소식을 전달해야 할 의무를 가진다”고 썼다. 공영방송인 BBC의 저널리즘 이념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가치관이다.

거의 비슷한 관점에서 스캐넬과 카디프(Scannell & Cardiff, 1982)는 방송 저널리즘은 “모든 사람을 위해 무엇인가를 전달해야 할 뿐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서는 모든 것을 제공해야 하기도 한다(not only to provide something for everyone but everything for someone.)”라고 말했다. 여기서 이들이 강조하는 것은 방송내용의 다양성이다. 그들에 따르면, 개인 수용자들은 가능한 다양한 범위의 콘텐츠(the widest possible range of content)에 접할 수 있어야 한다. 또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방송사는 다양한 내용과 관점이 혼합된 뉴스 프로그램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설명이다.

BBC 연차보고서는 방송 뉴스의 기능에 대해 더욱 분명하게 밝힌다. “BBC 뉴스의 기능은 공정하고 분명하게, 그리고 절대로 특정한 시각을 강요하지 않으면서, 세상에서 발생하는 가장 중요한 일들을 요약해주는 일이다(BBC Year Book, 1947).”

한국 방송 저널리즘의 이념은 앞에서 제시한 영국 방송의 가치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 방송의 기본 가치는 2000년 제정된 방송법에 잘 정리돼 있다.

방송법 3조를 보면, ‘방송 사업자는 시청자가 방송 프로그램의 기획, 편성 또는 제작에 관한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하고, 방송의 결과가 시청자의 이익에 합치하도록 하여야 한다’라고 제시되어 있다. 이는 매우 강력하게 방송의 시청자 주권을 명시한 규정이다. 시청자가 프로그램 제작에까지 참여할 수 있도록 했고, 방송 결과가 또 시청자의 이익에 합치해야 한다고까지 함으로써 방송의 공공성을 최대한 확대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 

방송법은 이러한 기본 이념을 바탕으로 5조에서 방송의 공적 책임을 규정한다. 공적 책임과 관련한 중요한 내용은 1항과 2항에 집약돼 있는데, 1항은 선언적 내용으로, ‘방송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 및 민주적 기본 질서를 존중하여야 한다’라고 되어 있다. 요약하면, 인간존중과 민주주의의 가치관을 천명하는 조항이다. 공공성을 규정하는 원칙은 2항에 담겨 있는데, ‘방송은 국민의 화합과 조화로운 국가의 발전 및 민주적 여론형성에 이바지하여야 하며 지역 간, 세대 간, 계층 간, 성별 간의 갈등을 조장하여서는 안 된다’라고 규정했다. 

방송법의 6조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공정성과 공익성에 관한 내용들을 좀더 세밀하게 정리했다. 특히 2항을 보면, ‘방송은 성별·연령·직업·종교·신념·계층·지역·인종 등을 이유로 방송편성에 차별을 두어서는 아니 된다’라고 했고, 5항에서는 ‘상대적으로 소수이거나 이익추구의 실현에 불리한 집단이나 계층의 이익을 충실하게 반영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라고 규정했다. 9항은 정치적 내용에 관한 조항으로 볼 수 있는데, 여기서는 ‘방송은 정부 또는 특정 집단의 정책 등을 공표함에 있어 의견이 다른 집단에게 균등한 기회가 제공되도록 노력하여야 하고, 또한 각 정치적 이해 당사자에 관한 방송 프로그램을 편성함에 있어서도 균형성이 유지되도록 하여야 한다’라고 명시했다. 

이처럼 한국의 방송법은 지나치리만큼 세밀하게 방송의 공적 성격과 공정성, 균형성 등을 규정하고 있다. 이는 역시 과거 권위주의 시대에 지속적으로 문제가 돼온 집권세력에 의한 방송의 지배와 그에 따른 편파방송의 폐해를 제도적으로 극복하려는 시도로 이해된다.

한국 방송 저널리즘의 기본 가치는 이러한 방송법의 기본 이념들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기본 가치들은 앞에서 살펴본 영국이나 미국 등 방송 선진국들의 방송 이념들보다 더욱 구체적으로 법률로 규정될 만큼 강력하며, 우리 방송계와 사회 속에 제도적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문제는 물론 이러한 선언적 이념과 가치관들이 구체적인 일상의 보도 행위들 속에서 기자와 편집자들에 의해 얼마나 실천되는가 하는 점이다. 

한국 방송 저널리즘의 역사

한국의 방송 저널리즘은 1927년 ‘JODK’라는 호출 부호를 사용한 경성방송의 출범으로부터 시작된다. 물론 당시는 등록된 수신기 수가 1천4백여 대에 불과한 상황이었으므로 지극히 제한된 청취자를 대상으로 라디오 보도를 실시했었다(최창봉・강현두, 2001). 여기서 고려할 점은 당시 방송이 주로 일본어로 진행되었다는 사실이다. 수신기의 80%는 일본인들의 소유였던 것으로 조사됐다. 김영희(2002)에 따르면, 1920년대 말 한국어 방송은 밤 9시 40분에서 11시까지만 실시된 것으로 조사됐다. 김영희는, 1933년이 되며 한국어 전용 방송이 제2방송으로 독립해 실시됐고, 그 무렵에야 한국인의 가구당 라디오 수신기 보급률이 1천 가구에 1대 수준이 됐다고 밝혔다. 

초기 뉴스는 일본 도쿄방송 뉴스를 번역해 전달하는 정도였으나 청취자들의 관심은 매우 높았다. 특히 2차 세계대전이 확산되던 1930년대 말부터는 ‘국민필청보도기관’으로 인식됐었다(김영희, 2002). 최창봉과 강현두에 따르면, 라디오 수신기의 보급은 5년 뒤에도 등록 수가 불과 2만여 대에 이를 만큼 저조해, 오늘날 생각하는 방송과는 거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해방 후 미군정시대가 시작되면서 보도 프로그램은 상당히 체계적인 제도를 갖추게 된다. 당시 뉴스 프로그램은 아침 7시, 낮 12시 30분, 오후 5시, 7시, 9시로 하루 다섯 번 편성됐다. 매번 뉴스의 진행 시간은 15분 정도였고, 이러한 정규 뉴스와 별도로 군정청 기록 뉴스라는 프로그램을 오후 1시 30분에 방송했다. 이는 주로 각 지방의 행정기관에게 행정적 정보를 신속히 제공하려는 시도였다. 최창봉과 강현두(2001)에 따르면,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종합 뉴스 성격의 뉴스는 저녁 7시에 편성했고, 9시 뉴스는 그날의 주요 쟁점을 설명하는 해설적 성격이 강했다. 

최창봉과 강현두에 따르면, KBS의 라디오 보도 프로그램이 크게 발전하기 시작한 시기는 6·25 전쟁이 끝난 뒤 사회가 안정되며 보도인원이 확충되고 해외 주요 통신과 계약을 하는 1955년 무렵이다. 이 당시는 특히 텔레타이프가 도입되며 외신의 전달 속도가 빨라져 방송이 신문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당시에는 외신의 비중이 45%에 이를 만큼 많은 시간을 차지했었다. 1956년에는 선거방송이 활성화되며 중계차를 활용해 개표실황이 철야 중계되기도 했다.

텔레비전 뉴스는 1956년 HLKZ-TV가 개국하며 시작된다. HLKZ-TV는 하루 두 차례 뉴스를 방송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제휴사인 한국일보 뉴스와 통신사 뉴스, 미국 문화원이 제공하는 리버티 뉴스 등으로 내용을 채웠다. 최창봉과 강현두의 설명을 보면, 당시는 전문 인력이나 자원이 모두 크게 부족한 여건이었다. 

따라서 제대로 된 TV 뉴스는 대체로 1960년대 초 KBS TV가 개국하는 시기에 시작된다. 1961년 12월 31일 개국한 KBS TV는 매일 오후 6시와 8시 30분에 10분씩 뉴스를 편성했다. 또 이와는 별도로 리버티 뉴스와 런던 TV 뉴스를 묶어 1주일에 세 차례 10분씩 해외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기사는 대부분 라디오 보도계의 지원을 받거나 정부기관의 보도자료를 가공해 만들었고, 전달 방식은 아나운서가 기사를 읽어주는 스트레이트 뉴스 보도 양식을 사용했다.

1964년 12월 7일 동양텔레비전(TBC) 방송이 문을 열었고, 1969년 8월 8일에는 라디오만 갖고 있던 MBC가 TV 방송을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방송 3사의 경쟁 시대가 열리면서 TV 뉴스도 새로운 변화의 순간을 맞게 된다.

현대적 TV 뉴스 양식의 등장

1960년대 말부터 KBS와 TBC, MBC 3사의 경쟁구도가 격화되며 TV 뉴스 양식도 혁명적 변화를 겪는다. 최창봉과 강현두(2001)에 따르면, 그 무렵 TV 방송에서 보도 프로그램은 불규칙하게 들쭉날쭉 편성돼 다른 연예・오락 프로그램의 잔여시간을 채우는 정도의 부수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다. 전체 프로그램 시간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불과 10% 수준에 머물렀을 뿐이다. 이처럼 브릿지나 쿠션 프로그램 정도에 그치던 TV 뉴스를 저녁 TV 프로그램의 중심으로 격상시키는 변화를 선도한 곳은 후발주자였던 MBC TV였다.

MBC는 개국 1년 만인 1970년 가을에 오늘날 형태와 유사한 <뉴스데스크> 프로그램을 선보인다. 아나운서 대신 당시 보도국장이던 박근숙 씨가 진행을 맡아 미국 상업방송 방식의 앵커 시스템을 시도한 것이다. 개별 기사의 보도 역시 현장감을 최대한 살려 취재 기자의 리포트를 통해 전달했다. 무색무취하게 객관적 사실을 아나운서가 읽어주던 뉴스 양식이 앵커와 보도 기자의 퍼스낼리티를 담은 개성을 살리는 보도 방식으로 전환했음을 의미한다. 

1972년에는 TBC가 이라는 이름으로 같은 뉴스 양식을 도입하고, 1973년 KBS 역시 이 방식을 수용함으로써 한국 TV 뉴스는 앵커가 스튜디오에서 진행하고 취재 기자들이 현장에서 리포트하는 오늘날의 뉴스 전달체제를 구축한다. MBC는 <뉴스데스크>와 함께 현장감을 극대화하는 TV 보도 양식인 <카메라 고발>을 1973년 신설해 신문 보도 방식과는 현격하게 다른 텔레비전적인 보도 기법의 새로운 지평을 열기도 했다.

그러나 1970년대의 종합 뉴스 양식은 다양한 실험을 거치는 시기로 보는 편이 옳다. 우선 보도 시간이 오후 9시대로 고정되기까지 상당한 변화를 겪는다. TBC는 초기에 오후 7시대에 종합 뉴스를 배치했다가 1972년 5월부터는 오후 10시로 옮겨 MBC <뉴스데스크>와 맞대응 체제로 들어갔다. 그러나 KBS는 이들과 달리 9시대에 메인 뉴스를 배치하고, 7시에는 스트레이트 중심의 초저녁 뉴스를, 그리고 11시에는 마감 뉴스를 고정 배치하는 편성정책을 선택한다. 이 무렵 각 방송사의 메인 뉴스는 대체로 미국 주요 네트워크의 모델을 따라 30분 정도의 보도 시간을 유지했다.

당시에 실험됐던 또 다른 요소는 앵커 시스템이다. 오늘날과 달리 그 무렵에는 2~3명의 앵커가 요일별로 돌아가며 뉴스를 진행하는 일이 많았다. 한 사람으로 고정되기까지 다양한 인물과 포맷을 시험하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1970년대 후반이 되면 10년에 걸친 보도 시스템의 실험이 마무리되며 한 사람의 주요 앵커가 9시에 진행하는 하루 30분 정도의 메인 뉴스 포맷이 정착되고, 그러한 제도적 안정과 더불어 TV 뉴스의 영향력과 인지도 또한 급속하게 상승 추세를 그린다.

1980년대 5공화국의 등장과 공영방송제도의 도입은 텔레비전에 대한 정부의 영향력을 대폭 강화시키는 계기로 작용한다. TBC는 KBS로 흡수돼 KBS2 채널로 바뀌며 보도 기능이 사라지다시피 하고, TV 뉴스는 KBS 9시 뉴스와 MBC 뉴스데스크의 양자 구도로 재편된다. 이 시기에 드러나는 양식적 특징은 뉴스 시간의 연장 정도를 들 수 있는데, 과거 30분 정도이던 뉴스 시간은 5공화국 초기부터 35분에서 40분 정도로 늘어난다. 뉴스가 연장되는 주원인은 정통성이 부족한 정부가 TV를 이용해 정권의 정통성 강화를 꾀하는 시도 때문으로 볼 수 있다. MBC의 경우는 ‘5분 경제’, KBS는 ‘오늘의 경제’와 뉴스 해설 꼭지 등을 뉴스 뒷부분에 붙여 뉴스 시간이 10분 정도 늘어나는 계기를 제공했다. 또 이 무렵부터 스포츠 뉴스가 별도 프로그램으로 분리돼 종합 뉴스에 이어 방송되기 시작했다.

1980년대 후반 민주화가 진행되며 정권 홍보적 기사들이 줄고 방송 시간이 다시 줄어드는 추세를 보이기도 했으나, 1990년대 초 SBS가 출범하고 KBS와 MBC사이에 9시대 뉴스 시청률 경쟁이 첨예하게 진행되면서 메인 뉴스 시간은 다시 늘어나기 시작해 1990년대 중반 이후에는 45분 정도까지 늘어났고, 2000년대 이후에는 스포츠를 포함하면 1시간으로 연장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90년대 이후의 뉴스 시간 연장은 KBS가 시작해 MBC와 SBS가 뒤따르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최근에는 주 5일제 도입 등으로 인력운용 문제 등이 대두돼 주말에는 뉴스 시간이 30분 정도로 크게 축소되는 경향을 보인다. 

1990년대의 새로운 요소로는 SBS가 시도한 8시대 뉴스 프로그램의 정착을 들 수 있다. 국민 생활시간대의 변화를 염두에 두고 9시대에 집중되는 뉴스 프로그램의 중복 편성 문제도 피하기 위한 시도였다고 판단된다. 

2000년 이후 한국 TV 뉴스의 주요 변화 가운데 하나는 KBS2 채널에서 시도하는 잡지적 방식의 뉴스 리포트 양식이다. 기사별 취재 보도 시간을 길게 끌고 가며 영상 부분도 9시 종합 뉴스 기사들보다는 호흡을 길게 편집해 사용하는 이러한 시도는 특히 젊은 시청자들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잡지적 텔레비전 저널리즘의 등장

한국에 잡지적 TV 저널리즘이 등장한 것은 1980년대 초다. 컬러텔레비전의 보급이 확산되면서 방송의 위상이 크게 향상되던 시기와 맞물린다. 김우룡(2000)에 따르면, 처음 편성된 프로그램은 KBS-1 TV의 <뉴스 파노라마>였다. 이때가 1980년이다. MBC는 1981년 <레이다 11>이라는 60분짜리 다큐멘터리를 방송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KBS는 1982년 2TV를 통해 <추적 60분>을 방송했다.

1990년대에는 MBC에서 을 신설했고, 1990년대 중반에는 주말에 <시사매거진 2580>을 방송하기 시작했다. SBS는 개국과 함께 <뉴스 추적>과 <그것이 알고 싶다> 등 프로그램을 편성해 10여 년째 고발성 잡지 프로그램을 운영해오고 있다. 

한국 텔레비전의 시사고발성 잡지 프로그램들은 대부분 1968년 미국의 CBS 방송이 시작해 이 분야 장르를 개척한 것으로 인정되는 <60 minutes>를 모델로 한다. 취재 대상의 선정이나 영향취재기법, 프로그램 진행 방식 등이 대체로 그러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러한 프로그램들은 프로그램별로 역사는 차이가 나지만 지난 20여 년 동안 한국 방송 저널리즘의 새로운 요소로 자리를 굳힌 것은 물론이고 중요한 역사적 고비 때마다 여론의 방향에도 의미 있는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특히 2000년 이후 MBC와 KBS에서 편성한 <이제는 말할 수 있다>와 <현대인물사> 같은 프로그램은 선거와 쟁점 법안의 처리 등 현실 정치상황에도 긴밀하게 영향력을 행사하며 방송 저널리즘의 지평을 넓히는 역할을 했다고 평가된다. 지난 2~3년 사이 등장한 미디어 비평 프로그램들과 최근 공영성 강화를 기치로 각 방송사가 다투어 편성하는 <일요스페셜>류의 장편 다큐멘터리들 또한 이러한 커다란 흐름을 반영하는 움직임들이다.

와 MBC <뉴스데스크>, SBS <8시 뉴스> 등 저녁 종합 뉴스 프로그램들은 1970년대 후반 이래 커다란 변화 없이 고정된 양식과 보도기법을 유지해온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한국 방송 저널리즘의 새로운 실험과 취재보도기법의 개발 작업은 주로 심층취재를 바탕으로 한 잡지적 다큐멘터리성 프로그램들이 주도해왔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다. 최근에 이러한 흐름에 새롭게 가세하는 프로그램으로는 6mm 카메라와 프리랜서들의 시각을 활용하는 류의 보도물들을 들 수 있고, 더 폭넓게 일반 시민의 참여를 허용하는 시민기자제의 도입 등도 생각해볼 수 있다.

잡지적 TV 저널리즘이 제기하는 가치의 문제

1980년대 이래 한국 방송에 확산된 잡지적 TV 저널리즘과 관련한 가치의 문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눠진다. 하나는 소위 말하는 PD 저널리즘 현상과 관계되는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보도의 주관성이 보편화하는 경향이다.
  
오늘날 TV 저널리즘의 사회적 영향력은 신문을 능가하고 있다. 이러한 TV 저널리즘의 영향력 확대는 한편으로는 보도국을 무대로 한 방송기자의 저널리즘적 활동의 중요성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시사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PD들의 왕성한 활동에 힘입은 바 크다. 즉, TV 저널리즘의 의미는 기자 저널리즘과 PD 저널리즘을 동시에 지칭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MBC PD수첩팀, 2000, 8쪽). 

위의 인용문은 MBC가 방송하는 프로그램 10주년 기념 책자의 서문에 포함된 내용이다. 한국의 잡지적 TV 저널리즘은 위의 글에 표현됐듯이 프로듀서들이 새롭게 개척해 나가는 영역이 중요한 부분을 형성한다.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PD 저널리즘’이라는 용어는 이러한 현상을 담으려는 개념적 노력으로 볼 수 있다. 

PD수첩팀은 같은 글에서 세 가지 측면에서 PD 저널리즘은 기자 저널리즘과 다르다고 주장한다. 첫째는, 출입처 중심으로 취재원과 밀착관계를 맺고 있어 이해관계를 초월하기 어려운 기자 저널리즘의 폐해를 극복했다는 점이다. 이 책이 제시하는 PD 저널리즘의 두 번째 특징은 환경감시 기능을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프로듀서들의 독립성이고, PD 저널리즘의 세 번째 장점은 기자 저널리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치밀한 기획을 바탕으로 장기적이고 심층적인 접근을 하는 점이다.

PD 저널리즘이라는 입장에서 제기하는 이러한 차별성은, 특히 한국의 방송 저널리즘 문맥에서는 일면 타당성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검토할 때, 기자들의 저널리즘 문화와 프로듀서가 중심이 된 저널리즘 문화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하는 주장은 저널리즘 활동을 지나치게 직종 중심으로 영역 지우는 오류를 포함한다.

잡지적 TV 저널리즘이 제기하는 또 하나 중요한 가치의 문제는, 프로그램을 제작할 때 전통적인 저널리즘의 가치인 중립성이나 객관적 사실의 전달, 그리고 갈등적 쟁점 경우는 다양한 관점을 균형 있게 취급하는 보도 기준 등을 준수하려 하기보다 제작자가 주관적으로 옳다고 판단하는 방향으로 기사의 내용을 몰아가는 제작관행이 확산되는 점이다. 이러한 경향은 특히 역사를 재해석하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인물현대사> 등의 프로그램들과 양대 공영방송에서 방송하는 미디어 비평 프로그램 등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현상이다. 이러한 추세가 더욱 걱정되는 이유는 이처럼 주관성이 강하게 투영된 저널리즘 가치가 인터넷 토론문화 등을 타고 시민 저널리스트들의 보편적 가치관으로 자리잡아가는 추세가 감지되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심지어 텔레비전 저녁 종합 뉴스의 앵커들도 자신의 주관이 강하게 드러나는 논평을 진행에 포함시켜 시청자의 주목을 끌려는 시도를 빈번하게 하고 있다.

저널리즘은 시대를 지배하는 생각의 틀로부터 자유롭기 어렵다. 특히 한국의 방송 저널리즘처럼 1970~1980년대 권위적 정부의 홍보 기구적 기능을 부끄러운 과거로 갖고 있는 경우, 그에 대한 반작용은 강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 한계도 있다. 그러나 이제 민주화의 실험도 상당한 시간이 흘렀고, 방송을 규율하는 내·외부의 힘들도 크게 바뀐 것이 사실이다. 한국의 방송법은 매우 세밀하게 방송 저널리즘의 이념을 제시하고 있다. 방송 저널리즘이 봉사해야 하는 대상이 누구이고, 어떻게 하는 것이 그러한 기능에 충실한 방향인지를 성찰해야 할 시점이다. 
 

[참고 문헌]

김영희(2002). 일제 시기 라디오의 출현과 청취자, 《한국언론학보》 46-2: 150~183쪽.
김우룡(2000). 시사고발 프로그램이 중요한 까닭은 무엇인가?, 《PD수첩과 프로듀 서 저널리즘》, MBC PD수첩팀(편), 97~119쪽.
이민웅(1996). 《한국TV저널리즘의 이해》, 서울: 나남.
이재경(2002). 한국TV뉴스양식의 특성과 한계, 《저널리즘 평론》 4호, 한국언론재단.
최정호(2002). 월요 포럼: TV권력 누가 바꾸랴, <동아일보>, 2002년 11월 24일자.
최창봉・강현두(2001). 《우리 방송 100년》, 현암사.
한국언론재단(2004). 《수용자 의식조사 2004》.
MBC PD수첩팀(편)(2000). 《PD수첩과 프로듀서 저널리즘》, 서울: 나남.

Bourdieu, Pierre.(1998). on Television. New York: The New Press.
Cronkite, Walter.(1996). A Reporter’s Life. New York: Ballantine Books.
Gerbner, George.(1996). Keynote Speech for McBride Roundtable at Seoul National University, July 1996.
McNair, B.(1994). News and Journalism in the UK. London: Routledge.
Postman, N.(1985). Amusing Ourselves to Death. New York: Penguin.
Scannell, P. & Cardiff, D.(1982). “Serving the nation: public service broadcasting before the war”, in B. Waites, T. Bennett & G. Martin (eds.) Popular Culture: Past and Present.(pp. 161~88). London: Croom Helm.
Stokes, J. & Reading, A.(1999). The media in Britain: Current debates and                  development. London: Macmillan.
The Project for Excellence in Journalism with Andrew Tyndall.(2004). The State of the News Media 2004: An Annual Report on American Journalism-Network TV. http://www.journalism.org
Wallis, Roger & Baran, Stanley.(1991). The Known World of Broadcast News.
 London: Routled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