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기즈칸의 길]『서역진출 길목 西夏를 정벌하라』
▼ 서하정벌 ▼
1227년 초가을 칭기즈칸은 서하(西夏)왕조의 최후를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일흔두살이었다. 돌덩이 같은 핏덩이를 쥐고 태어나 거의 평생을 말등에서 보낸 파란만장한 생애가 여기서 끝났다.
하지만 그가 정작 어디쯤에 묻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남송(南宋) 사신의 일행으로 1236년 막북에 갔던 서정(徐霆)은 케룰렌강의 상류에 있는 그의 무덤이 산과 물로 둘러싸여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현대과학을 동원한 종합적인 탐사에도 불구하고 그의 후계자들이 함께 묻혀있는 기련곡(起輦谷)은 아직도 베일에 가려 있다.
칭기즈칸의 사망날짜 지점 원인도 역시 수수께끼다. 사망원인에 대해서는 사냥도중 낙마설, 전투도중 부상설, 서하의 기후로 인한 질병설이 있다.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열병에 걸려 죽었다는 설이 타당한 듯하다. 사망일은 프랑스 동양학자 펠리오가 추정한 1227년 양력 8월18일이 가장 그럴듯하며 장례일자는 8월28일로 추정된다.
그가 죽은 장소에 대해서도 영주(靈州·현재의 영무시·靈武市) 청수현(淸水縣) 육반산(六盤山) 등 여러 주장이 있다. 비교적 많은 학자가 사망지점으로 추정하는 육반산 지역은 해발 2천m내외의 황토고원이다. 지금은 거의 개간해 초원을 볼 수 없지만 당시 이곳은 초원이었다. 1227년 여름 칭기즈칸이 죽기 직전에 더위를 피했던 양전협(凉殿峽)은 최고봉이 2천9백28m인 육반산 남쪽기슭에 있다.
여기서 고원(固原)시를 지나 북으로 가면 개성향(開城鄕)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최근 안서왕(安西王) 아난다의 여름 궁전의 유지가 발굴됐다. 원(元)황실의 유력한 충렬왕 후원자였던 아난다의 오르두(宮帳)가 있었음직한 경작지 옆에는 토성이 남아있는데 부근을 칭기즈칸의 사지로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티베트 계통의 탕구트족 출신 외명낭소(중국식 이름 이원호·李元昊)가 세운 서하는 영하회족자치구와 간쑤성(甘肅省)의 대부분, 그리고 내몽고자치구와 신장성(新疆省)의 일부를 포함한 비교적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 사막과 초원, 그리고 농경지역을 바탕으로 요(遼) 송(宋) 금(金) 사이에서 독특한 문화를 꽃피우며 발전해 왔지만 경계를 길게 맞댄 막북의 몽골과는 뚜렷한 충돌이 없었다. 그런데 왜 통일국가를 이룩하자마자 몽골은 서하를 첫번째 희생물로 지목한 것일까.
당시 서방에는 서요(西遼)나 호레즘 샤가 버티고 있고 남쪽에는 몽골족의 발전을 막아온 동아시아 제1의 강국 금(金)이 있었다. 몽골국이 웅비하려면 이들과의 결전을 피할 수 없었고 이를 위해 서하를 제편으로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했다. 또 서하의 좋은 말과 낙타, 이름 높은 활과 검 갑주(甲胄) 역시 서하의 기병만큼 몽골에 필요했다. 서하를 손에 넣으면 비단길을 통한 동서교역의 이익을 나눌 수 있었고, 무엇보다 중원과 서역으로 진출하는 안전한 통로를 확보할 수 있었다.
1205년과 1207년 서하의 서북변경과 오르도스 북쪽의 군사거점 올로가이를 공격해 허실을 탐색한 몽골군은 1209년 4월 칭기즈칸의 지휘 아래 제3차 서하 정벌에 나섰다. 올로가이성을 점령한 다음 하란산 저편으로 남하한 몽골군은 중흥부 외곽의 최후보루 극이문(克二門·오늘날의 하란산 삼관구)을 격전 끝에 함락했다. 하지만 오르도스 평원으로 진입해 증흥부를 포위한 몽골군은 서하왕이 칭신(稱臣)등 항복조건을 받아들이자 철군했다.
그러나 몽골이 금국 정벌에 군사력을 집중한 사이 서하에서는 1211년 쿠데타가 일어났고 새로 즉위한 신종(神宗·遵頊)은 서정(西征)을 위한 몽골의 출병요청을 거절했다. 더욱이 1223년 즉위한 덕왕(德旺)은 항몽연합전선을 꾀했으며 급기야 1225년에는 금과 형제지국의 동맹관계를 회복했다. 하지만 당시 서정에 골몰했던 몽골은 서하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1225년 서정에서 돌아오자 비로소 칭기즈칸은 서하정벌군을 출진시킬 수 있었다. 그해 가을 대장 아타치(阿答赤)가 이끌고 출정한 서로군은 신장의 서부에서 위구르 지역을 통과해 하서주랑을 따라 하란산맥 서쪽지역을 공략해 갔고, 칭기즈칸 자신은 이듬해 2월 동로군을 이끌고 남하해 직접 하란산맥 동쪽으로 나와 서하의 복판을 향해 쳐들어갔다.
1226년 11월 아타치의 서로군과 합세한 칭기즈칸의 군대가 서하의 배도(陪都)인 서평부(西平府·영주)를 포위하자 서하는 노장 명외영공(名嵬令公)에게 병력 10만명을 주어 이를 구원하게 했다. 황하의 얼음판 위에서 벌인 양측의 최후 결전은 결국 몽골군의 승리로 끝났다. 서하가 농성전을 꾀하자 칭기즈칸은 주력을 이끌고 황하를 건너 금의 서경을 선제공격했다. 금의 서하에 대한 원군 파견의 여지를 없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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