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아시아의 투르키스탄은 칭기즈칸 침입 이전에 서위구르, 카라키타이(西遼), 호레즘 등 세 왕국이 통치하고 있었다. 투르크계 왕조
서위구르는 톈산산맥 동쪽의 동투르키스탄에, 카라키타이는 탈라스지방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자리잡고 있었고, 호레즘은 이란화된 투르크계 왕조로서
서투르키스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카라키타이는 중국의 요나라가 1125년 멸망한 후 거란족의 지도층이 서진, 톈산북로를 통과하여 돌궐계 카라한조를 멸망시키고 그 땅에 왕조를 재건한 것이다. 몽골 초원에서 칭기즈칸에게 멸망당한 나이만족의 왕자 퀴츨뤽은 칭기즈칸에게 쫓기자 카라키타이에 접근, 군주 귀르한의 호의를 산 후 카라키타이에 조공을 바치고 있던 호레즘의 군주 술탄 무하마드와 결탁해 카라키타이를 멸망시켰다. 카라키타이의 서부는 호레즘이, 동부는 퀴츨뤽이 차지했다.
호레즘은 서쪽으로는 지금의 이란 전역과 이라크 일부, 남으로는 아프가니스탄을 차지하였으며, 카라키타이를 멸망시킨 후 우르겐치와 부하라,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하는 실크로드의 중심부 등 방대한 영토를 장악하고 있었다. 칭기즈칸은 해뜨는 곳의 군주이고, 술탄은 해지는 곳의 군주였다.
몽골과 호레즘은 친선을 다짐했지만 둘의 대결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술탄은 전형적인 이슬람왕조의 통치자이며 매우 야심찬 알라신의 사도였다. 그는 자신을 한 왕조의 통치자로서보다는 이슬람세계의 통치자요, 수호자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술탄이 알라의 통치권을 전세계에 구축하라는 알라신의 법에 길들여진 사람이라면, 칭기즈칸은 이기는 동물만이 살아남는 야생의 생태, 즉 초원의 법에 길들여진 사람이었다. 존 스미스가 지적한 것처럼 초원의 전사들에게 있어서 「전쟁은 목적이지 수단」이 아니었다.
1218년 칭기즈칸은 5백마리의 낙타에 동방의 온갖 진귀한 물품을 실은 커다란 캐러밴을 편성, 4백50명의 사절단을 호레즘왕에게 보냈다. 사절단이 호레즘의 첫번째 성 오트라르에 도착하였을 때 성주 이날측이 이들을 정탐꾼으로 몰아 모두 죽이고 물건들을 빼앗아버렸다. 낙타몰이꾼 한 사람만이 탈출, 필사의 도주 끝에 몽골에 도착해 이 사실을 알렸다.
칭기즈칸은 이 사건을 보고받고 격노하여 복수를 맹세했다. 그러나 당시 칭기즈칸은 즉각적으로 호레즘과의 전쟁을 개시할 형편이 아니었다. 그는 특별히 귀족으로 구성된 사신을 호레즘의 술탄에게 보내 이날측의 도발에 항의했으나 술탄은 오히려 사신 한명을 처형하고 다른 한 사람은 수염을 깎아 돌려보냈다. 수염이 권위의 상징인 무슬림 사이에서는 이것은 더할 나위없는 모욕이었다. 이슬람 학자 나사위는 『이 죽음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무슬림의 피가 흘렀는가』하고 탄식하였다. 이 사건은 중앙아시아 뿐만 아니라 유럽의 운명까지 바꾸어 놓고 말았다. 칭기즈칸은 술탄의 행위에 대해 듣고 언덕에 올라 모자를 벗고 하늘을 향해 사흘 낮과 밤 동안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고 한다.
『이같은 고난을 일으킨 것은 제가 아닙니다. 저에게 복수할 힘을 주십시오』 칭기즈칸에게 있어서 복수는 도덕적 의무였고, 하늘의 뜻이었다.
호레즘 정벌에 나선 칭기즈칸이 이끄는 몽골군은 1219년 이르티슈강에 도착하였다. 몽골군은 여기서 도하전투훈련을 벌였다. 시르다리야와 아무다리야 등 거대한 강으로 둘러싸인 호레즘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이었다.
몽골군은 그해 가을 호레즘 변방도시 오트라르에 접근했다. 칭기즈칸이 즐겨쓰는 책략이 호레즘 공격에도 적용되었다. 첫째, 심리전을 사용한다. 공격에 앞서 자신이 신에 의해 선택된 통치자임을 천명하고 적국의 군중에게 저항하는 자들에 대한 무자비한 처형방침을 공포하고 점령후에는 그대로 시행한다. 둘째, 적국에 대한 연구와 첩보를 강화하여 그 정보에 기초하여 적국의 내적 취약성을 폭로하고 교란작전을 펴서 적국 지도층 사이에 갈등과 반목을 조장한다. 셋째, 모든 종교에 대하여 관용을 보장하여 종교적 핍박을 두려워하는 현지주민의 지지를 끌어낸다.
칭기즈칸은 자신이 평소 호의적으로 대해온 대상들을 이용해 호레즘의 지리적 특징, 군대배치도, 군인들의 사기, 주민동정 등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는 한편 몽골의 군주가 하늘이 정한 온세계의 군주라는 말과 몽골군이 과거 전쟁에서 저항한 자를 어떻게 처형했는지에 대한 소문을 퍼뜨리게 해 호레즘 백성들의 대항의지를 꺾고 심리적으로 무력화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칭기즈칸은 1220년 2월 오트라르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전투는 6개월간 지속되었으나 오트라르는 결국 몽골군에 함락되어 이날측과 주민 모두가 학살되었고 도시는 그후 다시 재건될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었다.
몽골군은 다음 공격목표인 부하라를 손쉽게 함락하고 풍요롭게 번창하던 실크로드의 진주 사마르칸트로 향했다. 사마르칸트 공격은 칭기즈칸에게 호의적인 이 도시의 대상들과 무슬림지도자들이 항거를 하지 않음으로써 쉽게 끝났다. 성에서 대항하던 투르크군 3만여명은 도시민 대표들이 투항한 다음날 항복했으나 모두 무참히 처형당했다.
칭기즈칸은 호레즘을 무너뜨리고 동서양을 연결하는 실크로드의 중심 부하라와 사마르칸트를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고 결국 세계의 제국을 건설해 동서양의 군주로 군림하게 되었다.
최한우(호서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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