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여정에서 만리장성을 빼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게다. 칭기즈칸의 몽골군대가 처음 이곳을 들이쳤을 때 오늘날과 같은 장성의 모습은 없었다. 거용관(居庸關)이 몽골군의 진입을 저지했다.
팔달령(八達嶺)에 이르기 전에 차도 왼편에서 관객을 맞는 아치형 동문(洞門)을 볼 수 있다. 위로 탑(과가탑·過街塔·일명 운대·雲臺)을 받치고 아래로 사람이 통행했던 이 동문은 원(元)대에 지은 것이다.
1211년2월 칭기즈칸은 높은 산에 올라 제사를 지내고 영원한 하늘(長生天)의 권능으로 금(金)나라에 대한 원한을 갚도록 도와줄 것을 빌었다. 고려인의 후예 아구타가 세운 여진족의 나라 금(1115∼1234)은 그동안 정기적으로 군대를 보내 몽골족의 장정을 제거(減丁)해왔고 칭기즈칸의 선조 암바가이 칸을 나무 노새에 못박아 처형했다. 금은 칭기즈칸까지도 붙잡아 죽이려 했다. 금을 도와 타타르부를 격파한 공로로 조공무역권을 획득한 칭기즈칸이 1208년 새로 즉위한 황제의 조서를 받으러 정주(淨州)에 갔을 때 공물(貢物)을 접수하던 위소왕(衛紹王)이 새 황제로 즉위한 것을 알고 『이 따위 용렬하고 나약한 자도 황제가 된단 말인가. 어찌 그로부터 조(詔)를 받겠는가』라며 북으로 돌아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칭기즈칸의 금 정벌은 묵은 원한도 개재돼 있었지만 신흥 몽골국의 발전에 걸림돌이 되는 금을 굴복시키지 않으면 몽골초원의 명실상부한 주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더 큰 이유였다. 또 서방의 강적인 호레즘 샤와 싸워 초원의 패자가 되려면 먼저 금을 굴복시켜 후고(後顧)의여지를없애야했다.
케룰렌 하반에는 1만명의 케식(겁설)군과 탐마치(탐마적)군 외에도 몽골부족군 12만명이 모였다. 칭기즈칸은 4만명의 우익군을 주치 차가타이 워게데이에게 주어 토르강에서 옹구트부 지역으로 남하하게 하고, 7만명은 다시 중군과 좌익으로 나누어 자신은 무카리와 함께 중군을 이끌고 제베 수부데이 주치카사르와 막내아들 툴루이에게 맡긴 좌익과 함께 케룰렌 강에서 동남쪽으로 내려갔다.
당시 금의 정규군 맹안모극군(猛安謀克軍)은 27만명이고 이민족으로 이뤄진 규 군과 지방군인 화모군이 따로 있었지만 몽골을 얕본 새 황제는 주력을 남송과의 경계에 배치하고 있었다. 반면 칭기즈칸은 음산산맥 대청산(大靑山)북방의 몽골부족 옹구트부를 통일 전부터 끌어들였고 난하 상류에 근거를 가진 거란호족 야율아해 독화 형제도 오래 전부터 칭기즈칸의 막하에 투신해 금나라 북방을 지키는 거란족 장군과 이미 기맥이 닿아 있었다.
동생 오지킨에게 뒤를 부탁하고 먼저 난하 상류에 도착한 칭기즈칸은 옹구트 부장 아랄쿠시(阿刺忽失)의 향도로 대청산을 넘은 우익군을 기다려 공격을 시작했다. 야율아해가 선도한 우익군은 서경(西京·다퉁·大同)방면으로 공격하고, 야율독화가 안내한 좌익군은 네이멍구(內蒙古) 고원에서 중원으로 들어가는 요충 야호령(野狐嶺)을 향해 진격했다. 뒤늦게 급보를 받은 금의 주력은 야호령근처 오사보(烏沙堡)에 방어진지를 구축했지만 제베가 이끈 몽골 좌익군이 우회해 이를 격파했다. 금군을 추격해 야호령을 내려간 제베의 군대는 거용관을 지키는 수비군을 유인해 격파했고 단숨에 수도인 중도(中都)까지 진격해 포위했다.
그러나 중도성의 방어는 견고했고 구원군이 왔기 때문에 제베군은 일단 장성 이북으로 물러갔다. 그래도 몽골군의 1차 공격은 큰 소득이 있었다. 거란족 군단이 전투다운 전투 없이 몽골에 투항했고 우익군도 네이멍구 자치구 수도 후허호트 서쪽의 초원(운내주·雲內州)에서 40만(일설 1백만)마리의 군목감(軍牧監) 군마를 빼앗아 금군의 기동력에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입힌 의외의 전과를 올린 것이다.
네이멍구 초원에서 전열을 정비하고 1212년제2차침공에 이어 1213년 가을 다시 야호령을 넘어 거침없이 진격하던 몽골군은 전과 달리 거용관 북구에서 진격을 멈췄다. 거용관에 철제 관문을 달아 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칭기즈칸을 따라 샛길로 서쪽의 비호령을 넘은 뒤 자형관(紫荊關)을 통해 진입한 제베의 부대가 거용관 남구의 금군 본영을 기습함으로써 결국 거용관을 손에 넣긴 했지만 몽골군은 바로 중도로 진격하지 않았다. 화북과 요동 각지를 공격해 중도를 고립시킨 다음에 1214년 중도를 포위했다. 그 사이 정변으로 즉위한 선종은 항복 권고를 호락호락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결국 굴복, 1214년 칭기즈칸에게 위소왕의 딸 기국공주(岐國公主)와 금백(金帛), 동남녀(童男女)5백명, 비단옷 3천벌, 말 3천필을 보냈다.
그러나 칭기즈칸의 몽골군이 시링골 초원에 도착했을 때 선종은 몽골군의 위협이 덜한 황하 남쪽 남경(南京·변경·현재의 카이펑·開封)으로 천도했다. 이를 화약의 파기로 간주한 칭기즈칸은 가을에 다시 징벌군을 보냈고 1215년5월 결국 중도를 함락했다. 하지만 금조에 대한 뒷일은 국왕 무카리에게 맡기고 화약무기 진천뢰 등이 포함된 막대한 전리품만 가지고 몽골로 철수했다.
그런데 왜 5년 동안이나 줄기차게 공격한 금나라를 멸망시키지 않고 군대를 돌린 것일까. 군마를 빼앗겨 기동력을 상실한 금군은 이제 종이 호랑이였고 서방의 정세 역시 갑자기 악화됐다. 또 몽골로 돌아간 칭기즈칸이 곧 서정(西征)에 나섰으므로 철군이유는 자명하다. 그러나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칭기즈칸은 농경민의 황제를 꿈꾼 적이 없었고, 초원의 유목민 튀르크족과 페르시아인의 카간이 되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는 점이다.
이개석<경북대교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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