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1994년 7월,
커트 와이샵트氏의 80세 생일파티에 초청을 받아서 참석했다. 뉴욕 맨해튼 월돌프 아스토리아 호텔 연회장에서 열린 생일파티에는 1000명에 가까운
그의 친지와 賀客(하객)들이 참석했다.
이 호텔은 한국 대통령들이 뉴욕을 방문할 때마다 묵는 뉴욕의
최고급 호텔이다. 커트는 한겨울에 잠을 잘 때 2층 침실의 난방만 남기고 모든 난방을 꺼버리는 「짠돌이」다. 그런 그가 20만 달러(韓貨
2억2000만원)를 들여 호화로운 생일파티를 벌였다.
당시 커트는 생일파티 초청장에서 이런 제안을
했다.
<생일 선물을 가져오지 마십시오. 대신 제가 정기적으로 기부해 오고 있는 60여 개 복지기관에
자선기금을 내주십시오. 여러분이 그날 기부하는 액수만큼 제가 기부를 하겠습니다>
이른바 「매칭 펀드」
방식으로 자선기금을 모으겠다는 얘기였다.
그날 밤 생일파티장은 경매장처럼 흥겨웠다. 참석자들이 낸 기부금
액수가 돈을 받는 기관별로 집계돼 순간순간 전광판에 떴다. 초청을 받은 60여 개 복지기관의 책임자나 이사들은 안면이 있는 이들에게 『오늘 밤
커트를 파산시키자』는 농담을 던지면서 기부를 요청했다.
커트는 파티장을 돌면서 『어이, 지갑 안가지고
왔어?』라며 농담을 던졌다. 기관별로 모금 액수 경쟁이 붙어 지켜보는 재미가 있었다. 흥겨운 파티 분위기 속에 고급 와인이 제공됐고, 흥겨운
춤판이 벌어졌다.
파티가 끝날 무렵 모금액이 공개됐다.
10년 전
일이라 정확한 액수는 기억나지 않는다. 손님들이 60만 달러 이상을 기부했고, 커트가 그 자리에서 그 액수와 똑같은 금액의 수표를 끊어서
자선기관 대표자에게 전달해 총 모금액이 120만 달러(韓貨 13억2000만원) 정도가 됐다.
파티에
1000명이 참석했으니, 1인당 평균 1000달러(韓貨 110만원)를 낸 셈이다.
커트는 고맙다며 이렇게
인사를 했다.
『친구들, 중용을 지켜 주어서 고맙습니다. 여러분들이 정도에 넘치는 기부를 했다면, 내가
오늘 밤 쪽박을 찰 뻔했습니다. 여러분이 오늘 후원한 기관들의 신세를 안지게 해줘서 고맙습니다』
커트는
20만 달러의 개인 경비를 썼지만, 창조적이고 재미있는 생일파티 기획으로 120만 달러라는 기부금을 모아 가난한 이웃을
도왔다.
존경하는 선배이자 친구였던 커트는 2004년 7월 90세 생일을 며칠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月刊朝鮮으로부터 「미국의 기부문화에 대해 글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고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이
커트였다.
미국 사회가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세계질서를 주도하는 초강대국이 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얼까? 다양하고, 설득력있는 답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지도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제」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간단하다. 지도층이 나라가 戰亂(전란)에 처하면 목숨을 내놓고, 어려운 사람들을 보면 재산을 내놓는 일이다. 기부는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대표적인 행위다. 커트는 평생 번 돈 가운데 4000만 달러(韓貨 440억원)를 기부했다. 그게 그의 全재산일지도 모른다.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하려면 지도층은 근검해야 한다.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고, 자식들의 방종한 생활을 지탱해 주면서 이웃을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儀典的(의전적)인 자리가 아니라면, 빌 게이츠 마이크로 소프트 회장이나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간단한
샌드위치·햄버거를 즐겨 먹는다.
지도자들이 기름진 음식을 즐기고, 쾌락에 빠지면 그 문명은 쇠락한다. 그런
점에서 필자는 「팍스 아메리카」 시대가 상당히 길어질 것으로 전망하는 쪽이다.
『세상을 위해 쓴 돈은 영원히
남는다』 ![](http://monthly.chosun.com/upload/0503/0503_422_1.jpg)
지난 10여 년간 교유해 온 커트의 인생 이야기와 더불어 미국의 자선문화를 설명하면 독자들의 이해가 쉽지
않을까 싶다.
커트를 처음 만난 것은 필자가 뉴욕 가톨릭 재단에서 일하던 1992년 무렵이었다. 필자가
1994년부터 뉴욕의 플러싱 YMCA에서 「기금모금위원장」, 「연례만찬위원장」을 맡으면서 더 가까워졌다. 커트는 이미 플러싱 YMCA를 위해
50여 년간 봉사했고, 명예이사로 재직 중이었다.
플러싱 YMCA 이사장(2000년 1월~2003년
1월)으로 일하면서는 물질적·정신적으로 그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제일 감명을 받은 것은 「돈과 기부」에 대한 그의 확고한
생각이었다.
그는 내게 이런 語錄(어록)을 남겼다.
『우리가 자신을
위하여 사용한 돈들은 우리의 죽음과 함께 사라질 수밖에 없다. 남들과 세상을 위하여 사용한 돈들은 늘 살아 있는 영원한 유산이
된다』
『돈은 쌓여 있을 때는 죽은 돈이다. 돈은 돌아야 생명을 살린다』
커트는 몸이 허약해진 80代 후반의 나이를 무릅쓰고 아들과 손자들을 데리고 폴란드와 스페인 등지를 방문하면서 나치의 유대인
虐殺(학살)을 잊지 않도록 교육했다.
폴란드에 살고 있던 20代의 유대인 커트는 나치의 학살을 피해
1942년 폴란드를 탈출했다.
그는 가짜 여권으로 아내와 함께 바르샤바에서 스페인의 마드리드로 가는 기차를
타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기차 안에서 게슈타포의 불심검문에 걸렸다. 열차 복도에서 게슈타포와 실랑이를 하고 있는데 일등석에서 한 신사가
나와서 소리를 쳤다. 그는 나치 당의 배지를 달고 있었다고 한다.
『그 사람들은 내 친구야. 내 방에서
함께 여행하려고 하니, 그들을 괴롭히지 마』
게슈타포를 물리쳐 준 스페인 신사는 커트 부부를 마드리드까지
데려다 주고 호텔에 방을 잡아 주었다. 포르투갈行 열차를 탈 수 있는 신분증에다가, 열차표 그리고 여행 비용까지 챙겨 주었다.
뉴욕에 안착한 커트 부부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일년에 몇 차례씩 스페인을 방문해 그 신사를 수소문했다. 50여 년에
걸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를 찾지 못했다. 「도대체 그 신사가 무엇 때문에 나를 도와주었을까」라는 커트의 의문은 그의 죽음과 함께 영구미제
사건이 되고 말았다.
커트는 내게 여러 번 이런 얘기를 했다.
『나치의 박해를 피해 폴란드를 떠나면서 神에게 한 가지 기원을 했어요. 무사히 탈출해서 목숨을 건질 수 있다면 평생 다른 사람들을 돕는 삶을
살겠다고.
뉴욕에서 우표 판매상을 시작할 때 경제적으로 무척 어려웠어요. 그래도 수익의 10~20%는
빈민들을 돕거나 생명을 구하는 데 썼어요』
한국 심장병 어린이 1000명
치료 커트는 1970년대부터 한국의 심장병 어린이들을 미국에 데려와 수술시켜 주는
사업을 했다. 「생명의 선물」이라는 프로그램으로 발전한 이 사업은 1980년 한국을 방문했던 美 레이건 대통령과 낸시 여사가 美 공군 1호기에
한국의 심장병 어린이 두 명을 데리고 온 것이 시작이었다.
이 이야기는 한국 언론에 널리 알려졌지만, 이
사업을 주도해 온 커트는 한 번도 알려진 적이 없다. 커트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의 심장병 어린이 수술 사업은 이후 러시아, 중국, 南아시아,
南美 등의 국가들로 확장됐다.
1990년대 이후로는 아동들을 살고 있는 곳의 의료진에 맡겨 수술시키거나,
미국의 의료진을 아동들이 사는 나라로 보내 수술을 시키는 방식으로, 어린이들의 불편함을 덜어 주었다.
한국에서만 1000여 명이 넘는 아동들이 커트와 그의 친구들의 도움으로 새 생명을 얻었다. 그는 별세하기 2년 전인 2002년 뉴욕 베이사이드에
있는 큰 집을 처분하고, 뉴욕 롱아일랜드에 있는 노인 주거시설로 이사했다.
매번 찾아갈 때마다 커트는 서재
벽 한가운데 걸려 있는 빛바랜 詩畵(시화) 액자에 쓰인 글을 읽어 달라고 했다. 그의 도움으로 심장수술을 받은 부산의 어린이와 부모들이
1983년 한국을 방문한 커트에게 전달한 것이다.
매끄럽지 못한 英文이지만, 생명을 다시 얻게 해준 커트에
대해서 깊은 감사의 인사를 전한 글이었다.
그 글을 읽어 줄 때마다, 아이들과 만났던 날을 기억하는 듯
그의 얼굴은 상기됐다. 기력이 더 쇠퇴해진 2004년에는 내가 읽어 주는 詩畵를 들으면서, 그의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혼자서는 일어서지도 못 하는 커트를 부축해서 방 안을 가볍게 걸으면서, 커트에게 새로운 생명의 기운이 찾아오기를 기원했다.
커트의 도움으로 수술을 받은 아이들(지금은 모두 성인이 되었을 것이다)과 부모들이 커트가 하늘나라로 갔다는 사실을 알고, 그의 편안한
永眠(영면)을 빌어 주었으면 좋겠다.
『대학 보냈으면 됐지』
![](http://monthly.chosun.com/upload/0503/0503_422_2.jpg)
커트가 건강할 때, 세 명의 자식과 여섯 명의 손자·손녀들에게는 얼마 정도의 유산을 물려주었는지 물어봤다.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대학교 마칠 때까지 들어가는 비용은 다 대주었어요. 이만하면 좋은 아버지와
할아버지 아니야』
그는 죽기 전까지 60여 년간 4000만 달러 이상을 기부했다.
그 돈을 60년에 걸쳐 주식에 투자했으면, 아마 그는 수십억 달러를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커트는 『쌓아 놓은 돈은
생명이 없는 죽은 돈이고, 돈은 생명을 살리기 위해 써야 한다』고 얘기했다.
그는 왜 자식들에게 돈을
유산으로 물려주지 않았을까? 커트는 이렇게 얘기했다.
『왜 자식들에게 돈을 주지? 자식들에게 돈을 물려주는
건 神이 내 자식들을 위해 준비하신 은총에 대한 배반행위야. 神이 내게 선물로 주신 자식을 가장 효과적으로 파괴시키는 일이 돈을 물려주는
일이야』
그는 자신을 구해 준 스페인의 은인을 언급하면서 『우리 부부의 생명을 구해 준 그 양반이 베풀어
준 바를, 다른 이들에게 베푸는 것이 나의 책임』이라고 얘기했다.
근력이 쇠약해진 후에도 그는 꼭 넥타이
차림으로 거실에 앉아서 책을 읽었다. 방문객이 오면 정장 재킷을 갖춰 입었다.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이 올 것에 대비해 재킷에 늘 개인 수표와
현금을 넉넉히 넣어 두었다.
베이사이드의 저택에 살 때 그의 집은 너무 추웠다.
기부를 요청하기 위해, 내가 처한 어려운 일을 상의하기 위해 그를 자주 찾았다. 그와 나는 『커트』, 『존(필자의 미국
이름)』이라고 이름을 부를 정도로 가까워졌다. 겨울에 방문했을 때는 코트를 입은 채 이야기를 나눠야 할 정도로 집이 추웠다.
커트는 『2층의 잠자는 방만 약간 따뜻하면 되지, 왜 사용하지도 않는 응접실에 쓸데 없이 난방을 하느냐』고 했다. 자기에게는
엄격했지만, 남들에게는 너그러웠다. 자신을 도와주는 간병인, 가정부, 운전기사, 청소부, 정원사들에게 그는 넉넉한 급여와 팁을 챙겨
주었다.
북한에 300만 달러어치 의약품
기부 2001년 커트의 생일 저녁에 필자가 저녁식사를 대접했다. 북한 문제가 화제로
올랐다.
필자는 커트에게 『북한 어린이의 절반 이상이 심각한 영양부족에 시달리고 있고, 의약품이 부족해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한다』고 얘기해 줬다. 한국의 심장병 어린이들을 도와 온 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커트는 『내가 명예이사장으로 있는 「생명의 의약품 프로그램」을 동원하면 지원을 해줄 수 있겠지만, 미국의 敵性國(적성국)에는 원조할 수 없다는
내부 원칙이 있다』며 난감해했다. 며칠 후 커트가 전화로 『의약품의 수신처를 한국으로 하면, 지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희망적인 소식을 전해
왔다.
커트는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해서, 2회에 걸쳐 300만 달러어치의 영양제와 의약품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북한의 어린이에게 제공했다. 해운 운송료와 제반 비용을 커트가 부담했다.
필자는 2002년
1월 평양을 방문해 커트가 마련한 의약품을 북한 당국에 직접 전달했다. 북한의 의료시설을 돌아볼 기회도 가졌다.
필자와 함께 갔던 한 한국인 의사는 천식 때문에 한밤중에 평양의 외국인 전용 병원에 실려 갔다가, 응급실의 열악한 의료장비를
보고 기겁을 해서 호텔로 돌아왔다. 북한의 의료기관과 학교에서는 형용할 수 없는 참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노동당 간부와의
對話 ![](http://monthly.chosun.com/upload/0503/0503_422_3.jpg)
필자는 북한 노동당과 정부의 고위 관계자들을 여럿 만났다. 그쪽에서 만나자고 연락을 했다.
그들은 나를 「미제의 앞잡이」로 여기는 눈치였다. 그래서인지 필자가 만난 노동당의 고위간부는 『부시 행정부의 정책에 어떻게
대처하면 되겠느냐』고 자문을 구했다. 아무것도 걸릴 게 없는 필자는 솔직한 충고를 해줬다.
『나를 이상한
눈으로 보는데, 불쌍한 북한 어린이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평양에 절대로 오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오라고 해도 올 생각이 없다. 도대체 뭐가
궁금하다는 건가? 부시 대통령이 북한을 「惡의 축」이라고 하지 않았나? 북한에 오고 보니 부시가 옳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부시가 4년 만
대통령을 하고 물러나면 좋겠지만, 한 번 더 하면 어떻게 할 건가? 부시 대통령이 변하기를 바라지 말고 당신들이 변해라. 아이들을 언제까지
이렇게 고생을 시킬 건가?』
노동당 간부는 아무 말이 없었다.
커트는
자신이 이끄는 「생명의 의약품 프로그램」을 통해 북한뿐 아니라, 수단·케냐·스리랑카·중국·인도네시아·인도·콜럼비아 등지의 어린이 수십만 명의
목숨을 구할 의약품을 지원했다.
커트는 한국에서 反美운동이 확산된다는 얘기를 듣고, 필자에게 가끔
「화풀이」를 하곤 했다.
『나와 내 친구들은 한국의 어린이들을 돕기 위해 팔을 걷어붙였는데, 이제 어른이
됐다고 한국이 이렇게 매정하게 노인네에게 등을 돌리면 되겠어?』
미국의 메인스트림을 형성하고 있는 이들은
富에 대해 청교도적인, 혹은 기독교 원리주의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
기부는 사회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방법 필자가 뉴욕 가톨릭 재단과 플러싱 YMCA에서 「펀드 레이징」을 하면서 만난
미국의 기업인과 금융인, 중산층들은 「죽을 때 돈을 기부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기부란 자신의 재산을 소비하는 행위가 아니다. 「공동체에 기여한다」는 자부심은 경제활동에 더 큰 애착을 갖게 만든다. 기부에 적극적인 경제인들은
「올해 돈을 더 많이 벌어서, 더 많이 기부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일에 열심이다.
커트의 경우, 조금 벌
때는 조금 기부했고, 재산이 불어나면서 기부의 규모를 늘려 갔다. 그는 일찍 운명한 아내의 이름을 딴 장학재단을 만들었고, 60개 이상의 단체에
지속적으로 기부를 했다.
기부는 자신의 리더십과 사회적 영향력을 늘려 주는 수단이 된다.
미국에 자리를 잡고 있는 한국 이주민 사회가 가장 적응을 하지 못하는 분야가 기부다. 청과물 도매상이나 세탁소를 해서 가족이
안락하게 살 만한 돈을 버는 것은 쉬운 일이다. 거기에 비해 미국의 主流 사회에 진입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돈을 많이 벌고 세금을 많이 내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커뮤니티」를 위해 기부하고 일을
해야 主流 사회의 일원이다. 한국 이민자들이 일요일이면 전부 韓人교회로 몰려가는 것은, 이들이 미국 主流 사회에 접속하는 데 실패했다는 증거일
수 있다.
뉴욕의 플러싱은 한국 이민자 밀집지역이다. LA 지역처럼 영어를 모르고 살 수 있는 곳이다.
거리 간판은 대부분 한국어이고, 떡볶이·순대·붕어빵 같은 한국 토속 음식을 맛볼 수 있다.
하지만 필자가
이 지역 공동체의 핵이라 할 수 있는 「플러싱 YMCA」의 이사장으로 2000년 1월 취임했을 때, 16명의 이사진 가운데 한국인은 한 명도
없었다. 16명의 이사진은 모두 50代, 60代 백인들이었다.
필자는 3년 동안 YMCA 이사장으로
일하면서 이사진에 한국인 4명, 중국인 2명을 영입했다. 고문으로 영입했던 「삼성 U.S.A」의 이만수 사장(現 신라호텔 사장)은
「기금모금위원장」, 「연례만찬위원장」 등을 맡아 필자를 도와주었다.
理事陣으로 참여한 한국인들은
『지역사회에 봉사한다는 게 대단히 명예로운 일이라는 걸 느꼈다』, 『지역 봉사활동이 지역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출발점이다』, 『이 지역을
이끄는 리더들과 연대감을 느끼게 된 게 큰 보람』이라는 소감을 털어놓았다.
사실 YMCA 이사장의 임무는
「돈 모으기」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YMCA의 「취학 전 어린이 종일 학교」, 「방과후 청소년
학교」, 「토요일 청소년 학교」, 「청소년 리더십 교실」, 「청소년 수영·체조 교실」, 「소수 민족 영어교실」을 운용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모금하는 것이 이사장의 몫이다.
한국인인 필자가 YMCA 이사장으로 영입된 것은, 뉴욕 가톨릭 재단에서
쌓은 「펀드 레이징」 노하우를 높이 샀기 때문이다.
미국 중산층들이 기부를 「필수」라고 생각하고, 「우리
아이들이 커뮤니티에서 받은 혜택을 되돌려줘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 기금모금에 큰 장애는 없었다.
필자는
지난 15년간 각종 기금모금 사업들을 벌였고, 가톨릭 뉴욕 교구 추기경의 기금모금, 기금 투자관리 사업을 도왔다.
뉴욕대교구장 故 오카널 추기경은 늘 『사명이 정확하면 항상 돈은 따라오게 마련이다』 했다. 禪僧(선승) 같은 이야기라
처음에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기금모금이
반드시 필요한 일이고, 그 일을 완수할 수 있다」는 철저한 자기 암시를 가지라는 말씀으로 이해된다.
그렇다고 무작정 자기 암시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필자가 그동안 체득한 구체적인 기금모금의 노하우를 간추려 봤다.
▣ 기금을 잘 모으는 9가지 실전
노하우
「70대 30」의 법칙
1. 기금모금에는 「70대 30의 법칙」이 작동한다. 기금의 70%는 전체 기부자의 30% 정도인 대형 기부자들에게서
나오고, 총액의 30% 정도는 전체 기부자의 70%를 차지하는 소액 기부자들에게서 나온다. 피라미드 모형을 생각하면 된다. 30% 대형 기부자의
리스트를 만들어 그들의 경제적 성향과 기부성향, 소비성향을 분석하는 연구가 있어야 한다.
2. 기부자에게
제시할 사업계획서가 구체적이어야 한다. 누구나 읽어서 쉽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읽고 나면 한 문장으로 머리에 남아야 한다. 기부자들이
목표를 분명히 인식하지 못하는 자선사업은 성공할 수 없다.
모든 것은 숫자로 표시될 수 있어야 한다.
3. 분명한 시간표가 있어야 한다. 시간표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기금모금 추진 위원들과 기금모금 전문가의 협의를 통해 사업
목표와 목표액에 대한 냉철한 평가가 있어야 한다. 그 목표를 달성하는 시간표, 방법, 임무 분담표, 기금 액수 분담표에 대한 합의가 이뤄져야
한다.
4. 기금모금 작업은 氣(기)싸움이다. 끊임없이 氣를 살리는 전략적 스케줄과 이벤트들이 있어야
한다. 필자는 플러싱 YMCA에서 시설 개선을 위한 자금 300만 달러를 모금했다. 목표액의 30% 가량이 대형 기부자로부터 기부되기 전까지는
언론과 지역 사회에 기금모금 개시를 알리지 않았다.
「뉴욕 커뮤니티 뱅크」가 30만 달러의 기금을 내고, 다른 대형 기부자들이
약정한 금액이 100만 달러에 이르렀을 때 기금모금 개시를 지역 언론을 통해 알렸다. 곧바로 100만 달러 「목표 달성」이 발표되자, 기금모금에
참여한 직원 및 봉사자들의 사기가 고양됐고, 기금모금은 힘차게 진행됐다.
5. 돈을 모금하겠다는 의욕이
넘치도록 동기유발 교육을 충분하게 해야 한다. 기금을 모으겠다는 의욕이 왕성한 이들을 각 지역이나 분야의 책임자로 임명하고, 시장과 목표액을
구체적으로 배정해야 한다.
6. 얼마의 기부금을 내겠다고 약정을 받았다면, 기부자에게 기부액과 완납시기를
분명하게 인식시킨다. 기부 약정자가 익명을 요구하지 않는다면, 감사의 인사를 담은 편지를 즉각 보낸다. 큰 액수를 약속했다면, 「기부금 납입
스케줄」을 담은 감사패를 만들어서 보낸다. 필자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감사패를 전달받은 고액 기부자의 95% 이상이 약속한 시간 안에 기부를
완료했다.
名望家 中心의 모금은
실패한다 7. 자신의 돈을 기부할 생각이 없는 사회적 유명인사와 전문가 집단으로 구성된
기금모금 작업은 출발부터 동맥경화증에 걸려 성공할 가능성이 희박하다. 기금모금에 나서는 이사들은 자신도 기금을 출연할 책임이 있다. 그런 의무를
하지 않는 사람은 기금모금위원에서 배제해야 한다.
8. 기금모금 액수의 5~10%에 해당하는 금액을
기금모금 비용으로 미리 책정한다. 이 비용은 미리 마련해 두어야 한다. 모이는 기금에서 행정비나 경비지출이 절대 발생되지 않아야 한다.
9. 경험이 풍부한 선거참모가 선거의 승리에 도움을 주듯이, 능력 있고 경험 있는 기금모금 전문가를
참모장으로 둬야 한다. 전문가가 참여할 때 기금모금의 성공률이 급격하게 향상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