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리
없는 전쟁
2006.09.24 김혜선 기자
<범죄의
재구성> 최동훈 감독이 화투판의 의리 없는 전쟁을 그린다. 18세 관람가답다.
찬사를 받은 데뷔작 <범죄의
재구성> 이후 최동훈 감독이 준비했던 것은 강도영화였다. 하지만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그 와중에 그에게 책이 주어졌다. 그것도
만화책이. 김세영이 쓰고 허영만이 그린 국민만화 <타짜>를 영화화해보라는 제안을 받은 후 최동훈 감독은 화투판에 피어난 '사기의
미학‘을 자기 식으로 그려보자고 마음먹게 됐다. 전체 4부인 원작 가운데 1부 ’지리산 작두‘만을 각색한 영화 <타짜>는 돈 때문에
여러 인생 끝장나는 광경을 따라잡는다. 오만가지 인간 군상이 얽힌 도박판의 배신과 음모, 욕망의 연쇄 반응을 추적하는 드라마는 이렇게 시작된다.
가구공장에서 일하던 청년 고니(조승우)는 혹시나 싶어 공장 구석에서 벌어진 화투판에 끼었다가 역시나 제 돈과 누나의 이혼 위자료까지 몽땅
날린다. 얼마 후 그 판이 전문도박꾼이라는 타짜 박무석의 사기 도박판이었음을 알게 된 고니는 그를 찾기 위해 전국의 화투판을 뒤지다가 전설의
타짜 평경장(백윤식)을 만난다. 아버지 같은 평경장의 가르침에 따라 타짜의 기술을 섭렵한 후 지방원정을 돌며 승승장구하게 된 고니. 그러다
‘도박판의 꽃’이라 불리는 설계자 정마담(김혜수), 수다로 상대 정신을 쏙 빼놓는 타짜 고광렬(유해진)을 만나면서 고니 인생엔 예기치 못한
파도가 닥친다.
영화 <타짜>는 타짜들의 승부가 에피소드별로 이루어졌던 신문 연재 원작 만화를 각색해 화투판의 의리
없는 전쟁을 경험하는 고니의 성장사로 재구성했다. 최동훈 감독은 영화 초반 가구공장에서의 화투판부터 화면을 마치 만화의 한 페이지처럼 분할하는
등 속도감 있는 편집으로 영화의 곳곳을 밀고 당긴다. 타짜가 된 고니의 현재와 과거를 더듬는 동안 밀실, 산꼭대기 비닐하우스, 선박 등 도박판의
다채로운 풍경을 전시하고 그 만큼 많은 돈과 많은 인간들을 등장시키는 것도 잊지 않는다. 불어나는 돈다발에 달라붙는 인간들. 타짜들이 보여주는
기술은 밑장빼기와 패섞기 등 약간의 손기술 정도지만 그들 인생이 보여주는 욕망의 패러다임은 폭넓다. 박무식, 곽철용의 사기도박부터 평경장의
낭만도박, 뭘 모르는 인생들의 막무가내 도박까지. 정마담의 내레이션을 통해 도박판을 관전하게 만든 영화는 클라이맥스에 벌어지는 고니와 ‘죽음의
타짜’ 아귀의 승부로 차가운 배신의 풍경을 연출하며 도박 전쟁의 고지를 점령한다. <범죄의 재구성>이 보여줬던 총기 어린 반전에
비하면 그 강도는 다소 약하지만 영화 속 가장 박진감 넘치는 한 판으로 시선을 붙들기엔 충분하다. 이후 이어지는 여러 반전의 컷들이 다소
설명적이고, 등장인물들이 저마다 화투판을 인생에 비유하며 내뱉는 한마디가 지나치게 교훈적이긴 하지만 배우들의 저력이 이를 극복해낸다. 쾌활한
청년 타짜로 또 다른 ‘하류인생’ 고니를 연기한 조승우, 수다쟁이 타짜의 입담을 과시한 고광렬 역의 유해진, 화려하고 과감한 꽃 정마담 역
김혜수의 연기는 노력의 흔적이 역력하다. 대한민국의 3대 타짜 평경장, 아귀, 짝귀를 연기한 백윤식, 김윤석, 주진모의 걸출한 연기도 영화에
도박 세계의 존재감과 풍부함을 더한다. 사람과 돈, 그리고 욕망으로 빚어진 영화 <타짜>는 그렇게 홍콩식 도박기술이 아닌 할리우드
클래식의 포커페이스를 한 채, 제법 세련된 자기 패를 꺼내 보인다. 온 나라가 도박으로 들썩이는 요즘, 화려한 한 판으로 우리 시대의 욕망을
과감히 비웃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