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데즈·코르도바(알래스카)=글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우리는 블라이 암초에 좌초됐다. 여기 잠시 머무르겠다. 하지만 석유 유출이 발생한 게 분명하다.”
1989년 3월24일 오전 12시4분. 유조선 엑손 발데즈호의 헤이즐우드 선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해안경비대에 전달됐다. 전날 오후 발데즈를 출발한 헤이즐우드 선장은 거대한 유조선을 조여오는 빙산군을 피하지 못하고 암초에 부딪혔다.
△ 세계적인 멸종위기종인 해달은 최대 5천 마리가 죽었다. 1989년 4월3일 프린스 윌리엄스 해협 그린섬의 모습 |
결국 기름탱크가 터졌고, 검은 기름이 12~15m 상공으로 솟구쳤다.
1120km의 암흑, 바닷새 60만마리 죽어
프린스 윌리엄스 해협에서 벌어진 엑손 발데즈호 사건은 ‘석유의 체르노빌’로 비유된다. 유조선에서 유출된 174만9천㎘의 기름은 752km를 흘러나갔으며, 프린스 윌리엄스 해협 1120km의 해안가를 휩쓸었다. 새들은 바닷물 위나 해변에 내렸다가 검은색 기름 범벅이 되어 허우적거리며 날지 못했다. 그렇게 바닷새 30만~67만5천 마리가 죽었다. 250마리의 대머리 독수리, 300마리의 바다표범, 3500~5천 마리의 해달도 죽었다. 프린스 윌리엄스 해협에 서식하는 범고래 36마리 가운데 14마리가 3년 안에 죽었다.
“검은색 바다였어. 그때 바다를 향해 오줌을 누면, 검은 기름층이 30cm 정도 오목하게 파였지.”
프린스 윌리엄스 해협의 항구도시 코르도바에 사는 어부 마크스 킹(54)은 기억하기 싫다는 듯 말을 꺼냈다. 그는 사고를 낸 석유회사인 엑손과 계약을 맺고 유조선 둘레에 쳐진 기름 방제띠의 보초를 섰다. 엑손이 미웠지만, 할 수 없었다. 기름을 막지 않으면, 생업을 포기해야 할 판이었다.
“나는 매일 아침 기름 방제띠에 나갔어. 하루에도 몇 번씩 비행기가 날며 기자들이 사진을 찍었고, 댄 퀘일 부통령이 시찰한다고 해서 특별 관람대까지 설치됐어. 그런데 옆의 친구가 그러더군. 우리가 맡은 일은 PR 업무일 뿐이라고. 이미 기름은 방제띠를 넘어 다 퍼졌다는 거야.”
엑손은 대대적인 정화작업을 벌였다. 당시 돈으로 시간당 16.96달러를 주고 인부를 고용해 바위를 일일이 문질러 닦았고 최소한 25억달러를 지출했다. 자연은 아주 천천히 복구됐다. 엑손은 1991년 기름 정화 작업이 완료됐다고 선언했다.
지난 8월19일 찾은 발데즈는 17년 전의 재난을 잊은 듯했다. 과연 발데즈 근처의 개울에는 은빛의 연어들로 가득 차 있었다. 연어들은 다시 돌아왔고, 흑곰들도 배불리 연어를 먹었다. 그리고 17년 전과 북극의 프루도베이 유전에서 원유를 보냈고, 유조선들은 발데즈 항구를 부지런히 오갔다. 발데즈 주민들은 그리 큰 경제적 타격을 입지 않은 듯했다. 발데즈의 어부들은 이미 1976년 건설된 엑손의 유전터미널 노동자와 관광업종으로 일거리를 바꿨기 때문이다.
그러나 발데즈의 이웃 항구인 코르도바의 상황은 달랐다. 코르도바 주민들은 수입의 대부분을 바다에서 얻었는데, 검은 기름이 어업을 회복 불능 상태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코르도바는 재난이 일어나기 전인 1988년만 해도 미국의 8대 어업기지였지만, 지금은 100위 안에도 끼지 못한다. 생선 가공 공장 5곳 가운데 3곳이 망했다. 어업 가구 가운데 30%가 코르도바를 떠났다. 코르도바 인구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던 에야크(Eyak) 인디언도 도시를 떠났다. 에야크족의 장로인 듄 랭커드(46)는 “기름 유출 전만 해도 2500명이 살았는데, 지금은 1400명 정도밖에 안 남았다”며 “거대 석유회사가 인디언의 터전을 할퀴었다”고 말했다.
미국 8대 어업기지가 100위 밑으로
코르도바의 어업이 궤멸된 주원인은 청어 때문이었다. 연어는 다시 돌아왔지만, 청어는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다. 팀 조이스 코르도바 시장은 이렇게 설명했다. “기름 유출 당시 연어들은 기름 바다에서 떨어진 강 상류에 있었기 때문에 피해를 모면했죠. 거기에서 알을 낳았고, 이들이 성어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예전의 생산량을 회복하는 데 10년이 걸렸어요.”
△ 석유 재앙 이후 프린스 윌리엄스 해협의 생태계는 아주 천천히 회복됐다. 바다사자도 돌아왔지만, 개체 수는 여전히 모자란 상태다 |
사고 복구 작업에서 돌아온 마크스 킹은 힘든 세월을 보냈다. “사고 직후 과학자들은 3년은 지켜봐야 한다고 했어. 사고가 일어난 해인 1989년만 해도 청어가 잡혔어. 1990년도, 1991년도, 1992년도, 가슴 졸이며 바다에 나갔지. 그런데 1993년부터 청어가 오지 않는 거야.”
수입이 줄어들자, 그는 3명의 조업원을 내보내고 혼자 바다에 나갔다. 1982년에 1억4천만원을 주고 산 대형 선적도 1995년에 반값을 주고 팔았다. 고기가 안 잡히니 고깃배가 후한 값을 받을 리 없었다. 연간 2억원을 벌던 쏠쏠한 수입은 5천만원대로 줄었다.
코르도바 주민들은 그동안 법정에서 거리에서 ‘무책임한 거대 석유회사’와 이를 방조한 정부와 17년 동안 싸우고 있다. 엑손은 마크스 킹에게 사고 수습 작업비조로 1억원을 주고 입을 닦았다. 그는 동료 어부들과 함께 엑손을 상대로 피해 보상 소송을 벌이고 있다.
△ 알래스카 횡단 송유관은 북극 생태계를 위협하고 있다. 영구동토층 때문에 지상에 설치된 송유관은 쉽게 부식되어 말썽을 빚고 있다. 프루도베이에서는 부식 사고가 잇따랐다. |
거대 석유회사와 싸우는 주민들은 새로운 실험을 모색하고 있다. 그것은 석유자본에 대한 통쾌한 복수이자 ‘대안으로 말하기’라 할 수 있었다. 듄 랭커드는 취재진을 배에 태워 코르도바 항구의 통조림 가공 공장 앞으로 다가갔다. 통조림 공장 지붕은 하얀 눈이 덮인 듯 갈매기들로 가득 차 있었다.
“통조림 공장은 가공하고 남은 생선 찌꺼기를 그냥 펌프로 뽑아올린 뒤 바다에 버려요. 그러니까 저렇게 갈매기가 많죠. 프린스 윌리엄스 해협에만 연간 4억5천만kg의 생선 폐기물이 발생해요. 그 정도면 750만~1125만ℓ의 바이오디젤을 만들 수 있는 양이죠.”
생선 찌꺼기를 재활용한다
주민들의 실험은 바로 바이오 발전소다. 생선 찌꺼기로 기존의 화석연료를 대체하는 계획이다. 생선 찌꺼기 가운데 50%는 다시 쓸 수 있고, 이 중 15%는 바이오디젤을 만들 수 있다고 랭커드는 말했다. 그는 “이미 기술은 개발돼 있고, 정부 융자, 소기업 투자 외에 5억원의 건설비를 모으고 있다”고 설명했다.
△ 에야크 인디언인 듄 랭커드(왼쪽)는 생선 폐기물로 에너지를 만드는 시민 발전소를 계획하고 있다. 그는 “시민들이 거대 석유회사의 역할 모델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
“초국적 석유회사가 미국을 장악하고 세계를 움직이고 있어요. 시민들이 그 권력을 돌려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대안적 에너지 생산과 소비의 바람직한 역할 모델이 돼야 합니다. 바이오 발전소로 시민들이 돈을 벌어야 돼요. 거대 기업들이 우리가 만든 에너지를 살 수 있도록 말입니다.”
새벽 조업을 마친 항구는 평화로워 보였다. 이번에도 그물 속에 청어는 보이지 않았다. 듄 랭커드가 모는 배도 코르도바 항구로 돌아왔다. 바다에 누워 있던 해달이 덥수룩하게 수염이 난 머리를 들고 두리번거렸다.
[인터뷰/ 독성학자 리키 오트 박사] “시프린스호 사건도 조사해야”
▣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8월23일 오전 코르도바 항구에서 리키 오트(52) 박사를 만났다. 독성학자인 오트는 1989년 엑손 발데즈호 사건 이후 환경운동에 가담하면서 관련 연구를 지속해왔다. 그는 지난해 한국에 방문해 여수 시프린스호 사건 피해자들을 만나기도 했다.
2004년 쓴 <해협의 진실과 기업의 신화>라는 책에서 엑손 발데즈호 사건 복구 작업에 투입됐던 주민들의 건강에 문제가 발생됐다고 주장해 논란을 일으켰는데.
=(화학원소를 그리며) 이것이 벤젠이다. 벤젠이 결합하면 PAHs(polycyclic aromatic hydrocarbons·다방향족탄화수소)가 된다. 벤젠을 마시면 머리가 아프지만 곧 괜찮아진다. 그런데 PAHs는 몸에 들어가 쌓이면서 면역체계에 이상을 일으키거나 암을 발생시킨다.
PAHs가 문제를 일으켰다는 것인가?
=그렇다. PAHs의 위험성이 보고된 지 오래되지 않았다. 사고 당시에는 알려지지 않았을 때이고. 1999년 환경보호청(EPA)이 다이옥신이나 DDT와 같은 위해물질에 PAHs를 등재했다. 엑손의 자료에 따르면, 사고 직후인 1989년 사고 복구 노동자 가운데 6722명에게서 호흡기 질환이 발생했다는 보고가 있다. 하지만 엑손은 이 사실을 정부에 보고하지 않았다. 이러한 정보가 없었기에 정부도 사고 복구 인력의 장기적 건강검진을 실시하지 않은 것이다.
사고 직후 조사를 벌인 과학자들도 기름 유출의 장기적 효과에 대해선 몰랐던 것 같다.
=유출 사고 3년 뒤인 1991년 엑손의 과학자들은 “바다에서 기름은 제거됐다”며 더 이상 자연 피해는 없을 거라고 했다. 그런데 1992년 처음으로 곱사연어(pink salmon) 어업이 중단됐다. 1993년에는 청어 조업이 중단됐다. 어부들은 “장기간 영향은 없을 거라는 과학자들이 우리를 속였다”고 말했다. 석유 회사들은 수백만달러를 정부에 로비하고 석유를 시추하는 데 쓴다. 하지만 기름 유출 사고의 예방과 대책 그리고 이에 관한 연구에는 돈을 쓰지 않는다.
시프린스호 사건도 비슷한 경우가 아닐까.
=지난해 여천의 한 마을에 들렀다. 주민들에게서 코르도바 주민들과 똑같은 분노를 느꼈다. 주민들은 기름 유출 사고 뒤 사람에게 병이 생긴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것이다. 한국 정부는 시프린스호 사건에 투입됐던 인력의 건강상태를 지속적으로 관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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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래스카 횡단 송유관은 흉기인가
노스슬로프의 프루도베이는 ‘제2의 쿠웨이트’라고 칭송받기에 충분한 원유가 있었다. 석유회사들이 이곳에 유전개발을 추진한 건 1960년대였다.
문제는 수송이었다. 북극의 석유를 미국 본토로 가져오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프루도베이가 있는 북극해의 바닷길은 1년에 세 달밖에 열리지 않았다. 1970년 유전개발 참여사인 ‘험블’은 북서항로(알래스카에서 캐나다 북부 연안을 통해 미국 동부로 들어가는 항로)로 원유 수송을 시도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도리어 배가 빙산에 부딪혀 기름 유출 사고가 날 뻔했다.
유전에서 뿜어져나올 막대한 달러를 예상한 운송사들의 제안이 이어졌다. 보잉사는 날개 길이가 143.4m에 이르는 초대형 항공기 기단을 편성하자고 제안했다. 제너럴 다이내믹스사는 핵잠수함을 유조탱크로 개조해 기름을 운송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BP, 험블, ARCO 등 프루도베이의 석유회사들이 최종적으로 선택한 건, 프루도베이에서 알래스카 남부인 발데즈까지 1280km를 연결하는 이른바 ‘알래스카 횡단 송유관’이었다. 북극해의 원유를 송유관을 통해 부동항인 발데즈로 보내고, 여기서 다시 유조선으로 미국 서부로 보내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암초에 부딪혔다. 북극 땅의 특성인 영구동토층 때문이었다. 북극 땅 1~2m 아래에는 거대한 얼음층이 존재한다. 섭씨 77도의 원유가 흐르는 송유관을 땅에 묻었을 때의 효과는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송유관이 영구동토층을 대대적으로 녹여 툰드라를 변화시킬 게 뻔했다. 이런 과학자들의 비판에 직면하자, 석유회사들은 알래스카 송유관을 땅 위에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환경단체가 ‘생태 장벽’을 세우는 것이라며 반대운동을 벌이고 법원의 공사 중지 처분도 이어졌지만, 산고 끝에 알래스카 송유관은 1977년 최종 완공된다.
하지만 근처의 컬럼비아 빙하가 흘려 보내는 빙산군 때문에 발데즈항은 항시적인 사고 위험을 초래했다. 엑손 발데즈호뿐만이 아니었다. 1994년 오버시스 오하이오호는 빙하와 충돌해 6m나 되는 구멍이 생겼다. 1995년 유조선 케나이호는 선적 규정 항로에서 이탈해 배 전체의 절반가량이 여울목에 처박힌 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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