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크틱 빌리지·페어뱅크스(알래스카)=글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경비행기는 알래스카 중부의 중소도시 페어뱅크스를 떠나 북쪽으로 날았다. 푸른 타이가가 붉은 툰드라로 바뀌는 동안 마을도 도로도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2시간30분여를 나니, 강 언저리에 위성 안테나를 단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이 보였다. 비행기는 마을을 한 바퀴 선회하더니, 자갈밭 활주로에 쿵쾅거리며 착륙했다.
△ 북극야생보호구역의 망루에서 내려다본 툰드라의 평원은 고요했다. 지구온난화로 인해 순록의 이동주기가 불규칙해지고 있다 |
주민 대여섯은 이미 활주로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앵커리지에서 온 편지를 받아 읽었고, 친척이 부쳐준 식료품 상자를 싣느라 분주했다.
스스로 고립을 택한 사람들
인구 147명. 아크틱 빌리지의 그위친족은 스스로 ‘고립’을 선택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철따라 북극야생보호구역(ANWR)의 내륙과 북극해를 이동하는 포큐파인 순록에 기대어 자급자족적인 삶을 산다. 문명으로 연결된 도로도 전선도 통신선도 없다. 아크틱 빌리지와 문명을 연결해주는 끈은 단 하나, 하루에 9명을 실어나르는 정기편 경비행기뿐이다.
아크틱 빌리지는 북극야생보호구역의 유전 개발을 호시탐탐 노리는 석유자본과 이를 저지하려는 환경단체로부터 모두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아크틱 빌리지는 알래스카 유전지대 중 마지막 남은 미개발 지역인 북극야생보호구역의 남쪽 끝에 붙어 있다.
호텔도 민박도 없는 마을에 도착한 취재진은 빈 오두막집에 여장을 풀고, 학교 옆 우물에 가 물을 길어와야 했다. 마을에 상하수도관 시설이 없기 때문이다. 난방 시설도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취재진은 장작을 패고 불을 지펴 오두막집의 눅눅한 한기를 없애고 일을 시작했다.
“이누이트(에스키모)들은 유전 개발에 협조해준 덕분에 많은 생활편의 시설을 얻었죠. 석유회사의 지원 업무를 수행하는 원주민 회사도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배당금도 받지 않아요. 우리는 애초부터 유전 개발에 반대했답니다.”
아크틱 빌리지에서 태어나고 자란 로버트 길버트(42)가 말했다. 그는 주중에는 목수로 일한다. 다른 주민들은 산림 감시원, 생태계 조사원 등 연방정부나 부족이 고용하는 임시직으로 일하면서 약간의 생활비를 번다. 그리고 순록과 말코손바닥사슴(무스), 곰 사냥으로 나오는 식량과 부산물을 직접 생활에 이용한다.
길버트씨 가족은 8월27일 오후 순록 사냥을 나갔다. 길버트는 챈들러강 상류와 마을 옆 호수에 사냥용 오두막집을 갖고 있다. 보트를 타고 1시간 거리에 있다.
챈들러강 상류의 오두막집에 이르자, 로버트는 높이 7m의 망루에 올라갔다. 그리고 한참 동안 사방을 관찰했다. 그위친어로 ‘산을 집어라’는 뜻의 산 ‘나싯디’가 이마에 하얀 눈을 덮고 있었다. 그 아래로는 온통 시뻘건 땅이다. 바로 북극야생보호구역이다.
△ 길버트씨 가족은 빈손으로 사냥에서 돌아와야 했다. 올해는 순록이 유난히 늦게 오고 있다 |
길버트는 망루에서 터덜터덜 내려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순록이 아직 오지 않았어.” 사방이 지평선인 땅은 바람 소리 하나 없이 조용했다. 낼모레면 9월이었다. 그러니까 예전 같으면 발 빠른 순록들이 이미 마을 주변을 어슬렁거려야 했다. 길버트의 장모 메기 로버트(82)가 저 멀리 나싯디를 바라봤다. “20~30년 전만 해도 순록은 7월에 오기도 했어요. 항상 똑같은 시기에 오는 건 아니지만, 뭔가 변하긴 변한 거야.”
부시 행정부의 느닷없는 공격을 받다
길버트의 아내 브렌다(50)가 말을 이었다. “이게 다 지구온난화 때문이야. 해마다 순록이 늦게 오고 있어.”
봄철이 되면 순록들은 얼음이 언 포큐파인강을 건너 해발 2천m의 브룩스 산맥을 넘는 험난한 여정을 떠난다. 브룩스 산맥을 넘으면 북극해의 연안평야다. 초여름 순록들은 그곳에서 새끼를 낳고 키운다. 그리고 여름철 이동을 시작해 7월에서 10월까지 차례로 아크틱 빌리지 근처로 돌아온다.
△ 하늘에서 내려다본 알래스카 내륙은 인적 없는 광활한 땅이다 |
그런데 최근 들어 순록의 이동에 변화가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고 있다. 순록떼의 북쪽으로의 이동이 늦춰지고 있다는 것이다. 2003년에 나온 북극 최대의 생태 보고서인 ‘북극기후 영향 보고서’는 “포큐파인 순록은 그 어느 동물보다 기후 변화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며 “따뜻한 날씨로 인해 강의 결빙과 해동의 주기가 달라지는 등 지형 변화가 순록의 이동 습성을 바꾸고 있다”고 지적했다.
루시 비치 그위친 지도위원회의 대표는 “이미 이런 현상은 아크틱 빌리지뿐만 아니라 다른 14곳의 그위친족 마을의 사냥꾼들로부터 목격되고 있다”고 말했다.
“어떤 해는 겨울이 시작했는데도 포큐파인 순록이 돌아오지 않는 거예요. 강이 얼어야 할 시기인데 강은 얼지 않았고. 그래도 순록떼들은 강을 건너지요. 포큐파인 순록의 회귀 본능은 매우 강하거든요. 그러다가 새끼 순록은 강을 건너다 죽어요. 몇 년 전엔 수백 마리의 새끼를 잃어버렸어요.”
12만3천 마리의 포큐파인 순록들이 수백km를 걸어 북극해의 연안평야까지 여름 이동을 하는 이유는 ‘1002구역’이라고 불리는 이곳이 번식과 양육의 천혜의 조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곰과 늑대 그리고 특히 모기의 괴롭힘이 없다. 많은 연구 보고서는 포큐파인 순록의 북행을 알래스카의 지긋지긋한 여름모기의 괴롭힘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다. 이곳에서 순록들은 새끼를 안심하고 서너 달 기른 뒤, 다시 새끼를 데리고 아크틱 빌리지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런데 순록의 번식지인 ‘1002구역’에 유전 개발이 추진되고 있다. 지난해 부시 행정부가 북극야생보호구역의 개발 제한 해제를 허용하는 법안을 제출한 것이다. 부시의 느닷없는 ‘공격’ 때문에 지난해 그위친족은 바쁘고 힘든 한 해를 보냈다. 올해 80살이 된 목사 트림블 길버트는 지난해 9월 워싱턴까지 날아가 반대 시위를 벌였다. 그위친족을 비롯한 60명의 원주민 지도자와 5천 명의 환경단체 활동가들이 참여한 거대한 반대투쟁이었다. 트림블이 말했다.
△ 그위친족의 주요 이동수단은 사륜 오토바이다. 나무를 하러 갈 때나 사냥 갈 때도 이용된다 |
“마을 사람들 모두가 반대해요. 1002구역은 포큐파인 순록이 태어나는 곳이에요. 우리는 그곳에서 석유 개발을 하지 않길 바라는 거예요. 석유 시추가 진행되고, 유전이 개발되면 우린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말 거예요.”
자급자족 경제를 지켜라
지난해 그위친족은 인권을 위해, 환경단체는 자연을 위해 연대해 싸웠다. 싸움은 일단 그위친족과 환경단체의 승리로 끝났다. 북극야생보호구역 개발 허용 법안이 상원에서 부결된 것이다. 하지만 올해 말 다시 법안 통과가 시도될 것은 확실시된다. 아크틱 빌리지 주민들은 9월4일 위성 안테나로 수신되는 부시 대통령의 노동절 연설에서 “문제는 우리가 외국에서 많은 양의 원유를 수입하고 있다는 것이고, 일부 세력은 우리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는 말을 들었다. 주민들은 부시의 거듭된 ‘에너지 독립’ 설파가 결국 자신들을 겨냥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14곳의 그위친 마을은 그위친 지도위원회를 설립해 알래스카의 중소도시인 페어뱅크스에서 반대활동을 벌이고 있다. 지난해까지 그위친족 지도위원회 회장을 맡았던 사라 제임스(62)는 “올해 11월 중간선거가 끝나면, 다시 우리는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 사냥에 성공하면 포틀래치가 열린다. 초대하는 것도 ‘고맙다’고 말하는 관습도 없다. |
“다국적 석유회사들은 수천만달러를 가지고 있지만, 그위친족 지도위원회의 상근자도 딱 두 명밖에 없어요. 우리는 로비 자금이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는 어떻게 태어났고,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알리는 수밖에 없어요.”
사실 아크틱 빌리지 주민들은 풍족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 외따로 떨어져 석유에서부터 생필품까지 항공편으로 공수해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이야말로 석유가 가장 필요한 사람들인지 모른다. 아크틱 빌리지에서 ℓ당 가솔린 가격은 1320원이다. 알래스카의 다른 지역에 비해 2배에 가까운 가격이다. 지난해 11월에는 전기를 공급하는 디젤 발전소가 석유가 없어 1주일 반 동안 중단된 적도 있었다. 발전소는 주민들의 돈을 걷어 부족회의가 운영하는데, 충당 자금이 바닥나버린 것이다.
이런 일을 심심찮게 겪는 주민들은 그래도 한결같이 “석유 개발에 반대한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지구온난화를 버티며 석유산업과 싸우고 있는 듯 보였다. 사실 석유산업과 지구온난화는 원인과 결과로 결합된 한 몸통이 아니던가. 석유로 대표되는 20세기의 화석 연료는 지구를 덥혔다. 석유 등 온실가스가 뿜어대는 이산화탄소의 농도는 산업혁명 시기 280ppm에서 2000년 370ppm으로 30% 증가했고, 20세기에만 지구 기온이 0.6℃ 상승했다.
주민들은 1002구역을 그위친어로 ‘모든 생명이 기원하는 신성한 곳’이라고 부른다. 1002구역이 알래스카 최대의 유전지대인 프루도베이처럼 변한다면, 포큐파인 순록은 사라질 것이고 주민들이 꿋꿋이 지켜온 자급자족 경제도 치명타를 입게 될 것이다.
“올해 순록은 언제 돌아올까”
사냥을 나간 길버트씨 가족은 결국 빈손으로 마을로 돌아왔다. 브렌다와 메기가 쳐놓은 그물에 걸린 북극창꼬치 한 마리만 들고서. 브렌다는 “겨울이 시작되기 전에 미리 음식을 마련해놓아야 하는데, 순록이 늦게 와서 큰일이다”며 말코손바닥사슴 한 마리밖에 없는 창고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8월26일 저녁에는 포틀래치(축제)가 열렸다. 마을 사람들 중 하나라도 사냥에 성공하면 이렇게 마을 앞마당에 모여 고기를 굽는다. 서로 ‘초대’해야 하는 것도 없고, 대접을 받아도 ‘고맙다’고 말하는 관습도 없다. 포틀래치에는 순록 대신 말코손바닥사슴의 머리가 화톳불에 올랐다.
14살짜리 소녀 레니타 앨런이 수줍어하며 다가왔다. “저도 사냥을 할 줄 알아요. 아빠는 열두 살 때 총을 주셨지요. 지난해 10월에 포큐파인 순록 두 마리를 제 손으로 잡았어요.” 올해 순록은 언제 돌아올까. 앨런이 저 멀리 툰드라 평원에 솟아 있는 브룩스 산맥을 바라봤다.
[인터뷰/루시 비치 그위친 지도위원회 대표]“우리가 순록이고 순록이 우리다”
그위친족은 애서바스칸 인디언의 한 지파다. 인구는 8천 명. 북극권 알래스카 내륙과 캐나다 유콘주 북부 그리고 노스웨스트 준주에 있는 14곳의 마을에 산다. 포큐파인 순록은 14곳의 마을 주변을 철 따라 이동하고, 이들은 모두 순록 사냥을 경제적·문화적 전통으로 이어가고 있다. 루시 비치 그위친 지도위원회 대표를 8월25일 페어뱅크스에서 만났다.
그위친 지도위원회는 어떤 단체인가.
=그위친족은 2년에 한 번씩 한자리에 모인다. 이 자리에서 그위친족의 미래 방향을 논의한다. 1988년 지도위원회 창설이 결정됐고, 2년마다 지도위원회 대표를 뽑고 있다. 대표는 페어뱅크스에 나와 여러 대외 업무를 처리한다. 특히 북극야생보호구역 개발을 막는 여러 활동에 집중하고 있다.
그위친족에 있어 포큐파인 순록은 어떤 의미인가.
=그위친족은 원래 유목민이었다. 순록을 따라다녔다. 아크틱 빌리지의 경우 정착한 지 200년이 채 안 됐다. 그위친족의 창조 설화에 ‘우리는 순록 심장의 한 부분이고, 순록은 우리 심장의 한 부분을 이룬다’는 말이 있다. 우리가 순록이고 순록이 곧 우리다. 유목민이었을 때, 우리는 순록 가죽과 모피로 집(텐트)과 옷을 만들었고, 순록의 뿔로 그릇과 사냥도구를 만들어 썼다. 물론 주식도 순록 고기였다.
석유 개발에 반대하는 것도 순록 때문인가.
=우리가 모든 지역의 석유 개발을 반대하는 건 아니다. 우리는 현실주의자다. 우리 역시 화석 연료를 쓰고 있다. 다만, 우리의 경제적·문화적 중심을 이루고 있는 순록의 번식지를 유전으로 만드는 것만큼은 안 된다는 것이다. 1002구역은 브룩스 산맥에 떨어져 있어서 늑대나 곰으로부터 안전한, 순록 번식에 매우 이상적인 장소다.
이미 1002구역에서 150여km 떨어진 프루도베이에는 북아메리카 최대의 유전시설이 들어서 있지 않나. 이로 인해 알래스카 주민들은 한 해에 100만원 이상의 배당금을 받고 있다.
=노스슬로프에 마술이 일어나고 있다. 바로 지구온난화다. 이 때문에 순록 개체 수가 줄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지구온난화의 원인이 무엇인가. 바로 무분별한 화석 연료 사용 때문이 아닌가. 우리가 유전 개발에 반대하는 또 하나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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