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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에서 보낸 으스스한 여름

북극에서 보낸 으스스한 여름

빙하가 녹자 굶주린 북극곰들은 서로를 잡아먹고 마을은 물에 잠기고…멸종인가 석유 재벌의 탄생인가… 지구와 함께 기로에 선 에스키모들

▣ 알래스카(미국)·스발바르제도(노르웨이)=글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2004년 4월7일 미국지질조사국(USGS)의 스티븐 암스트럽 박사팀은 북극의 보퍼트해에서 얼어붙은 15살짜리 어미 북극곰의 사체를 발견했다. 북극곰의 두개골은 다른 수컷 북극곰에게 물려 잘게 부서져 있었다. 목과 등의 하얀 가죽은 벗겨져 있었고, 왼쪽 넓적다리의 3분의 2와 갈비의 2분의 1이 뜯겨 없어졌다.


이 포식자는 대장까지 흔적 없이 먹어치웠지만, 간과 폐는 그대로 남겨뒀다. 어미 북극곰의 새끼도 사흘 뒤 북쪽으로 125km 떨어진 지점에서 살점이 뜯긴 채 발견됐다.

굶주린 북극곰이 사람을 습격하기도

지난 9월2일 북극곰의 ‘동족 포식’이 벌어진 보퍼트해를 찾아간 <한겨레21> 취재진은 이누이트 마을인 카크토비크 근처에서 북극곰 한 마리를 발견했다. 카크토비크에 사는 이누이트인 브래드 타나브룩(42)이 말했다. “올해 두 번째 손님이야. 나누크는 고래잡이철이 시작된 걸 알고 용케 찾아온 거야. 우리는 북극곰을 나누크라고 부르지.”

원주민이 고래 사냥을 나가는 9월 초가 되면, 보퍼트해의 북극곰들은 1~2주일 전부터 마을 주변을 어슬렁거린다. 원주민이 남겨둔 고래 쓰레기를 먹기 위해서다. 고래잡이를 기다리는 북극곰의 행렬은 수십 년째 이어져온 인간과 동물이 만들어낸 공존 방식인 셈이다.


△ 지구온난화로 해빙이 빨리 녹으면서 지구의 해류 순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보퍼트해의 이누이트 도시 배로 앞바다의 빙산.

어미로부터 갓 독립한 두세 살짜리 북극곰은 지난해 원주민이 먹고 남겨둔 고래 살점을 게걸스럽게 뜯어먹었다. 이 북극곰은 원주민들이 고래를 잡아올 때까지 살아남지 못할 수도 있다. 바로 이 지역에는 동족을 잡아먹는 북극곰이 출몰하니까.

북극곰의 동족 포식은 1999년 노르웨이 스발바르제도에서 처음 보고됐다. 북극곰이 북극곰에게 쫓겼고, 습격당해 죽었으며, 이윽고 먹이가 됐다.

“8년 전에 스웨덴에서 온 교사 한 명이 마을 근처에서 북극곰에 습격당해 숨졌어요. 그전에는 그런 일이 없었는데요. 북극곰들이 굶주려 내려온 거예요.” 지난 6월27일 스발바르제도의 롱이어바이엔에 사는 크리스틴(32)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 사건 이후로 롱이어바이엔 시당국은 마을 근처에 나갈 때도 총 소지를 의무화했다.

스티븐 암스트럼 박사팀은 2004년 보퍼트해 남부에서 148마리의 북극곰을 관찰한 결과 이 가운데 무려 47%인 70마리가 영양부족 상태인 것을 발견했다. 북극곰은 짝짓기나 서열다툼을 위해 동족을 해치는 경우는 있어도, 먹기 위해 죽이지는 않는다. 연구팀은 그해 2건의 동족 포식을 발견됐다. 그리고 이런 기현상을 “갈수록 힘들어지는 북극의 먹이조건 때문”이라고 추정했다.


△ 내륙 빙하의 붕괴도 크고 빨라지고 있다. 1993년 알래스카 남부의 차일즈 빙하(왼쪽)는 무너지면서 4.5m의 해일을 일으켜 시민 두 명이 부상당하기도 했다.

북극곰들이 굶주리는 이유는 북극이 녹고 있기 때문이다. 북극은 육지 없이 바다얼음(해빙)으로만 이뤄진 얼음 평원이다. 2003년에 출판된 북극 최대의 생태 보고서인 ‘북극기후 영향 보고서’는 “지난 30년 동안 북극 해빙의 10% 이상이 감소됐다”고 밝혔다. 2070년까지 10~20%가 추가 감소될 전망이다.

해빙이나 빙산이 줄어들수록 북극곰의 사냥은 어려워진다. 북극곰은 빙산과 빙산을 헤엄쳐 다니면서 주식인 물범이나 바다사자를 잡아먹어야 하는데, 빙산과 빙산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수영’이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천하의 수영선수 북극곰이라도 어쩔 수 없다. 최근에는 북극곰이 사냥 도중 익사한 사례가 발견되기도 했다.

열대우림처럼 쏟아지는 비

북극에서 녹고 있는 것은 빙산만이 아니다. 내륙의 빙하도 엄청난 속도로 녹고 있다. 취재진이 알래스카 남부 추가치 산맥에서 마주친 워딩턴 빙하 아래에는 과거에는 없었던 큰 호수가 생겼다. 지난 100년 동안 빙하가 급속히 후퇴했고, 급기야 1950년대에 호수가 생긴 것이다. 취재진이 빙하 끝에 다가가 얼음을 때리니 쉽게 부서졌다. 워딩턴 빙하의 운명은 지구온난화에 달려 있는 듯했다.


북극해에서의 변화는 더 극적이다. 알래스카 북극해의 항구 도시 배로는 수십 년 안에 마을을 뒤쪽으로 옮겨야 할 판이다. 이곳에 사는 이누이트 지질학자 조지 에드워드슨(60)은 취재진에게 생생한 경험담을 털어놨다.

“점점 더 바닷물이 육지 쪽으로 밀려와요. 부모님은 세 번이나 집을 육지 쪽으로 옮겨야 했어요.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지금 바다였던 곳에서 뛰어놀았는데….”

그의 말은 허풍이 아니었다. 콜로라도주립대의 W. F. 맨리 박사팀이 배로의 세 지점을 관측한 결과, 1948년에서 1997년까지 평균 20.7m의 해안 침식이 일어난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쉽게 말해 육지 20.7m가 후퇴했다는 이야기다. 연구팀 관계자는 “지구온난화로 인해 해수 순환이 불안정해지고, 이에 따른 폭풍이 발생해 북극의 해변이 침식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에드워드슨은 “바닷물이 1년에 3.3m씩 치고 들어오는 시스마레프는 이미 이주 계획을 세워 주민투표에까지 들어갔고, 포인트 호프도 준비해야 할 때가 다가왔다”고 말했다. 지구온난화로 난민이 된 건 적도의 투발루뿐만이 아니었다. 북극의 이누이트들도 다음 세기에는 환경난민이 될지 모른다.


△ 인구밀도가 극도로 낮은 북극권은 야생동물의 천국이다.

알래스카 남부는 8월 한 달 비가 내렸다. 앵커리지에서 페어뱅크스까지 가는 고속도로가 끊기는 등 최악의 홍수가 발생했다. 남부의 항구 코르도바가 가장 피해가 컸다. 8월20일 하루만 203mm가 내려 20년 만에 최고 강수량을 기록했다. 수력발전소는 집채만 한 물덩이를 견디지 못하고 과부하를 일으켜 멈췄고, 인근 쿠퍼 삼각주로 이어지는 고속도로는 물에 잠겼다. 심지어 에야크 호수 근처의 주택이 수몰돼 20세기 이래 최초로 수재민이 발생하기까지 했다. 샌디 킹(57)은 “북극권 아래의 알래스카가 열대우림의 타이 같다”고 읊조렸다.

지역신문들은 알래스카의 기록적인 폭우와 더불어 북부 유전지대인 프루도베이에서 일어난 석유 유출 사고를 연일 머리기사로 다루고 있었다. 지난 3월 76만ℓ의 원유가 부식된 송유관에서 누출된 데 이어 8월에 3656ℓ의 원유가 누출되는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4인 가구 불록소득 2천만원

현재 운영 중인 노스슬로프 프루도베이 유전은 하루 40만 배럴의 원유를 생산하는데, 이는 미국 원유 생산량의 8%를 차지한다. 미국이 세계 석유 생산량의 25%를 소비하니 엄청난 양이다. 프루도베이를 포함한 노스슬로프에서는 250억 배럴의 석유가 매장돼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석유산업계는 노스슬로프를 북아메리카 최대 유전으로 만들 계획이다.


△ 보퍼트해의 이누이트 마을 카크토비크에 찾아온 북극곰(왼쪽)과 프린스 윌리엄스 해협에 찾아온 연어들

하지만 환경단체인 그린피스 미국지부는 “1996년 이래 알래스카 송유관에서 한 해 평균 409건의 석유 누출 사고가 일어났다”며 “북극권의 청정지역인 노스슬로프에서 더 이상의 유전 개발은 안 된다”고 주장했다. 다른 환경단체들도 이번 석유 유출 사건을 계기로 최근 부시 행정부가 공격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북극야생보호구역(ANWR) 유전 등 노스슬로프에서 대대적으로 진행 중인 석유 시추 계획을 중단하라는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환경단체는 정작 이곳에 사는 이누이트를 설득시키지 못하고 있다. 대다수 이누이트들은 유전 개발에 찬성한다. 배로에 사는 리처드 파코닥(57)은 그 이유를 설명해주겠다며 원주민 기업이 보내준 주식증서를 보여줬다. “두 원주민 기업은 배로의 이누이트들에게 각각 주식 100주씩을 받아요. 매년 배당금도 주는데, 지난해엔 400만원을 받았지요.”

원주민 기업은 주로 BP, 코노코필립스 등 거대 석유회사의 하청 업무를 맡고, 이누이트의 상당수는 여기에 고용돼 일한다. 이누이트 한 명은 매년 100만원 정도의 알래스카 종신기금을 받고 400만원의 원주민 배당금을 받는다. 4인 가구의 연간 ‘불로소득’이 2천만원이 되는 셈이다. 사실상 이누이트는 이렇게 석유산업과 경제공동체가 되었다. 알래스카가 북극의 쿠웨이트가 되고 이누이트가 북극의 석유 부호가 된다는 세설이 과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 흰머리독수리가 북극야생보호구역 상공을 날고 있다

하지만 파코닥은 “유전 개발에 반대한다”고 말했다. 대대적인 유전 개발이 이뤄지면, “이누이트 마을은 산업 도시로 바뀌어 전통문화가 사라지기 때문”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파코닥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최근 들어 늘고 있다.

개발 반대하는 이누이트들 계속 늘어

국립야생보호구역 석유 개발 허용을 둘러싼 논쟁에서 석유회사 편을 들었던 카크토비크 주민들 사이에서도 반대 움직임이 일고 있다. 이 지역은 산 너머 아크틱 빌리지의 그위친족이 유전 개발을 결사반대하는 곳이었다.(70~80쪽 기사 참조) 카크토비크의 사냥 가이드 로버트 탐슨은 지난해 석유 개발을 반대하는 53명의 서명을 받았고 여론의 추는 요동치고 있다.


△ 북극해의 항구도시 배로는 이번 세기 안에 마을을 뒤쪽으로 옮겨야 할 판이다. 49년 동안 해안선이 육지 쪽으로 20.7m 후퇴했다. 배로에서 뛰어노는 이누이트 아이들.

멜라니 더친 그린피스 활동가는 ‘소수의’ 이누이트들과 유전개발 반대운동을 벌인다. 더친은 “알래스카의 유전 개발을 반대하는 활동이 바로 지구온난화와 싸우는 일”이라며 “석유 시추와 유전 개발에 투입되는 돈을 대체연료 개발과 상용화로 돌려야 한다”고 말했다.

오늘날 알래스카가 누리고 있는 번영은 비싼 대가를 치르고 얻는 것이다. 이누이트는 북극의 석유 부호가 될 수 있을까. 지구온난화에 고통받고 있는 그들은 지금 지구와 함께 기로에 서 있다.



북극생태계의 보물창고

석유 매장 가능성 큰 1002구역은 멸종위기 동물들의 서식지

북극야생보호구역의 유전 개발은 부시 행정부의 핵심 에너지 정책이다. 특히 보호구역에서 북극해와 맞대고 있는 1002구역의 석유 매장 가능성이 가장 큰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하지만 매장 추정치는 편차가 있다. 가장 최근 조사를 마친 미국지리조사국(USGS)은 “57억 배럴의 원유가 저장돼 있을 확률이 95%, 160억 배럴의 원유가 저장돼 있을 확률이 5%”라고 발표했다. 부시 행정부는 최근의 불안정한 중동 정세를 이유로 그동안 생태계 보호를 위해 금지됐던 이 지역의 석유 개발을 추진해야 한다는 논리를 내밀고 있다.

이 지역은 북아메리카에서 마지막 남은 북극 생태계의 보고다. 북극야생보호구역 사무국에 소속된 생물학자 스티브 캔들(47)은 이곳을 “브룩스 산맥의 북단에서 북극해로 완만하게 내려오는 푹신푹신한 툰드라 땅”이며 “동식물이 살기에 천혜의 조건을 이루고 있다”고 소개했다. 보호구역에는 180종의 조류, 36종의 어류, 42종의 포유동물이 산다. 특히 4만2천 마리의 포큐파인 순록(캐나다 제외)과 멸종위기종인 사향소, 북극곰 등이 이곳의 생태학적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북극야생보호구역 안에는 두 마을이 있다. 그위친족이 사는 내륙의 아크틱 빌리지와 이누이트가 사는 북극해 연안의 카크토비크다. 그러나 두 부족은 북극야생보호구역에 대한 상반된 입장을 가지고 있다. 순록에 의존해 수렵 생활을 하고 있는 그위친은 내륙의 유전 개발에 반대하는 반면 고래, 바다표범 등 해양포유류 사냥의 전통을 잇고 있는 이누이트는 유전 개발에 찬성하고 있다.



[머릴린 크로켓 알래스카 석유·가스연합 대표] “유전은 생태계와 공존한다”

해저 운송 방식은 유출 사고 나도 피해 최소화 할 수 있어

알래스카 석유·가스연합은 알래스카에 진출한 다국적 석유회사와 협력사들의 모임이다. 머릴린 크로켓(53) 알래스카 석유·가스연합 대표는 9월7일 앵커리지 사무실에서 기자와 만나 “유전 개발은 이누이트의 전통문화와 북극 생태계의 안전을 보장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알래스카 노스슬로프의 석유 매장량은 어느 정도 되는가.

=모두 250억 배럴 정도다. 프루도베이와 인근 지역에 150억 배럴이 있고, 북극야생보호구역에 100억 배럴이 매장돼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셰브론에서 최근 조사한 바로는 노스슬로프가 북아메리카 최대의 원유 매장지라고 한다.

북극야생보호구역에 유전 개발에 대해선 그위친족인 아크틱 빌리지 주민들과 이누이트인 카크토비크 주민들의 의견이 엇갈린다. 아크틱 빌리지 주민들은 유전 개발이 포큐파인 순록에 영향을 끼칠 거라며 반대하는데.

=아크틱 빌리지의 주장일 뿐이다. 순록에겐 별 영향이 없을 것이다. 알래스카 송유관 옆에 서식하는 중앙 북극순록 떼는 오히려 6500마리에서 2만3천 마리로 늘었다.

이누이트들은 내륙의 유전 개발에는 찬성하지만, 해저 개발엔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데. 카크토비크 주민들은 올해 여름 석유 시추에 앞서 이뤄지는 지진파 시험을 반대했다.

=네덜란드계 석유회사인 셸이 지진 검사를 계획했으나, 다른 시추 일정이 많았고 해빙 상태도 좋지 않아 하지 못했다. 카크토비크는 지진 검사 때 나는 소음 때문에 반대했다. 원주민들이 뱃길과 고래 사냥에 방해를 받을까봐 걱정했던 것 같다.

해저 유전이 설치되면 해저 생태계에 악영향이 없을까.

=셸이 카크토비크 앞바다에 세울 유전은 육지에서 35km 떨어져 있다. 영향이 없다. 원유는 해저 송유관을 통해 육지로 운송된다. 해저 운송은 가장 안전한 방법이다. 기름 유출 사고가 나더라도 얼음바다이기 때문에 제거하기 쉽다. 여름에 유출될 경우 얼음이 녹은 바다 사이로 사고수습반이 기동성 있게 움직일 수 있다.

알래스카 경제에서 석유 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어느 정도인가.

=석유산업이 내는 세금이 알래스카 주정부 수입의 86%를 차지한다. 올해는 3조원을 냈다. 주정부는 석유 수익금을 종자돈으로 알래스카영구기금을 만들었는데 현재까지 37조원이 쌓였다. 올해는 아마 한 사람당 100만원을 받을 것이다. 이 밖에 석유산업은 3만4천 명을 직접 고용했고, 유관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은 이 수치의 1.5~2배에 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