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고 나누고 섬기는 사람 김성수 성공회대 총장 |
“참고 견뎌야지, 뻥치지 말아야지” |
타고난 스포츠맨이던 열아홉 살 소년, 폐결핵 3기 진단을 받고 10년을 누워 살았다. 예수의 사랑을 닮고파 사제가
됐고, 낮고 더 낮은 곳을 찾아 평생을 몸 굽혔다. “난 바보야, 아무것도 몰라.” 그래서 더 높이 쓰인 둥글고 연민의 정 깊은 영혼. 사람은 왜 살며, 어찌 살아야 하는가. |
꽃핀 교정은 가슴 시리다. 하늘은 더 파랗고 공기는 더 보드랍다. 하얗게 드러난 여학생의 종아리에선 푸른 잎이라도 돋아날 듯하다. 서울 구로구. 공장지대로만 알던 동네에 이리도 예쁜 학교가 있었나. 언젠가부터 대학 교정을 거닐 때면 가슴 한켠이 아릿해지곤 했지만, 이 학교는 특별하다. 작고 밝고 꾸밈 없고 싱싱한. 듣던 대로 ‘울도 담도 쌓지 않은 그림 같은’ 학교. 교정은 물론 주차장도 도서관도 주민에게 다 개방한다 했던가. 몇 채 안 되는 건물 사이로 조심조심 차를 몰면서, 걸어올 걸 그랬다, 자꾸 아쉬워진다. 지나가는 학생에게 총장실이 어디냐고 묻는다. “조오∼ 앞 우체국 건물 2층 왼쪽 맨 안쪽에 있어요.” 척 하고 답이 돌아온다. 이 학교 학생들은 총장실을 제 집 드나들 듯한다더니 그 말이 정말 맞나보다. 찾아낸 우체국 건물, 참 작다. 하긴 원체 다 해봐야 1만2000평밖에 안 되는 미니 대학교다. 2층 계단을 올라 왼쪽으로 고개를 삐죽 들이미니 과연 오른편에 문 활짝 열린 방 하나가 눈에 띈다. 들어가 보니 웬만한 교수 연구실보다 더 작다. 그나마 총장실임을 알게 해주는 건 문 밖 책상 하나 차지하고 앉은 여직원의 존재뿐. 다른 대학 같으면 비서실이 이 방보다 두세 배는 더 클텐데, 그런 생각이 든다. 주인 없는 틈을 타 휘휘 방 구경을 한다. 살림 오래 산 집 건넌방처럼 두서없고 편안하다. 학생들이 선사했음직한, 사진을 흐릿하게 인쇄한 넓은 천이 벽을 반이나 덮고 있다. 총장이 연극동아리 학생들 사이에 묻혀 활짝 웃고 있는 사진이다. 마침 사진 속 주인공이 방으로 들어선다. 성공회대학교 김성수(金成洙·75) 총장이다.
“총장님, 식권 한 장만 주세요” “그냥 할아버지야, 동네 할아버지.” 김 총장이 어떤 분이냐고 묻자, 30년도 더 전 그의 신혼집에서 ‘집단 기생’하던 젊은이들(송창식 윤형주 김도향 이장희 윤여정 박상규 등) 중 하나인 가수 조영남은 낄낄대며 그렇게 말했다. 김 총장은 성공회 사제로서 대주교까지 지낸 우리 종교계의 큰 어른이다. 그런데도 주변 사람들은 이제껏 그에게서 “교회 다녀라” “교회 나와 봉사 좀 해다오”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한다. 길을 가다가도 행동거지 나쁜 사람을 보면, 젊은 시절 김 총장 입에선 바로 “이노무 자식! 너 한 대 맞아볼래?” 하는 말이 튀어나왔다고 한다. “무슨 신부가 길거리에서 이 자식 저 자식 하며 싸워요?” 하면 “짜식아, 그럼 신부는 사람도 아니냐” 하는 대꾸가 돌아왔단다. “엉터리 신부가 어째서 자꾸 계급이 올라가는 거냐”고 입방정을 떨면, 또 아무렇지도 않게 “인물이 없는 거지 뭘” 하고 대답했다는 바로 그 사람이다. 수인사를 나눈 후 마침 도착한 사진기자와 함께 촬영을 하러 나섰다. 학교 안에 있는 작은 예배당을 찾았다. 그런데 교회 형태가 독특하다. 딴 게 아니라, 영 교회 냄새가 안 난다는 거다. “왜 십자가 장식 하나 없냐”고 했더니 교회 입구 위를 가리킨다. 연꽃인 듯도 하고 국화인 듯도 한 문양이 예쁘게 새겨져 있다. “보세요. 꽃잎이 십자가 모양이지. 세계 어디든 그 나라의 문화와 전통에 맞게 가꾸어 간다는 것이 우리 성공회의 생각이거든.” 김 총장이 지나가면 여기저기서 학생들이 쪼르르 달려와 친할아버지에게 하듯 어리광을 부린다. “총장님, 식권 한 장만 주세요.” “총장님, 저희랑 같이 사진 찍어요.” “총장님, 우리 과 체육대회에 꼭 오실 거죠?” |
그러면 김 총장은 또 “옛다, 식권” “이쁘게 찍어줄 거야?” “알았어, 갈게” 하며 일일이 다 받아준다. 아니면 먼저 “밥 먹었니?” “담배 피우면 나중에 애 낳을 때 고생한다” “어딜 그렇게 뛰어가?” 하며 자꾸 말을 붙인다. 친구 같기도 하고, 가족 같기도 하고, 어쨌거나 익히 상상하는 바 도무지 대학 총장과 학생들 사이로는 뵈지 않는다. 총장실로 돌아가 차 한 잔 놓고 마주앉는다. 김 총장은 무슨 얘길 해도 ‘허허’ 웃기부터 한다. 그럼그럼, 맞아맞아… 그런 말들이 입에 붙었다. 답변은 짧고 단순하다. 명쾌하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에 대해 말하는 데 영 취미가 없단 말이다. ‘좋다 싫다’가 분명치 않은 것은 물론이요, 과거사를 물으면 “그거 잘된 거야, 안 그랬으면 어쩔 뻔했어” 하며 무조건 좋은 쪽으로 해석한다. 그러니 어찌 보면 참 밍밍하기 짝이 없는 대화인데, 또 한편으론 죽치고 앉아 자꾸 수다를 떨고 싶어지니 이상하다.
열아홉 겨울, 각혈을 하다 김 총장은 1930년생이다. 경기도 강화가 고향이다. 강화는 1889년 우리나라에 첫발을 디딘 성공회 선교사가 최초로 대중 선교활동에 나선 곳이다. 이 때 김 총장의 조부가 성공회에 귀의함으로써 그의 집안은 초기 대한성공회의 틀을 닦는 데 힘을 보태게 된다. “아버지의 사촌형제 중에는 신부님도 계셨어요. 강화도 온수리 교회를 오래 지키셨지. 그러니 꽤 일찍부터 가족 모두 성공회 신자가 됐던 거야.” 그는 서울 교동국민학교(초등학교)를 다녔다. 어머니의 남다른 교육열 때문이었다. “처음에 원서를 넣었지만 집이 강화라 그랬나 떨어졌지. 그래, 온수리 길상국민학교를 1년 다니다 교동으로 전학을 갔지요. 세 살 터울의 여동생, 여섯 살 터울인 남동생도 그랬어. 삼남매가 다 국민학교 때부터 서울 유학이라니, 우리 어머니가 참 대단하셨지.” ‘농사도 짓고 사업도 좀 한’ 집안 형편은 제법 괜찮은 편이었다. “아주 미안한 얘기지만 일제시대에 밥 굶지 않고 살았으니… 아버지는 무서운 분이셨어. 어머니도 무서웠지만 그래도 늘 밀어주시고 끌어주시고… 그런데 내가 큰 실망을 드렸지.” 교동국민학교 시절 그는 보이스카우트에 해양소년단에, 군사훈련 대대장까지 도맡아 한 팔방미인이었다. “착한 어린이지만 개구장이였지 뭐. 그런데 너무 잘한다 잘한다 하면 아이가 비뚤어지거든. 그 칭찬을 받아서 꼭 그렇게 가야 할텐데, 우쭐해가지고, 내가 제일이라고….” 결국 그는 어머니가 그토록 원하던 경기중학생이 아닌 배재중학생이 됐다. 배재중 2학년 때 해방을 맞았다. 어떻든 그는 공부는 뒷전, 운동에만 정신을 쏟았다. 그는 “그때 정신 차리고 공부 열심히 했으면 신부가 못 됐겠지, 그럼그럼” 하며 껄껄 웃는다. 4학년(지금의 고교 1학년) 때 친구들과 아이스하키부를 만들었다. 장비를 마련할 길이 없으니 혹은 직접 만들어 쓰고 혹은 미국인들 경기에 구경 가 ‘슬쩍’ 해오기도 했다. 그렇게 5학년이 되고 6학년이 되고, 졸업 전 마지막 겨울이 시작될 즈음 기막힌 일이 생겼다. 각혈을 한 것이다. “그러니 내가 무식한 거야. 얼른 집에 가서 주사 맞고 그랬어야 하는데, 겨울 내내 시합이니 안 뛸 수도 없고 말이야.” 시즌이 끝나고 강화도 집에 가서야 비로소 병원을 찾았다. “폐결핵 3기라는 거야. 의사 말이 얼마 못살고 죽는다고 그래. 아이고 이거….” 그래도 혹 몰라 아이스하키팀이 있는 연세대에 체육 특기생 입학을 신청했다. “시험도 보고 신체검사도 하고…. 떨어졌지. 내 딴에는 ‘아, 나는 신체검사에서 떨어졌다’ 하는 거지. 그럼그럼, 그렇게 생각해야지. 공부 못해서 떨어졌다 할 수는 없잖아, 허허.”
“바보처럼, 돼지처럼 산 거지” 곧이어 전쟁이 터졌다. 강화에도 북한군이 들이닥쳤지만 ‘동네 사람 다 아는 폐병쟁이’인 그는 인민군 치하 3개월을 별탈 없이 넘길 수 있었다. 1·4 후퇴 후에는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피란을 갔다. 그 와중에 경기여고 졸업 후 피란지에서 대학에 다니던 여동생이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서울 수복 후에는 서울대 상대에 다니던 남동생이 여의도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그 뒤를 따랐다. 후에 여동생은 교수 생활을 하다 평화봉사단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사회사업가가 됐다. 남동생은 현지 증권사 사장을 역임하는 등 유능한 금융인으로 잘 살고 있다. |
전쟁이 끝나고, 대학 간 친구들이 졸업하고, 그래서 취직하고 결혼하고 아이 아빠가 되는 동안 내내 그는 고향집 방 한 칸을 차지하고 누워 질긴 투병생활을 했다. 친구들의 발길도 차츰 뜸해졌다. “친척들도 내 옆으로는 가까이 안 와. 내가 애들을 좋아하니까 좀 안아주면 ‘아유’ 하며 싫어서 막 빼앗아가고. 그런 걸 겪으면서 인생을 참고 견디는 걸 배우고…. 운동하며 껄렁껄렁 우헤헤! 그러던 게 조금씩 조금씩 없어진 거지.” 고통스럽지 않았다면 거짓일 것이다. “의사 선생님이 그러셨어. 병이 나으려면 바보가 돼야 한다…. 내가 그걸 전폭적으로 믿은 거지. 그저 건강해지기만 하자…. 참 바보처럼, 돼지처럼 산 거지.” 몇 번인가 “약이나 주워먹고 병신처럼 살아야 하는” 인생이 너무 싫어 무작정 집을 뛰쳐나가려 한 적도 있었다. 그 때마다 부모님이 나서 때론 어르고 때론 으르며 힘겹게 붙잡아 앉혔다. “한편으론 이상해.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어째 그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무료하게 살 수 있었을까. 세계문학전집을 읽었다지만 그거야 남들 다 하는 거고. 음악도 마찬가지야. 해설책 보고 공부하고, 그런 걸 전혀 못 했으니까. 그저 듣고 그저 책장만 넘기고. 어떻게 보면 나는 참 끈기도 없고 집착도 없고. 아침에 일어나면 밥 먹고 누워 있다 또 점심 먹고…. 세상에 그런 편한 팔자가 또 어디 있어.” 그는 “내가 대주교 일 끝내고 정년퇴임하면서 제일 맘 편했던 게 설교 준비 안 해도 되는 거였다”고 한다. “옛날에 영남이가 우리 집에 오면, ‘이게이게이게-, 서재가 이게 뭐야!’ 그땐 책이 더 없었지. 그럼 이 녀석이 ‘아 신부님, 빌리 그레이엄은 보좌목사가 몇 명이나 되는데요, 주일 설교 제목만 딱 주면 쫙 해가지고, 아 어마어마한데…’ 하면서 막 놀려. 그럼 내 변은 이런 거지. ‘책이야 사면 되고 책이 있으면 반은 읽은 거니까 됐지 뭐.’ 오늘 아침에도 그렇고, 출근하면 꼭 성경을 본단 말이야. 아, 요걸 기억해뒀다 좀 얘기해줘야겠다…. 그러고선 책 놓고 변소 한 번 갔다오면 다 잊어버려, 허허허.” 그는 “내가 너무 무식하니까 학문적인 얘기는 못하고 아는 것만 말하는데, 또 남들은 쉬운 얘기 한다고들 좋아한다”며 “참 답답한 일”이라고 했다.
“넌 남 잘되는 게 뭐 그리 좋냐” 투병 기간이 길어지면서 교회를 더 가까이하게 됐다. “예수님께 의지한 거지. 학문적으로 그분을 이해하려 한 게 아니라 그저 마음으로. 아플수록 더 그랬어.” 속이 까맣게 타들어갈 법도 했건만 잘 버틴 모양이다. “경기 붙고 서울대 붙고, 그렇게 좋은 일 생겨 인사 오는 친척이 많았거든. 그럼 난 너무너무 좋아했어. 형, 누나 집에 경사가 난 거잖아. 그럼 어머니는 ‘넌 남 잘되는 게 뭐 그리 좋으냐’고…. 답답하셨던 게지, 속상했을 거야.” 얘기가 이쯤 갔는데 벌써 점심시간이다. 그와 식권 하나씩 챙겨들고 학교 식당으로 간다. 성공회대에는 교수식당, 학생식당이 따로 없다. 교정을 걷는데 웬 참하게 생긴 처녀 하나가 김 총장을 향해 안겨들 듯 달려온다. 성공회대 졸업 후 뜻한 바 있어 강남대 특수교육학과에 편입한 학생이란다. “총장님, 안녕하셨어요? 너무 뵙고 싶었어요.” 셋이 같이 식당에 가 자리를 잡고 앉는다. 벽에 나붙은 공지 사항을 보니, 김 총장의 ‘업무’ 중에는 자취하는 학생들에게 한 달에 한 번 삼겹살 사주는 일도 있나보다. 2000년 총장에 취임한 직후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이 연 3000만원에 달하는 판공비를 반납한 것이다. “식권이고 삼겹살이고, 때 되면 군대 간 휴학생들 면회까지 가는 걸로 아는데 돈 쓸 일이 참 많겠다”고 했다. 그는 “덕분에 카드 빵꾸날 뻔한 적도 있었다”며 껄껄 웃었다. 여학생은 식사를 하며, 열심히 공부해 좋은 특수교육교사가 되고픈 꿈을 풀어놓는다. 그는 “그럼그럼, 참 좋은 일이야” 하며 학생의 등을 가만히 토닥인다. 밥 먹는 내내 여기저기서 “총장님” “총장님” 하는 소리가 이어진다. 역시 성공회대 최고 인기 스타다. |
벽안(碧眼)의 사랑, 프리다
다시 방으로 돌아와 이야기를 이어간다. 투병 생활이 8년을 넘어 몸이 거의 정상을 되찾자, 그는 아버지가 운영하는 회사의 수원 지점에 취직했다. 마침 수원 성공회교회의 방 한 칸이 비어 있어 거기서 숙식을 해결했다. 그곳에는 부속 고아원이 있었다. 늘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그를 보고 교회 일 보는 아주머니들이 말했다. ‘시몬(김 총장)은 신부님이 되면 참 좋겠다…’고. “성공회는 학구적인 분위기가 아니야. 그저 신부라면 미사 드리고 신도 잘 이끌고 아픈 사람 돌봐주고…. 한마디로 소외되고 어려운 사람 곁에 있을 수 있으면 그걸로 되는 걸로 생각했지. 내가 좀 그렇게, 편하게 예수 믿을 사람으로 보였나봐.” 성공회 사제를 길러내는 성미카엘신학원은 대학 졸업생만 입학할 수 있었다. 다행히 그에겐 졸업장이 있었다. “한참 아플 땐데, 내가 한사코 싫다는데도 어머니가 나서 부득부득 단국대에 등록을 시키는 거야. 언젠가 사회로 나가려면 대학 졸업장은 꼭 있어야 한다는 거지. 6·25전쟁 후 한참 혼란스러운 때라 어찌어찌 졸업이 가능했겠지. 덕분에 신부가 될 수 있었어.” 서른한 살에 신학원 학생이 됐고, 한편으로는 연세대 신학과에 편입해 그 또한 수료했다. 신학원 재학 중 그는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을 한다. “탄광촌에 갔어. 한 3개월 정도였나. 요즘으로 치면 위장취업을 한 거지. 영세 광부에 영세 회사. 깊이를 모를 어둠에 먹고 살기는 힘들고. 그러니 가정생활은 또 얼마나 어렵겠나. 그렇게 참 힘든 세상을 보고 와서,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절로 그런 생각이 안 들 수 없는 거지. 그러니 더 부끄러운 거고.” 전라남도 무안군의 영산강 간척사업 현장에도 뛰어들었다. “거기서 거적문이라는 걸 처음 봤지. 더운 여름인데도 방바닥엔 물기가 질척질척하고. 밥상에는 깡보리밥에 된장 종지 하나. 숟가락 모양이 동그래야 되잖아. 근데 반달 모양으로 닳아버렸어. 숟가락 뒤로 하도 된장을 퍼먹어서. 그러니 나와 이들이 같은 대한민국 사람이 맞나…. 그렇게 어렵던 우리나라가 40년, 50년 만에 이렇게 잘살게 됐어. 하지만 몸만 아니라 정신도 함께 잘살아야지, 가난한 사람은 여전히 가난하고….” 1964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서른네 살 때였다. 3년 후 일본에서 열린 한 행사에 참가했다 아내 될 이를 만났다. 영국에서 선교사로 온 벽안(碧眼)의 처녀 프리다였다. “일본에 한 달을 있었는데, 이 여자가 괜찮다 하고 만난 건 3일밖에 안 돼. 그런데도 ‘한국으로 한번 나오라’ 하니 진짜 오길래 ‘이게 날 좋아하나보다’ 생각했지, 허허.” 영어, 일본어를 섞어가며 의사소통이 원활치 않았지만 두 사람은 한눈에 서로를 알아보았다. “내가 키도 크고(174㎝거든), 뭐 하여튼 빛이 나더라나 허허. 사랑은 서로 쳐다보기만 해도 좋은 거지. 말이 뭐 필요해. 강화도까지 왔기에 전등사길 같이 산책하면서 결혼을 결정했지.” 마침 러브 스토리라 귀가 바짝 당기는데 그만 예정된 시간이 다 찼다. 총장실 밖에는 벌써 ‘독서왕’ 상을 받을 학생들이 미리 와서 대기하고 있다. 도서관에서 책 많이 빌려 본 학생에게 주는 상이란다. 김 총장은 “가난한 학교라 근사한 선물을 줄 수 있나. 그저 내가 여기저기 행사장 다니며 받아놓은 시계, 기념품, 책 같은 것으로 대신하는 일이 많다”고 아쉬움을 토로한다. ‘돌아오는 토요일 댁으로 찾아뵈마’ 하고 돌아서려니 그도 선뜻 몸을 일으켜 건물 밖까지 배웅한다. 1층 현관을 나서는 순간, 아, 환한 햇살이 길 위에, 푸른 나뭇잎 위에, 재잘대는 학생들 예쁜 어깨 위에 축복처럼 고이 나린다. 그도 같은 느낌이었을까. 조용히 중얼댄다. “여기가 내 천국이지….” |
70년 된 양복 앞섶에 가죽 덧대 볕 좋은 토요일, 다시 김 총장을 만나러 간다. 그의 집은 여의도의 한 오래된 아파트에 있다. 그가 이 집을 갖게 된 데는 사연이 있다. 1993년까지 그의 가족은 24평 아파트에 살았다. 그러던 것이 그가 대주교가 되면서 뜻밖의 요구에 부딪혔다. 대주교라면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 성공회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다. 그런 이의 집이 겨우 24평이라니, 어디 손님 한번 제대로 치르겠냐며 주변에서 걱정이 많았던 것이다. 결국 지금 사는 48평 아파트로 옮겼고, 도배 한 번 안 한 채 10년을 고스란히 산 것을, 지난해 사위가 “더는 못 보겠다”며 직접 페인트 칠을 하고 새 벽지를 발라주어 지금의 모양새가 됐다. 그럼에도 김 총장은 자꾸 “이리 사는 것이 황송하다”며 머리를 긁적인다. 한 달 생활비를 물으니 “150만원”이란다. “얼마 전까지도 나는 집에 돈을 가져오지 않았어. 아내 월급으로 살림을 꾸렸는데 지난해 여름부턴가는 아내도 돈을 더 못 벌게 된 거지. ‘한 달에 120만원만 주쇼’ 해서 몇 달 그렇게 했더니 도저히 안 되겠던가봐. 그래서 지금은 150만원인데, 뭐 두 식구 사는 데야 또 괜찮지.” 김 총장은 장인어른이 물려준 70년 된 양복을 지금도 입고 다닌다. 소매 끝과 앞섶에 얇은 가죽이 둘려져 있는데, 영국인 장인이 그렇게 가죽을 덧대가며 입은 것을 결혼식 무렵 물려받아 지금까지 입는다 했다. 평생 받은 월급과, 옷 한 벌 안 사 입고 모은 돈은 다 어디로 갔을까. 정신지체아 교육시설인 ‘성베드로학교’, 음성나환자복지시설인 ‘성생원’, 맞벌이 신도를 위한 양육시설 ‘나눔의집’, 그리고 1999년 김 총장이 선친에게서 물려받은 땅을 기증해 경기도 강화에 마련한 정신지체장애인 근로시설 ‘우리마을’….
6·10민주항쟁의 불을 댕기다 특히 성공회대 캠퍼스와 딱 붙어 있는 성베드로학교는 그가 1973~84년 교장을 맡아 제 몸처럼 아끼며 키워온 곳이다. 우리나라 특수교육의 선구자로 불리는 부인 프리다 여사도 이 학교에 열과 성을 쏟아부었다. “그 아이들을 보면 참으로 인간의 본성에 이토록 아름다운 것이 있구나…. 예를 들어 달리기할 때, 얘들은 혹 뒤처지는 친구가 있으면 꼭 기다렸다 같이 들어가거든. 거북이가 자면 깨워 같이 달리는 토끼가 돼야지, 너 먼저 들어가라, 너 1등으로 가거라, 그러면 우리 사회에 무슨 희망이 있어.” 온갖 편견과 재정적 어려움에 시달리며 이웃을 위한 여러 사업에 매달리는 동안, 그에게도 아이들이 생겨나고 대한성공회도 조금씩 성장해갔다. “1970년에 아들 용이, 1971년에 딸 빛나가 태어났지. 이 녀석들이 제 친구들과 외모가 다르다보니 알게 모르게 크면서 어려운 점이 많았나봐. 그런데 나야 새벽 6시에 나와 밤 12시에 들어가니 그런 사정을 알 턱이 있나….” 학창시절 아들은 괴짜였다. 선생님이 싫으면 그 과목은 아예 공부를 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학교를 주름잡는 ‘주먹대장’이었다. 그러던 것이 고교 2학년생이 되면서 확 바뀌었다. 대학 입학이라는 목표가 생긴 것이다. “한 1년 열심히 하더니 연세대 체육과에 붙고, 대학원까지 나와 한국종합예술학교 무용역학교수가 됐어, 허허.” 딸 빛나씨는 성악을 공부하다 고교 졸업 후 방향을 바꿔 ‘에스모드서울’에서 패션디자인을 전공했다. “그러다 좋은 사람 만나 그냥 시집갔지. 글쎄, 내가 돈이 많아 외국인학교라도 보내고 유학도 시키고 그랬으면 좀 나았을까…. 지금은 맘이 아프고 좀 후회도 되고 그렇지.” 그의 말대로라면 ‘천하에 아는 것도 없고,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바보 같은 사람’인 그는 1984년 주교가 되고 1993년 대주교가 됐다. “실력 없이 됐겠냐”고 하자 그는 극구 “아냐, 아냐. 내가 키두 크구 인물두 떨어지지 않구 성공회 집안 사람이구, 그래서 된 거야” 한다. 곁에서 부인까지 한 수 거든다. “키 컸어요, 그때는. 그쵸?” 서울교구장이던 1987년 6월10일, 대한성공회의 본산인 정동성당에서 큰 사건이 벌어졌다. 그날 대강당에서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대규모 집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집회를 원천봉쇄한 경찰은 성당에 난입해 민주 인사와 학생, 사제들을 무참히 구타하며 연행해 갔다. 김 총장은 이에 단식투쟁으로 항의해 결국 내무부 장관의 사죄를 받아냈다.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된 사건이다. 하지만 김 총장의 이야기는 또 다르다. |
“박종규 신부라고 있어요. 그 사람이 운동권 사람들을 성당 안 사택에 다 모아놓은 거야. 난 몰랐지. 근데 나중에 와서 여차저차 설명을 하대. 벌써 와 있는 걸 어떻게 해. 근데 집회를 시작한다니까 경찰들이 최루탄 쏘며 밀려 들어와가지구, 막대기 같은 걸로 사람들을 때려서 피가 막…. 신부들이 농성을 하는데, 글쎄 그걸 신부들이 다 했다니까. 나야 ‘여러분이 하는 일을 책임지는 건 접니다’, 딱 그 한마디 한 것뿐이지.” 김 총장은 매사 설명하는 방식이 다 이렇다. 지난해 이라크 파병 반대 운동에 동참한 것도 “학교에서 애들이 하자 그러니까 했지 뭘”이다. 그가 취임한 이래 성공회대가 사회학과, 사회복지학과, NGO대학원 등을 중심으로 놀라운 발전을 거듭하는 것 또한 “다 교수님들 공”이라며 손을 내젓는다. 성공회가 사회의 낮은 곳을 살피는 교단으로 국민의 높은 신뢰를 얻고 있는 것은 “젊은 사제들이 빈민 속으로 들아가 기꺼이 봉사해온 덕분”이다. 십수개 사회운동·봉사 단체에 선뜻 이름을 빌려주고 남다른 성실성으로 임해온 것 역시 “모두 사돈의 팔촌이라 인정상 거절하지 못해서”란다.
다양성을 즐길 줄 아는 사람 하지만 누가 뭐래도 김 총장은 ‘일이 되게 하는 사람’이다.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고 어디로도 움직이지 않는 것 같으면서, 어느새 가장 핵심적인 말을 하고 가장 중요한 일을 도맡아 해치워버린다. 행정가이자 실천가로서 그의 저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나는 나하고 일하는 사람들을 전폭적으로 믿어. 또 그 믿음이 오늘 이 순간까지 단 한 번도 깨진 적이 없어. 일거리를 주고 권한을 다 주고, 난 그저 일한 거 보고받고 협의하고, 그걸로 끝이야. 그러니 일하는 사람들도 나한테 얼마나 잘하겠어. 장군이 전쟁터에 나갈 적에, 왕이 ‘이번 전투는 이러니 작전은 이렇게 짜고…’, 그런 왕은 바보래. ‘김 장군, 자네는 장군일세. 나를 대신하는 사람일세. 그저 소신대로 하시오’ 이렇게 하면 그 장군이 천하통일을 한대.” 그래도 도무지 손 발이 안 맞는 사람, 안 맞는 부서는 어떻게 할까. “부서라는 건 2, 3년이면 또 바뀌거든. 아주 망가지지만 않게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야지. 근데 그걸 못 하고 모가지를 자른다, 그럼 다른 사람들까지 불안해서 일을 못하지. 내가 그 사람보다 100배 나으면 대신 하겠지. 하지만 100배 낫지도 않으면서 뭘 그래. 인내심을 갖고 참아야지. 그게 조직을 움직여나가는 힘인 거지.” 김 총장의 신앙에 대한 견해도 소박하고 단순하다. 우선 성공회는 교인 수를 ‘뻥’치지 않는다. “한 5만에서 6만명, 그 정도는 되겠지. 그런 데서부터 눈 가리고 속임수를 쓰려 하면 안 되지. 한 신부가 5명인 교인을 10명으로 만들고 싶다, 근데 그걸 혼자 하려고 하면 안 되지. 5명 교인하고 더불어 해야 되는 거지.” 그는 하나님이 중심이나 사람 또한 소중함을 거듭 말한다. “하나님은 왜 하늘에서 소리만 치지 않고 예수를 보냈을까. 예수는 사람이자 하나님의 아들이지. 하나님은 꼭 사람을 통해 (일)하신다는 걸 기억하면 좋겠어. 하나님은 왜 에덴동산 중심에 선악과를 심어놓았을까. 그건 인간의 자유의지를 위한 보루인 거지.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되 꼭두각시나 로봇이 되기를 원치 않으셨거든.” 그는 이론적으로만 하나님을 섬기려 드는 것에 대해서도 반대라 했다. “뭔가 의심스러울 적엔 예수를 생각해야지. 왜 그는 아픈 사람, 가난한 사람을 찾아다녔을까. 그렇게 찾아다니다 보면 베풀지 않고는 못 배기는 거지. 기차 레일이 두 개가 있듯 이론과 실천은 늘 함께 가는 거야. 예수의 실천을 무겁게 생각해야지.” 문득 이라크 전도를 고집하며 순교에 대한 열정을 토로하던 선교사들이 생각난다. 하나님 보시기에 그건 잘하는 일일까, 잘못하는 일일까. |
“글쎄…, 인위적 선교는 생각해볼 문제지. 예수님도 그렇고 제자들도 그렇고, 돌로 맞을 것 같으면 쓱 피해 옆으로 가라 그랬는데…. 또 믿음을 강요하는 건 진짜 믿는 게 아닐 거야. 그거야 하나님이 결정해주시는 거지.” 이 참에 오랫동안 머릿속을 어지럽혀 온 의문 하나를 슬쩍 던져본다. “하나님은 유대의 하나님이요 예수 또한 유대사람인데 한국사람, 일본사람까지 왜 그를 믿어야 하죠?” 김 총장이 이렇게 답한다. “예수님이 왜 나랑 같은 민족이어야 할까. 그건 욕심이지.” 한참 얘기를 나누다보니 벌써 늦은 오후다. 지난번처럼 또 노구를 이끌고 아래층까지 배웅을 나선다. “성공회대가 어떤 학교로 성장하고, 학생들이 어떤 사람으로 커가길 소망하시나요.” “우리 학교 이념이 ‘열림 나눔 섬김’이지. 한 사람의 특별한 지도자보다 더불어 살아가는 열 사람의 평민을 양성하길 원하지. 다양성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면 더 좋겠지. 획일적인 질서에 집착하지 않고 무질서 속의 질서를 읽어낼 줄 아는 눈을 가진 이라면 더 바랄 나위 없겠지.”
총장님, 총장님, 우리 총장님 여우비가 후두둑 내리는 여름 오후다. 또 차를 몰고 성공회대로 향한다. 예쁜 교정을 느긋하게 걸어 가로지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오늘은 좀 짐이 많다. 찾는 이 없이 회사 책꽂이에 무료하게 꽂혀 있던 책 여남은 권, 여기저기서 받은 홍보용 시계 몇 개를 챙겨 지금 김성수 총장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사실 걱정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밖으로 꺼내서야 말 못하겠지만, 내심 ‘뭐 이런 구질구질한 걸 다 들고 왔나’ 흉볼 수도 있는 일 아닌가. 이윽고 그 앞에 닿아 쭈뼛쭈뼛 짐을 풀어놓는데, “아니 이게 다 뭔가” 진심으로 기뻐하는 그 얼굴. 마음이 절로 그득해진다. 고마워하시니 고마워라. 이 또한 보시오, 사람 사는 세상이다. (끝) |
글: 이나리 동아일보 기자
byeme@donga.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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