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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 피플

[스크랩] 타임지 선정_ 우리시대 주인공 10명

 

 

회화를 최첨단 예술로 승화시킨 혁명가, 잭슨 폴록(artist, 1912~1956)
잭슨 폴록은 1956년 8월 뉴욕 롱아일랜드에서 44세의 나이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갑작스럽고 충격적인 그의 죽음은 미국의 대표적인 ‘반사회적 예술가’라는 폴록의 신화적 지위를 한층 더 확고히 했다. 캔버스 가득 선과 움직임으로 층층이 이루어진 패턴을 만들어낸 이 미술계의 혁명가는 사실 안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고등학교를 두 번이나 퇴학당했고, 성인이 된 후에도 폭력, 알코올, 기억 상실, 자학, 그리고 창작의 한계에 시달렸다. 그러나 그의 대표작들이 세상에 막 나오기 시작하던 1940년대 후반은 예외였다. 1945년에 결혼한 동료 화가 리 크레이스너(Lee Krasner)와의 관계는 그의 창작욕을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에 폴록은 캔버스를 바닥에 고정하는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이젤을 거부했으며, 이젤 안에 표현되는 위와 아래, 왼쪽과 오른쪽으로 이루어진 질서 정연한 우주를 거부했다. 폴록은 캔버스 주위를 옮겨 다니면서, 때로는 캔버스를 가로질러 다니면서 다양한 각도에서 물감을 방울져 떨어뜨리거나 마구 뿌리고 휙 던질 때마다 끊임없이 생겨나는 실처럼 가는 선들로 캔버스를 채워나갔다. 눈부실 정도로 명쾌한 작품 속에서 에너지와 선들이 나타났다. 불편하기만 했던 전통적인 작업 도구들에서 해방되자 폴록은 캔버스, 합금판, 카드 보드, 금속 같은 다양한 표면 위에 여러 가지 물감 사용법을 실험했다. 그는 자신이 창조한 이미지들이 그것의 내용이나 개념과 거리를 두게 하려고 작품에 제목을 붙이는 대신 번호를 매겼다. 폴록의 인기는 꾸준히 올라갔다.

 

그의 예술적 후원자인 존 D. 록펠러 부인도 여러 작품을 구입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과 예술적 자유도 폴록을 자유롭게 해주지는 못했다. 크레이스너와 별거 중이던 1956년, 밤새도록 술을 마신 폴록은 자신의 정부, 절친한 친구와 함께 차에 올라탔다. 이 자동차 사고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그의 정부뿐이었다. 미국의 미술을 최첨단 예술로 발전시킨 주인공은 그렇게 눈을 감았지만 우리에게 엄청난 유산을 남겼다. 거대한 캔버스 위에 인간의 마음을 담은 명료한 풍경화 <폭발 직전(Simmering Substance)>과 <푸른 기둥들(Blue Poles)>도 그 가운데 속한다. 이제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미국 미술가로 확실하게 자리 잡은 폴록은 요즘도 심심찮게 언론에 등장한다. 폴록의 이름이 등장하는 뉴스 제목에는 대개 달러 표시가 따라다닌다. 지난해 11월 할리우드 미디어 재벌 데이비드 게펜이 소장하던 폴록의 초기 작품 <넘버 5>가 무려 1억4천만 달러에 팔렸다. 미술 작품 매매 사상 최고가였다.

 
 

새로운 건축을 향하여, 르 코르뷔지에(architect, 1887~1965)
동료들은 그를 ‘코르부(Corbu)’라고 불렀는데, 프랑스어로 ‘까마귀’를 뜻한다. 사실 ‘르 코르뷔지에’라는 이름도 본명이 아니다. 프랑스 건축가 샤를르 에두아르 잔네르(Charles Edouard Jeanneret)는 20대 초부터 외할아버지의 이름을 직업상의 가명으로 사용했다. 성(姓)을 버리는 것은 물론이고 이름을 바꾸는 것이 과거와의 단절을 의미한다면,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건축가 역시 형식에 충실했다. 르 코르뷔지에 이전의 건축은 대부분 예스럽고 운치 있는 멋을 강조했는데, 스펙트럼의 한쪽 끝에는 지역적으로 영감을 받은 단일 가족 주택들이, 반대쪽에는 역사적으로 알려진 육중한 공공건물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르 코르뷔지에의 등장으로 ‘도시 공간의 중요한 장식품’이던 주택이 그저 ‘사람들이 살기 위한 기계’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장식을 배제한 르 코르뷔지에의 주거 공간에는 강철, 콘크리트, 유리판같이 규모가 크고 잘 사용되지 않던 재료들을 과감하게 사용했으며, 건물을 지면에서 분리하기 위해 ‘필로티’나 각주를 사용했다. 또 천장과 바닥의 높이를 다양하게 함으로써 자유와 뜻밖의 놀라움을 선사했다. 건축가들에게 건축 미학을 넘어 유기적 실체로 도시를 이해할 것을 촉구한 르 코르뷔지에의 성명서는 오늘날의 도시화를 예견했다. 1914년 조립식 부품을 이용해 실험적인 대량 주택 건설을 계획했던 ‘도미노 프로젝트’는 르 코르뷔지에에게 부와 함께 세계적인 성공을 안겨주었다. 호리호리한 체격에 안경을 쓰고 옷과 예의범절에 지나칠 정도로 까다로웠던 이 건축 천재의 영향력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하지만, 정작 본인은 성공 가도를 달리면서도 화가로서의 야망 때문에 좌절하곤 했다.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화가로서의 야망은 그가 세운 롱샹 교회의 날개 지붕처럼 더 많은 건물들이 솟아오르기를 희망했는지도 모른다.

 

 

영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유산, 다이애나 왕세자비(princess of Wales, 1961~1997)
다이애나 스펜서가 서른여섯 살의 나이에 자동차 사고로 사망하자 싸움과 반목을 일삼던 전 세계는 하나가 되어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장례식을 지켜보고, 조문객 명부에 이름을 남기고, 그녀를 기리기 위해 꽃으로 장식된 제단을 세운 것은 그녀가 단지 미모의 왕세자비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람들은 다이애나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은 세계에서 카메라 세례를 가장 많이 받은 이 여성이 성숙한 모습으로 변해가는 모든 과정을 지켜본 것이다. 대중은 다이애나를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하고자 애쓴 여성으로 기억했기 때문에, 그녀가 사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언론의 무자비한 추적을 받고 왕족들이 출연하는 화려하고 값싼 드라마에서 자신이 맡은 배역을 박차고 나왔다는 사실은 거의 문제 삼지 않았다.

 

1996년 막을 내린 다이애나와 찰스의 ‘잘못된’ 결혼 생활은 미친 듯이 눈물을 쏟아내며 법정을 나서는 다이애나의 모습을 통해 알려졌다. 전 세계는 배신당한 여성이 느끼는 고통과 사랑받고 싶은 욕구에 충분히 공감했다. 그녀가 왕세자비라는 호칭마저 박탈당하자 그녀의 추종자들이 직접 나서 ‘국민의 공주(The People’s Princess)’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사람들은 다이애나가 명성을 이용해 자신이 지지하던 자선 사업에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모으는 모습을 자랑스럽게 지켜보았으며, 에이즈로 죽어가는 환자를 껴안거나 지뢰밭 한가운데 서 있는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사랑과 선행 그리고 사랑의 가치에 대한 다이애나의 고집은 영국 왕실을 궁지로 몰아넣은 원인인 동시에 왕실의 재건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마찬가지로 그녀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다이애나가 전 세계 사람의 상상 속에 영원히 젊고 아름답고 활기찬 모습으로 살아 있음을 의미했다. 다이애나는 자신이 이룬 것이 아니라 이루려고 한 것 때문에 세기의 아이콘이 되었다.

 
 

미국이 낳은 무용계의 가장 큰 축복, 이사도라 던컨(dancer, 1878~1927)
속이 훤히 비치는 얇은 천으로 직접 옷을 만들어 입고 맨발로 무대에 올랐던 이사도라 던컨은 미국 현대무용의 창시자였으며, 또한 미국이 낳은 무용계의 가장 큰 축복이었다. 그녀는 틀에 박힌 전통적인 발레 양식에서 벗어나 영혼에서 바로 솟아 나온 듯한 움직임을 바탕으로 전혀 새로운 무용 이론을 발전시켰다. 순수한 기교와 ‘예쁜’ 동작을 거부한 던컨에게 자유란 창의적 활동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최고의 명제였다. 성적 욕구를 억압하던 시대에 자유연애를 주장한 이 매력적인 무용수는 매끈한 감색 머리와 유연하면서도 육감적인 몸매, 그리고 자유주의 사상가의 솔직함으로 수많은 유럽의 지성인과 귀족을 자신의 숭배자로 만들었다. 던컨의 조국은 이 쾌활한 성격의 무용수를 처음에는 별로 환영하지 않았다. 그러나 런던의 관객들은 브람스, 바그너에 대한 그녀의 해석에 열광했으며, 베를린에서는 ‘신 같은 이사도라’라는 찬사를 보냈다.

 

무명의 사교댄스 강사였던 던컨이 런던 안주인들의 약속자 명단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것은 1900년 멘델스존의 <웰컴 투 스프링>을 공연하면서부터다. 이 공연으로 교향곡 전체를 해석한 최초의 무용가가 된 던컨의 사생활은 그녀의 무대만큼 축복받지 못했다. 던컨은 평생 두 자녀를 두었는데, 1906년에 태어난 첫째 아이의 아버지인 배우 겸 무대 디자이너 고든 크레이그는 던컨에게 경제적으로 상당한 부담이 되었다. 그녀에게 둘째 아이를 갖게 한 백만장자 패리스 싱어와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게다가 그녀의 두 아이와 가정교사가 탄 차가 센 강에 빠져 모두 익사하는 불행한 사건이 발생했다. 세 번째 남편인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예세닌(러시아 출신의 시인으로, 아내를 학대하는 남자였다)은 자살로 생을 마감했고, 그녀 역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어쩌면 ‘극적’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수 있겠다. 은퇴한 뒤 코트다쥐르에서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그녀는 1927년 어느 화창한 가을날 “안녕, 친구들. 나는 영광을 찾아 떠나”라는 인사말을 남긴 채 홀연히 사라졌다.

 
 

우리의 영원한 피에로, 찰리 채플린(actor, 1889~1977)
채플린은 자신의 작품 가운데 특히 1925년에 제작한 고전 <황금광 시대>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랫동안 남기를 소망했다. 이 영화에는 우리 기억에 길이 남을 명장면들이 많이 등장했다. 특히 채플린의 트레이드마크 같은 등장인물 ‘리틀 트램프’가 저녁 식사를 위해 구두를 냄비에 끓인 다음 미식가처럼 오묘한 맛을 음미하면서 먹어 치우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이 장면은 희극과 비극이 미묘하게 조화를 이뤄 영화의 서정성을 끌어올렸다. 가진 것이라고는 지팡이 하나와 찌그러진 중산모, 그리고 진취적인 기상뿐이던 그는 개인적인 역경과 고통에도 굴복하지 않은 채 뒤뚱거리며 앞을 향해 걸어 나갔다. 채플린의 후기 작품은 정치적인 비평 때문에 충분히 평가받지 못했다. 의학적으로 정당한 사유가 있었는데도 보수주의자들은 그가 제1차 세계대전에 참가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분개했으며, 미국에서 40년간 면세 혜택을 누리고 살면서도 미국 시민이 되지 않았던 점과 1940년대에 그가 보였던 ‘공산주의 경향’에 대해서도 비난을 퍼부었다. 무엇보다 팬들은 채플린이 보여준 가난하지만 용기 있는 방랑자의 이미지와 실제로는 백만장자로 살아가는 그의 이미지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캔들, 정치적 문제, 까다로운 성격 때문에 채플린의 인기는 꺾이고 말았다. 그는 말년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조용히 은둔 생활을 즐겼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채플린이 영화 예술에 지대한 업적을 남겼다는 사실을 아무도 부정할 수 없었다. 채플린의 비범하고 고집스러운 천재적 자질은 감동적인 팬터마임인 <시티 라이트>와 사회적 공감을 불러일으킨 <모던 타임스>, 그리고 그가 가장 아끼는 영화 <황금광 시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영화들 때문에 이 자그마한 팬터마임의 거장은 쇼 비즈니스 역사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엔터테이너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20세기의 중요한 순간을 함께한 작은 영웅, 에드워드 R. 머로(journalist & reporter, 1908~1965)
한 비평가가 ‘신의 손위 형제(God’s Older Brother)’ 같은 목소리라고 표현했던 20세기의 목소리 주인공은 초창기 방송인 에드워드 R. 머로다. 침착하고 사려 깊으며 지적일 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완벽한’ 기자의 성품을 대변하는 그의 목소리는 라디오에서 텔레비전에 이르기까지 20세기의 중요한 역사적 순간들과 함께했다. 1938년 히틀러의 오스트리아 합병, 영국 본토 항공전, 진주만 공습, 소련과 미국 간 적대 관계 형성 등이 그의 목소리를 통해 전달되었다. 머로는 같은 세대의 기자 중에 가장 통찰력이 뛰어났으며, 가장 여러 곳을 돌아다닌 구술 역사가였다. 꾀가 많고 비참한 소식을 전하는 증인이던 그에 대해 시청자들은 사건을 전달하는 그의 진실성만큼이나 다각적인 면에서 사건을 취재하려는 그의 노력을 전적으로 신뢰했다.

 

런던 대공습 순간을 지붕 위에 서서 용감하고 생동감 있게 보도해 미국의 연합군 가담을 도모, ‘전쟁의 흐름’까지도 완전히 바꾸어놓는 데 일조한 이 남자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제안을 받아들여 30여 년간 일했던 CBS를 사임하고 미국 정보국의 책임자가 되었다. 머로가 마지막으로 맡은 일은 사회적으로 권위 있는 자리이기는 했지만, 우리가 기억하는 그의 모습과는 다르다. 우리가 기억하는 머로는 위험을 즐기고 사건 현장 한가운데 있어야 할 필요성을 인식한 용감한 청년 기자다. 나아가 불의를 폭로한 훌륭한 베테랑 기자이며, 사회를 바꾸기 위한 최선이자 취후의 희망이 ‘보도’라고 믿은 사람이다. 그는 전쟁을 보도하던 도중 흐느껴 운 적이 있을 정도로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머로는 자신이 하는 일의 핵심이 사실을 정확하게 보도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만큼 자제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는 완벽한 전달자였다. 그의 직업은 우리 시대의 중대한 문제에 대해 선동하는 것이 아니라 잘 보이도록 빛을 비추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미키 마우스에서 디즈니랜드까지, 월트 디즈니(enterpriser, 1901~1966)
전설의 미키 마우스는 1928년 뉴욕에서 로스앤젤레스로 가는 기차 안에서 탄생했다. 미키 마우스를 창조한 주인공은 자신이 만든 만화 작품인 <오스왈드 더 래빗>에 대한 판권을 잃은 후 사업을 다시 일으킬 방법을 모색하던 스물일곱 살의 청년이었다. 그는 자신의 작업대 근처에 놓인 쓰레기통 안에서 살던 들쥐들을 기억해냈다. 그리하여 월트 디즈니는 기차가 로스앤젤레스 역으로 들어서는 순간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캐릭터 중 하나를 탄생시켰다. 미키는 곧 대공황으로 지친 미국인에게 활기를 주는 상징이 되었다. 영화 <미친 비행기>에서 처음 선보인 이 장난꾸러기 캐릭터는 곧 전 세계에서 다양한 이름으로 사랑받게 되었고, 얼마 안 있어 미키 마우스 가족(미니 마우스, 도널드 덕, 구피 그리고 플루토)과 하늘을 나는 서커스 코끼리, 똑똑한 두더지, 수줍음 많은 파랑새를 포함한 변덕스러운 동물 일당이 탄생했다. 디즈니는 자신이 만들어낸 캐릭터가 생각하고 말하고 느끼기를 원했다. 그리고 치열한 경쟁과 파산의 고통을 겪은 끝에 애니메이션의 황금 시대를 열었다.

 

디즈니는 정밀한 묘사를 위해 아무리 사소한 것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대단한 집중력을 가진 각본 편집자였던 그는 몇 시간 동안 심사숙고하는 과정을 거친 다음에야 비로소 대사나 특수 효과에 대한 결정을 내렸다. 디즈니의 전기 작가들은 디즈니가 미키를 창조한 뒤 내린 결정 중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다. 바로 유성영화의 엄청난 가능성을 인식하고 1927년 <증기선 윌리호>에 소리를 덧입히기 시작한 점이다. 멜로디에 맞춰 유쾌하게 움직이는 미키와 영화는 대히트를 했고 기술적인 도약도 이뤄냈다. 화가가 그린 캐릭터를 의인화하는 디즈니의 능력은 1937년 최초의 장편 만화인 <백설 공주와 일곱 난쟁이>를 통해 새로운 영역에 도달했다. 3년의 제작 기간과 1백60만 달러에 달하는 제작비를 투자해 만든 <디즈니스 폴리>는 8백만 달러의 판매고를 기록했으며, 인물 애니메이션의 획기적인 사건으로 찬사를 받았다. 미국의 가정에 텔레비전이 보급되자 ‘월트 아저씨’는 29년 동안 TV 프로그램 <디즈니의 놀라운 세상>의 사회자로 출연하면서 일약 스타가 되었다. 평생 담배를 좋아한 그는 1966년 폐암으로 사망했다.

 
 

찰나를 포착한 시대의 눈, 앙리 카르티에-브레송(photographer, 1908~2004)
브레송은 35mm 라이카 카메라를 들고 ‘세계의 상처’를 찍는 다큐멘터리 작가로 전 세계를 누볐다. 그는 처음 카메라를 산 후로 찰나의 현실을 탐닉하는 스토커가 되었다. 우리의 일상에 갑자기 의미가 나타나는 순간, 아이러니와 연민과 기쁨이 영혼에 닿는 순간을 기록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사진의 아름다움이 예술의 관점에서 볼 때 충분하지 않다고 가정하더라도, 만약 사진술이 예술의 영역으로 정당한지를 묻는다면 이 겸손한 사진가의 작품이 그것을 증명해줄 것이다. 브레송의 사진을 ‘본다’는 것은 거기에 ‘있는 것’, 그리고 사진 속의 ‘순간’이 보여주는 그 시간의 일부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카메라를 자신의 가장 절친한 친구로 여기며 늘 몸에 지니고 다녔던 그는 ‘가장 절친한 친구’와 함께 스페인 내전과 조지 6세의 화려한 대관식을 목격했다. 또 독일에서는 강제수용소 해방 운동을, 중국에서는 마오쩌둥과 민족주의 국민당 간의 혁명적 투쟁을 기록했다.

 

1948년 1월 30일에는 인도에서 평화주의자 간디가 암살되기 바로 몇 분 전에 그의 초상화를 찍었고, 파리의 학생·노동자 혁명을 사진에 담았다. 원래 화가였던 브레송은 사진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보다 더 깊은 감각을 갖고 있었다. 그가 찍은 유명한 작품들인 마티스의 누드화를 감상하는 수녀나 나치 협력자를 고발하는 프랑스 여인은 아주 개인적인 모습들이지만 그 시대의 정신을 잘 잡아내고 있다. 그는 흑백 필름으로 수천 장에 달하는 사진을 찍었는데, 원판을 잘라내지 않는 것으로 피사체에 대한 존경을 표했다. 1947년 로버트 카파, 조지 로저와 함께 ‘매그넘 포토’를 설립했으며, 자신의 노력을 항상 오이겐 헬리겔의 <활쏘기의 선>과 비교했다. 궁수가 그러하듯이 특별한 기술을 배울 필요를 못 느꼈다는 것이다. 그는 모든 속임수를 내던지고 빛을 찾아 여행하며, 사람과의 ‘기본적인 연결’을 찾아 헤맸다. 그는 걸었다. 결코 뛰지 않았다.

 

 

격정적인 삶을 살다간 프리마돈나, 마리아 칼라스(opera singer, 1923~1977)
극작가 테렌스 맥낼리가 “노래하는 거대한 상어 같다”라고 표현했듯이, 마리아 칼라스는 극 중 소프라노로서 노래를 한 것이 아니라 라이벌들을 잘근잘근 씹어서 삼키는 듯했다. 전혀 힘들이지 않고도 울려 나오는 그녀의 풍부한 성량은 뛰어난 예술적 기교와 탁월한 음악적 표현력에 힘입어 더욱 빛을 발했다. 칼라스는 1947년 스물네 살의 나이로 베로나 프로덕션의 <라 조콘다>를 공연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2년 후 나이 많은 이탈리아 백만장자와 결혼한 칼라스는 남편의 사랑과 재력 덕분에 <트리스탄과 이졸데>, <투란도트> 같은 대작에서 노래하는 행운을 누렸다. 또 체중을 27kg이나 줄여 <아이다>의 네페르티티 왕비 역에서는 날씬하고 매혹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이다>는 칼라스와 그리스의 선박 왕 오나시스가 처음 만난 장소이기도 했다. 그 후 30년에 달하는 격동기 동안 까다롭고 당당한 이 여배우는 세계의 오페라 무대를 누비면서, 그녀의 요구 사항 앞에서 풀이 죽는 오페라하우스 매니저들의 목을 죄었다. 유명세 때문에 변덕이 더 심해진 칼라스는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는다고 느끼면 공연 중에도 무대에서 내려왔는데, 심지어 1958년에는 대통령이 지켜보는 중에도 공연을 중단했다.

 

1958년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감독과의 불화로 오페라단에서 쫓겨났고, 오나시스는 약물 중독에 빠진 그녀의 곁을 떠나 재클린 케네디에게 안착했다. 오나시스가 떠난 뒤, 그녀는 13개월 동안 고별 순회 공연에 올라 세 번째 남편 주세페 디 스테파노와 합동 공연을 펼쳤다. 그러나 두 사람의 목소리는 형편없었고, 당시 한 평론가는 “개들이 서로 바라보며 짖는 것 같다”고 혹평했다. 칼라스는 53세가 되던 해에 파리에서 눈을 감았다. 더는 노래를 부를 수 없었고 아무도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지만, 예술가로서 그녀의 전설적인 재능은 영원히 남았다. 수많은 음반에 담긴 불후의 목소리에 전 세계가 아직도 전율하고 있다.

 

 

 

한때는 ‘신’보다 위대했던 4인조 음악 천재들, 비틀스(singer, 1961~1974)
비틀스는 한마디로 20세기에 가장 영향력 있는 밴드였다. 멤버 모두 작곡을 해 리더가 없는 그룹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했고, 가장 먼저 4인조 밴드의 우수성을 알렸다. 수많은 사람들이 마치 주문처럼 “그들의 이름은 존, 폴, 조지 그리고 링고”라고 인용했지만 사실 그들은 개개인의 성격보다는 그룹 전체의 성격이 더 중요한 최초의 ‘그룹’이었다. 비틀스는 여러 요소로 구성된 하나의 밴드였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비틀스로 남을 것이다. 침울하고 반항적인 성격의 존 레넌은 1957년 영국 리버풀에서 폴 매카트니를 만났을 때, 말재주가 좋고 매력적인 이 왼손잡이 기타리스트의 재능을 알아보았다. 두 사람은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났으며, 그야말로 세련된 것과는 거리가 먼 촌뜨기들이었다. 이어 조지 해리슨과 링고 스타가 합류하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비틀스의 라인업이 완성됐다.

 

이 네 명의 음악 천재들은 영국에서 ‘작은’ 인기를 얻은 데 이어 1963년 미국의 텔레비전 프로그램 <에드 설리번 쇼>에 출연한 뒤 하룻밤 사이에 벼락 스타가 되었다. 조심스럽게 쌓아온 이미지만큼 멋지지는 않았지만 팬들은 순수한 노랫말이 시사하는 바를 꿰뚫어보았기 때문에 호소력은 그만큼 더 컸다. 비틀스 가발, 비틀스 부츠, 비틀스 영화, 심지어 비틀스 만화 쇼까지 생겨나면서 명실 공히 비틀스 마니아는 세계적인 현상이 되었다. 비틀스가 그토록 엄청난 인기를 누린 비결은 멤버 각자의 전문가적 자질이 조화롭게 균형을 이루었기 때문이리라. 매카트니의 취향이 묻어나는 곡에 레넌이 쓴 강력한 가사, 힌두 음악에 대한 해리슨의 열정과 도전, 비틀스의 패션 스타일을 만들었던 스타까지 그 누구도 그들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러나 어떤 일이든 끝이 있게 마련이고, 실제로 그들에게도 끝이 다가왔다. 시작이 그랬듯이 변호사, 회계사, 아첨꾼, 그리고 옛 동료들이 복잡하게 얽히면서 끝 또한 소란스러운 가운데 순식간에 다가왔다. 우정과 경쟁 사이에서 줄다리기했던 레넌과 매카트니는 진정한 경쟁 관계에 돌입했고, 각자의 음악 스타일을 발전시켰다. 1980년 레넌이 뉴욕에서 총격을 받아 40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비틀스가 다시 뭉치기를 바라던 올드 팬들의 희망은 영원히 물거품이 되었다.

 

 

 

출처 : 쵸이
글쓴이 : 쵸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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