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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ke a trekking

[스크랩] [해외트레킹] 파키스탄 카라코룸 발토로빙하

 
[해외트레킹] 파키스탄 카라코룸 발토로빙하
 
궁극의 트레킹 루트 곤도고로 고개를 넘다

곤도고로 고개(Gondogoro La)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것은 재작년 여름 산악인 김형주씨의 차라쿠사 등반대를 따라 파키스탄의 K7 지역으로 들어갔을 때였다. 하산 도중 사이초에서 우리와는 다른 방향에서 내려오는 외국인들은 만났는데, 바로 그 고개를 넘어오는 트레커들이었다. 그때는 관심이 없었지만 훈자에서 히말라야에 정통한 한 산악인으로부터 그 고개가 ‘궁극의 트레킹 루트’란 말을 듣고는 생각이 달라졌다. 이 나이에 나도 갈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사람 모으기가 쉽지 않았다. 파키스탄의 오지란 말만 듣고도 손을 내젓는 사람들이 많았다. 작년은 실패했다. 금년에도 함께 추진하던 사람이 갑작스러운 다리 부상으로 단념했는데 구세주가 나타났다.

여름 모험지를 찾고 있던 오지탐험의 고수이자 차라쿠사 원정대 일원이었던 김만수씨가 함께 가자고 나선 것이다. 결국 그의 주선으로 6명의 곤도고로라 트레킹대가 구성되었다. 그동안 여러 번 함께 트레킹했던 노장 양근수씨, 일산산악회의 이규현씨, 그리고 두 여성대원이었다. 팀의 이름은 분위기에 맞게 ‘와일드 트레커즈’로 정했다.


 

 ▲ 눈으로 덮인 곤도고로라.

와일드 트레커즈

7월24일 우리 일행은 타이항공 편으로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방콕에서 하루 묵고, 다음 날 밤 이슬라마바드 공항에 도착했다. 이번 트레킹을 책임진 액션트래블 파키스탄의 사장이면서 가이드인 아슈라프가 나와 있었다. 차라쿠사 원정대에서 알게 된 성실한 친구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파키스탄산악회 부회장 집으로 가서 규정에 따른 일종의 입산신고를 했다. 앞으로 겪어야 할 무수한 검문과 신고 등 복잡한 행정절차의 시작이었다. 검문소에 제출하는 허가서 사본만 14통이나 만들었다고 한다. 유독 K2 지역이 그렇다는데 내년부터는 간소화될 것이라고 한다.


▲ 석양을 받으며 기도를 하는 포터.
여기서 우리는 곤도고로라가 정상 부근에 생긴 크레바스 때문에 지난 2년 동안 폐쇄되었다가 바로 며칠 전 새로운 길이 개설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대통령이 지나간다고 교통이 통제된 길을 겨우 뚫고 들어간 공항에서 트레킹 기지인 스카르두행 비행기가 취소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이번 트레킹에서 우리가 겪은 일련의 시련 중에서 첫 번째에 불과했다.

산사태로 6시간 지체

우리는 즉시 이틀간의 스카르두행 버스 장정을 시작했다. 비행기로는 1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다. 출발이 늦었기 때문에 산허리를 끊어 만든 카라코룸 하이웨이를 달려 칠라스의 호텔에 도착한 것은 다음 날 오전 2시였다. 잠깐 눈을 붙이고 다시 출발했으나 얼마 가지 않아 큰 산사태를 만났다. 10분이면 뚫린다던 길이 6시간 뒤에야 겨우 뚫렸다. 우리는 밤 9시에야 스카르두의 호텔에 도착할 수 있었다.

스카르두에서 트레킹이 실질적으로 시작되는 아스콜리(3,040m)까지는 2대의 4륜구동 지프에 분승하여 갔다. 여기서 우리는 산사태로 생긴 첫 번째 블록(도로차단)을 만났다. 가이드는 15분만 걸어가면 다시 차를 탈 수 있다고 했지만, 그가 몰랐던 두 번째 블록이 있었다. 다리가 끊어져 있었다. 우리는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산허리의 모랫길을 1시간 동안 걸어야 했다.

폐차장에서 가져온 듯한 일제 4륜 구동차는 아슬아슬한 산길을 마구 달렸다. 오프로드를 했다는 한 대원은 그런 험로는 처음 보았다고 말했다. 그는 증거로 남기기 위해 사진을 찍으려고 했지만 흔들리는 차 속에서 카메라를 꺼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우리는 모두 녹초가 되어 첫 야영지에 도착했다.

7월29일 실질적인 트레킹이 시작되었다. 강변의 모래와 자갈길을 따라 줄라(3,180m)까지 올라가는 비교적 순탄한 길이었지만 작열하는 태양이 우리를 괴롭혔다. 온도계는 38℃를 가리켰다. 목적지 근처에서는 강을 건너가는 케이블이 끊어져 바로 눈앞에 야영지를 보면서도 1시간 이상 돌아가야 했다.

초열지옥 속의 강행군

다음날 파유(3,485m)까지 가는 길 역시 초열지옥 속의 강행군이었다. 점심도 그늘은커녕 풀 한 포기 없는 뜨거운 땅바닥에 앉아서 먹어야 했다. 나는 우산을 폈다. 선두와 후미가 벌어지고, 그 중간에 끼어 있던 나는 표지가 없는 갈림길에서 길을 잘못 들어 엉뚱한 곳으로 가고 있었다.

다행이 마주 오던 일단의 파키스탄 군인들을 만났다. 그들은 기진맥진한 나를 보고 안 되었던지 가던 길을 멈추고 나를 파유로 가는 길까지 데려다 주었다. 얼마나 고마웠던지. 자기들 구역에 들어왔다고 동포 관광객을 쏘아죽인 군인과는 너무나 달랐다.


▲ (왼쪽)우르드카스 야영장의 개머리 바위./(오른쪽)말은 빙하지대의 중요한 운반수단이다.
파유는 관광청 규정에 따라 트레커들이 하루 휴식을 하게 되어 있는 곳이다. 화장실을 비롯해서 세탁장이나 여러 가지 시설이 비교적 깨끗하게 관리되어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염소 한 마리를 잡았다. 우리뿐만 아니라 포터들에게도 먹여야 하는 것이다. 우리 팀은 가이드 등 스태프가 4명에 짐을 운반하는 수십 명의 포터로 구성되어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스페인팀을 만났다. 알고 보니 재작년 K7 지역에서 만났던 팀이라고 한다. 당시 우리 등반대와 그들 사이에 약간의 옥신각신이 있었다는데,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나는 모양이다. 몇몇 대원이 일사병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고, 헬리콥터를 타고 돌아가겠다는 사람까지 나왔지만 하루 동안의 휴식으로 상태가 호전되었다.

반가운 손님이 찾아 왔다. 가셔브룸2봉을 등반하려고 예정일보다 사흘을 더 버티다가 기상악화로 포기하고 돌아가던 전남대 등반대가 우리 텐트를 보고 들린 것이다.

한국인이 점령했다

8월1일, 우리는 호불체(3,930m)를 향해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다. 빙하지역에 들어서면서 한낮의 열기는 좀 식었지만 고도가 점점 올라가고, 얼음과 너덜지대 때문에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도중 가이드나 포터 없이 올라가고 있던 3명의 체코인들을 만났다. 그들은 호숫가에서 스프를 끓이고 있었는데 그 구수한 냄새가 그 동안 파키스탄 음식만 먹고 있던 우리를 자극했다.


▲ 곤도고로라 정상에서 기념촬영.
호불체에서 우르두카스(4,240m)는 짧지만 가파르다. 우리는 처음으로 노출된 빙하를 보았다.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다. 도중 우리는 중앙고등학교 100주년 기념 가셔브룸1봉 등반을 격려하기 위해 베이스캠프에 갔다가 돌아간다는 트레킹 대원들을 만났다. 그 무렵 김영미, 오은선, 고미영씨 등 대표적인 우리나라 여성 산악인과 경남산악연맹 등반대도 있었으므로 카라코룸 등반은 사실상 한국 사람들이 독차지한 셈이었다.

우리는 정오께 야영장에 도착하여 물개처럼 생긴 커다란 바위 아래 자리를 잡았다. 우르두카스는 시설을 제대로 갖춘 마지막 야영장이었다. K2와 브로드피크 등반 중 사망한 한국인 박영도, 허승관의 비명이 바위에 붙어 있었다. 바로 얼마 전에 브로드피크에서 죽은 것으로 보이는 블라도 플루리크란 사람의 급조된 금속 접시 비명도 있었다. 그리고 더 많은 수의 이름 없는 포터들의 무덤이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K2에서 한국인이 포함된 10여 명의 사망자가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다. K2는 높이가 8,611m로 에베레스트(8,848m)보다는 낮지만 난이도와 위험도는 훨씬 높아서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한 산악인은 히말라야가 지리산이라면 카라코람은 설악산이라고 하면서 같은 높이라도 1,000m는 더 보태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이 날 일사병으로 식욕을 잃은 여자 대원 한 명이 포기하고 하산길을 택했다. 

 

명산이 병풍처럼 둘러친 콩코르디아

8월3일, 5명으로 줄어든 우리는 고로1을 거쳐 고로2(4,400m)로 향했다. 본격적인 빙하지역이었다. 바닥은 시원했지만 한낮의 열기는 여전해서 최고 43℃를 기록했다. 8월4일 드디어 콩코르디아(4,720m)에 도착했다. 빤히 보이는 야영장이 실제로 가려면 몇 시간이 걸렸다.

콩코르디아가 눈과 얼음으로 덮여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나는 실망했다. 온통 바위와 돌뿐이었던 것이다. 5월경에 오면 눈에 덮인 콩코르디아를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바로 밑은 빙하이기 때문에 하룻밤 자고 나면 텐트 바닥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야영장의 위치도 오염 등의 이유로 2년마다 옮긴다고 한다.


▲ 알리 캠프를 향해 본격적인 빙하 트레킹이 시작되었다.
콩코르디아의 진가는 그 바닥이 아니라 주변에 있다. K2와 브로드피크 등 이름난 카라코룸의 명봉들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기 때문이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면 의자를 내놓고 하루 종일 이런 준봉들을 바라보면서도 시간이 가는 줄 모를 것이다.

다음 날 새벽 체력이 좋은 세 대원이 K2 베이스캠프로 출발했다. 이 날 하루 종일 비가 오락가락 내렸다. 그들은 어둑해져서야 한국인 3명을 포함한 K2 국제등반대 11명의 조난 상보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런 경황 중에도 그들은 철수 준비 중인 한국등반대로부터 식품을 얻어왔다. 덕분에 우리는 다음날 오래간만에 쌀밥과 시금치국 등 한식을 포식할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화장실

다음 날 모처럼 화창한 날씨였다. 그동안 좀처럼 제 모습을 보여주지 않던 K2와 브로드피크가 구름 한 점 없이 전신을 드러냈다. 우리는 마구 셔터를 눌렀다. K2 등반대를 철수시키는 헬리콥터가 분주히 날아다녔다. 가셔브룸 등반에 성공하고 돌아가는 한국등반대가 새카맣게 탄 얼굴로 우리 캠프에 들렸다.

▲ 우르두카스의 이름 없는 포터들의 묘지.
8월7일, 우리는 알리 캠프(4,955m)로 출발했다. 길은 비교적 평탄했지만 빙원 위를 걸어야 했고, 곳곳에 크레바스가 있었기 때문에 조심해야 했다. 빙산의 녹은 물이 폭포수처럼 흘렀다. 야영장은 빙원에서 조금 떨어진 언덕 위에 있었다. 온통 돌과 바위투성이였다. 구조대원 몇 명이 돌로 둘러싸고 비닐을 덮은 움막에서 살고 있었다.

우리들의 지친 모습을 본 가이드는 하루 더 쉬자고 말했다. 그 동안 자기는 곤도고로라에 가서 상황을 알아보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루를 그곳에서 머물렀다. 돌을 쌓아 만든 화장실도 있었는데 빙원을 내려다볼 수 있는, 세계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화장실이라고 할 만했다.

8월9일, 우리는 한밤중에 일어나 간단히 식사를 하고 출발했다. 눈과 얼음이 녹기 전에 곤도고로라를 넘어야 하기 때문이다. 바람이 없었고 춥지도 않아서 나는 우모복을 벗어버렸다. 우리는 온통 바위와 돌로 덮인 길을 헤드램프로 비추면서 천천히 걸었다.

눈에 덮인 곤도고로라(5,680m)는 내게는 거의 직벽처럼 보였다. 새로 만들었다는 길은 인터넷에서 보았던 그런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젊은 대원들은 로프를 잡고 올라갔다. 나는 구조대원의 도움으로 하네스를 하고 주마를 사용하면서 올라갔다. 가이드는 아예 사진을 찍을 생각을 하지 말고, 절대로 위를 올려다보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나는 그저 한 걸음 한 걸음 발밑만 보면서 올라갔다.

머리를 들어보니 정상이었다. 정상은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려 주었다. 10시쯤 된 것 같았다. 나는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사진을 몇 장 찍었다.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었다. 대단한 사람들이다. 기온이 올라가고 있었기 때문에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하산길은 장난이 아니었다. 경사도 급했지만 모래와 너덜로 덮여 무척 위험했다. 그 밑에는 얼음이었다. 로프가 깔려 있었지만 나는 몇 번이나 미끄러졌다. 바지가 찢어지고 다리와 엉덩이가 온통 찰과상이었다. 잘못하면 까마득한 계곡 아래로 추락할 수 있었다. 얼음이 녹으면서 돌이 굴러 떨어지기 시작했다.

위험지역은 계속 나타났다. 야영지 후스팡(4,500m)이 빤히 보였지만 좀처럼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나는 기진맥진해 한 대원의 도움으로 겨우 텐트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 날 다른 대원들은 15시간 이내로 산행을 마쳤는데 나는 그보다 3시간은 더 걸렸던 것 같다.


역시 궁극의 트레킹 코스

스틱을 보니 첫 단이 휘고 촉이 망가져 있었다. 멀쩡했던 등산화의 바닥에도 구멍이 나 있었다. 무릎이 부어올라 굽히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나는 궁극의 트레킹코스를 넘었다. 지금까지 곤도고로라를 넘은 연장자 기록은 84세라고 한다. 하지만 새 길로 넘은 사람 중에서는 72세인 내가 최연장자일지 모른다고 멋쩍은 생각도 했다.

8월10일 사이초(3,500m)로 내려가는 길도 편하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거대한 빙하지대를 걸어가야 했다. 구름이 짙게 깔리기 시작하자 가이드는 비가 쏟아지기 전에 이 지역을 통과해야 한다고 재촉하면서 앞으로 내뺐다. 다행이 비는 우리가 빙하지역을 벗어난 다음에 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말이 풀을 뜯는 초원이 나타났고, 곧 이어 수풀도 보이기 시작했다.

사이초 야영장에는 간단한 식당도 있었다. 2년 전과 똑 같은 모습이었고, 주인도 그대로였다. 여러 나라의 트레커들이 식당에 모여 그동안의 무용담을 나누고 있었다. K2에서 조난한 등반대에 참가했던 네팔인 가이드도 있었다.
8월11일 우리는 사이초를 떠나 강가를 따라 후세(3,300m)로 향했다. 4시간 정도 걸었을까. 낯익은 마을이 나타났다.

모두들 야영장에 모여 있었다. 호불체에서 내려갔던 대원도 그곳에 있었다. 우리는 서둘러 지프에 짐을 싣고 스카르두로 향했다. 다음 날 우리는 쓰지 않은 예비일을 이용하여 데오사이 국립공원, 훈자, 쿤제랍패스, 탁실라 등을 돌아본 다음 19일 밤 서울로 돌아왔다.

정보를 충분히 입수했다고 생각하고 시작한 트레킹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전혀 달랐다. 모든 여건이 열악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 코스를 권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한 가지 동의한 것이 있다. 그것은 그곳이 궁극의 트레킹 코스라는 사실이다.


월간산/ 글·사진 이남규 전 조선일보 외신부장

 

 

 

 
출처 : silkro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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