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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TV방송

[스크랩] 참된 방송으로 가는 길

                                          참된 방송으로 가는 길

                     

                                                                         이상희 (iTV희망조합원. 전 iTV아나운서)

       

 

잊혀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 것.
시작했던 그때로 돌아갈 것.
아무것도 아니었던 때, 신인이었던 때로 돌아갈 것.
늘 신인이라는 것을 명심할 것. 단지 자신이 되어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을 슬퍼할 것.

- 구본형의 <<일상의 황홀>>중에서 -

시간적 효율보다는 비용을 먼저 생각하게 되는 ‘해직자’의 생활. 목적지까지 도달하는 데 몇 번을 갈아타고, 몇 시간이 걸리더라도 주요 이동수단으로 자리잡은 지하철이지만, 아직은 낯선 역 이름과 익숙하지 않은 환승장에 어색한 몸짓으로 서있던 어느 날, 모처럼 마음을 움직이는 글을 만났다.

오랜만에 모는 차 안, 정시 라디오 뉴스를 듣는다. 현장을 떠나있는 사이,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는 지 궁금해서다. 대충 얼굴은 아는 타사 후배의 목소리. 완급이 마음에 들지 않고, 어조가 어색하고, 예독이 부족하다. 허겁지겁 뉴스 원고를 집어들고 스튜디오에 급하게 들어왔구나 싶다. 못마땅하다. 채널을 돌린다. 이쯤되면 뉴스가 궁금해서가 아니다. 기어이 다른 채널의 뉴스를 찾아 듣는다. 차분하고 정돈된, 나지막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 호흡도, 띄어읽기도 정확하고, 진행속도도 적당하다. 마음이 놓이고 그제야 내용이 들린다. 그 짧은 5분동안 이해와 전달의 중요성을 생각하고, ‘나라면 이렇게 할 텐데’하며 진행자의 시각에서 뉴스를 분석한다.

그러다 깨닫는다. 아직 ‘현장’을 떠나지 않았음을. 못마땅함은 잠시 접어둔 방송에 대한 아쉬움의 반증이었음을.

2005년 1월 1일부터 iTV경인방송은 없다. 매서운 겨울바람이 휘몰아치던 2004년의 마지막 날, 회사에 발도 들여놓지 못한 채 굳게 잠긴 철문 앞에서, 방송이 정파되는 순간을 지켜보며 서러움이 북받쳤던 이유는, 오직 하나, 시청자가 주인이지 못했던 방송이었기에 이 같은 순간을 맞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시청자들께 고개숙여 사죄했다. 우리가 더 일찍 좋은 방송을 만들었다면, 1300만 경인지역 시청자의 볼 권리는 지켜낼 수 있었기에.

제대로 된 방송을 하고 싶었다. 프로그램을 ‘찍어내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내고 싶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올바른 자부심을 지키고, 스스로의 자아에 대해 ‘그렇다’라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양심이라 했던가. 최선을 다해 양심에 부끄럽지 않은 방송을 하고 싶었다. 시청자의 삶 속에서 살아 숨쉬는, 의미 있는 방송을 하고 싶었다. 생존의 차원을 넘어 존재의 가치가 달려있었다. 그렇기에 방송위원회의 재허가 추천거부 결정이 갖는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방송의 공공성과 공익성은 지켜져야 한다는 대의가 받아들여진 것이라고, 존중받아야 한다고 여겼다.

직장폐쇄. 구사대. 뉴스를 하며 익숙했지만 나와는 상관없다고 지나쳤던 단어들. 객관성, 중립성, 심지어 공정성이라는 잣대로 가치 판단을 유보했던 일들이 이외에도 얼마나 많았는지를 생각한다. 내 일터에서 벌어진 일들을 목도하기 전과 후의 삶은 다를 수밖에 없음을 이제는 안다. 극한 상황에 다다랐을 때에 사람됨이 빛나고 긍지와 진정성은 고통과 희생이 따른다는 것도 겪었기에 믿는다.

방송 언론동지들의 소중한 성금으로 마련된 ‘희망조합’ 사무실. 조금이라도 아끼겠다고 작은 난로 하나만 켠 채 곱은 손을 녹이며 밤새 일하는 집행부. 한겨울 삭풍을 온몸으로 견뎌내며 서명작업에 몰두하는 조합원들. 무노무임이라는 고통스런 과정에서도 옳은 길을 가라며 지지해준 가족들.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고사리 손으로 금요일 촛불집회를 지키는 어린 자녀들. 실업급여를 받으면서도 퇴직금의 절반은 새로운 방송을 위한 기금으로 조성하자고 기꺼이 결의한 내 동료들. 그리고 우리를 격려하고 동참하는 시청자들이 있다.

이제까지 걸어온 길을 되짚어본다.
그동안 나는 얼마나 뜨겁고 치열하게 방송을 해왔던가. 새삼 방송을 대하기가 두려운 것도 이 때문이지만 그렇기에 우리가 앞으로 하게 될 방송은 조금은 더 참되고 진실한 방송으로 거듭날 것이라고 기대한다. 물론 결코 쉽지 않은 길일 것이다. 지금보다 더 힘들고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반드시 이루어내야 하는 길이기에 우리는 당당하게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것이다. 

< 언론노보 395호 2005년 1월 26일 수요일 4면>


출처 : 희망의 새 방송을 준비하는 사람들
글쓴이 : 파도소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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