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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스크랩] 서양 최초의 실크로드 탐험가 오렐 스타인

모래바람 속 동양의 신비 드러낸 2만5000마일 대장정
권삼윤 문명비평가 tumida@hanmail.net

서방에 실크로드를 알린 최초의 탐험가이자 고고학자, 지리학자인 오렐 스타인. 그는 세 차례에 걸친 실크로드 탐험으로 명성과 부, 그리고 동양의 값진 문화재를 얻었다. 중국 둔황에 있던 세계 최고(最古)의 금강경 목판본도 그의 전유물 중 하나다. ‘보물 사냥꾼’ ‘실크로드의 악마’로 악명을 날리기도 했지만, 그는 분명 위대한 탐험가이자, 실크로드의 진정한 문화적 가치를 세계에 알린 전도사였다.

옛 간다라 땅에 속하는 스와트 지역. 이곳에는 아직도 그 시대에 세워진 스투파(불탑)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인류사에서 본격적인 여행은 대규모 병력과 이들을 지원하는 민간인이 대거 장거리 이동을 감행한 십자군전쟁에서 비롯됐다. ‘호텔(hotel)’ ‘병원(hospital)’ ‘환대(hospitality)’ 같은 용어가 서구사회에서 쓰이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다. 그게 첫 번째 여행문화 발전기라면 두 번째 시기는 신대륙을 발견한 직후이고, 세 번째는 19세기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를 무대로 고고학적 탐사 붐이 일어난 때라 할 수 있다.

여행은 미지의 세계를 찾아가는 노정이자 위험한 도전이다. 그만큼 거기에는 수많은 위험과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다. 그걸 이겨낼 길은 치밀한 준비와 열정밖에 없다. 열정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힘이다.

헝가리 출신으로 40대 초반에 영국인으로 귀화한 마크 오렐 스타인(Marc Aurel Stein·1862~1943)이 바로 그 열정으로 가득 찬 인물이다. 그는 모두 여덟 차례에 걸쳐 세계를 탐험했다. 그가 다닌 길의 거리는 2만5000마일에 육박할 것으로 추산된다. 그가 주로 탐험한 지역은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 일대. 그런 까닭에 ‘보물 사냥꾼’ ‘실크로드의 악마’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이 붙었지만 그는 분명 위대한 여행가였다.

스타인은 1862년 11월26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유대인 집안의 늦둥이로 태어났다. 누나는 그보다 스물한 살, 형은 열아홉 살이나 많았다. 덕분에 가족 모두에게서 지극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유대인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쉽지 않던 당시 동유럽의 분위기상 그의 집안은 기독교로 개종해 교회를 다녔다. 이런저런 이유로 그는 어린 나이에 외국 유학의 길을 택한다. 이런 배경은 그가 탐험가로 대성하는 원동력이 됐다.

스타인은 소년 시절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더 대왕을 흠모했다. 그에게 영웅 같은 존재인 대왕의 원정길을 그대로 밟아보고 싶은 욕망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생애의 대부분을 그때 품은 꿈을 실현하는 데 보냈다. 탐험 과정에서 대왕의 원정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인 여러 현장을 확인했고, 80세에 떠난 페르시아 대사막을 가로지르는 생애 최후의 답사 때는 원정군이 피로에 지쳐 붕괴 직전에 이르자 대왕이 페르시아로 퇴각하던 길을 따라 걸었다.

스타인은 열 살 때 독일의 드레스덴으로 건너갔다. 5년 뒤에는 대학을 위해 김나지움(독일의 중등교육기관)에 들어가 동양학을 배웠다. 그런 다음 빈 대학, 라이프치히 대학, 튀빙겐 대학 등을 옮겨다니며 동양학에 매진했다. 여기서 말하는 동양학이란 서아시아·중앙아시아의 역사와 그곳의 고대 언어에 관한 학문을 뜻한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스타인은 그리스어, 라틴어, 산스크리트어, 프랑스어, 영어, 페르시아어를 능숙하게 구사하게 됐다. 21세 때엔 튀빙겐 대학에서 ‘고대 페르시아의 종교철학’이란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장(玄奬)과 마르코 폴로가 스승

이듬해인 1884년 스타인은 학자의 길을 걷기 위해 헝가리 정부의 장학금을 받아 영국 유학을 떠났다. 대영박물관 근처에 숙소를 잡은 그는 동인도회사로 찾아가 사서인 라인홀트 로스트를 만났다.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에 관한 희귀한 자료를 보고 싶었던 것이다. 곧 오리엔탈 칼리지에 입학했고, 알렉산더 대왕을 깊이 알고자 그리스·로마사에 몰두했다. 이어서 페르시아·인도의 고대 언어와 역사 연구에 진력했다.

그 시절 스타인은 위대한 여행가 두 사람을 마음속의 스승으로 받아들였다. 한 사람은 7세기 중국에 나도는 불경과 교리에 오류가 많다는 사실을 알고 불경이 처음 씌어진 곳으로 들어가 불교의 진수를 몸소 체득하고자 인도를 찾았던 당나라의 고승 현장(玄奬)이다. 현장은 17년(627~643)간 인도에 머물며 방방곡곡을 여행했다. 그의 ‘대당서역기’는 그때의 일을 기록한 여행기로 실크로드를 세상에 처음 알린 정보원이다. 스타인은 이 책을 탐험하는 내내 지니고 다니며 길잡이로 삼았다.

또 한 사람의 스승은 13세기 후반의 베니스 상인 마르코 폴로다. 폴로는 스타인이 꿈에 그리던 실크로드의 거의 모든 코스를 몸소 거쳐간 인물이 아니던가. 스타인은 두 스승을 통해 앞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결론은 고대와 근대, 동양과 서양, 그리고 보편적이고도 국제적인 불교와 국제 교역로인 실크로드를 연결하자는 것이었다.

탐험 중 측량대 앞에 선 스타인(대영박물관 자료)

어느 정도 학문적 성취를 이룬 스타인은 1887년 말, 증기선 ‘엘렉트라호’를 타고 개통된 지 얼마 안 된 수에즈운하를 통과해 인도로 향했다. 그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인도에 도착해 자리잡은 곳은 라호르. 지금은 파키스탄에 속하나 당시는 영국령 인도 땅이었다. 행정은 물론 전략상으로나 상업상의 중요성이 부각돼 철도 교통의 중심지로 떠오른 라호르에서 그는 교육 관련 일을 보면서 탐험에 필요한 것을 준비했다. 그는 특히 그리스의 영향을 받은 초기 불교 미술에 관심이 많았다.

알렉산더 대왕과 현장이 그를 움직였다. 1898년 9월, 그는 자신의 미래를 결정짓게 될 신청서를 작성해 인도 정부에 제출했다. 중국령 투르케스탄에 속하는 호탄(Khotan·和田)과 그 주변의 고대 유적을 탐사하기 위한 탐험 계획서였다. 중국령 투르케스탄이란 지금의 신장(新疆) 위구르 자치구를 말한다. 1899년 2월 그가 쓴 한 서신에는 “중국령 투르케스탄으로 떠나는 고고학 연구여행은 1897년 이래 내가 꿈꾸어오던 것”이라는 구절이 있다.

드디어 실크로드로

인도 정부의 허락이 떨어지고 마음의 준비도 끝나자 6개월의 하기휴가를 신청했다. 처음엔 그도 그 기간 안에 돌아올 수 있을 거라 믿었다. 37세 때인 1900년 5월31일, 스타인은 드디어 실크로드 탐험 길에 올랐다. 그는 그 길에서 현장법사의 발자취를 찾고 싶었다.

당시 실크로드 지역 대부분은 1644년 명(明)을 꺾고 중국대륙을 차지한 청(淸)의 손에 들어간 상태였다. 1900년대에 접어들면서 이 지역에 대한 청의 지배권이 느슨해졌다. 서구 제국주의자들이 베이징, 상하이, 난징, 홍콩, 칭다오 등지에서 목을 조여왔기 때문이다. 그러자 투르케스탄 지역에서 오래 전부터 살아온 무슬림이 교역을 장악하고 독립운동과 무장봉기가 일어나는 등 혼란이 그치지 않았다. 그만큼 스타인 일행이 예기치 않은 일에 말려들 위험성이 컸다.

카슈미르의 스리나가르를 출발한 스타인 곁에는 지도 작성과 위치 확인을 도와줄 잠신이라는 측량기사와 라지프트족 출신의 요리사 겸 잡역부 5명, 다수의 인부, 그리고 텐트와 식료품, 도구 등을 운반하는 16필의 조랑말이 있었다.

첫날은 날씨도 쾌적하고 발걸음도 가벼웠다. 일행은 대체로 도보 행군을 할 계획이었다. 달리 마땅한 교통수단도 없었지만 자연과 친해지는 데 그보다 더 나은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카슈미르를 지나 표고 3000m 지점에 이르자 소나무숲으로 둘러싸인 좁은 평지가 나타났다. 눈이 녹아 생긴 습지의 바닥에는 고산식물이 꽃을 피웠고 띄엄띄엄 오두막집도 보였다. 가면 갈수록 눈길은 더욱 깊어갔다. 적설이 상당했다.

스타인은 맞딱뜨리는 마을마다 들러 그곳 사람들의 행동양식과 사용 언어를 관찰했다. 6월8일에는 3300m가 넘는 고개를 지나 인더스 강 상류를 향해 전진했다. 그때 그는 일기에다 “웅대한 인더스 강의 흐름을 보았다. 북으로는 준봉이 겹겹이 이어져 있다”고 썼다.

그곳에 ‘부즈카시’라고 부르는 부족이 살고 있었는데 마상경기를 즐겼다. 스타인 일행은 거기서 길기트 계곡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오늘날 지도에 보면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의 북부 국경지대로 그 남쪽에 초기 간다라 문명이 꽃핀 스와트란 곳이 자리잡고 있다.

길기트에선 현지 정부본부에서 내준 쾌적한 방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그곳은 영국령이던 인도의 최북단 국경초소였다. 그 다음으로 방문한 훈자 마을에서도 스타인은 촌장의 환대를 받았다. 훈자의 중심지구인 발티트 성은 절벽 위에서 위풍당당한 자태를 뽐냈고, 그 아래로 과수원과 정원이 펼쳐졌다. 촌장은 그 한쪽 공터에서 부즈카시 경기를 벌여 스타인 일행을 즐겁게 해줬다. 일행이 떠나려 하자 촌장은 파미르 고원의 지형을 잘 아는 두 명의 안내자와 화물 수송을 도와줄 인부 6명을 붙여주었다.

영국의 최후 방어선 아프가니스탄

스타인 일행은 6월24일, 1마일(1609m) 정도 되는 빙하를 어렵사리 건넜다. 그곳을 지나자 이번에는 거의 수직에 가까운 벼랑이 일행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걸 피하려고 키리크 고개로 향하다가 눈 덮인 험준한 봉우리를 만났다. 스타인은 그곳이 옥서스, 인더스, 야르칸트의 세 강으로 갈라지는 분수령이라고 생각했다. 표고는 4750m.

탐험조사는 거기서부터 시작됐다. 조건은 양호했다. 스타인은 측량기사를 대동하고 4800m가 넘는 산 정상으로 올라가 지형을 살폈다. 일행은 초지가 있는 곳에서 이틀을 보냈다. 다음 코스는 ‘세계의 지붕’인 파미르 고원. 그곳에 이르자 일행은 좀처럼 나아가지 못했다. 7월15일자 그의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옛날 박트리아 왕국의 수도이던 발흐(Balkh)에 남아 있는 15세기 때의 이슬람 사원. 발흐는 지금 아프가니스탄령이다.

“밤새 비와 눈이 내렸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에는 안개비가 계곡을 온통 뒤덮고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것은 텐트 속에서 기록하거나 편지를 쓰는 일이었다.”

날씨가 맑게 개 더 높은 곳에 오르자 호흡하기가 힘들었다. 고산병에 강한 현지인을 데리고 온 게 큰 도움이 됐다. 훈자족 인부들 덕분에 체력을 가다듬고 얼마간 눈 속 행군을 할 수 있었다. 일이 끝나자 스타인은 안내자와 인부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고액의 보수를 받은 그들은 기뻐하며 돌아갔다.

스타인은 어려운 고비를 몇 차례 넘기고 7월29일 드디어 중간 기착지인 카슈가르에 닿을 수 있었다. 현지 영국영사 조지 매카트니 부부가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그들은 초면이었지만 서로 잘 통했다. 매카트니는 어머니가 중국인이라 중국어에 능통한데다 그들의 관습과 사고방식에 정통하고 중국 관리들과도 면식이 넓었으니 스타인으로서는 여간 반가운 게 아니었다.

매카트니가 인도를 찾은 것은 1887년, 그러니까 스타인이 인도로 떠난 해였다. 그는 중국에서 영사직을 얻고 싶었으나 줄이 없어서인지 이뤄지지 않자 미얀마 치안판사의 중국어 통역인으로 인도를 찾았다. 그로부터 몇 년 뒤 그는 카슈가르의 행정관이 됐고 도합 28년을 그곳에 머물렀다.

오아시스 여관 ‘캐러밴 세라’

당시 중앙아시아 지역에 대한 영국의 고민은 러시아 문제였다. 러시아가 신장 최서단의 오아시스를 탈취하고 거기서 인도로 통하는 군용도로를 자기들의 관리 하에 두고자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국은 그곳이 아프가니스탄의 손에 그대로 있기를 바랐다. 대영제국의 최후 방어선이 아프가니스탄이기 때문이다. 스타인은 서구인에 대한 중국인의 적의와 반감이 대단하다고 들었지만 매카트니를 만나보니 경계해야 할 대상은 반외세를 주장하는 중국의 의화단원(義和團員)이 아니라 은근 슬쩍 위협해오는 러시아인이란 사실을 알게 됐다.

매카트니가 스타인이 카슈가르에 머무는 동안 지내라고 ‘티니베크’라는 가옥을 강변에 지어주었는데, 그 집의 발코니에 서면 강은 물론 밭과 정원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비가 그치고 하늘이 투명하게 열리는 날이면 멀리 흰 눈을 뒤집어쓴 산이 눈에 들어왔다.

스타인이 티니베크에 들어간 것은 7월31일. 두 달에 걸쳐 흰눈 덮인 산속을 행군한 뒤라 휴식이 필요한 터였다. 그는 그곳에서 피로를 풀면서 마음의 평정을 얻었고, 무엇보다 매카트니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했다. 그와 함께 중국의 역사와 고대 중국의 순례자, 초기 유럽인 여행가들의 기록도 살펴봤다.

하지만 스타인의 등장으로 카슈가르에 긴장이 감돌았다. 러시아측에서 그를 스파이로 봤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오해를 풀어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매카트니는 그들에게 “스타인은 고고학자이며, 이슬람 전래 이전 한·당대의 문화유적을 조사하기 위해 투르케스탄을 찾았다”고 해명했다.

스타인은 대개 오전에는 마드라사(이슬람 학교)의 권위자들을 만나 투르크어 경전을 배우고, 오후에는 촬영한 사진을 암실에서 현상하면서 보냈다. 때로는 일과 연구를 중단하고 중국인 관리들을 만나기도 했다. 예정된 탐험의 목적을 그들에게 알리고 또 도움을 얻자는 생각에서였다. 그런 과정에서 자연스레 중국인을 대할 때 지켜야 할 예의를 배웠다.

카슈가르에서 5주일 남짓 머물면서 몸과 마음의 원기를 되찾은 그는 9월4일 다시 길을 나섰다. 나무와 관목이 자라지 않는 불모의 회색 땅을 오랫동안 걷기도 했다. 그러다 중국령 투르케스탄의 상업 중심지로 한때 번성했던 야르칸트에 닿았다. 일행을 맞이한 현지 인도 상인이 매카트니가 마련해준 숙소로 안내했다.

10월2일에는 사막 길로 접어들었다. 그런데 길 위에 막대기가 아주 촘촘하게 세워져 있었다. 그는 여행자가 야간이나 모래바람이 불어 시야가 좋지 않더라도 길을 잃지 말라고 그렇게 해놓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 곳에도 오아시스는 있었고, 그곳을 지나던 여행자나 캐러밴은 오아시스에 세워진 ‘캐러밴 세라’라고 부르는 여관에서 물과 먹을 것과 잠자리를 얻었다. 우편 취급소에서는 말을 구했으며, 업무 통신문을 보낼 수 있었다.

사막이라 길은 여전히 모래에 덮여 있었으나 일행은 계속 전진해 호탄 지역에서 두 번째로 중요하다는 카라카슈(黑玉河)에 도착했다. 설마 했는데 사막 한가운데인 그곳에 실제로 강이 흐르고 있었다. 일행이 묵은 호상(豪商)의 집은 방이 미로처럼 이어졌고 조명과 환기가 엉망이었다. 뜰에는 관목이 자라고 있었으나 오랫동안 손질하지 않아 폐허처럼 보였다.

 

길기트에선 폴로 경기의 일종인 부즈카시가 자주 열린다.
둔황 막고굴에 남아 있는 불상 조각
둔황 석굴에 프레스코 화법으로 그려진 비천상

불교문화권에 꽃핀 인도문화

10월2일 카슈가르에서 500km 떨어진 호탄에 당도했다. 고대 불교문화의 중심지인 호탄은 스타인이 이번 여행에서 특히 중점을 둔 곳이었다. 그곳에서 호탄과 고대 인도와의 관계를 구명하고자 했으나 영국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인 데다 일행 중 중국어를 아는 자가 없었고, 무엇보다 사막 속의 작은 마을이라 무슨 일이 생기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호탄은 위룬카슈(白玉河)와 카라카슈 사이에 있어 일찍부터 땅이 비옥하고 기후가 온화해 서역 최대의 오아시스 왕국으로 발돋움했다. 비단과 면화, 모직물, 옥의 거래가 활발했던 이곳을 지나며 마르코 폴로는 “이곳은 없는 것 없이 풍족하다”고 ‘동방견문록’에 기록해 놓았다. 호탄은 또 뽕나무 씨앗이 중국으로 전래된 곳으로도 유명하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호탄 왕실로 시집 온 서역의 공주가 머리핀 속에 숨겨서 가져왔다는 것. 스타인은 이곳에서 카슈(玉河)의 원류에 대한 지리학적 조사를 했고, 일대의 유적에서 고문서와 고대 화폐, 조각을 다수 발견했다.

스타인은 고대 호탄국의 유적지인 요트칸, 라와크, 단단위리크, 카타리크 등을 모두 둘러보았다. 단단위리크(‘상아의 거리’란 뜻)에서 발굴한 장식 벽화와 부조들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스 미술의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는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는 호탄지역이 불교문화권이 아니라 인도문화권이었음을 확신했다. 그것은 새로운 발견이었다.

후일 밝혀진 사실이지만 호탄은 원래 불교문화권이 아니었다. 카슈미르 이북에 소재한 힌두문화의 최북단 기지였다. 인도 상인들이 카슈미르에서 길을 따라 북상해 교역을 하면서 자연스레 그렇게 됐던 것이다.

스타인은 단단위리크에서 3주를 보낸 후 그곳에서 300km 떨어진 니야로 향했다. 그곳의 주인은 다름 아닌 모래였다. 사람은 그 배경에 지나지 않았다. 이따금씩 오아시스 마을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니야에선 기원전 105년에 씌어진 것으로 보이는 목간(木簡) 100점이 발견됐다. 고대 인도 언어로 일상사를 기록한 것이었다. 인도 문서로 그보다 앞선 것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의 발견은 그만큼 대단한 것이다. 또 그것으로도 그 지역은 기원전 2세기경부터 인도인이 지배했다는 사실이 증명됐다.

다음해인 1901년 1월말 호탄을 거쳐 5월12일 카슈가르로 되돌아갔다. 그는 그곳에서 출발지 스리나가르로 가지 않고 대륙을 횡단해 런던으로 갔다. 그럴 경우 30일 정도 여행 기간을 줄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스리나가르를 출발한 지 꼭 1년 만의 일이었다.

은자의 동굴 ‘천불동’

1901년 7월2일 런던에 도착한 스타인은 그가 보낸 수집품을 확인하고 우선 대영박물관에 예치했다. 그렇게 스타인의 제1차 중앙아시아 탐험은 성공리에 끝났다. 그리고 2년 뒤 탐험 보고서 ‘모래에 묻힌 유적’을 발표했다.

성공적인 탐험은 그를 일약 유명인사로 만들었다. 학자들 사이에선 ‘영웅’이란 말도 들렸다. 학문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약속된 미래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영국의 지배하에 있던 인도 정부는 그의 다음 탐험에 재정적으로 지원할 것을 약속했다. 1904년 스타인은 영국 시민이 됐다. 귀화한 것이다.

스타인의 1차 탐험은 2000년의 역사를 가진 실크로드의 문화적 가치를 서구 사회에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02년, 그러니까 스타인이 귀국한 지 두 달 뒤 독일과 일본도 중국의 보물을 손에 넣기 위해 실크로드 탐험에 경쟁적으로 뛰어들었다.

제2차 중앙아시아 탐험은 1906년 4월20일 페샤와르를 떠남으로써 시작됐다. 그의 목표는 러우란(樓蘭)과 둔황(敦煌)이었다. 그는 이 지역을 탐험한 최초의 고고학자가 되고 싶었다. 6월8일 카슈가르에 도착했다. 거기서 2주간 머물다 호탄으로 들어가 위룬카슈와 쿤룬(崑崙)산맥에 대한 지리학적 조사를 벌였다.

 

카불의 외국인 묘지에 있는 스타인의 무덤.
1차 탐험을 끝낸 뒤에 펴낸 보고서 ‘모래에 묻힌 유적’의 표지.

둔황에 도착한 것은 1907년 3월12일. 먼저 천불동(千佛洞)을 둘러보았다. 그런 다음 위먼관(玉門關)의 위치를 확인하고자 주변 일대를 뒤지다 5월15일 둔황으로 귀환했다. 본격적인 천불동 조사에 들어간 것은 그로부터 1주일 후. 천불동을 첫 대면한 당시의 느낌을 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거의 수직으로 깎아 세운 회식단애는 무질서하게 파놓은 동굴 같아 거대한 벌집을 연상케 했다. 그 광경을 보고 있으니 기묘하게도 먼 옛날 초기 이탈리아 회화에 등장하는 은자의 동굴이 떠올랐다. 환상은 오랫동안 지속됐다. 천불동에 머문다는 것은 곧 불도를 구하는 일일 터. 그곳에는 불타의 상이 모셔져 있었다.”

그는 단단위리크의 인도색 짙은 문화와는 다른 중국식 문화에 깊이 빠져들었다. 6월13일, 그곳 관리인인 왕원록을 만났다. 그를 흔히 ‘왕도사(王道士)’로 불렀다. 작업은 천천히 진행됐다. 상대가 눈치 채지 않도록.

왕도사가 자리를 비운 사이 젊은 승려에게 접근해 불화와 불경에 대해 성스러운 태도를 보여줬다. 그가 이것저것 내보이자 승려는 사의를 표했고 마지막에는 3루피 정도의 말발굽형 은화 한 닢을 건네자 젊은 승려는 감격했다. 처음부터 큰돈을 들이지 않고 상대방의 마음부터 사고자 한 것이다. 왕도사에게도 이런 자세로 대했다.

스타인은 결국 은화 몇 닢으로 왕도사에게서 채색벽화와 불경 등을 샀다. 거기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강경 목판본도 들어 있었다. 문서는 한어와 산스크리트어, 소그드(사마르칸트 근처)어, 티베트어, 위구르어, 투르크어 등 여러 언어로 씌어진 것이라 한눈에 봐도 대단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왕오천축국전’이 프랑스로 간 까닭

스타인은 그 보물을 눈에 띄지 않게 숨겼다. 그런 다음 운반에 필요한 상자를 구해 포장했다. 그가 떠나는 장면을 목격한 중국의 어느 젊은 시인은 “저녁이 되어 스타인이 이끄는 대상(隊商)이 12개의 큰 상자를 싣고 길을 떠났다. 그때 그들은 마지막으로 저무는 핏빛 태양과 선혈이 흐르는 한 나라의 상처를 바라보았다”며 서글퍼했다.

이 일로 스타인은 ‘보물 사냥꾼’이라고 욕을 먹었다. 이듬해에는 프랑스 고고학자 폴 펠리오가 그곳에 들러 역시 은화 몇 닢으로 6000여 권의 경전과 불화를 트럭 10대에 나눠 싣고 돌아간 일이 있다. 펠리오의 물품 가운데는 신라 승려 혜초가 쓴 ‘왕오천축국전’도 포함됐다. 천불동의 관리인 왕원록은 전문가도, 행정관리도 아니었기에 천불동의 불화와 경전의 가치를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런데다 당시 청나라 조정은 변경에서 일어나는 일까지 챙길 만큼 여유가 없었다. 비극은 그렇게 일어난 것이다.

스타인은 둔황을 떠나 북동부에 위치한 안서(安西), 가욕관(만리장성의 서쪽 끝 관문), 주천(酒川), 감주(甘州) 등을 거쳐 치롄(祁連)산맥으로 갔다. 9월15일 다시 안서로 나왔다가, 하미를 거쳐 톈산(天山)산맥 남쪽의 오아시스 도시 투르판, 카라살을 통해 8월1일엔 쿠챠에 이르렀다. 쿠챠는 한(漢) 시대엔 인구 10만을 자랑하는 서역 최대의 왕국이었다. 그런 다음 타클라마칸 사막을 횡단해 케리야를 거쳐 호탄으로 들어갔다. 스타인은 그곳에서 한동안 조사를 벌였는데, 겨울이 깊어지자 더는 글을 쓸 수가 없었다. 잉크가 꽁꽁 얼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겨울을 나고 사막을 북상한 그는 이듬해 4월 다시 호탄으로 귀환했다. 8월에는 쿤룬산맥으로 들어가 티베트 고원 북쪽지대를 답사했다. 그때 동상에 걸렸다. 급히 카라코람 준령을 타고 내려와 ‘레’란 곳에 도착했으나 상처가 깊어 발가락 두 개를 잘라내지 않으면 안 됐다. 1908년 11월13일 스리나가르로 귀환해 2차 탐험을 끝냈다. 스타인은 곧바로 요양에 들어갔다. 그 뒤 유럽 여러 도시를 순회하며 강연과 휴양, 전시회를 여는 한편 3차 탐험을 위한 준비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제3차 탐험은 1913년 8월1일 시작됐다. 출발에 앞서 스타인은 유언장을 작성했다. 2차 탐험에서 예기치 않은 사고를 당하고 나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던 것. 짐도 인부 편으로 먼저 보내고 자신은 가벼운 복장으로 출발했다. 스리나가르에서 북상해 훈자를 거쳐 9월11일 카슈가르에 도착했다. 이듬해 1월엔 미란, 3월엔 로프노르에 이르러 러우란의 유적을 조사했다. 미란에서는 날개 달린 천자상(天子像)을 발견해 그리스 영향을 받았음을 확인했다. 러우란은 타림분지의 동쪽 끝, 로프노르의 서쪽 끝에 위치한 고대유적으로 옛 선선국이 자리잡았던 곳이다.

 

러우란으로 가는 길에서 고대 화폐 200점을 발굴하는 성과도 거뒀다. 3월24일엔 둔황에 도착해 구면의 왕도사를 만났고, 그에게서 또 경전을 샀다. 그런 다음 주천, 감주를 거쳐 10월 투르판에 닿았다. 조사 도중 투르판인이 묻혀 있는 공동묘지를 찾아냈다. 그러나 이미 도굴꾼들의 손을 탄 탓에 이렇다 할 만한 것은 남아 있지 않았다. 다행히 시신을 싼 비단만은 그대로 있었다. 고대의 아름다운 비단은 실크로드를 따라 헤맨 그에게는 값진 선물이었다. 그 비단은 지금 대영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1915년 5월31일 카슈가르에 도착한 그는 그동안 수집한 보물을 런던으로 보냈다. 10월에는 사마르칸트로 들어가 그 일대는 물론 부하라와 아슈하바드 등을 조사했다. 모두 실크로드 덕분에 번성을 누린 오아시스 도시였다.

그 다음 도착한 곳은 이란 북동부의 중심도시 메세드. 11월에는 이란 동부의 그 옛날 인더스 상류를 지배한 사카족의 땅이던 시스탄 지방에 머물다 1916년 3월16일 스리나가르를 거쳐 런던으로 돌아왔다.

런던에서 그는 극진한 찬사를 받았지만, 중국 정부는 그에게 ‘악마’란 별칭을 붙였다. 그리고 고대 유물이 집중된 지역에서 조사·탐험을 일절 금지했다.

세 차례에 걸친 탐험으로 스타인은 수많은 무덤과 사라진 언어, 북경 목판본 그리고 중국의 보물들을 발굴하고 가져왔다. 그 뒤 70년간 계속된 전화와 봉기로 사라질 뻔한 보물들이 그로 인해 보호받았다고도 할 수도 있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영국측의 주장이나 변명에 지나지 않겠지만.

스타인의 탐험으로 실크로드는 고대 문화교류의 길에서 연구대상으로 그 성격이 바뀌었다. 학자들은 현장법사와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에 기록된 교역내용과 풍부한 문화유산을 직접 증명하고자 현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약속의 땅’ 카불에 잠들다

스타인은 이후에도 탐험과 조사를 계속했다. 그때마다 그는 ‘대시(Dash)’라는 개를 대동했다. 그는 2차 탐험을 함께한 대시 2세를 ‘대시 대왕’이라고 불렀다.

160cm의 단구에 강건하고 뚝심이 센 사나이 스타인. 그는 81세로 숨을 거둘 때까지 탐험이나 여행을 떠나지 않은 해가 없었다. 인도 북서부 변경지대를 여행하는 그를 본 현지의 한 승려는 이렇게 말했다.

“스타인은 인간이 아니다. 초인이다. 그와 함께 산중을 걷는데 나는 피곤해 쉬고 싶었으나 그는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그는 진정한 여행자였다. 그는 어떤 사람과도 잘 어울렸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모든 것을 쏟아부을 정도로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3차 탐험 이후 그가 다닌 조사여행 가운데 굵직한 것만 열거해도 모헨조다로 유적 조사(1926), 스와트 일대 답사(1926), 발루치스탄에서의 인더스 문명 유적 조사(1927), 중동의 고대유적 조사(1928), 제4차 중앙아시아 탐험(1930∼31), 이란에서의 고고학적 조사(1932, 1935, 1938), 요르단 유적 조사(1939) 등 끝이 없다.

81세 되던 1943년 10월19일, 스타인은 아프가니스탄 정부의 초청으로 그 스스로 ‘약속의 땅’이라 부르던 카불을 찾았다. 그러나 폐렴에 걸려 그로부터 1주일 뒤인 10월26일 오후, 사망했다. 그의 곁을 대시 7세가 지켰다.

權三允
● 1951년 출생
● 한국외국어대 무역과 졸업
● 중동지역 등 60여 개국 여행
● 저서 : ‘문명은 디자인이다’ ‘세계문화유산’ ‘나는 박물관에서 인류의 꿈을 보았다’ ‘꿈꾸는 여유, 그리스’ 등

그의 유해는 1880년대 아프간전쟁(영국과 아프간 대결) 때 산화한 영국 병사들이 잠들어 있는 카불의 기독교인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그가 생전에 영국국교회의 예에 따른 매장을 강력히 희망했기 때문이다. 영결식은 10월29일 목사에 의해 집전됐다. 묘비에는 ‘인도 고고학조사국원, 학자, 탐험가 겸 저작자’라고 씌어 있다. 우리 시대의 위대한 탐험가, 오렐 스타인은 생전의 그답게 유해도 이역만리 바람 잘 날 없는 곳에서 그렇게 휴식을 취하고 있다.

스타인은 고대 그리스의 학예의 신인 9명의 뮤즈 가운데 하나인 크레이오(역사와 시의 여신)를 평생 연인으로 삼았다. 죽는 순간까지 크레이오는 그의 주인이었다. 1899년 인도 동북부 비하르 지방을 함께 여행하면서 친구가 된 오르담은 스타인을 “위대한 학자이자 행동가”라고 평했다.

 

출처 : 연운항에서 시작하는 사람들의모임
글쓴이 : 목동독수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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