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불교 왕국... 쿠챠 (庫車)
서기 629년, 초 봄에 현장법사라는 젊은 학승이 서역의 찬바람을 얼굴에 한 껏 맞으며, 가사에는 사막의 모래바람을 한껏 뒤집어 쓴 채 공작하(孔雀河)를 넘고 위간하(渭干河)를 따라 쿠챠계곡에 이르렀다. 쿠챠계곡일대는 서역에서 보기 힘든 대국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이곳이 바로 서역불교문화의 중심지인 구자국(龜滋國)이었다. 1998년 봄, 나 역시 현장이 걸어갔던 길을 열차를 타고 따라갔다. 중원의 정주(鄭州)를 출발한 기차는 서안을 통과하며 드디어 실크로드에 접어든다. 곧장 서로 달리던 기차는 황하(黃河)물을 만나고 황하 상류의 대도시인 란주(蘭州)에 다다른다. 기차는 란주에 이르러 그 방향을 갑자기 북으로 돌린다. 하서회랑을 따라 서서히 서역의 입구로 들어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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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무지에 놓여있는 만리장성을 따라 북으로 한참을 가다가 다시 서쪽으로 방향을 돌린다. 만리장성의 서쪽끝인 가욕관(嘉欲關)을 뚫고서 드디어 서역의 관문인 돈황(敦煌)에 다다른다. 지금껏 보아왔던 황무지의 고향인 서역으로 드디어 들어가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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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쿠챠의 역사 현재의 쿠챠일대는 옛 구자국의 자취가 남아있는 곳이다. 구자국은 서역국가로서 그리 낯설지 않은 나라로써 고대 서역의 36국 중 하나였고, 실크로드상의 중요한 오아시스 도시였다. 일찍이 기원전 100년을 전후하여 한(漢)나라 장군 장건(張騫)이 서역을 돌아다니며 이곳을 지나갔다. 한나라 선제(宣帝)때에는 구자국의 왕이 한나라와 우호정책을 펼치면서 수 차례 장안으로 조공을 바치러 갔다. 그 후로 구자국은 한나라를 섬기게 되었는데 기원전 60년 서한에서 서역도호부(西域都護府)를 설치하면서 구자국은 완전히 한나라에 귀속되었다. 그 후 동한(東漢) 말 한나라의 세력이 급격히 쇠퇴해지며 서역에 대한 지배력이 약해지면서부터 구자국은 완전한 독립국가로 자리잡으며 불교문화를 부흥시키기 시작하였다. 위진남북조시대에는 인도로부터 수많은 불교문화를 받아들이면서 간다라 계통의 특색있는 고유 불교문화를 발전시켜 나갔다. 오늘날 남아있는 쿠챠지역의 많은 천불동과 불교사원유적들은 대부분 이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 후 당나라 658년 안서대도호부(安西大都護府)를 구자국으로 옮기며 구자국은 다시 한번 중화문화권에 포함되게 된다. 당시 구자국의 문화는 중원의 문화발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구자국의 음악과 춤은 중원 전역에서 아주 성행하였고, 중원의 시와 노래등도 구자국의 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 하지만, 그 후로 이슬람문화의 유입으로 불교문화는 점점 사라지게 된다. 14세기 이후 쿠챠의 왕조는 수많은 분열과 통합의 변화를 겪으며 1759년에 이르러서야 청나라가 남신쟝(南新疆)의 분열을 평정한 후 비로소 안정을 찾게 된다. 고대 구자국은 실크로드의 상업도시로 각국의 상인들이 여기에 모여 동서양의 토산품을 거래하였다. 이렇게 구자국에서 중개무역이 발달하면서 점차 이 지역의 경제적 기초가 다져져 갔고, 구자국의 개방적인문화가 발전해 나간 것이다. 구자국은 서역 각국 중 가장 이르게 중원지역에 승려를 보내 서역불교를 전파하였다. 불교의 유행에 힘입어 구자국의 예술 또한 중국의 서북지역에 전파되어 둔황석굴을 비롯한 중원 서북지역의 석굴에 아주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위진남북조시대에 키지리를 시작으로 하여 수많은 천불동들이 중원의 서북지역과 서역에 만들어 진 것이다.
2.쿠챠로 가는 길 쿠챠로 가기 위해서는 일단 신쟝위구르족의 땅에 들어가야 한다. 현재 북경.상해.광주 및 중국의 많은 대도시에서 신장의 수도인 우루무치로 매일 매일 비행기가 날라다닌다. 하지만, 중국 땅덩어리가 워낙 크고 신장땅이 워낙 멀리 떨어져 있어 항공료가 웬만한 국제선 비용보다 더 비싸다.
상해로부터 서쪽으로 계속 달리는 열차길이 1970년 신강땅에 첫발을 들인 후 투루판, 우루무치 그리고 신장의 신흥석유도시 코를라까지 기차길이 놓였으나, 더 이상 서역행은 힘들었다. 천산남로를 따라 기찻길을 놓으려 했으나 험한 기후와 한 번씩 흘러내리는 천산의 눈녹은 물들이 길을 휩쓸어 버리기에 기차길을 놓는 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1999년 12월, 중국의 또 하나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서역횡단철로가 드디어 개통되었다. 사막땅에 거대한 댐을 쌓듯이 쌓아올린 신강철로는 중앙아시아의 이슬람성지인 카슈가르에서 그 기나긴 길을 마감한다. 하지만, 더 이상 서역으로 가는 것은 정말로 불가능하다.
일단 우루무치로 왔다면 여기서 남서쪽으로 약 450KM떨어진 쿠챠까지 이동해야한다. 우루무치 시외버스터미널에서는 매일 4-5차례씩 쿠챠로 가는 버스가 출발한다. 출발시간은 정확하지 않으며 손님이 다 타는대로 출발을 한다. 시간은 약 15-18시간 정도가 걸리며 가격은 2만원 정도...
열차편을 이용하려면 투루판에서 타는 것이 편하다. 카슈가르로 가는 서역횡단철도에 쿠챠역이 있으나, 얼마전까지만 해도 여객열차는 쿠챠 좀 못 간 아크수까지만 다녔었다. 현재는 이 열차가 쿠챠를 지나 카슈가르까지 이어지며, 예전보다 편하게 서역을 여행할 수 있게 되었다.
3.쿠차의 먹거리 쿠차역시 다른 서역의 오아시스 도시와 다를 바 없다. 먹을 것이라고는 양꼬지와 '낭'이라고 불리우는 위구르전통 빵, 그리고 좀 괜찮은 식당에 들어가 보면 레그멘, 폴루, 소쉬르...등 위구르전통의 가벼운 식사거리를 찾을 수 있다.
4.쿠차의 볼거리 키지리 천불동은 쿠차의 서북쪽, 바이청현 키지리향 동남쪽 9KM 황토절벽아래에 있다. 쿠챠에서는 동북쪽으로 난 길을 따라 약 80km를 달려가면 키지리에 다다른다. 석굴은 북쪽으로 산을 끼고 있고, 앞으로는 위간하(渭干河)가 마른 바닥만을 보이고 있다. 키지리 천불동은 중국에 있는 석굴 중 가장 이른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대략 3-4세기에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9세기에 이르러 끝난다. 5-600년 동안 만들어진 것이다. 키지리석굴은 구자국 석굴문화의 대표로서 중국 서북지역의 석굴문화의 효시라 볼 수 있다. 키지리 천불동은 승려들의 승방으로 수행의 장소가 되기도 하였고, 불도들의 불전으로 불공을 드리는 곳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키지리 천불동의 236개의 석굴은 64개의 승방과 172개의 불전으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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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근대 서구열강들과 일본의 침략과 약탈로 대부분의 유물들이 소실되고 현재 75개의 석굴만이 그나마 완정된 형태로 벽화와 불상들을 유지하고 있다. 수바시사원 유적지는 쿠차현 동쪽 23KM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수바시는 '물길의 처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수바시 옆으로 쿠차협곡과 쿠차하천이 흐르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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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부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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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바시사원은 현재 노란 황토 터 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수바시사원은 쿠차협곡을 중간에 두고 동.서 양쪽의 사원으로 나누어진다. 동쪽 사원은 불전이나 사원내의 불탑등이 모두 흙으로 만들어져 현재 그 형태를 알아보기가 힘들다. 하지만, 10M가 넘는 벽에 둘러 쌓인 종루의 형태는 아직도 남아 있다. 서쪽사원은 북쪽으로 낮은 절벽을 끼고서 건립되었다. 절벽을 끼고 나머지 3면에는 약 10M정도 높이의 흙으로 만든 성벽이 둘러 쌓여져 있다. 북쪽 절벽에는 여러 동굴들이 뚫려 있는데 이 동굴들을 가만히 들어가 보면 수많은 형태를 알 수 없는 불상들이 있고, 그 옆으로 보일 듯 말 듯한 문자들이 쓰여져 있는데 이는 어느누구도 해독할 수 없는 옛 구자국의 문자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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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이곳 서쪽 사원에서 수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남북조 시대의 화페와 당대의 목기, 도자기, 흙 인형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수바시사원이 한나라시대때 건립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여기서 출토된 유물들을 볼 때 이 사원은 당대에도 번창하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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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부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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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게 사막을 넘어 쿠차에 도달했다면... 왠지 이상하다. 옛 불교문화의 중심지였던 쿠차에서 지금 포도를 따고 지금 춤을 추고 지금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 모두는 저 중동에서나 봄직한 콧털 달린 이슬람들이다. 옛 불교왕국의 영화는 어디로 사라진 것인가... 쿠차를 돌아다니다 보면 좀 어색하기는 하지만 이슬람의 사람들이 옛 불교왕국의 춤과 노래를 흥얼거리고 덩실거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이 얼굴이 바뀐 것인가... 아니면 그들의 춤과 노래를 전해주고 저 멀리 갑자기 사라져 버린 것일까...
키지리에서 마지막으로 본 석굴의 미묘함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엷게 들어오는 빛이 모래 먼지의 광선을 안으로 뿜에 대고 나는 좁디 좁은 그 동굴 속으로 들어간다. 좁은 굴이라고는 하지만 이곳 저곳 구멍이 많이 뚫어져 있다. 손을 더듬어 가며 굴속으로 들어간다. 잠시 어둠이라는 공포감을 느꼈을 때 내가 얼만큼 들어왔는지 잊어 버렸다. 어느 구멍속으로 들어갔는지, 얼마를 왔는지... 그만 눈을 감고 발걸음을 멈추면 세상은 '空'이다. 내 마음 속에 공포감만 밀어 버린다면 정말 어떠한 것도 알 수가 없다. 있는지 없는지...
한참을... 내가 살아온 세월이 흘러간 만큼의 시간을 공포를 잊기 위해 우두커니 서 있고서야 비로소 발걸음을 되돌렸다. 몇시간, 아니 며칠을 걸어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와 보니 역시 나를 맞이하는 것은 모래 먼지의 광선을 뿜어대던 햇살이다.
지금도 쿠챠의 여러 황무지에 우뚝 솟아 있는 유적지들을 보고 있으면 저 황토 흙 속에 옛 사람들의 비밀이 아직 숨어 있을 것 같다. 뭔가 나에게 깨달음을 줄 것 같은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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