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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과 돌을 섞어 지은 티베트의 전통가옥. 지붕은 평평하고 어느 집이나 오색 룽다를 매달아 놓는다. 척박한 땅을 일구고 사는 티베트
사람들의 피곤한 삶을 엿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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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체(日喀則)는
티베트에서 라싸 다음으로 두 번째로 큰 도시로 과거 창지방의 수도였다.
오랫동안 교역의 중심이었으며 행정의 중심지로서 600년에 가까운
역사를 지닌 유서 깊은 도시이다. 티베트의 여느 도시처럼 시가체도 사원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라싸하면 조캉사원이 있듯이 시가체에는 타쉴훈포
사원이 있다.
중국의 중요문화재 가운데 하나인 타쉴훈포는 겔룩파종파의 6대 사원 중 하나로 판첸라마가 거주하는 사원으로도 유명하다.
타쉴훈포에 대한 평판은 복합적이지만 부정적인 요소가 더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근대 티베트 사원 중 가장 잘 운영되고 있는 최대의 사원이며 유물도
비교적 잘 보전 유지되고 있다고 한다. 반면에 승려들이 불친절하고 몇몇의 승려들은 중국정부와 내통하고 있다는 의심을 받기도 한다. 물론 확인이
필요한 얘기다. 그러나 이렇게 되기까지는 역시 오랜 정치적인 배경이 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중국의 간섭을 받던 티베트는, 결국 중국에 의해
판첸라마가 창지방과 서부티베트의 지도자로 임명되면서 달라이 라마와의 갈등 구조를 만들었다.
중국이 주변국가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시도해 온
분열정책의 일환으로 달라이 라마와 판첸 라마를 분열시키려는 의도였다. 그 의도가 적중하여 1929년 13대 달라이 라마와 9대 판첸 라마 사이에
타쉴훈포 사원의 자치권을 놓고 심각한 분쟁이 벌어져 판첸 라마가 중국으로 도망갔다. 그 후 9대 판첸 라마는 끝내 티베트로 돌아오자 않았고
1937년 중국에서 사망했다.
이후 10대 판첸 라마는 중국 출신으로 중국 측이 개입하여 옹립하였으나 중국의 음모설이 제기되면서 티베트
사람들에게 판첸 라마의 환생으로 인정 받지 못했다. 그러나 오히려 중국 정부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달라이 라마의 존재를 인정하는 등 티베트
사람들보다 더 티베트적이어서 나중에 인정을 받게 된다. 10대 판첸 라마 이후 티베트 사람들에 의해 옹립된 11대 판첸 라마는 정작 베이징
어딘가에 연금되고, 현재 타쉴훈포에 거주하는 판첸 라마는 중국측이 옹립한 가짜 11대 판첸 라마가 섭정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타쉴훈포는 중국 정부에 협조하는 어용 판첸 라마가 이끄는 사원이라는 의심을 받고 있는 것이다.
하늘색 빼고는 모든 것이 누런 황량한
티베트 고원을 지나다가 갑자기 나타나는 도시 시가체.
라싸에서 280여 킬로미터 떨어진 시가체는 얄룽창포 강과 그 지류인 남체 강의
합류지점으로 ‘토지가 풍부한 정원’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시가체 주변에는 넓디 넓은 보리밭과 여유롭게 방목하는 야크와
양떼를 많이 볼 수 있다.
또한 시가체는 티베트 서남부 농축산물의 집산지로도 유명하다. 시가체의 중앙로인 상하이로드를 조금만 벗어나면
티베트 사람들의 활기 찬 전통재래시장을 볼 수 있다. 티베트의 제 2의 도시라고 하지만 우리네 면이나 읍정도 규모로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
같다. 더구나 라싸와 달리 화려함보다는 오히려 시골의 풋풋함과 티베트의 예스러움이 더 많이 남아 있는 따뜻한 도시라는 느낌을
받는다.
드디어 시가체 서쪽 거대한 바위산 니써르산(尼色日)산에 자리잡고 있는 타쉴훈포를 찾았다.
타쉴훈포는 문화혁명 기간에 그다지
피해를 입지 않은 사원 중에 하나. 사원은 전 지역이 높다란 벽으로 둘러 싸여 있다. 그 안으로 수 많은 전각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고 금빛
사원이 햇볕에 반사되어 그 화려함과 웅장함이 멀리서도 인상적으로 다가 온다. 입구에 다다르자 예의 악다구니 같은 티베트 어린아이와 장사꾼들이
쏜살 같이 모여 들어 정신을 쏙 빼놓는다. 사원 입구는 사원의 규모에 맞지 않게 겨우 차 한대가 통과할 수 있을 정도. 그 옆에 매표소가 있다.
라마승들이 직접 입장료를 받는데 입장료가 만만치 않다. 1인당 중국돈 55위안, 한국 돈으로 약 7700원에 이른다. 양국의 물가 차이를
감안하면 무지하게 비싼 금액이다. 중국 노동자의 한달 월급이 평균 300위안이라고 하질 않던가.
그러나 할 수 없는 일. 오늘 우리가
타쉴훈포를 찾은 것은 시가체의 중심사원이기도 하고 11대 판첸 라마가 거주하는 곳이라는 점도 있지만, 우리 탐험대를 안전하게 안내하기 위해
라싸에서부터 동행하고 있는 중국국제체육여유공사 이원 총경리의 인연이 크게 작용을 했다. 어린시절 10대 판첸 라마의 은총을 받은 이후 언젠가는
꼭 한번 10대 판첸 라마를 알현하고 싶었던 소원을 이루기 위해 온 것이다. 이원 총경리를 따라가던 카메라는 입구에서 제지를 당했다. 비디오
촬영을 할 수 없다는 것. 그러나 이내 티베트 안내원이 흥정을 하자 대뜸 1800위안을 내란다. 한국 돈 약 25만원. 조금 깎아 볼 요량으로
흥정을 해보았으나 더 이상 여지가 없다. 이원 총경리가 중국 중앙에서 내려 온 고위관리이고 10대 판첸 라마와의 인연을 생각하면 쉽게 해결되리라
믿었건만 적어도 사원에서는 라마승이 법이었다. 할 수 없이 용단을 내려 비싼 촬영비를 내고 찍을 수 밖에. 10대 판첸 라마는 특별한
지도자였기에 관심이 더한 것이 사실이었다. 중국인 출신이면서도 1959년 라싸봉기 직후, 티베트 사람들의 종교적 자유와 인권을 보장하라는
7만자에 달하는 탄원서를 마오쩌뚱에게 보낸 것은 물론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의 영적, 세속적인 지도자’라는 대중연설을 함으로써 중국 정부에
정면으로 맞섰던 인물이다. 그로인해 결국 판첸 라마는 오랫동안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가 1978년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이 후에도 정치적
연금 상태에서 통제를 받다가 1989년 돌연 심장마비로 죽고 만다. 그러나 티베트 사람들은 중국측에 의한 독살이라고 의심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10대 판첸 라마가 1989년 입적하자 중국 정부의 지원으로 금장 영탑을 지어 10대 판첸 라마의 법체를 모시기로 하고, 드디어 1993년
드디어 높이 33.17미터, 총면적 1,933평방미터에 이르는 규모의 전각이 세워졌다. 조금 어두운 전각에 들어서자 시주를 챙기는 라마승 두
명이 눈에 거슬렸으나 이내 화려한 10대 판첸 라마의 금장 등신불이 눈에 든다. 정면에 마치 부처처럼 위치한 10대 판첸 라마는 화려한 금장으로
장식된 미라로 모셔져 있었다. 마치 살아 있는 듯 부리부리한 눈과 표정은 살아있을 때 중국정부에 야합하지 않고 중국출신이면서도 더 티베트적으로
살았던 지조가 그대로 드러나는 듯 하다. 이원 총경리가 어린시절 잊지 못할 추억을 되새기듯 아주 엄숙하고도 차분하게 10대 판첸 라마를 알현하는
꿈을 조용히 누리고 있었다.
에베레스트로 가는 길을 재촉하기 위해 서둘러 사원을 빠져 나오는 길. 그늘진 벽에 기대 앉은 노승이 지나가는
관광객과 사진을 찍어 주고 용돈을 챙기고 있다. 또 다른 노승 2명은 사탕 항아리를 한 병씩 들고 가다가 환한 포즈를 취해 주기도 한다. 한때
4천명이 넘는 승려가 수행을 했다던 유서 깊은 사원에 정작 수행자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고, 뜨거운 고원의 햇살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그 넓은
사원을 돌고 또 도는 순례자는 역시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후줄근한 티베트 사람들의 신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