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티베트

[스크랩] [티벳]현재

:: 중국인 이주정책 / 티베트인보다 중국인의 수가 더 많은 티베트

티베트인과 문화, 환경을 가장 위협하는 것 중에 하나는 중국인들과 군인들의 티베트 유입으로 티베트가 중국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당국의 중국인 이주정책으로 1980년에 티베트에 거주하는 티베트인들이 6백만명인 반면 중국인들은 7백 5십만명에 이르렀었다. 수도 라사의 경우만 해도 1946년까지만 해도 대 사원에 있던 2만여명의 승려 수보다 적은 인구가 살았었는데 지금은 20여 만명이 넘는 인구가 살고 있으며 라사 인구의 70%가 중국인이다.  

티베트인들에 대한 산아제한, 낙태 강요와 불임시술이 이러한 티베트의 중국화를 가세하고 있다. 중국 당국은 1984년부터 1가정에 2명의 자녀만 낳은 정책을 추진해왔다. 이러한 중국인 이주 정책과 산아제한 정책의 추진 결과 티베트인들은 경제, 교육, 정치, 사회 영역에서 소외당하고 있으며 티베트 문화와 전통은 급속한 속도로 사라져가고 있다.
  일례로 중국의 경제정책도 티베트인보다는 중국인들 우선이고 대다수의 기업들은 중국인 소유인데 캄과 암도 지방에서 계곡에 위치한 좋은 땅들은 대부분 중국인들에게 분배되었지만 티베트인들은 점점 황무지로 쫒겨나고 있다. 주요한 행정직은 중국인들이 차지했다. 더우기 중국인들은 티베트 사람들에 비해 삼림과 광물개발에 있어서 우선권을 부여받았다.

라사에 있는 1만 2천개의 가게들과 식당중에서 단 300개만이 티베트인들이 소유하고 있다. 그리고 중국인들이 133개의 사업체를 소유한 반면 티베트인들은 15개의 사업을 소유하고 있다. 다른 지방에서도 비슷한 비율을 보이고 있다. 영국언론에 의하면 암도 지방의 도시 중심에서는 상황이 훨씬 좋지 않다고 한다. 중국은 티베트에서 행해지는 개발에 대한 환경영향 평가를 하지 않는다. 이 개발은 중국 이민자들에게 혜택을 주어 티베트로의 유입을 장려하고 있을 뿐이다. 중국의 티베트 문화말살 정책은 티베트어 사용 금지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모든 학교는 티베트어대신 중국어를 가르치고 정부 문서도 중국어로 출판한다.


:: 인권의 사각지대

티베트 망명정부가 수집한 정보에 의하면 중국의 티베트 침공 이후 1979년까지 120 여만명의 티베트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또 중국군 기밀 문서에 의하면 중국군은 52년과 58년 사이에 996건의 폭동을 진압하면서 1만명의 티베트인들을 죽였다. 비슷하게도 진압으로 인해 암도 지방의 인구는 1956년의 13만명이던 것이 63년 6만명으로 감소했다. 판첸 라마는 이에 대해서

"만약 킹하이 지방에서 일어난 모든 잔혹행위를 영화로 담는다면 이것은 보는 사람들에게 충격을 줄 것이다. 고록 지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그들의 시체는 언덕에서 웅덩이로 굴러갔다. 군인들은 죽은 사람들의 가족과 친척들에게 반역자를 몰아냈기 때문에 축하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들은 시체 위에서 춤을 춰야 했다. 하지만 곧 바로 그들 또한 학살당했다." 고 했다.

감옥에서 살아 나온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감옥에 수감된 사람들의 70%가 죽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티베트 고원 북부의 황무지에서 1만명 이상의 구속자들이 5개의 감옥에 갇혀 갱도를 파야 했다. 노동수용소에서는 매일 10명에서 30명의 티베트인들이 굶주림과 폭행, 과로로 숨졌다. 1년에 8천명 이상의 사람들이 죽었다. 이와 비슷하게 라사의 전력발전소 공사에서는 매일 3-4명의 시체가 근처 강으로 버려지거나 불태워졌다고 한다. 1960에서 62년 사이에 1만 2천여명의 수감자들이 납 채굴 광산에 숨졌다. 한때 금지되었던 외국인 관광객의 입국이 허용되고 있지만 공식 인정된 관광안내원이 따라 다니기 때문에 티베트인들을 만날 수 없다. 또한 라사 이외의 외곽지역은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가능하다.

또한 티베트인들은 거주 이전과 여행의 자유가 없다. 정부당국의 허가 없이는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중국당국의 명령에 반하는 행동을 할 경우 적법한 절차도 없이 투옥되거나 처형된다.


:: 티베트 불교 말살정책 / 불교문화 유산의 파괴

중국의 티베트 침공 전까지만 해도 티베트 전역의 모든 마을과 도시에는 사원과 암자가 6천 여개가 있었고 여기에는 약 60만명의 승려가 살고 있었다. 드레풍, 라사의 세라, 사캬 등의 거대한 사원은 수준 높은 교육의 장소였었다. 이들 사원들은 수 천여 개의 불상과 금, 은, 다른 보석이 박힌 공예품이 있었고 수십만 개의 탑이 있었다. 불교 경전 외에도 이들 사원들은 문학, 의학, 천문학, 예술, 정치학 등의 작품 등을 보관하는 중심으로서 티베트 국민들의 "보물의 집"이었다.

  불교민속과 가르침은 사람들의 생활과 축제, 명절, 노동윤리, 집안 일 뿐 아니라 국가적인 문제까지도 조절해 주었다. 티베트는 중국이 침공하기 전까지는 긍지를 가진 불교독립국가였다. 티베트에는 또한 모스크 사원을 갖는 이슬람교도의 공동체가 있었다. 더불어 아주 소수의 힌두교와 기독교 신자들이 있었다. 예전에 그들의 종교는 묵인되었고 동등한 권리를 갖고 있었다. 이 또한 중국의 침공으로 파괴되었다.

처음에 중국정부는 티베트의 완전한 합병이 이루어지는 동안에는 종교수행에 대해 어떤 제재도 가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포했다. 그러나 중국정부는 티베트의 전통적 사회체계와 종교를 허물기 시작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종교는 우리 유물론자들의 적이고 종교를 믿는 것은 맹목적인 믿음이기 때문에 종교를 믿지 말고 비난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1950년대 중반까지 중국당국은 종교를 티베트 통치의 근본적인 장애로서 인식하였고 1956년 이후부터 소위 "민주개혁"이라는 것을 캄과 암도 지방에서 그리고 1959년 티베트 중앙까지 실시했다. 그 결과 사원과 문화기관들이 체계적으로 노략질 당해서 해체되었다.

처음에는 광물학자들이 사원건물들을 옮기고 귀중한 돌들을 뽑아갔다. 다음에는 야금학자들이 금속을 트럭에 실어갔다. 벽은 폭파되었고 목재와 나무기둥들도 빼갔다. 점토로 만들어진 불상들은 귀금속을 찾는 과정에서 파괴되었다. 결국 남아있는 모든 나무와 돌들이 없어졌다. 수백 톤의 귀중한 불상, 탱화, 금속공예와 보물들을 국제골동품시장에 팔기 위해 또는 녹이기 위해 중국으로 실어갔다. 불교경전은 불태워져 밭의 거름에 섞였다. 비구와 비구니들에게 사람들 앞에서 성관계를 하도록 했고 기적을 행하라고 강요했다. 황폐해진 사원은 돼지우리로 둔갑했다. 중국 감옥에서 굶주리고 있는 비구와 비구니들에게 중국인들은 대신 "부처에게 음식을 달라"고 말했다.

중국의 공식 주장과 달리 수많은 티베트 문화와 종교가 1955년과 1961년 사이에 파괴되었다. 1976년에는 6,259개의 사원 중에서 단 8군데만이 남았다. 60만명의 비구, 비구니, 린포체(환생한 승려)와 탄트라 수행자 중에서 11만명이 고문을 당하고 죽었으며 25만명 이상이 중국당국의 강요에 의해 환속했다. 일례로 중국의 침공 이전에 세라 사원에는 8천여명의 승려가 있었으나 지금은 300명만 허용하고 있고 1만명에 가까운 승려가 있었던 드레풍 사원도 400명으로 감소되어 있다. 또한 사원의 기능은 종교사업국, 티베트불교연합, 민주관리위원회, 정보기관등으로 편제되었다. 티베트의 종교파괴 정도에 대해 1988년 판첸 라마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티베트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의 사원들은 100% 완전히 파괴되었다. 티베트 전역에서 99%가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 중에서 포탈라 궁의 상황은 가장 양호하다. 그러나 포탈라 궁 또한 훼손되고 있다."

1979년 이후부터 피상적인 종교의 자유가 허락되었던 티베트에 "자유화"가 시작되었다. 이는 제한적이고 선택적인 사원의 복원과 절하기, 사원과 탑 주위 돌기, 만트라 암송, 향 피우기 등 일정정도의 의식을 허가했다. 하지만 여전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설파하는 것은 금지되었고 허가된 곳에서 제한적으로 통제를 받으면서 할 수 있었다.중국당국은 티베트 승려들과 달라이 라마와의 연결고리를 끊기 위해 사찰 내에 공안관리를 배치했다.

 

싸이트 출처 : http://tibetfriends.org/t&hhdl/t&hhdl.htm

출처 : 제로미의 여행이야기
글쓴이 : 제로미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