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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스크랩] 기획-다라이라마 누구인가

달라이 라마, 그는 누구인가
 

2. 세속과 영혼의 지도자 ‘달라이 라마’

- 목 차 -
  1. 들어가는 말
  2. 세속과 영혼의 지도자 ‘달라이 라마’
  3. 14대 달라이 라마, 텐진 갸초
  4. 티베트 불교의 또 다른 축, 판첸 라마
  5. 티베트 인들이 생각하는 환생
  6. 맺는 말

1) 티베트 불교와 정치권력과의 관계

고대 티베트 고원에 흩어져 살던 티베트 민족은 7세기 중반 송첸감포라는 걸출한 군주에 의해 왕국으로 탄생했다. 티베트라는 이름은 당시의 몽골어었던 ‘투베트(Thubet : 吐藩)’에서 유래하였는데, 이는 ‘눈 위의 거주지’라는 뜻이다.

송첸감포 왕은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당나라와 네팔의 공주를 왕비로 맞아들였다. 송첸감포 왕의 결혼은 공식적으로 티베트에 불교가 전해진 계기가 되었다. 티베트에 시집을 온 두 공주는 각각 라모체 사원과 투르낭 사원을 세웠으며, 이것이 티베트 불교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송첸감포 왕의 뒤를 이은 티송데첸 왕은 761년 불교를 국교로 정했으며, 이후 티베트 불교는 인도의 대석학 샨타락쉬타와 파드마삼바바에 의해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티베트 불교의 발전은 처음부터 갈등의 씨앗을 안고 있었다. 공식적인 최초의 불교 전래는 당나를 통해서 이루어졌고, 이후 인도 불교의 유입으로 발전을 이루었기 때문에 티베트 불교는 친인도 세력과 친중국 세력으로 양분되었고, 이는 결국 파벌에 의해 티베트 불교가 유지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전통 종교인 본(Bon) 교(敎)와의 갈등도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나 각 종파간의 다툼을 비롯해 본교와의 갈등은 한편으로는 오히려 티베트 불교 발전의 기틀이 되기도 했다. 티베트 불교는 특유의 씨족 교단을 형성하고, 정치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후 티베트 불교는 정치세력화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활불전세(活佛轉世 : 환생)’와 ‘정교일치(政敎一致)’라는 티베트 불교만의 독특한 전통이 확립된 것이다.

이 때문에 송첸감포 왕은 달라이 라마의 등장 이전까지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티베트 인들에게 추앙되었다. 또한 정교일치 제도로 인하여 티베트 불교는 종파의 형성이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이는 ‘환생’과 함께 ‘정치·종교지도자’로서의 ‘달라이 라마’ 제도가 확립된 계기가 되었다.

9세기 중반 랑 다르마(Lang Dharma) 왕이 즉위하였다. 티송데첸 왕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국교가 된 후, 융성을 거듭하던 티베트 불교는 랑 다르마에 의해 일대 위기를 맞았다. 불교의 강력한 권력 아래 숨을 죽인 채 왕권의 회복을 노리던 그는 본교 세력과 손을 잡고 불교를 탄압했다. 그러나 강력한 권력을 누리던 불교 세력은 1년이 되지 않아 왕을 암살했고, 이는 토번 왕국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이후 티베트는 몽골의 세력권으로 편입되었다. 1239년 오고타이 칸의 아들 쿠텐은 티베트를 점령했고, 이 과정에서 사캬파의 쿵가 겐첸 즉 사캬 판디트(Sakya Pandit)가 몽골과 손을 잡고 집권했다. 당시 티베트에는 몇 개의 불교 종파가 있었으며, 이들 종파는 몽골 제국과의 관계 정립에 의해 집권과 몰락을 거듭했다. 그리고 몽골 제국의 지배가 약화될 무렵 쫑카파가 등장해 티베트 불교와 티베트 정치권력은 큰 변화를 맞이했다.

2) ‘달라이 라마 제도’의 확립

1357년 탄생한 쫑카파(Tsonkhapa, 1419년 입적)는 이미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던 카르마파(派)와 사캬파 등 티베트 불교 종파의 가르침을 두루 섭렵했다. 그리고 1409년 간덴 사원을 건립하고 겔룩파를 세웠다. 겔룩파는 그때까지 사실상 티베트의 실권을 쥐고 있던 파크모두파(1158년 창설) 등과 권력을 다투었다. 겔룩파가 카르마파에 밀리던 1475년 겔룩파에 겐둔 갸초(Gendun Gyatso)가 태어났다.

그는 후에 2대 달라이 라마로 추대되었고, 당시 복잡하게 얽혀 돌아가던 티베트 불교 세력 다툼에서 겔룩파를 강자로 올려 놓았다. 그의 뒤를 이은 소남 갸초(Sonam Gyatso)가 1543년 태어나 겔룩파를 확고한 위치에 올려 놓았고, 이때부터 사실상 티베트에는 종교와 정치 지도자로서의 ‘달라이 라마 제도’가 확립되었다. 소남 갸초는 ‘살아 있는 부처’로 티베트 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으며,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추앙받았다.

그는 1578년 몽골의 황제 알탄 칸(Altan Khan)을 만났다. 알탄 칸은 그에게 감화되어 그의 이름 중 ‘큰 바다’라는 뜻을 가진 ‘갸초’에 해당하는 몽골어 ‘달라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이것이 공식적인 달라이 라마 제도의 등장이었다. 소남 갸초는 몽골 제국의 원조 아래 왕권이 붕괴된 티베트의 실권자가 되었다. 몽골은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정치세력 대신 종교지도자를 대리통치인으로 선택한 것이다. 티베트에서는 군주로 몽골에서는 왕사(王師)로서의 달라이 라마의 정치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군사력의 뒷받침이 없는 군주의 위상은 오래가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몽골의 지원은 겔룩파의 집권을 가져온 동시에 티베트 불교의 본격적인 정치 세력화와 피비린내 나는 권력 암투를 불러온 것이다. 정치권력의 다툼 한가운데는 언제나 달라이 라마가 있었고, 달라이 라마는 그때부터 오늘날까지 티베트의 비극과 희망을 한꺼번에 지닌 존재가 되었다.

역대 달라이 라마를 살펴보는 일은, 14대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와 티베트 국민에게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어떤 정치 상황하에서 달라이 라마 제도가 유지되었는지를 아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달라이 라마’에게는 ‘쿤둔(Kundun : 모두에게 존경받는)’ ‘걀와(Gyalwa : 위대한 수행자)’ ‘노르부(Norbu : 서원을 이루는 금강석)’ 등 여러 가지 칭호가 붙는다.

3) 역대 달라이 라마

1대 달라이 라마는 ‘걀와 겐둔 둡(Gyalwa Gendun Drub, 1391∼1474)’이었다. 소남 갸초가 달라이 라마로 즉위한 뒤 추서한 1대 달라이 라마가 그였다. 걀와는 ‘위대한 수행자’라는 뜻이다. 그는 카담파의 나르탕 사원에서 출가하여 여러 종파에서 수학하였다. 1447년 그 유명한 시가체(Shigatse)의 타쉬룬포(TashiLhunpo) 사원을 건립했다.

선정(禪定)과 교학(敎學)을 겸비했고, 20년 이상을 수행에 전념하다 1474년 앉은 채로 입적했다. 2대 달라이 라마는 ‘걀와 겐둔 갸초(Gyalwa Gendun Gyatso, 1475∼1542)’다. 그는 닝마파 가문에서 태어났고, 4살 때 1대 달라이 라마 겐둔 둡의 환생으로 확인되었다. 그의 환생을 신성한 호수 라모이 라초(Lhamoi Lhatso)가 알려 주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여기에서부터 달라이 라마의 환생은 라모이 라초에 의해 확인하는 전통이 시작되었다. 1542년, 그 역시 앉은 채로 입적에 들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달라이 라마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3대 달라이 라마 ‘소남 갸초’는 달라이 라마 제도를 확립한 사람이다. 1543년 탄생한 그는 드레풍 사원에서 교육을 받았다. 1578년 몽골의 황제 알탄 칸을 교화하고, 티베트 불교 중 겔룩파의 전성기를 열었다.

일생을 닝마파와 겔룩파의 전통에 따라 수행했고, 이를 융합하려고 노력했다. 아시아와 유럽을 장악한 몽골 제국과의 외교관계 설정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로 인해 티베트 불교의 지도자가 아시아 전역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1588년 설법을 하다가 입적했다. 티베트의 정치와 종교를 이끌던 달라이 라마 제도는 4대 달라이 라마 ‘용텐 갸초(Yonten Gyatso, 1589∼1617)’대에 이르러 문제에 직면했다.

그는 티베트 인이 아니었다. 달라이 라마가 몽골 제국에서 태어났다. 몽골 제국의 황제 알탄 칸의 직계 후손이 4대 달라이 라마 용텐 갸초였다. 이방인 달라이 라마의 환생은 소남 갸초가 알탄 칸에게 몽골로 돌아가겠다고 한 약속을 지킨 결과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 밖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환생의 확인도 즉위도 늦었다.

4대 달라이 라마는 수행과 교육에 전념했고, 일찍 입적했다. 5대 달라이 라마 ‘걀와 나왕 롭상 갸초(Ngawang Lobzang Gyatso)’는 달라이 라마를 굳건한 권력의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그래서 ‘위대한 5대 달라이 라마’로 불린다. 그러나 냉혹한 권력투쟁의 한가운데 서 있었고, 역사상 가장 정치적인 위치에 있기도 했다. 9세기 이후 지방으로 나누어져 있던 티베트의 권력을 중앙으로 집중시켰다. 1642년 그는 정신적이고도 세속적인 군주의 자리에 오른다. 티베트의 의료 체계와 국가 교육 체제를 확립한 탁월한 정치가로 활약했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오늘날 달라이 라마의 상징이며 티베트의 상징이기도 한 포탈라궁을 건설한 일이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즉각 알려지지 않았다. 강력한 군주의 사후 포탈라궁이 완성되지 못할 것을 두려워 한 그의 유언 때문이었다. 그가 입적한 지 17년이 지난 1695년 포탈라궁이 완공되었다. 이 때문에 6대 달라이 라마의 즉위가 많이 늦어졌다.

6대 달라이 라마 ‘걀와 상양 갸초(Tsang Yang Gyatso)’는 사찰에서 수행 생활을 하지 않은 유일한 달라이 라마다. 이 때문에 2대 판첸 라마가 직접 그를 찾아가 환생자로 확인했고 가르쳤으며, 1697년 즉위했다. 그는 시와 음악을 사랑했다. 그러나 20살이 되던 해 자리를 박탈당했고 포탈라궁에서도 쫓겨났다.

그가 사찰에서 수행 생활을 하지 않은 것을 빌미로 일단의 몽골 인들이 침입해 1705년 몽골로 납치했으며 다음해 몽골에서 입적했다. 7대 달라이 라마 ‘걀와 칼장 갸초(Kalzang Gyatso)’는 1708년 동티베트에서 태어났으나, 몽골 제국과의 갈등으로 공식적으로 즉위하지 못했다. 불운한 환경에서 지냈으나 그의 청정한 수행 생활은 티베트 국민의 마음에 깊이 자리 잡았다. 많은 논서를 남겼고 1757년 입적했다.

8대 달라이 라마 ‘걀와 잠팔 갸초(Jampal Gyatso)’는 1758년 태어나 1762년 라사로 보내졌다. 3대 판첸 라마에게서 교육을 받았으며, 경이로운 영적 능력을 지녔고 정치를 혐오했다. 그의 생전에 영국이 최초로 티베트에 식민지를 건설하려는 의도를 보였고 이때부터 티베트는 고립정책을 채택했다. 그는 1804년 입적했다. 9대 달라이 라마 ‘걀와 룽톡 갸초(Lungtok Gyatso)’는 가장 불행한 지도자였다.

5대 달라이 라마 사후 달라이 라마의 지도력은 급격히 약해졌으나, 외부 세계와의 갈등으로 인해 티베트 내부 정치 상황은 권력 다툼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이 때문에 ‘달라이 라마’ 제도가 명목을 유지한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내부 권력 다툼은 오래지 않아 다시 격화되었고, ‘달라이 라마’는 그 소용돌이에서 비켜날 수 없었다. 이후 9대부터 4대에 걸친 달라이 라마가 모두 단명했다.

9대 달라이 라마는 겨우 10살에 입적했다. 10대 달라이 라마, 11대 달라이 라마, 12대 달라이 라마는 각각 21살, 18살, 20살에 입적했다. 이들의 죽음에 대해, 정치적 암살이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으며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13대 달라이 라마 ‘걀와 툽텐 갸초(Tubten Gyatso)’는 지도자로서의 위치를 회복했지만 티베트의 저물어 가는 운명과 일생을 함께 한 비극의 지도자였다. 1876년 태어나 1878년에 즉위한 그는 1904년 영국의 침략과 1909년 중국의 침략을 받았다. 티베트 정치는 외부의 침략으로 인해 안에서 다툴 여력이 없었고, 역설적으로 13대 달라이 라마는 국내 정치를 안정적으로 이끌 수 있었다. 기나긴 중국의 침략을 간신히 견뎌냈으나 끝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13대 달라이 라마는 조국 티베트의 비극을 예언하며 1933년 입적했고, 14대 달라이 라마 ‘텐진 갸초’는 티베트의 비극과 함께 환생했다. <계속>

출처 : TOGETHERKOREAN
글쓴이 : 김재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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