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계로 가는 뚜벅이

이탈리아 (Italy) 여행기 1편 - 남부

이탈리아 (Italy) 여행기 1편 - 남부 | 유럽 2005/04/05 23:51
http://blog.naver.com/dicecasts/11589978
이탈리아 (Italy) 여행기 1편 - 남부
이탈리아 프롤로그
폼페이 (Pompei)
나폴리 (Napoli)
카프리 (Capri)

이탈리아 프롤로그
고대 로마 유적에서 르네상스 미술까지 이탈리아는 나라 전체가 유적지이며 또한 박물관이다. 건축, 미술, 음악, 음식 등 다양한 분야에 걸친 매력이 깃들어 있기 때문에 관심이 무엇이든 모든 길은 이탈리아로 통하고 있다. 로마 문명에 대한 관심 때문에 가장 기대를 많이 했던 나라 중 하나이다. 로마인들이 쌓아 올린 문화 유산들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 지지 않았기에 그 흔적들을 눈으로 살펴보고 마음으로 느껴 보기 위한 것이 이탈리아 여행의 주된 목표이다.
<사진>폼페이 유적지
폼페이 (Pompeii)
2000년 전의 로마인들의 일상은 어떠했을까? 가장 먼저 벤허와 글라디에이터 같은 영화 속의 장면들을 머리에 떠 올려본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좌우로 흔들게 된다. 영화 속의 장면들은 전체가 아닌 일부분의 모습이며, 일반 대중들의 생활상과는 큰 괴리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일상의 모습은 그들의 것과 어떻게 다르고 같은지를 비교해 보고 싶은 것이다.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폼페이는 명확한 답변을 해 줄 수 있는 장소이다. 갑작스러운 화산 폭발은 ‘동작그만’의 상태를 연출했기 때문에 여느 다른 유적지에서 볼 수 있는 타민족에 의한 문화재 약탈과 파괴 행위 없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물론 초기 발굴 시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었음) 일례로 새끼 돼지가 오븐에 넣어지려는 모습도 있었으며, 여인숙 탁자에 손님이 계산한 돈이 그대로 놓여 있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하나의 도시를 완전무결하게 보전하는 방법으로 도시를 화산재로 덮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라고 말하기도 한다. 폼페이 발굴은 고전주의 붐을 일으킬 정도로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 때문에 고고학이란 학문이 철학과 역사에서 뛰쳐 나온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사진>폼페이의 입구 전경

<사진>폼페이의 포럼 전경

<사진>침대에 누워서 죽음을 맞이한 사람의 모습

<사진>화산 폭발 당시의 참혹한 표정

<사진>화산 가스 때문에 쪼그리고 앉아서 얼굴을 손으로 가린 사람의 모습

<사진>몸부림 치는 개의 모습

<사진>폼페이에서 출토된 로마 시대의 도기들
로마인들의 인프라
로마 제국은 역사상 인류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쳤던 문명 중 하나이다. 그래서 로마는 힘과 기독교, 법을 통해서 세계를 3번 지배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보다 정확히 한다면 로마 문명이 인류에게 남겨준 가장 큰 선물은 유형, 무형의 인프라일 것이다.

인프라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로마인들이 건설한 도로는 오늘날 유럽의 주요 도로의 기본이 되었고, 유럽의 주요 도시들은 로마의 군단 기지에서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독일의 쾰른) 상하수도 급수 시스템과 다리 건설과 같은 건축 기술도 로마인들의 유산에서 빼 놓을 수 없다. (화장실 변기, 주행 기록기, 여행용 지도 등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이러한 유형적인 것 이외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많은 제도나 조직들 역시 로마제국에서 유래한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공화제, 군대 경찰 조직의 편제, 우편배달 시스템, 퇴직 연금 제도, 특별 소비세(오리엔탈 사치품에 25%) 등이다.

영화 속에서 비춰진 로마인들의 모습은 이러한 장점 보다는 사치와 향락, 정복과 박해 등이 주요한 소재로 선택되어 왔다. 하지만 그것은 고대부터 현대까지 반복되어 온 역사의 보편성 중의 하나이다. 나는 로마사의 밝은 면에 놓여져 있는 장점과 그들만이 가지고 있던 특수성을 보다 초점을 맞추고 싶다.

· 도로

로마인들이 만들어 낸 인프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국의 동맥과도 같은 도로이다. 기본적으로는 폭 10m (차도 4m, 인도 각각 3m)이며, 돌들을 끼워 맞추어 가능하면 직선에 가까운 도로를 만들었다. (간선도로의 경우 대부분 자갈로 포장) 이러한 가도의 건설로 군대의 이동이 빨라지며, 지역간 교류가 활발하게 해 주기 때문에 광대한 영토의 로마 제국을 운영하기 위해서 필수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전부 합치면 지구를 두 바퀴 돌 수 있는 거리나 된다고 한다.


<사진>일직선으로 건설된 로마의 가도 (돌은 횡단   보도, 마차가 지나갈 수 있는 틈도 있다.)

<사진>한적한 도로 옆에 만들어 놓은 무덤들은 로마인들의 생사관을 보여 준다
· 상하수도

로마인들의 1인당 하루 급수량은 요즘의 대도시 시민들의 소비량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한다. 수원이 도시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 경우에는 수도를 이용해서 물을 끌어서 사용했다. 더운 곳에는 지하 수도관을 만들었고, 때로는 고가 수도교를 건설했다. 도시 대부분의 서민들은 70m간격으로 설치된 공동 수조를 이용했으며, 개인용 수도는 지방 자치 단체의 허가를 받은 후 요금을 지불하며 사용했다고 한다.


<사진>로마시대의 공공 수도

<사진>오늘날 공공 수도 앞에서 목을 축이는 여행자들
로마인들의 일상
로마의 도시 구조는 폼페이에서 보는 것처럼 기본적으로 격자 모양이다. 중앙 광장에는 바실리카, 신전, 상점 등이 있고, 시가지에는 규칙적으로 주택들이 배치되어 있다. 번화가에는 손님을 끌기 위한 간판과 선거 문구 등이 발견 되었으며, 음식점, 빵집, 세탁소, 여인숙 등이 있었다고 한다. 우리와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을 것 같지만,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는 오늘날과 비슷한 것이었다.

· 음식점

대중들에게 음식과 음료를 판매하는 간이 음식점들은 여러 개 발견할 수 있다. 뒤쪽에는 술을 저장해 두었던 양손잡이 항아리가 발견되었다. 참고로 로마인들은 반 정도 누워서 음식을 먹었다고 한다. 앉아서 먹는 것은 오늘날의 우리가 서서 먹는 것처럼 불편한 자세였다고 한다.


<사진>폼페이의 중심 도로이자 번화가 아본단자 거리

<사진>음식점 (L자 모형의 판매대 구멍에 음식과 음료가 담긴 용기를 넣는다.)
· 세탁소

물과 소다, 사람의 소변(알카리 성분)을 섞어 타원형 대야에 넣고 노예들이 발로 밟아서 옷의 오물을 제거했다. 세탁소에서는 햇볕에 옷을 말릴 수 있는 테라스나, 옷을 염색하거나, 다림질 할 수 있는 흔적들도 볼 수가 있다.

· 빵집

나귀나 노예의 힘으로 맷돌을 돌려서 밀가루를 만들고, 이것을 반죽해서 오븐에 구워낸다. 한 번에 대략 80개의 빵을 구워내며, 품질이 떨어지는 밀가루로 만든 빵들은 주로 노예들에게 주었다고 한다.


<사진>세탁소의 커다란 물통

<사진>베이커리 (원추형의 돌은 밀가루를 만드는 맷돌)
· 집창촌

인간의 역사와 함께 시작했다는 술과 매춘 역시 폼페이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뒷골목 한 귀퉁이에서 집창촌이 발견되었다. 각 방마다 주특기(?)를 표현하는 그림들이 그려져 있고, 안에는 간단히 돌로 만들어진 침대가 놓여져 있다.


<사진>방 입구에 그려진 그림

<사진>침대만 놓여져 있는 단순한 구조
· 목욕탕

로마 시대의 목욕탕은 오늘날의 것보다 더욱 복합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단순한 목욕 이외에 공놀이, 육상, 레슬링, 독서 등을 할 수 있는 문화 체육 시설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것과 달리 혼탕은 금지되었고, 시간대를 달리함으로써 남녀가 모두 이용이 가능했다.

· 원형경기장

로마인들의 모습 중 우리에게 친숙한 장면 중 하나일 것이다. 지방의 유력자에 의해서 후원된 검투사 경기는 오늘날의 대중 스포츠와 같은 형태로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수용인원에 열 배를 하게 되면 그 도시의 인구 수와 비슷한 숫자가 나온다고 한다.


<사진>목욕탕 내부의 모습

<사진>하이에라 폴리스(터키)의 원형 경기장
가옥구조
대부분의 도시 주택들은 도로 쪽을 입구로 하는 직사각형 형태이다. 입구에 들어서면 아트리움이라는 작은 뜰이 있고, 다시 안쪽으로 들어가면 조금 큰 뜰이 있다. 각각의 뜰 둘레로 방이 둘러 쌓여 있기 때문에 사각형을 두 개 연결해 놓은 것과 같은 모습이다. 단독주택(도무스-domus, 농촌가옥은 빌라-villa)뿐 아니라 3,4층의 임대용 연립주택(인술라-insula)도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사진>귀족 저택의 정원 모습

<사진>안 뜰의 모습

<사진>현관 입구에 표시된 개조심 타일

<사진>대저택에서는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프레스코화

<사진>전형적인 아트리움

<사진>저장 창고

<사진>지속적으로 복원 중인 건물들

<사진>포도 농장 주인집에서 발견된 포도 압축기

<사진>오렌지 가게
아침부터 저녁 폐장 시간까지 폼페이 유적지를 살펴 본 후 뿌듯한 마음으로 폼페이 유적지를 나왔다. 들어 갈 때는 눈에 띄지 않던 오렌지 가게들이 나올 때는 유난히도 빛나는 것이었다. 하루 종일 모노톤의 유적지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니, 갑자기 맞이한 현실의 컬러 톤이 상쾌한 충격으로 다가온 것이다. 2000년 전에는 폼페이 유적지도 모노톤이 아닌 컬러 톤으로 존재했을 것이다.
카프리
오늘날 카프리 섬은 그야말로 지중해에서 손에 꼽히는 고급휴양지가 되어 있었지만, 2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아무나 접근할 수 없는 로마 황제의 별장이 있었던 장소이다.
카프리에 매혹된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이 섬을 매입하여 별장을 지었고, 그것을 증. 개축한 2대 황제 티베리우스는 로마 제국의 시스템이 안정화 되자 이 섬에 은둔하여 거대한 로마 제국을 10년이나 통치하였다. 이 섬에의 꼭대기에는 사람들이 찾지 않는 티베리우스의 별장이 있다. 나는 이 별장에 가기 위해 시내를 벗어나 1시간 가량 산길을 걸어 올라가야만 했다. 시내를 벗어나자 한적한 시골 풍경이 눈 앞에 펼쳐진다. 깔끔하게 지어진 집들이 줄지어 있고, 잘 가꾸어 놓은 화단 등이 보인다. 시끄러운 해변이나 시내와는 매우 대조적인 모습이다. 별장은 남은 것이 별로 없다고 표현할 정도로 황량했지만, 그곳에서 바라보는 카프리의 전경은 일품이었다. 로마의 황제도 이런 깍아지는 듯한 절경에 매혹되었으리라.

카프리 섬에서 가장 있는 푸른 동굴이다. 좁은 입구를 뚫고 들어 오는 강렬한 빛이 바로 푸른 동굴의 오묘한 색깔을 만들어낸다. 빛의 강약에 따라서 바닷물의 색깔이 변하며, 이러한 색깔은 사람의 파렛트에서는 절대로 만들어 낼 수 없는 자연의 색깔이다. 동굴 안에 체류한 건 불과 몇 분이 되지 않지만, 그 느낌은 나폴리를 떠날 때까지도 쉽게 지워지지 않을 정도로 강렬한 것이었다.


<사진>카프리 해변 풍경

<사진>깔끔하게 꾸며진 시내 광장 주변

<사진>푸른 동굴 입구의 모습

<사진>동굴 안에서 바라 본 바깥 풍경

<사진>오묘한 빛깔의 푸른 동굴 내부

<사진>푸른 동굴 내부

<사진>아슬아슬하게 배들이 동굴로 들어가는 모습

<사진>깎아지는 듯한 카프리의 절경

<사진>티베리우스 황제의 별장

<사진>카프리의 모습

<사진>시내 관광지를 조금만 벗어나도 한적한 시골 풍경이 펼쳐진다.
나폴리
그리스의 파트라스와 이탈리아의 브린디시는 기원전에도 이탈리아 반도와 발칸 반도를 연결하는 주요한 해로였다. 과거의 해로를 이용해서 이탈리아에 도착하였다. 기차를 타고 바로 나폴리로 왔기 때문에 나폴리는 이탈리아 여행을 시작하는 장소이다.
세계 3대 미항으로 어떤 이는 죽기 전에 나폴리를 보라는 말을 남기기도 하였지만 거리에는 쓰레기들이 지저분하게 널려 있어서 그런 말들이 무색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오늘날 밀라노가 부의 도시라면 나폴리는 무질서하고 부패한 도시로 인식되고 있다고 한다. 이탈리아 역시 남북 문제로 홍역을 앓고 있는 것이다. 거리에는 유난히 흑인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로마 시대 북아프리카에서 끌려온 노예들의 후손일 것이란 생각이 든다. 길거리 가판에서는 로마의 소매치기들이 훔쳐 온듯한 것으로 보이는 휴대폰이나 디지털 카메라 등이 판매되고 있었다. 여행 중 만난 어떤 친구는 광장에서 담배 한 보루를 절반의 가격에 샀는데, 뜯어 보니 모두 스티로폼과 돌만이 가득했다고 한다. 그 사람들에게는 나폴리에 대한 나쁜 기억이 당분간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나폴리를 떠나면 생각해 보니 나폴리의 진정한 매력은 나폴리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근교에 있는 폼페이나 카프리에 있는 것이라 생각을 해 본다.

<사진>나폴리의 심볼이라 불리는 누에보 성

<사진>나폴리 풍경

<사진>나폴리의 작은 항구 풍경

<사진>해변가가 아닌 곳에서 하는 일광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