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전
‘퓨전’은 21세기를 대표하는 하나의 트렌드다. 흔히 퓨전을 단순히 무언가를 섞어놓은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퓨전은 ‘서로 다른 것들이 합쳐져서 새로운 것이 된다.’는 뜻이다. 퓨전이라는 단어자체는 매우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뜻을 함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진취적인 퓨전과 보수적인 사극이 만났다? 이는 매우 충격적인 합일이 아닐 수 없다.
MBC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퓨전 사극 '다모'
그래서 처음으로 이를 표방한 ‘다모’(MBC)는 텔레비전이라는 매체에서 늘 새로움을 갈구하는 시청자들에게 낯선 즐거움을 선사했다. 낯선 사극 다모의 성공으로 여러 사극들이 앞 다투어 퓨전사극으로 모습을 바꿨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궁녀와 의녀의 직업분야를 똑똑한 머리로 넘나드는 대장금(MBC)이 그러했고, 신라시대 해상왕 장보고의 일대기를 다룬 해신(KBS)도 퓨전사극을 표방했다.
2006년 들어서면서 이러한 퓨전사극 열풍은 중국의 동북공정이라는 시대상과 맞물려 더욱 왕성한 활동을 펼치게 됐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 속에서 사극은 현재 진화의 과정에 있다. 이제는 예전 전통사극으로는 현대인들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은 어려워졌다는 말이다. 그래서 전통사극의 자리를 퓨전사극이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퓨전사극은 비록 시공간적 배경은 과거를 표현하고 있으나, 그 속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은 현대인과 거의 같다. 예전에 전통사극의 모든 배우들이 지금은 사라진 옛 어투를 사용했다면, 퓨전사극의 배우들은 때론 현대 사람들과 같은 말투를 사용한다. 이는 등장인물의 대화에서뿐만이 아니라, 내용적인 측면에서도 그렇다. 전통 사극이 사실에 입각한 역사고증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면, 퓨전 사극은 재미와 흥미를 위해서 역사적 고증보다는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창조된 내용들로 구성됐다. 이것이 바로 현대인들이 퓨전사극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이유다.
그렇다면, 우리는 퓨전사극이 왕성하게 세력을 넓히며 하나의 새로운 드라마 장르로 자리를 잡아가는 이 시점에서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다. 전통사극에 비해 퓨전사극이 과연 좋기만 한 것인지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1980년 큰 인기를 누렸던 조선왕조 500년
물론, 현재 퓨전사극은 예전 내가 어릴 때보던 1980년대 조선왕조 500년 시리즈에 비하면 훨씬 쉽고 재미있어졌다. 그러나 무언가가 향상이 되었다면, 무언가는 밀려나기 마련이다. 퓨전사극의 재미는 역사성의 결여에서 오는 재미다.
현재 시청률 40%를 넘나들며, 드라마 1위 자리를 고수하고 있는 '주몽'(MBC)을 보면 이 점을 확연히 느낄 수 있다. 나약한 주몽이 강한 주몽이 되어 나라를 건설하기까지의 과정이 그려지는 드라마 주몽은 그러나 주몽과 대소, 금와, 유하, 해모수라는 몇 몇의 등장인물과 부여, 고구려라는 몇 개의 역사적 사실을 빼면 거의 대부분이 역사적 근거가 없는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주몽이 고구려가 아닌 다른 나라를 세운다고 해도 이 드라마는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그래서 주몽은 대하사극을 내세우고는 있지만, 사실 현대극과 뚜렷이 구별되는 점을 찾기는 힘들다.
이렇듯 퓨전사극에 역사성이 사라져가는 것으로 인해 혼란을 겪는 것은 바로 시청자들이다. 텔레비전 매체의 특성상 사람들은 사극을 매우 쉽게 접할 수 있고 이는 사람들의 사고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 요즘처럼 일주일 내내 사극을 접한다면, 이는 더욱 그러하다.
한국사에 대한 제대로 된 교육이 학교교육에 국한된 가운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극을 통해서 한국사를 접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때에 부정확한 역사극을 접한다면, 한국인의 역사관은 엉망이 되고 말 것이다. 실제로 드라마는 허구가 많이 섞여 있으므로, 역사가 왜곡될 소지는 다분하다.
현재 드라마 시청률 1위를 달리고 있는 주몽
MBC 드라마 ‘주몽’의 경우 현토태수 양정은 부여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지만, 사실 그 당시 현토 태수는 지금으로 말하면 지방군수에 지나지 않았다. 이 정도 직급의 관리가 왕을 좌지우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다. 또한 주몽이 두 번째 처인 과부 소서노를 부여에서 처녀로 만난다는 설정은 역사를 왜곡한 것이고, 한나라의 군사로 자주 등장하는 철기군(鐵騎軍) 역시 역사적 사료에 따르면 한나라의 군인일 수가 없다. 그 당시 한나라 군인들은 대부분 농민병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연개소문’(SBS)도 마찬가지다. 연개소문이 신라에서 김유신의 하인으로 등장하는 것은 말도 안 되며 김유신의 동생 보희와 정실부인 될 이화의 관계 또한 역사적으로 맞지 않는 것이다. 또한 연개소문이 당태종이 될 이세민과 친분이 있었다는 주장 또한 역사왜곡의 확실한 예다. SBS 드라마 연개소문 이렇듯 퓨전사극에서 변화 축소된 역사의식위에는 재미와 흥미라는 원초적인 본능만이 남았다. 이는 사극이라는 존재자체까지 흔들 수 있는 매우 큰 구멍이 아닐 수 없다. 어느 중견연기자는 현재 유행하고 있는 퓨전사극은 너무 가볍다고 비판했다. 사극에는 국민들의 사관을 확립하는 공적인 부분과 재미를 추구하는 오락적인 부분이 있어야 하는데, 요즘 사극에는 이 공적인 부분이 약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왕궁에서는 항상 골육상쟁만 일삼고, 등장인물들은 지적인 사고가 부족한 평면적인 인물들이 대부분이라고 비판했다. 이는 현재의 퓨전사극의 본질과 문제점을 꿰뚫는 발언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퓨전사극은 새로운 장르로 정착되면서 이러한 기본적인 문제점들을 노출하고 있다.
KBS 퓨전 사극 황진이는 퓨전사극의 공적인 부분과 오락적인 부분의 조화를 꾀하고 있다.
이러한 때에 퓨전사극 ‘황진이’(KBS)의 출현은 주목할 만하다. 일단 이 사극은 고구려 일색인 타 사극에서 벗어나 조선시대를 다루고 있고, 다른 사극들이 남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는데 반해,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차별적 흥미를 끄는데 성공했다. 황진이의 반가움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황진이는 시청자들에게 오락적 부분과 함께 공적인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황진이를 중심으로 한 조선시대 기녀들의 생활과 기예, 그리고 애환이 바로 그것이다. 이와 함께 최근에는 황진이가 입고 나오는 한복패션, 드라마 안에서의 전통춤과 한국적 연주 등이 사람들의 큰 관심을 끌고 있다. 이는 사람들이 사극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역사성의 기대감을 황진이가 어느 정도 충족해 주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황진이도 퓨전 사극이 가지고 있는 결함들을 어느 정도 내포하고는 있다. 기생이라는 신분적 직업을 미화하는 것도 그렇고, 황진이를 비롯한 등장인물의 말투는 현대극과 전통극 그 중간 정도에 있다. 또한 젊은 연기자들이 극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전통사극과 달리 가벼운 느낌을 주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황진이가 다른 사극에 비해 공적인 부분과 오락적인 부분을 적절하게 조합해 시청자의 관심을 끌고 있음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현재 20%를 넘나드는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고, 연일 인터넷 뉴스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도 사극은 계속 진화할 것이고, 당분간은 전통사극의 자리를 퓨전사극이 메우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퓨전 사극은 사극의 본질을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퓨전사극 ‘황진이’를 보면 이런 장면이 있다. 송도 기생 황진이가 조선의 예악을 없애기 위해서 온 명나라 사신을 맞이해 박연폭포라는 시를 지어 올린다. 황진이는 이 때 시를 통해 자국 문화에 대한 귀함을 역설한다. 명나라 사신은 황진이의 재기와 시에 감복해, 조선의 예악을 없애려는 계획을 포기한다.
나는 퓨전 사극의 본질도 여기에 있다고 본다. 황진이가 주장했던 나라에 대한 자부심 말이다. 현재 한국 시청자들이 사극에 대해 끊임없는 관심을 보이는 것도 한국의 뿌리로부터 찾을 수 있는 자긍심을 갖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러므로 퓨전 사극은 마땅히 이러한 공적영역에 더욱 많은 관심을 기울어야 한다.
퓨전 사극이 이를 지켜 한국인에게 적절한 고추장이 가미된 맛있는 비빔밥이 될 것인지, 아니면 고추장이 빠져 맛없는 비빔밥이 되어 버려질 것인지는 순전히 퓨전 사극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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