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먹고 잘사는 휴먼 다큐의 주인공!
인간극장이라고? ‘인간극장’ ‘VJ 특공대’ ‘세상에 이런 일이’와 같은 시청자의 제보나 사연을 바탕으로 제작되는 휴먼 다큐멘터리프로그램(이하 휴먼 다큐)들이 우리 TV 교양프로그램 목록에서 꽤나 많은 자리들을 차지하고 있다. 휴먼 다큐멘터리의 제작의도라 함은 “세상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그리고 재미와 감동을 전해주겠습니다.” 라는 것일 텐데 매번 방송되는 휴먼 다큐는 최루성 신파극으로 혹은 불쌍한 사람을 소개합니다. 라는 형식에 맞춰 제작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나 혼자뿐인가? 휴먼 다큐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요! 한 두달 전쯤 인간극장에서는 잘 먹고 잘 사는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기러기 아빠를 인간극장의 주인공으로 삼았었다. 그 방송이 나간 이후 인간극장의 시청자 게시판은 갑작스런 봉변을 당했다. 돈 있는 사람의 얘기가 어찌 인간극장의 소재가 되느냐? 부자 의사아빠가 나오는 게 무슨 다큐냐. 서민 우롱하는 것이냐. 돈 있고 집 있고 의사라는 번듯한 직업을 가진 의사 아빠가 아이들 유학 보내고 그런 사람이 무슨 외로움이냐. 무엇이 부족해서 우는거냐. 과연 그런 걸까? 이 글을 읽는 사람에게 하나 묻고 싶다. 잘살면 외로우면 안 되는 겁니까? 눈물 흘리면 안 되는 겁니까? 불치병에 걸려 죽어가는 아내를 보살피는 남편, 장애를 딛고 열심히 살아가는 아저씨, 온몸에 염증을 가지고 살아가는 아이를 가진 엄마의 눈물만 진짜 눈물입니까? 휴먼 다큐는 그렇게 만들어져왔고 시청자는 일방적으로 받아 들였다. 연출자들은 감동과 눈물이라는 주제의식에 사로 잡혀 계속해서 불쌍한 사람의 얘기만을 만들어 왔다. 지속적으로 생산된 휴먼 다큐는 하나의 틀을 만들어 냈다. 그 틀에 갇힌 시청자들은 불쌍한 사람이 아니라도 휴먼 다큐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새로운 변화를 꿈꾸지 못한다. 휴먼 다큐의 이종교배를 허락하지 않는다. 이미 휴먼 다큐는 신파극이라는 틀에 갇혀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휴먼 다큐를 바라보는 나의 마음은 짜증 반 안타까움 반이다. 참을 수 없는 휴먼 다큐 얼마 전 ‘세상에 이런 일이’ 프로그램에서 ‘코 없는 할머니’ ‘등 굽은 할아버지’ ‘링 위의 의족복서’라는 제목을 붙인 내용이 방영되었다. 프로그램의 내용을 꼬집어 내자는 것이 아니다. 이 얼마나 생각 없음의 극을 달리는 제목들이란 말인가! 세상에 코 없는 할머니라니! 프로그램 보지 않아도 알 만한 내용에 시작부터 눈물 콧물 쥐어짜내겠다고 지은 제목도 아니고 코 없는 할머니가 뭐란 말인가! 또 링 위의 의족복서라니! 신파극 마냥 이수일이와 심순애가 만나고 김중배의 다이아몬드가 어쩌구 저쩌구 이렇고 저렇고 했다더라! 참 슬픈 사랑 얘기가 아닐 수 없었다. 신파극을 주절주절 설명해주는 변사도 아니고 링 위의 의족 복서라니! 불의의 사고로 다리를 다친 불쌍한 사람이 용기와 희망을 잃지 않고 복싱에 도전한다. 그 아픔을 파헤쳐 보자! 라는 제목 아닌가! 안 봐도 비디오. 척 하면 삼천리다. 생각을 약간만 바꿔도 저런 제목을 당당하게 들고 나올 수 없는 것 아닌가? 차라리 “000씨 링 위에 서다!” 이런 제목은 어떤가? 제발 시작도 하기 전에 “감동과 눈물을 드려요.” 하며 샤바샤바 두 손 비비며 간사한 웃음을 흘리지 말란 말이다. 물론 신파극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휴먼 다큐는 이래야만 한다는 공식에 빠져 감옥과도 같은 틀에 익숙하게 만들지 말라는 말이다. 휴먼다큐는 트루먼쇼? 짐 캐리가 주연한 ‘트루먼 쇼‘라는 영화를 본 사람이 있을 것이다. 트루먼이 태어나서부터 자라는 동안의 모든 과정이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어 방영된다. 먹는 것, 자는 것, 슬퍼하는 것, 기뻐하는 것, 모든 것이 사람들에게 보여 진다. 물론 이건 영화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 의 휴먼 다큐는 어디까지 보여 줄 것인가? 물론 외부와 타자 그리고 나와 우리의 관계를 통해 차이가 발견된다면 자기를 돌아볼 기회를 만든다면 더 없이 좋은 프로그램이 되겠지만 정작 프로그램의 주인공이 되는 사람의 입장은 생각해 보셨는가 말이다. 자신의 요청에 따라 프로그램이 제작된다면 더없이 좋을 노릇이지만 타인의 제보라면 어디까지 보여줄 수 있는가? 신파극을 만들기 위해 그 사람의 아픈 부분을 대중 앞에 내어 놓기 위해 그것을 설득하고 만드는 작업들이 휴먼 다큐의 주인공이 되는 당사자에게는 얼마나 괴로운 것 일까? 난 ’코 없는 할머니‘ 편을 보면서 섬짓하기 까지 했다. 아픈 부분을 드러내고 그것을 방송하고 아름다운 감동을 주기 위해 포장하는 모습이 말이다. 할머니 너무너무 불쌍해요! 라는 외침 외에 그 무슨 얘기를 할 수가 있단 말인가. 휴먼 다큐 천개의 고원을 위해 다큐가 만들어 지는 이유는 그 상황이 어떻게 생기게 되었는가에 대한 논쟁점이 분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사람은 불쌍합니다!” 가 아니라 그것이 우리 사회에 어떤 문제를 보여주는가에 대한 것이 시청자에게 분명하게 전달되어야 한다. 논점도, 뭐가 문제인지도 보여주지도 않는 프로그램은 시청자를 바보로 만든다. 그 프로그램의 주절거림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TV는 말 그대로 바보상자 일 뿐이다. 획일화된 관점은 다양한 사고를 방해한다. 질 들뢰즈와 가타리는 천개의 고원을 말했다. 우리의 사유는 그만큼 다양할 필요가 있다. 휴먼 다큐는 한 개의 고원에 올라 밑을 내려다보고 있지는 않은가? “이렇게 만드세요 그게 좋은 다큐멘터리 라구요.” 라고 말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게 말한다면 그건 오만함의 극치다. 하지만 이 말 한 마디는 꼭 하고 싶다. 그리고 부탁하고 싶다. 우리의 삶을 하나의 다큐라고 본다면 개인의 삶이 다양한 만큼 다큐의 소재도 무한할거라고 생각한다. 변화를 꿈꾸자.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휴먼 다큐에 잘사는 사람 좀 나오면 어때? 불쌍한 사람만 나오란 법 없잖아?” 나도 당신도 휴먼 다큐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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