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6일 (금)
하룻밤의 숙소가 되어준 남아빈관(南亞貧館, 중국에서는 호텔을 貧館이라 한다.)은 별이 네 개 선명하게 그려진 호텔이다. 간단히 아침식사를 하고 쑤저우(蘇州) 관광을 나섰다.
쑤저우는 지면이 낮아 운하와 강이 잘 발달되어 있어 옛 시절에는 모든 집들이 배로 이동이 가능했다고 한다. 마르코폴로가 이곳을 보고 "동양의 베네치아"라 했다고 하는데, 곳곳에서 아직도 작은 배들이 물건과 사람을 운반하는 풍경을 볼 수 있고 수로를 따라 아슬아슬하게 지어진 작은 집들을 볼 수 있다. 베네치아와 비교한다면, 쑤저우의 도시 규모가 더 크고 거리가 수수하다는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아쉽다면 베니스에서는 골목골목 집접 걸어 다녔지만, 이곳에서는 버스를 타고 지나치며 직접 걷지를 못 한 점이다.
쑤저우의 수로 광경, 직접
찍지 못 해 다른 곳에서 빌려 온 사진
버스는 달려 호구에 도착했다. 이곳은 춘추전국시대의 오의 왕인 합려의 무덤이다.
오나라와
월나라는 이 지역의 패권을 잡기 위해 얼마나 경쟁이 치열했는지 두 나라는 오월동주(吳越同舟)라는 고사성어로 역사 속의 앙숙으로 기록된다.
'원수지간에도 같은 목적을 위해서는 한 배를 탄다'는 말이 그냥 나온게 아니고, '원수를 갚기 위해 풀섶에서 자고 쓸개를 씹는다'는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고사성어도 오의 부차와 월의 구천이 원수를 갚기 위해 한 행동이다. 여기에 미녀 스파이 서시(西施)까지 이 역사에
이름을 남기니...
오의 왕 합려는 월의 구천에게 패하고 죽어 이 곳 호구에 묻혔다. 합려의 아들 부차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풀섶에서 잠자며(臥身) 힘을 길렀고 결국 월의 구천을 물리쳤다. 겨우 목숨을 건진 월의 구천은 쓸개를 씹으며(嘗膽) 복수를 벼루고
여자스파이 서시를 보내 부차의 마을을 사로잡아 부차가 정사보다는 미색에 빠지게 하고 결국 오나라를 멸하였다.
이곳 호구(虎丘)는 이러한
역사 속의 전설이 많다. 오의 왕 합려가 이곳에 묻힌 후 백호(白虎)가 나타나 무덤을 지켰다고 하여 호구라 한단다. 호구의 입구엔 이 곳이
오나라의 가장 높은 산이라는 의미의 吳中第一山이라 크게 쓰인 문이 있다. 입구에서부터 춘추전국시대의 오나라가 친숙하게 느껴진다.
입구를 드러서자 조그만 다리가 나오고 다리 밑의 수로는 이곳이 물의 도시 쑤저우임을 상기시킨다. 관광객을 위한 예쁜 나룻배가 정말 타고 싶었다.
조금 올라가다
보니 우측에 시검석(試劍石)이라 쓰인 바위가 나타나고 그 아래에 가운데가 쫙 갈린 큰 바위가 있다. 예부터 오나라는 좋은 칼이 많았다고 한다.
이 시검석은 명검으로 잘린 바위하고 하는데 '믿거나 말거나' 쯤 아닐까 싶다.
또 조금 더 올라가니 합려의 무덤이라는 호구검지(虎丘劍池)가 나타난다. 예쁜 다리가 놓인 좁은 계곡에
위치한 작은 연못에 금붕어와 잉어가 노닐고 있는 이 호구검지는 오나라왕 합려의 무덤이라 한다. 합려는 죽으며 명검 3천자루와 함께 이곳에 묻혔고
흰호랑이가 이 무덤을 지켰는데, 나중에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 진시황이 명검을 얻기 위해 이곳에 사람을 보내 무덤을 파다고 호랑이가 나타나 뜻을
이루지 못 했으며, 파다 만 곳에 물이 고여 연못이 되었다고 한다.
호구검지를 우측으로 돌아 올라가니 사진 위로 보이는 예쁜 다리위로 연결된다. 다리에서 바라본 호구검지는
높지는 않지만 멋져 보이고 금붕어가 노닌다. 서시도 오의 왕 부차와 이곳에 자주 올라 왔다고 하니 서시가 올랐을 때도 이곳에 연못이 있었을련지
모르겠다. 전설에 의하면 연못은 진시황제 이후에 있어야 하니, 서시는 이 연못을 못 보았는지...
언덕을 계속 올라 산의 정상에 오르면 호구탑(운암사탑)이 우뚝 서 있다. 이 탑은 송나라시대에 쌓은
탑인데 이태리의 피사의 사탑처럼 기울어진 탑이다. 육안으로도 기울어져 보이는데 벽돌과 진흙으로 만든 아름다운 탑이다. 중국은 땅덩어리가 큰 만큼
탑도 거대하게 만들었구나 하는 감탄을 하게 된다. 산을 내려오며 찍은 사진에는 탑이 기울어져 보이지 않지만 언덕 위에 놓인 탑이 이곳에서는 가장
높은 산에 위치하고 있어 쑤저우의 가장 유명한 볼거리임에 틀림 없다.
호구탑 근경: 조금 우측으로 기울어진 걸 찍은 것인데 잘 드러나지는 않는다.
쑤저우는 예로부터 너른 평야가 발달하고 문물이 풍요로운 곳이다. 상해에서 쑤저우로 달려오는 동안 고속도로 주변으로 보이는건 모두
평야였다. 아무리 달려도 산이라는 걸 볼 수가 없었다. 실제로 이곳에서 가장 높은 산이 이곳 호구(吳中第一山)였는데 해발 40M란다. 그래도
사람들은 등산이 건강에 좋다고 이곳 호구를 많이 찾는다고 한다.
춘추전국시대의 얘기가 기원전 3-8세기쯤의 얘기인데 그 당시에도 이곳에는 절대군주가 등장하였으니 역시
중국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특히나 이곳은 잉여생산물이 많은 곳이라 국가간에 다툼이 많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예부터 화북지역의
황제들은 화남지역의 잉여 문물을 안전하게 가져오고자 하는 욕구가 많았고 수나라의 양제는 엄청난 일을 벌이니 북경부터 항주까지 1,800km의
대운하 건설이다.
경항대운하는 항주와 북경을 연결하였고 이후 최근까지도 운하를 더욱 넓히고 개축하여 100톤급의 선박도
운항이 가능하다고 한다. 위의 한산사 바로 앞의 경항대운하는 폭이 좁아 큰 배가 지나지는 못 할 것 같은데 큰 배도 지날 수 있는
별도의 운하를 연결하지 않았나 싶다.
수 양제는 고구려를 침범하였다가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으로 크게 대패한 황제로 잦은 고구려원정과
대운하 건설로 민심을 잃었고 민란이 잦았다고 한다. 수 양제는 대운하가 건설된 후, 3천 궁녀를 배에 태우고 북경에서 항주까지 왔다가 민란으로
인해 죽게 되었고 함께 온 3천 궁녀는 이곳 소주와 항주에 자리를 잡고 살게 되어 예로부터 이곳에는 미인들이 많다고 한다.
쑤저우를 지나는 경항대운하, 한산사
앞
한산사는 한산과 습득스님이 살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두 스님이 워낙 마음이 맞아 지음지교의 연을
맺었다고 하며, 이곳에는 백년해로를 빌기 위해 부부들이 함께 찾는다고 한다.
절의 대웅전 한편에 한산스님과 습득스님의 입상이
있는데, 두 사람이 헤어질 때의 모습이라고 한다. 서로 헤어지며 선물을 준비하였는데 한분은 연못에서 따온 연꽃을, 한분은 저작거리에서
주은 꽃병을 준비했다고 하여 서로 이처럼 마음이 맞았다고 한다.
한산사 안에 향을 태우며 소원을 비는 중국인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들은 향을 뭉치로 불로 태우고
향을 들고 고개와 허리를 숙여 절을 했는데 이런 인사를 사방으로 반복해서 하고 있다. 오랜 시간동안 하는 이 행동은 우리네 절과는 다른
모습이다.
중국인들이 이처럼 뭉치로 향을 태우는 것은 절이 멀어 자주 못 오니 한번 오면 여러 날의 소원을 빌고, 또 못 온 주변사람들의
소원을 함께 빌고 가기 때문이라고 한다. 젊은 아가씨가 한 뭉치 향을 들고 기도하는 모습을 사진에 담을 수 있었다.
한산사 건물 한편에 지구와 같은 공을 만지며 노는 숫사자상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는 건물주변과 탑 등에 예로부터 십이간지상을 세우거나 조각했다. 경복궁 근정전 주변 난간에 조각된 십이간지상이 그렇다고 할 수 있겠는데, 중국은 이와 달리 건물 주변에 사자상을 조각하고 세웠다. 양 옆으로 숫사자와 암사자가 있는데 숫사자는 지구공을 만지작거리고 암사자는 아기사자를 어루만진다. 보다 구체적인 고증은 모르겠지만 눈에 들어오는 모습만으로도 암사자와 숫사자의 구별은 어려움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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