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방송 다큐멘터리의 위기와 새로운 정체성 모색
손현철 프로듀서 (KBS 시사정보팀)
각 지상파 방송마다 시사, 정보, 역사, 환경, 휴먼 등의 단어를 앞에 붙인 ‘다큐’ 적인 성격의 프로그램들이 넘쳐나는 다큐멘터리 과잉, 범람의 시대에 다큐멘터리의 위기를 말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으로 들린다. 다큐의 위기나 정체성 혼란이란 말이 엄살로 들릴 만큼 History, National Geographic, Adventure, Discovery 등의 다큐전문 채널에서 매일 방송하는 해외와 국내 다큐멘터리만 해도 엄청나다. KBS만 보더라도 새 사장이 부임하면서 대한민국의 현대사와 사회 구조에 심각한 문제제기를 하는 ‘한국사회를 말한다’와 같은 다큐멘터리 프로그램들이 많이 등장했다. 기본 편성표에는 매일 방송되는 ‘인간극장’을 비롯하여 주간 단위의 ‘피플, 세상 속으로’, ‘이것이 인생이다’, ‘인물 현대사‘, ‘한민족 리포트’, 같은 휴먼 다큐와 ‘일요스페셜’, ‘제 3지대’ , ‘수요기획’ 같은 시사 다큐 등이 자리를 잡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방송 다큐멘터리의 정체(停滯)하고 있는 정체성(正體性, identity), 누구도 별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그 관습에 젖어 답습했던 ‘경향성’에 모종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이의 제기는 ‘현재의 다큐멘터리에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냐’는 반발에 직면할 수도 있다. 늘 방송 시간에 맞춰 납품하기에 급급한 생산자들은 현재 국내에서 제작․방송되는 다큐멘터리의 일반적 유형과 특징을 그대로 인정하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사실 관성에 빠져 일하는 것만큼 편안한 일도 없다. 게다가 어떤 프로그램은 천편일률적으로 제작하는데도 시청률이 기대 이상으로 잘 나온다. 하지만 시청자로부터 더 이상 볼 것이 없다는 불만이 터져 나오고 제작자도 매일매일 똑 같은 것을 반복하고 있음을 느낄 때야말로 뭔가 바꿔봐야 할 시기가 왔음을 말해준다.
1. 정체성의 위기는 어디로부터 오는가?
‘정체성’을 공유하고 있다고 믿는 집단의 구성원들이나, 하나의 큰 범주 안에 귀속된 개념들이 어느 순간부터 내가 여기에 속해 있는 것이 올바른가라는 문제 의식을 느끼기 시작할 때부터 정체성의 위기는 찾아온다. 위기의 시발점은 대부분 외부로부터의 충격과 그로부터 비롯된 '외부, 타자'와 '나, 우리'와의 ‘차이’의 깨달음이다. 일정 기간 내부의 별 잘못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가 서서히 외부와의 차이, 다름에 눈뜨면서 자기를 성찰하게 된다. 구성원들이 내부의 차이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전부 비슷비슷해 질 때, 서로가 형식과 내용에서 본질적으로 일체화를 이룰 때, 자신들이 통일돼 있다고 확신할 때, 역설적으로 정체성의 위기는 최고조에 달한다.
한국 방송다큐멘터리의 위기 또한 각 지상파의 방송 다큐멘터리의 내용과 형식이 단일 대오를 형성한 것처럼 서로 비슷비슷해진 오늘의 상황에서 비롯된다. ‘우리 이렇게 만드는 것이 정말 맞는 거야?’ 라는 의문이 여기저기서 들려오기 시작한 것은 케이블과 위성채널을 통해 해외의 ‘뭔가 다른’ 다큐멘터리들이 쏟아져 들어오면서부터이다. 비슷비슷한 것들끼리 서로를 참고하고 따라하는 동종교배의 기간이 길어지면서 너무 닮아버린 방송 다큐멘터리들이 해외의 새로운 것들에 화들짝 놀라면서 자신을 되돌아보는 일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다. 외부의 충격, 외부로부터 밀어닥치는 ‘뭔가 다름’에 의해 자신의 정체성에 의문을 갖기 시작하는
일이야말로 발전을 위해선 필수적이다.
이번 EBS의 다큐멘터리 축제도 정체성 위기를 증폭시키는데 한몫을 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와 너무나 다른, 차이가 분명한 타자의 모습이 원 없이, 충격적으로 몇 날 낮과 밤 동안 한국의 시청자와 제작자에게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다.
한 실체의 정체성은 영원 불변의 고정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유동적이고 역사적이고 시대적이다. 한국 방송 다큐멘터리의 정체성도 마찬가지이다. 한국 방송 다큐멘터리가 통시적으로 변화하면서 각 시기별로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채택해온 정체성은 고정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한국의 방송 다큐멘터리는 시대 별로 약간의 차이를 갖기는 하지만 거의 변함 없는 정체성을 유지해 왔다. 그리고 그 끈질긴 ‘정체성’은 이제는 벗어 던져도 좋을 만큼 우리 방송 다큐멘터리의 질적 변화와 발전을 가로막아왔다. 그 ‘정체성’ 은 다큐멘터리는 ‘이래야 해’
라는 묵시적인 명령․제약․지도로 나타나 다큐 제작자들을 옭매어 왔다.
어떤 집단이나 개인, 개념의 정체성을 찾는 일은, 그들이 현재 자신의 참 모습이라고 믿고 있는 가상적 정체의 허구를 뼈아프게 지적하는 데서 시작해야한다. 그것은 참된 정체성의 실현을 막고 있는 사이비 정체성을 폭로하고 수정하는 일이다.
필자는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 방송 다큐멘터리의 정체성이 무의식적으로 강요해온 ‘이래야 한다는 동일성’, ‘비슷비슷해지다 결국은 차이가 없어져 버린 획일성’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밝혀보고자 한다.
2. ‘정체성’이라는 동전의 양면 - 동일성과 획일성
‘정체성’ 이란 ‘같음’, ‘동일함’을 본질로 한다. ID 카드의 사진과 ID 카드 소지자의 얼굴이 같아야 ‘정체’가 확인되는 것이다. 서로 다른 내용과 형식을 가졌으면서도 수많은 방송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 ‘다큐멘터리’ 라는 개념으로 묶일 수 있는 것은 그들 사이의 어떤 동일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를 다른 것과 구별해 한 곳에 몰아 넣는 울타리는 실제 일어난 ‘현실’이다. 다큐멘터리가 다큐멘터리인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드라마처럼 ‘허구’를 다루는 것이 아니고 ‘현실․사실․진실’을 다루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기초적인 동일성을 두고 한국 다큐멘터리의 정체성을 논하는 것은 동어반복이 될 가능성이 많다.
왜냐하면 한국의 방송 다큐멘터리 치고 '현실'을 다루지 않는 다큐멘터리는 없기 때문이다. 1980년대부터 ‘허구’를 사실인 것처럼 그럴듯하게 꾸며서 시청자를 골탕먹이고 놀라게 하는, 그러면서 색다른 재미를 주는 Mock-Documentary, Fake Documentary가 서구 방송계에서 자리를 잡기는 했지만 , 아직도 ‘근엄과 심각’이 지배하는 한국 사회에서 ‘사실’을 가지고 희롱하는 다큐멘터리는 아직 설자리가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논의의 초점을, ‘모두가 너나 없이 ’현실‘만을 다루는 한국의 방송 다큐멘터리가 ① 왜 이 세상의 수많은 ‘현실’ 과 ‘진실 중 어떤 ’현실‘과 ’진실‘을 선택하고 있으며 또 ② 그렇게 선택한 ’현실‘과 ’진실‘을 어떤 방식으로 다루느냐에 국한 시켜야 할 것이다. 의문형인 위의 두 의제를 잠정적인 가설 형태로 바꿔 말하면 , ① 한국 방송 다큐멘터리가 수많은 ‘현실’ 중 ‘어떤 현실’에 가중치를 두거나 모종의 ‘경향성’을 띠면서 선택하고 있으며, ② 그렇게 선택한 현실을 아주 유사한 방식, 더 심하게 말해서 거의 획일적인 방식으로 다루고 있다 가 된다.
오늘 이 자리에서 ①의 의제를 다루는 것은 필자의 능력을 벗어난 일이다. 현실과 소재 선택의 경향성은 통계적인 접근 방식의 도움 없이는 논의 전개가 힘들어진다. 한국 방송의 인물 다큐멘터리가 그 동안 다룬 인물 중에서 ‘장애인’ 이 정치가나 기업인보다 월등히 많을 것이라는 추측은, 그 동안의 방송 경향 상 짐작은 가능하지만 일정기간 동안 방송 된 인물 다큐멘터리를 전부 검색해 통계적으로 검증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확실히 옳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겉으로 보기에 한국의 방송 다큐멘터리는 역사, 시사, 과학, 환경, 인물, 문화 등 우리 사회 각 분야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현상과 사실 중 빠트리고 다루지 않는 곳이 없어 보인다. 만약 우리 방송에도 서구의 Mock 다큐멘터리 같은 장르가 있다면, ‘사실’
과 ‘그럴듯한 사실’ 중에서 어떤 것을, 어떤 기제를 통해 선택해서, 어떤 스타일로 다큐멘터리를 만드는가 라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다큐멘터리의 제작 환경이 그런 식으로 바뀌어 간다면 ①의 의제도 앞으로 충분히 논의해 볼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위와 같은 이유로 오늘 이 자리에서는 ①의 의제보다는 ②에 집중하기로 한다. 결국 한국 방송 다큐멘터리의 정체성이라 함은 ‘현실’을 다루는 방식의 유사함과 동일함에서 비롯된다고 잠정적으로 추론할 수 있다. 물론 이 추론이 개별 다큐멘터리들을 학문적으로 다양하게 분석한 결과는 아니다. 그동안 현업에서 다큐멘터리 또는 그와 유사한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부딪히고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우리 방송 다큐멘터리의 동일성과 획일성을 나름대로 분류해서 정리한 것이다.
3. 한국 방송다큐멘터리가 ‘현실’을 기록하고 다루는 방식의 획일성
a. 변사(辯士) 다큐멘터리
- 왜 한국 방송 다큐멘터리에는 힘과 감동이 없을까?
한국 방송 다큐멘터리의 대부분은 무성 영화의 신파적인 해설자인 ‘변사 다큐멘터리’로 전락한지 오래다. 시사․ 문화․ 인물․ 자연․ 과학․ 역사 등 거의 모든 유형을 가리지 않고 해설자라는 ‘변사’의 도움 없이는 홀로 설 수 없는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 중에서도 현장의 생생함을 생명으로 하는 인물, 자연 다큐멘터리가 변사 다큐멘터리의 대표 선수가 되어 버렸다. 단순히 내레이션의 양이 많다는 것을 지적하는 차원에서 ‘변사 다큐멘터리’ 라는 다소 모욕적인 표현을 쓴 것은 아니다. 해설의 양적 측면을 넘어서,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는 언어 해설’이 ‘영상과 현장음으로 이뤄진, 감각적 구체물인 영상 다큐멘터리’ 에 가하고 끼치는 질적인 변화와 치명적인 해악을 감안할 때, 한국 방송의 다큐멘터리는 ‘변사 다큐멘터리’라는 뜻이다. ‘변사’는 객관성을 가장하면서 ‘현실’ 자체와
시청자 사이에 장막을 친다. 변사라는 필터를 통해 ‘다큐멘터리라는 2차적 현실’은 다시 한번 변형을 겪고 시청자에게 전달된다.
자신이 맞닥뜨린 ‘현실’, ‘상황’ 그 자체에 연출자가 자신감이 없어서일까? 해설은 그야말로 최소한의 정보 전달 역할만 하면 되는데, 연출자는 ‘사실’이 자신의 의도까지 말해주길 바라면서 그 의도를 노골적으로 해설로 위장한다. 심한 경우 인물다큐의 연출자가 파악한 주인공의 심정까지 해설로다 말해 버린다. 인물의 표정과 행동, 말로 전달하고 시청자 스스로 느끼게 해주면 될 것을 해설이 개입해 모든 것을 미리 규정해 버린다.
시청자가 다양한 영상과 현장음을 보고 듣고 심리적으로 반응하는 과정은 마치 빗방울 여러 개가 연못에 떨어져 만든 파문이 서로 부딪히고 간섭하면서, 혼란스럽긴 하지만 일정한 패턴을 만들어 가는 것과 유사하다.
한 인상적인 영상을 보면서 수백만의 시청자는 서로 다른 수 백만 가지의 상념을 느끼고 이것이 연속적으로 누적되면서 각자마다 하나의 감동을 형성하게된다. 추상적인 언어 해설은 이런 맥을 끊고 일방적인 방향을 강요하게 된다. 이는 마치 미술관 가서 그림을 보면서 첫 인상(impression)을 받고 음미하기도 전에, 평론가의 해설을 먼저 듣고 그림에 대한 선입관을 갖는 꼴이다.
변사 다큐멘터리의 문제는 무엇인가? 실제 현장과 상황, 사건과 인물의 생생함을 언어해설의 탈을 잘못 쓴(또는 쓰지 않아도 될) 연출자가 중간에 끼어듦으로써 시청자의 감정의 흐름을 차단한다는 점이다. 불필요한 해설 때문에, 시청자가 영상을 ‘보고 느끼기도’ 전에 영상과 현장음은 그 생명력을 잃고 언어 해설의 종속 변수로 떨어지고 만다. 자신의 의도를 빠르게, 빠뜨리지 않고 전달하고 싶은 조급증과 노파심에 빠진 연출자는 자꾸 영상보다는 ‘해설’에 주도권을 넘겨 버린다.
시청자가 영상을 보고 수 만 가지를 구체적으로 느끼고 주관적으로 이해하는 감각의 영역에, 너무 빨리 해설이라는 추상적인 언어가 침입해 객관을 가장한 설명으로 시각 정보를 박제로 만들어 버린다. 따라서 변사 다큐멘터리에서는 ‘TV가 영상 매체’라는 사실은 단지 시청자가 눈으로 화면을 보고 있다는 ‘물리적이고 감각적인 상황’ 빼고는 전혀 의미가 없다.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언어 해설에 의존하다 보면 ‘언어적 논리’와 ‘영상 논리’의 주종 관계에 익숙해진다. 이것이 깊어질수록 촬영하고 편집하는 과정에서도 이런 권력 관계가 그대로 유지된다. 새내기 방송 다큐멘터리 연출자들은 ‘관찰하는 법’ 보다는 먼저 ‘구성하는 법’을 배운다. 현실과 부딪히기 전에 미리 예상되는 현실 상황의 전개 틀을 짜 놓고, 촬영 나가서 꼼꼼히 관찰하기보다는 보고 싶고, 듣고 싶은 것만을 담으려 한다. 아예 해설과 논리의 뼈대를 잡아 놓고 그에 맞춰 해설의 밑그림용으로 촬영을 하기도 한다. 편집도 영상의 감각적 논리를 증폭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적 해설의 충실한 밑받침용으로 맞춰진다.
해설은 영상이 촉발한 감각의 영역을 심화하고 극대화 할 경우에만 쓸모가 있다. 5.1 채널 홈씨어터로 해설자의 나레이션을 짜증나게 듣는 것보다는 생생한 현장음과 음악을 즐기는 편이 훨씬 낫다는 것을 연출자들이 빨리 깨달아야 한다. 영상의 의미 전달은 영상에게 맡겨야 한다. 영상 그 자체가 드러내는 진실과 시청자 사이에 연출자가 ‘해설’이라는 수단으로 과도하게 개입해 영상을 죽이는 일을 그만두지 않으면, 한국 방송 다큐멘터리는 생생한 인간을 미라로 만들어 버리는 박제성을 극복하기 힘들 것이다.
b. ‘코드’ 에 갇힌 다큐멘터리
- 왜 한국 방송 다큐멘터리는 다 같아 보일까?
한국 방송 다큐멘터리는 대부분 독창적이지 못하고 그 나름의 개성을 찾아보기 힘들다. 각 지상파 방송사의 로고와 제작진 스크롤을 가리고 시사하는 블라인드 테스트를 해본다면 각 방송사 별로, 각 연출자별로 어디서 제작했고 누가 만들었는지 구별하기 힘들 것이다. 특히 ‘일요스페셜’ 이나 ‘VJ특공대’ 같이 정규 편성된 프로그램 타이틀 아래 제작된 작품들을 시사한 후 개별 다큐멘터리의 특성에 따라 연출자를 구별해내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럴 만큼, 소재는 다를지언정 스타일과 형식면에서 비슷비슷한 다큐멘터리가 동일한 기획의도를 가진 편성 프로그램의 틀과 규칙 안에서 생산되고 있다. 말로는 뭔가 다른, 파격적인 작품을 원하지만, 실제는 개성과 독창성보다는 집단적 유사성이 안전하고 무난하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다.
각 편성 프로그램이 선호하는 틀과 규칙을 ‘코드’ 라고 한다면, 그 ‘코드’에 맞춰 소재와 사실이 선택되고 그 코드가 원하는 스타일로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진다. 따라서 아무리 새로운 소재와 사실이 발굴돼도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유사한 다큐멘터리가 나올 수밖에 없다. ‘VJ특공대’의 카메라는 몇 년 전이나 지금이나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별 의미 없는 줌 인과 줌 아웃, 트랙킹, 팬을 어지럽게 반복하고, ‘일요스페셜’의 시사다큐는 예나 지금이나 의미와 정보는 있지만 별 감흥은 없는 내용을 무미건조하게 신문 기획기사처럼 쭉 엮어 놓는다.
별 변화를 용납하지 않고 이종 교배도 허용하지 않는 ‘코드’라는 감옥에 ‘현실’과 '연출자'가 모두 갇혀 있는 셈이다. ‘코드’는 한 편성 프로그램 아래의 개별 다큐멘터리의 통일성을 확보하는데 유용하고 타 프로그램과의 변별성을 확보하는데는 유용한 표지가 되기도 하지만 깊은 반성 없이 관성적으로 적용할 때에는 개별 다큐멘터리의 혁신과 발전을 저지하는 장벽이 된다. 기획회의에서 채택되지 못한 수많은 아이템들이 프로그램의 기획의도, 코드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이라는 것을 PD 들은 잘 알고 있다. 소재가 운 좋게 채택됐을 때도 코드가 종용하는 수많은 제약과 한계 때문에 별 빛을 발하지 못하고 고만고만한 내용으로 전락해 버리는 경우도 많다. 때로 코드를 충족시키지 못한 훌륭한 소재가 ‘특집 다큐멘터리’라는 이름으로 살아남기도 하지만 ‘코드 지향’ 은 다큐멘터리의 발전 측면에서 본다면 약보다는 독이 된다.
다큐멘터리의 혁신을 옭매는 ‘코드’의 배후는 민영방송의 경우에는 시청률과 대중 영합주의, 공영방송의 경우에는 기계적인 공영성, 민주화 이전의 모든 방송에겐 정권의 취향 등이다. 방송사 경영진이나 고위간부의 선호도, 시대의 분위기, 이념적 거대담론, 시의성 등도 ‘코드’의 권력 유지를 위한 강력한 후원자다. ‘코드’의 폐해는 연출자의 현실, 객체에 대한 접촉을 왜곡하고 때로는 차단하는 것이다. ‘코드’는 다큐멘터리 연출자의 오염되지 않은 직접적인 관찰과 기록 자체를 최초부터 방해한다. 연출자는 ‘저런 건 프로그램이 되지 않아’, ‘제안해 봤자 채택도 안 돼’ 라는 선입관에 가득 차 사실 , 진실 그 자체로부터 멀어진다. 방송 다큐멘터리 연출자의 자기 검열, 방송사의 내부 검열 등에 의해 어떤 종류의 사실과 진실은 기록되기도 전에 무시되고 잊혀지는 것이다.
이에 반해 독립 다큐멘터리 연출자들은 순수한 관심에서 ‘코드’의 방해 없이 사실 그 자체에 접근한다. 물론 독립 다큐멘터리 연출자들도 개인의 계층․이념․소득․성에 따라 그가 접하는 사실을 거르는 다양한 필터를 가지겠지만, 그것이 방송 다큐 연출자들을 제약하는 코드만큼 강력하지는 않다.
다큐멘터리의 본질이 다양한 현실의 기록과 묘사라는 데 모두가 동의하는 상황에서 ‘현실, 사실, 객체 지향’이 아니라 코드 지향의 다큐멘터리가 득세하는 것이 한국 방송 다큐멘터리의 현실이다. 우리 주변의 다양하고 천차만별한 현실과 진실이 ‘코드’의 체를 통과하지 못한 만큼, 우리의 방송 다큐멘터리는 종(種) 다양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획일적으로 되가는 것이다. ‘코드 지향’의 굴레를 깨기 위해서는 연출자의 자기 혁신과 저항이 필수적이다. 연출자들이 코드 지향이 아니라 순수한 현실, 객체 지향일 때,
거기서 사실 자체의 강력한 동력과 다양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관찰할 때, 개개의 사실과 소재에 걸 맞는 독특하고 고유한 형식과 스타일이 생겨날 것이다. 그러한 저항을 바탕으로 뭐라 이름 붙이기 힘들 정도로 새롭고 이상하고 낯선, 다양한 형식과 종류, 장르의 다큐멘터리가 등장해야한다.
연출자와 사실을 코드에서 해방시켜야한다. 다큐멘터리의 ‘작가주의’와 현실의 ‘사실주의’ 가 치열한 시청률 경쟁의 상황에서 사치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코드 지향주의를 극복하고 사실과 현실을 우선시 하는 ‘사실주의’를 제일로 놓지 않으면 한국 방송의 다큐멘터리는 영원히 몰개성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c. 주제의 포로가 된 다큐멘터리
- 왜 한국 방송 다큐멘터리는 근엄하고 강압적인 느낌을 줄까?
한국 방송 다큐멘터리의 대부분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딱딱하고 뻣뻣하다. 몇몇 연성 다큐멘터리는 예외로 친다 하더라도, 시사․ 과학․ 역사․ 자연은 물론이고 때로는 문화 다큐멘터리조차도 너무 심각하고 근엄한 경우가 많다. 한국 방송 다큐멘터리가 ‘현실’을 다루고 요리하고 풀어 나가는 방식이 상상력을 잃고 박제가 된 정석 위주에다 융통성이 없고 딱딱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그렇게 보이게 하는 이유는 다큐멘터리가 염두에 두고 있는 주제 의식과 문제의식이 너무 강하게 연출자를 사로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연출자의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가 있다보니 그가 모는 차에 탄 시청자들은 갑자기 팍팍 꺽는 운전대에 놀라고 이리저리 부딪히는 꼴이다.
대부분의 시사와 역사 다큐멘터리는 너무 뚜렷한 주제와 문제 의식을 가지고 있다. 뭔가 문제점을 꼭 폭로하고야 말겠다는 목적 의식이 앞서 있거나, 그것을 말하는 목소리는 지사적 심각함과 결단으로 가득 차 있다.
무엇인가를 힘주어 말하지 않으면, 무슨 의미든 부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뭔가 사회적 책임감을 이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경우가 많다. 누가 옳고 그른지, 진실이 무엇인지 반드시 밝혀내겠다는 연출자의 의지가 다큐멘터리 전반에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한국의 방송 다큐멘터리 연출자들은 그것이 중요한 사회적 의제든 아니면 소소한 사물이든 간에 그 ‘말하고자 하는 바’의 포로가 돼있다. 얘기 거리를 풀어 나가는 방식은 은근하고 부드럽기보다는 너무 당당하고 직선적이다. 처음에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경우가 많아서, 몇 분 보지 않아도 짐작이 가는 경우가 많다. 슬쩍 내비치는 것이 아니라 솔직하고 대담하게 ‘나 앞으로 이럴 거야. 볼래? 말래? ‘ 라고 다그친다. 연출자는 자신만만하고 확신에 차 있다. 제시하는 증거와 논거들은 확실하게 다큐멘터리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들로 차 있다. 영상자료를 많이 사용할 수밖에 없는 역사․시사 다큐멘터리들은 그 정도가 더 심하다. 한 번 꼬거나 한 바퀴 돌려서 우회적으로 진실을 내세우는 것이 감질나는 모양이다.
따라서 시청자는 논리 전개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빠져 들어가 점층적으로 연출자의 의도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강요당하다시피 설득된다. 그래서 다 보고 난 후 여운을 즐기면서 동감하기보다는, 대략은 옳지만 일방적으로 주입됐다는 느낌을 떨쳐버리기 힘든, 설교를 듣고 난 기분이 된다. 다큐멘터리가 주장하는 바와 다른 의견을 가진 시청자는 더욱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런 지적이 확실한 주제의식과 결연한 의지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 밑바탕이 회초리를 든 강압적인 교사의 이미지로 시청자에게 다가가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뚜렷한 주제의식은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전면에 너무 노골적으로 나타날 경우, 감동은 줄며, 시청자는 반발하게 된다. 설득은 다양한 차원에서 공감각적으로, 중층적으로, 다차원적으로 이뤄져야 효과가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다큐멘터리는 일차적이고 직접적으로 진실을 주장하려고 한다. 비리의 폭로는 있지만 그것을 끝까지 힘있게 몰고 가는,
사실들 사이의 숨겨진 고리를 읽고 찾아내는 상상력은 없다.
현실의 힘있는 기술(記述)은 이면의 본질을 파헤치고, 정곡을 찌르면서 때로는 후퇴하고 때로는 전진하는, 몇 번의 우여곡절과 굴절을 거쳐 몇 번씩 뒤집어 지면서 진행해야 한다. 현실을 그렇게 기술하고 묘사하는 것은 연출의 조작이 아니다. 현실은 이미, 먼저, 우리가 그것을 발견하기 전에
그런 생생하고 대립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다. 연출자는 그것을 찾아내고
충실하게 기록해야 한다. 그렇게 밝혀진 진실은 오래 기억되고 또 떨쳐 버리기 힘들다.
말하고자 하는 바에 자신감이 넘치고 그것에 지나치게 몰두해 힘이 들어가면 중간에 팍 꺽어지는 법이다. 주제로부터, 주장으로부터 몇 발짝 물러나서 진실을 서서히, 은연중에 드러나게 해야한다.
연출자는 주제로부터 자유롭게 이탈하기도 하고, 소재와 분리되거나 그것을 둘러싸고 회전도 하면서 운신의 폭을 넓힐 때만 주제와 소재의 포로가 되지 않고 그것의 주인이 될 수 있다.
4. 맺는 말
- 한국 방송 다큐멘터리의 새로운 정체성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지금까지 한국 방송 다큐멘터리의 정체성은 ‘① 각 편성 프로그램의 코드에 맞는 테마 또는 소재를 ② 언어적 논리에 치우친 해설로 평면적이고 단선적으로 구성하고 ③ 주제와 의도에 지나치게 경도해 엄숙주의와 건조 일색의 Tone & Manner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그 동안 몇몇 특집 다큐멘터리와 몇몇 연성 다큐멘터리 실험이 있긴 했지만 그것도 곧 매너리즘의 틀에 갇히는 상황이 되풀이 됐고, ‘전형’의 본질적인 변화는 요원한 실정이다.
이런 정체성의 정체(停滯)를 뛰어넘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다큐멘터리 제작자의 자기 혁신이 이뤄져야 한다. 이제 한국 방송 다큐멘터리의 혁신을 위해 전위에 설 다큐멘터리들은 정보와 의미 전달에 치우친 서술 방식을 과감히 버리고 ‘발견의 놀라움’과 ‘박진감 있는 드러냄의 미학, ‘현실의 자연스러운 감동’(극적 감동이 아닌)의 구조를 획득해야 한다. ‘현실’의 집요하고 세밀한 관찰, 폭로의 수준을 넘어서 사실들의 심층에 숨겨진 연결 고리를 찾는 상상력, 전위적인 영상언어와 새로운 영상문법, 다양하고 독창적인 관점, 파격적이고 다층적인 서사구조 (Narrative) 등의 실험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연출자를 제약하고 짓누르는 주제의 무거움과 코드의 교묘함을 벗어 던지고 생생한 현실․진실로 회귀, 환원해야한다. 지금까지의 다큐멘터리에 대한 모든 선입관과 판단에 괄호를 치고 가장 기본적인 ‘현실’ 그 자체로 돌진해야 한다.
한국의 시청자들은 이미 90년대와 2천 년 대 들어 널리 보급된 케이블․위성 채널을 통해 해외의 다양한 방송 다큐멘터리를 접해왔다. 세계화 시대에 맞춰 한국 방송 다큐멘터리 제작진 또한 우리 ‘다큐멘터리의 정체성과 변화 방향’에 대한 진지한 연구를 시작해야 할 때가 왔다.
위에서 든 한국 방송 다큐멘터리가 내부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획일성을
타파하고 새로운 정체성을 찾지 않으면, 한국 방송의 다큐멘터리는 시청자의 버림을 받거나, 아니면 새롭게 등장할 방송 장르의 위세에 눌려 근근히 명맥을 유지하게 될지도 모른다
손현철 프로듀서 (KBS 시사정보팀)
각 지상파 방송마다 시사, 정보, 역사, 환경, 휴먼 등의 단어를 앞에 붙인 ‘다큐’ 적인 성격의 프로그램들이 넘쳐나는 다큐멘터리 과잉, 범람의 시대에 다큐멘터리의 위기를 말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으로 들린다. 다큐의 위기나 정체성 혼란이란 말이 엄살로 들릴 만큼 History, National Geographic, Adventure, Discovery 등의 다큐전문 채널에서 매일 방송하는 해외와 국내 다큐멘터리만 해도 엄청나다. KBS만 보더라도 새 사장이 부임하면서 대한민국의 현대사와 사회 구조에 심각한 문제제기를 하는 ‘한국사회를 말한다’와 같은 다큐멘터리 프로그램들이 많이 등장했다. 기본 편성표에는 매일 방송되는 ‘인간극장’을 비롯하여 주간 단위의 ‘피플, 세상 속으로’, ‘이것이 인생이다’, ‘인물 현대사‘, ‘한민족 리포트’, 같은 휴먼 다큐와 ‘일요스페셜’, ‘제 3지대’ , ‘수요기획’ 같은 시사 다큐 등이 자리를 잡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방송 다큐멘터리의 정체(停滯)하고 있는 정체성(正體性, identity), 누구도 별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그 관습에 젖어 답습했던 ‘경향성’에 모종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이의 제기는 ‘현재의 다큐멘터리에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냐’는 반발에 직면할 수도 있다. 늘 방송 시간에 맞춰 납품하기에 급급한 생산자들은 현재 국내에서 제작․방송되는 다큐멘터리의 일반적 유형과 특징을 그대로 인정하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사실 관성에 빠져 일하는 것만큼 편안한 일도 없다. 게다가 어떤 프로그램은 천편일률적으로 제작하는데도 시청률이 기대 이상으로 잘 나온다. 하지만 시청자로부터 더 이상 볼 것이 없다는 불만이 터져 나오고 제작자도 매일매일 똑 같은 것을 반복하고 있음을 느낄 때야말로 뭔가 바꿔봐야 할 시기가 왔음을 말해준다.
1. 정체성의 위기는 어디로부터 오는가?
‘정체성’을 공유하고 있다고 믿는 집단의 구성원들이나, 하나의 큰 범주 안에 귀속된 개념들이 어느 순간부터 내가 여기에 속해 있는 것이 올바른가라는 문제 의식을 느끼기 시작할 때부터 정체성의 위기는 찾아온다. 위기의 시발점은 대부분 외부로부터의 충격과 그로부터 비롯된 '외부, 타자'와 '나, 우리'와의 ‘차이’의 깨달음이다. 일정 기간 내부의 별 잘못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가 서서히 외부와의 차이, 다름에 눈뜨면서 자기를 성찰하게 된다. 구성원들이 내부의 차이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전부 비슷비슷해 질 때, 서로가 형식과 내용에서 본질적으로 일체화를 이룰 때, 자신들이 통일돼 있다고 확신할 때, 역설적으로 정체성의 위기는 최고조에 달한다.
한국 방송다큐멘터리의 위기 또한 각 지상파의 방송 다큐멘터리의 내용과 형식이 단일 대오를 형성한 것처럼 서로 비슷비슷해진 오늘의 상황에서 비롯된다. ‘우리 이렇게 만드는 것이 정말 맞는 거야?’ 라는 의문이 여기저기서 들려오기 시작한 것은 케이블과 위성채널을 통해 해외의 ‘뭔가 다른’ 다큐멘터리들이 쏟아져 들어오면서부터이다. 비슷비슷한 것들끼리 서로를 참고하고 따라하는 동종교배의 기간이 길어지면서 너무 닮아버린 방송 다큐멘터리들이 해외의 새로운 것들에 화들짝 놀라면서 자신을 되돌아보는 일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다. 외부의 충격, 외부로부터 밀어닥치는 ‘뭔가 다름’에 의해 자신의 정체성에 의문을 갖기 시작하는
일이야말로 발전을 위해선 필수적이다.
이번 EBS의 다큐멘터리 축제도 정체성 위기를 증폭시키는데 한몫을 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와 너무나 다른, 차이가 분명한 타자의 모습이 원 없이, 충격적으로 몇 날 낮과 밤 동안 한국의 시청자와 제작자에게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다.
한 실체의 정체성은 영원 불변의 고정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유동적이고 역사적이고 시대적이다. 한국 방송 다큐멘터리의 정체성도 마찬가지이다. 한국 방송 다큐멘터리가 통시적으로 변화하면서 각 시기별로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채택해온 정체성은 고정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한국의 방송 다큐멘터리는 시대 별로 약간의 차이를 갖기는 하지만 거의 변함 없는 정체성을 유지해 왔다. 그리고 그 끈질긴 ‘정체성’은 이제는 벗어 던져도 좋을 만큼 우리 방송 다큐멘터리의 질적 변화와 발전을 가로막아왔다. 그 ‘정체성’ 은 다큐멘터리는 ‘이래야 해’
라는 묵시적인 명령․제약․지도로 나타나 다큐 제작자들을 옭매어 왔다.
어떤 집단이나 개인, 개념의 정체성을 찾는 일은, 그들이 현재 자신의 참 모습이라고 믿고 있는 가상적 정체의 허구를 뼈아프게 지적하는 데서 시작해야한다. 그것은 참된 정체성의 실현을 막고 있는 사이비 정체성을 폭로하고 수정하는 일이다.
필자는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 방송 다큐멘터리의 정체성이 무의식적으로 강요해온 ‘이래야 한다는 동일성’, ‘비슷비슷해지다 결국은 차이가 없어져 버린 획일성’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밝혀보고자 한다.
2. ‘정체성’이라는 동전의 양면 - 동일성과 획일성
‘정체성’ 이란 ‘같음’, ‘동일함’을 본질로 한다. ID 카드의 사진과 ID 카드 소지자의 얼굴이 같아야 ‘정체’가 확인되는 것이다. 서로 다른 내용과 형식을 가졌으면서도 수많은 방송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 ‘다큐멘터리’ 라는 개념으로 묶일 수 있는 것은 그들 사이의 어떤 동일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를 다른 것과 구별해 한 곳에 몰아 넣는 울타리는 실제 일어난 ‘현실’이다. 다큐멘터리가 다큐멘터리인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드라마처럼 ‘허구’를 다루는 것이 아니고 ‘현실․사실․진실’을 다루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기초적인 동일성을 두고 한국 다큐멘터리의 정체성을 논하는 것은 동어반복이 될 가능성이 많다.
왜냐하면 한국의 방송 다큐멘터리 치고 '현실'을 다루지 않는 다큐멘터리는 없기 때문이다. 1980년대부터 ‘허구’를 사실인 것처럼 그럴듯하게 꾸며서 시청자를 골탕먹이고 놀라게 하는, 그러면서 색다른 재미를 주는 Mock-Documentary, Fake Documentary가 서구 방송계에서 자리를 잡기는 했지만 , 아직도 ‘근엄과 심각’이 지배하는 한국 사회에서 ‘사실’을 가지고 희롱하는 다큐멘터리는 아직 설자리가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논의의 초점을, ‘모두가 너나 없이 ’현실‘만을 다루는 한국의 방송 다큐멘터리가 ① 왜 이 세상의 수많은 ‘현실’ 과 ‘진실 중 어떤 ’현실‘과 ’진실‘을 선택하고 있으며 또 ② 그렇게 선택한 ’현실‘과 ’진실‘을 어떤 방식으로 다루느냐에 국한 시켜야 할 것이다. 의문형인 위의 두 의제를 잠정적인 가설 형태로 바꿔 말하면 , ① 한국 방송 다큐멘터리가 수많은 ‘현실’ 중 ‘어떤 현실’에 가중치를 두거나 모종의 ‘경향성’을 띠면서 선택하고 있으며, ② 그렇게 선택한 현실을 아주 유사한 방식, 더 심하게 말해서 거의 획일적인 방식으로 다루고 있다 가 된다.
오늘 이 자리에서 ①의 의제를 다루는 것은 필자의 능력을 벗어난 일이다. 현실과 소재 선택의 경향성은 통계적인 접근 방식의 도움 없이는 논의 전개가 힘들어진다. 한국 방송의 인물 다큐멘터리가 그 동안 다룬 인물 중에서 ‘장애인’ 이 정치가나 기업인보다 월등히 많을 것이라는 추측은, 그 동안의 방송 경향 상 짐작은 가능하지만 일정기간 동안 방송 된 인물 다큐멘터리를 전부 검색해 통계적으로 검증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확실히 옳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겉으로 보기에 한국의 방송 다큐멘터리는 역사, 시사, 과학, 환경, 인물, 문화 등 우리 사회 각 분야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현상과 사실 중 빠트리고 다루지 않는 곳이 없어 보인다. 만약 우리 방송에도 서구의 Mock 다큐멘터리 같은 장르가 있다면, ‘사실’
과 ‘그럴듯한 사실’ 중에서 어떤 것을, 어떤 기제를 통해 선택해서, 어떤 스타일로 다큐멘터리를 만드는가 라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다큐멘터리의 제작 환경이 그런 식으로 바뀌어 간다면 ①의 의제도 앞으로 충분히 논의해 볼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위와 같은 이유로 오늘 이 자리에서는 ①의 의제보다는 ②에 집중하기로 한다. 결국 한국 방송 다큐멘터리의 정체성이라 함은 ‘현실’을 다루는 방식의 유사함과 동일함에서 비롯된다고 잠정적으로 추론할 수 있다. 물론 이 추론이 개별 다큐멘터리들을 학문적으로 다양하게 분석한 결과는 아니다. 그동안 현업에서 다큐멘터리 또는 그와 유사한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부딪히고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우리 방송 다큐멘터리의 동일성과 획일성을 나름대로 분류해서 정리한 것이다.
3. 한국 방송다큐멘터리가 ‘현실’을 기록하고 다루는 방식의 획일성
a. 변사(辯士) 다큐멘터리
- 왜 한국 방송 다큐멘터리에는 힘과 감동이 없을까?
한국 방송 다큐멘터리의 대부분은 무성 영화의 신파적인 해설자인 ‘변사 다큐멘터리’로 전락한지 오래다. 시사․ 문화․ 인물․ 자연․ 과학․ 역사 등 거의 모든 유형을 가리지 않고 해설자라는 ‘변사’의 도움 없이는 홀로 설 수 없는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 중에서도 현장의 생생함을 생명으로 하는 인물, 자연 다큐멘터리가 변사 다큐멘터리의 대표 선수가 되어 버렸다. 단순히 내레이션의 양이 많다는 것을 지적하는 차원에서 ‘변사 다큐멘터리’ 라는 다소 모욕적인 표현을 쓴 것은 아니다. 해설의 양적 측면을 넘어서,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는 언어 해설’이 ‘영상과 현장음으로 이뤄진, 감각적 구체물인 영상 다큐멘터리’ 에 가하고 끼치는 질적인 변화와 치명적인 해악을 감안할 때, 한국 방송의 다큐멘터리는 ‘변사 다큐멘터리’라는 뜻이다. ‘변사’는 객관성을 가장하면서 ‘현실’ 자체와
시청자 사이에 장막을 친다. 변사라는 필터를 통해 ‘다큐멘터리라는 2차적 현실’은 다시 한번 변형을 겪고 시청자에게 전달된다.
자신이 맞닥뜨린 ‘현실’, ‘상황’ 그 자체에 연출자가 자신감이 없어서일까? 해설은 그야말로 최소한의 정보 전달 역할만 하면 되는데, 연출자는 ‘사실’이 자신의 의도까지 말해주길 바라면서 그 의도를 노골적으로 해설로 위장한다. 심한 경우 인물다큐의 연출자가 파악한 주인공의 심정까지 해설로다 말해 버린다. 인물의 표정과 행동, 말로 전달하고 시청자 스스로 느끼게 해주면 될 것을 해설이 개입해 모든 것을 미리 규정해 버린다.
시청자가 다양한 영상과 현장음을 보고 듣고 심리적으로 반응하는 과정은 마치 빗방울 여러 개가 연못에 떨어져 만든 파문이 서로 부딪히고 간섭하면서, 혼란스럽긴 하지만 일정한 패턴을 만들어 가는 것과 유사하다.
한 인상적인 영상을 보면서 수백만의 시청자는 서로 다른 수 백만 가지의 상념을 느끼고 이것이 연속적으로 누적되면서 각자마다 하나의 감동을 형성하게된다. 추상적인 언어 해설은 이런 맥을 끊고 일방적인 방향을 강요하게 된다. 이는 마치 미술관 가서 그림을 보면서 첫 인상(impression)을 받고 음미하기도 전에, 평론가의 해설을 먼저 듣고 그림에 대한 선입관을 갖는 꼴이다.
변사 다큐멘터리의 문제는 무엇인가? 실제 현장과 상황, 사건과 인물의 생생함을 언어해설의 탈을 잘못 쓴(또는 쓰지 않아도 될) 연출자가 중간에 끼어듦으로써 시청자의 감정의 흐름을 차단한다는 점이다. 불필요한 해설 때문에, 시청자가 영상을 ‘보고 느끼기도’ 전에 영상과 현장음은 그 생명력을 잃고 언어 해설의 종속 변수로 떨어지고 만다. 자신의 의도를 빠르게, 빠뜨리지 않고 전달하고 싶은 조급증과 노파심에 빠진 연출자는 자꾸 영상보다는 ‘해설’에 주도권을 넘겨 버린다.
시청자가 영상을 보고 수 만 가지를 구체적으로 느끼고 주관적으로 이해하는 감각의 영역에, 너무 빨리 해설이라는 추상적인 언어가 침입해 객관을 가장한 설명으로 시각 정보를 박제로 만들어 버린다. 따라서 변사 다큐멘터리에서는 ‘TV가 영상 매체’라는 사실은 단지 시청자가 눈으로 화면을 보고 있다는 ‘물리적이고 감각적인 상황’ 빼고는 전혀 의미가 없다.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언어 해설에 의존하다 보면 ‘언어적 논리’와 ‘영상 논리’의 주종 관계에 익숙해진다. 이것이 깊어질수록 촬영하고 편집하는 과정에서도 이런 권력 관계가 그대로 유지된다. 새내기 방송 다큐멘터리 연출자들은 ‘관찰하는 법’ 보다는 먼저 ‘구성하는 법’을 배운다. 현실과 부딪히기 전에 미리 예상되는 현실 상황의 전개 틀을 짜 놓고, 촬영 나가서 꼼꼼히 관찰하기보다는 보고 싶고, 듣고 싶은 것만을 담으려 한다. 아예 해설과 논리의 뼈대를 잡아 놓고 그에 맞춰 해설의 밑그림용으로 촬영을 하기도 한다. 편집도 영상의 감각적 논리를 증폭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적 해설의 충실한 밑받침용으로 맞춰진다.
해설은 영상이 촉발한 감각의 영역을 심화하고 극대화 할 경우에만 쓸모가 있다. 5.1 채널 홈씨어터로 해설자의 나레이션을 짜증나게 듣는 것보다는 생생한 현장음과 음악을 즐기는 편이 훨씬 낫다는 것을 연출자들이 빨리 깨달아야 한다. 영상의 의미 전달은 영상에게 맡겨야 한다. 영상 그 자체가 드러내는 진실과 시청자 사이에 연출자가 ‘해설’이라는 수단으로 과도하게 개입해 영상을 죽이는 일을 그만두지 않으면, 한국 방송 다큐멘터리는 생생한 인간을 미라로 만들어 버리는 박제성을 극복하기 힘들 것이다.
b. ‘코드’ 에 갇힌 다큐멘터리
- 왜 한국 방송 다큐멘터리는 다 같아 보일까?
한국 방송 다큐멘터리는 대부분 독창적이지 못하고 그 나름의 개성을 찾아보기 힘들다. 각 지상파 방송사의 로고와 제작진 스크롤을 가리고 시사하는 블라인드 테스트를 해본다면 각 방송사 별로, 각 연출자별로 어디서 제작했고 누가 만들었는지 구별하기 힘들 것이다. 특히 ‘일요스페셜’ 이나 ‘VJ특공대’ 같이 정규 편성된 프로그램 타이틀 아래 제작된 작품들을 시사한 후 개별 다큐멘터리의 특성에 따라 연출자를 구별해내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럴 만큼, 소재는 다를지언정 스타일과 형식면에서 비슷비슷한 다큐멘터리가 동일한 기획의도를 가진 편성 프로그램의 틀과 규칙 안에서 생산되고 있다. 말로는 뭔가 다른, 파격적인 작품을 원하지만, 실제는 개성과 독창성보다는 집단적 유사성이 안전하고 무난하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다.
각 편성 프로그램이 선호하는 틀과 규칙을 ‘코드’ 라고 한다면, 그 ‘코드’에 맞춰 소재와 사실이 선택되고 그 코드가 원하는 스타일로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진다. 따라서 아무리 새로운 소재와 사실이 발굴돼도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유사한 다큐멘터리가 나올 수밖에 없다. ‘VJ특공대’의 카메라는 몇 년 전이나 지금이나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별 의미 없는 줌 인과 줌 아웃, 트랙킹, 팬을 어지럽게 반복하고, ‘일요스페셜’의 시사다큐는 예나 지금이나 의미와 정보는 있지만 별 감흥은 없는 내용을 무미건조하게 신문 기획기사처럼 쭉 엮어 놓는다.
별 변화를 용납하지 않고 이종 교배도 허용하지 않는 ‘코드’라는 감옥에 ‘현실’과 '연출자'가 모두 갇혀 있는 셈이다. ‘코드’는 한 편성 프로그램 아래의 개별 다큐멘터리의 통일성을 확보하는데 유용하고 타 프로그램과의 변별성을 확보하는데는 유용한 표지가 되기도 하지만 깊은 반성 없이 관성적으로 적용할 때에는 개별 다큐멘터리의 혁신과 발전을 저지하는 장벽이 된다. 기획회의에서 채택되지 못한 수많은 아이템들이 프로그램의 기획의도, 코드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이라는 것을 PD 들은 잘 알고 있다. 소재가 운 좋게 채택됐을 때도 코드가 종용하는 수많은 제약과 한계 때문에 별 빛을 발하지 못하고 고만고만한 내용으로 전락해 버리는 경우도 많다. 때로 코드를 충족시키지 못한 훌륭한 소재가 ‘특집 다큐멘터리’라는 이름으로 살아남기도 하지만 ‘코드 지향’ 은 다큐멘터리의 발전 측면에서 본다면 약보다는 독이 된다.
다큐멘터리의 혁신을 옭매는 ‘코드’의 배후는 민영방송의 경우에는 시청률과 대중 영합주의, 공영방송의 경우에는 기계적인 공영성, 민주화 이전의 모든 방송에겐 정권의 취향 등이다. 방송사 경영진이나 고위간부의 선호도, 시대의 분위기, 이념적 거대담론, 시의성 등도 ‘코드’의 권력 유지를 위한 강력한 후원자다. ‘코드’의 폐해는 연출자의 현실, 객체에 대한 접촉을 왜곡하고 때로는 차단하는 것이다. ‘코드’는 다큐멘터리 연출자의 오염되지 않은 직접적인 관찰과 기록 자체를 최초부터 방해한다. 연출자는 ‘저런 건 프로그램이 되지 않아’, ‘제안해 봤자 채택도 안 돼’ 라는 선입관에 가득 차 사실 , 진실 그 자체로부터 멀어진다. 방송 다큐멘터리 연출자의 자기 검열, 방송사의 내부 검열 등에 의해 어떤 종류의 사실과 진실은 기록되기도 전에 무시되고 잊혀지는 것이다.
이에 반해 독립 다큐멘터리 연출자들은 순수한 관심에서 ‘코드’의 방해 없이 사실 그 자체에 접근한다. 물론 독립 다큐멘터리 연출자들도 개인의 계층․이념․소득․성에 따라 그가 접하는 사실을 거르는 다양한 필터를 가지겠지만, 그것이 방송 다큐 연출자들을 제약하는 코드만큼 강력하지는 않다.
다큐멘터리의 본질이 다양한 현실의 기록과 묘사라는 데 모두가 동의하는 상황에서 ‘현실, 사실, 객체 지향’이 아니라 코드 지향의 다큐멘터리가 득세하는 것이 한국 방송 다큐멘터리의 현실이다. 우리 주변의 다양하고 천차만별한 현실과 진실이 ‘코드’의 체를 통과하지 못한 만큼, 우리의 방송 다큐멘터리는 종(種) 다양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획일적으로 되가는 것이다. ‘코드 지향’의 굴레를 깨기 위해서는 연출자의 자기 혁신과 저항이 필수적이다. 연출자들이 코드 지향이 아니라 순수한 현실, 객체 지향일 때,
거기서 사실 자체의 강력한 동력과 다양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관찰할 때, 개개의 사실과 소재에 걸 맞는 독특하고 고유한 형식과 스타일이 생겨날 것이다. 그러한 저항을 바탕으로 뭐라 이름 붙이기 힘들 정도로 새롭고 이상하고 낯선, 다양한 형식과 종류, 장르의 다큐멘터리가 등장해야한다.
연출자와 사실을 코드에서 해방시켜야한다. 다큐멘터리의 ‘작가주의’와 현실의 ‘사실주의’ 가 치열한 시청률 경쟁의 상황에서 사치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코드 지향주의를 극복하고 사실과 현실을 우선시 하는 ‘사실주의’를 제일로 놓지 않으면 한국 방송의 다큐멘터리는 영원히 몰개성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c. 주제의 포로가 된 다큐멘터리
- 왜 한국 방송 다큐멘터리는 근엄하고 강압적인 느낌을 줄까?
한국 방송 다큐멘터리의 대부분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딱딱하고 뻣뻣하다. 몇몇 연성 다큐멘터리는 예외로 친다 하더라도, 시사․ 과학․ 역사․ 자연은 물론이고 때로는 문화 다큐멘터리조차도 너무 심각하고 근엄한 경우가 많다. 한국 방송 다큐멘터리가 ‘현실’을 다루고 요리하고 풀어 나가는 방식이 상상력을 잃고 박제가 된 정석 위주에다 융통성이 없고 딱딱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그렇게 보이게 하는 이유는 다큐멘터리가 염두에 두고 있는 주제 의식과 문제의식이 너무 강하게 연출자를 사로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연출자의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가 있다보니 그가 모는 차에 탄 시청자들은 갑자기 팍팍 꺽는 운전대에 놀라고 이리저리 부딪히는 꼴이다.
대부분의 시사와 역사 다큐멘터리는 너무 뚜렷한 주제와 문제 의식을 가지고 있다. 뭔가 문제점을 꼭 폭로하고야 말겠다는 목적 의식이 앞서 있거나, 그것을 말하는 목소리는 지사적 심각함과 결단으로 가득 차 있다.
무엇인가를 힘주어 말하지 않으면, 무슨 의미든 부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뭔가 사회적 책임감을 이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경우가 많다. 누가 옳고 그른지, 진실이 무엇인지 반드시 밝혀내겠다는 연출자의 의지가 다큐멘터리 전반에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한국의 방송 다큐멘터리 연출자들은 그것이 중요한 사회적 의제든 아니면 소소한 사물이든 간에 그 ‘말하고자 하는 바’의 포로가 돼있다. 얘기 거리를 풀어 나가는 방식은 은근하고 부드럽기보다는 너무 당당하고 직선적이다. 처음에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경우가 많아서, 몇 분 보지 않아도 짐작이 가는 경우가 많다. 슬쩍 내비치는 것이 아니라 솔직하고 대담하게 ‘나 앞으로 이럴 거야. 볼래? 말래? ‘ 라고 다그친다. 연출자는 자신만만하고 확신에 차 있다. 제시하는 증거와 논거들은 확실하게 다큐멘터리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들로 차 있다. 영상자료를 많이 사용할 수밖에 없는 역사․시사 다큐멘터리들은 그 정도가 더 심하다. 한 번 꼬거나 한 바퀴 돌려서 우회적으로 진실을 내세우는 것이 감질나는 모양이다.
따라서 시청자는 논리 전개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빠져 들어가 점층적으로 연출자의 의도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강요당하다시피 설득된다. 그래서 다 보고 난 후 여운을 즐기면서 동감하기보다는, 대략은 옳지만 일방적으로 주입됐다는 느낌을 떨쳐버리기 힘든, 설교를 듣고 난 기분이 된다. 다큐멘터리가 주장하는 바와 다른 의견을 가진 시청자는 더욱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런 지적이 확실한 주제의식과 결연한 의지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 밑바탕이 회초리를 든 강압적인 교사의 이미지로 시청자에게 다가가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뚜렷한 주제의식은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전면에 너무 노골적으로 나타날 경우, 감동은 줄며, 시청자는 반발하게 된다. 설득은 다양한 차원에서 공감각적으로, 중층적으로, 다차원적으로 이뤄져야 효과가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다큐멘터리는 일차적이고 직접적으로 진실을 주장하려고 한다. 비리의 폭로는 있지만 그것을 끝까지 힘있게 몰고 가는,
사실들 사이의 숨겨진 고리를 읽고 찾아내는 상상력은 없다.
현실의 힘있는 기술(記述)은 이면의 본질을 파헤치고, 정곡을 찌르면서 때로는 후퇴하고 때로는 전진하는, 몇 번의 우여곡절과 굴절을 거쳐 몇 번씩 뒤집어 지면서 진행해야 한다. 현실을 그렇게 기술하고 묘사하는 것은 연출의 조작이 아니다. 현실은 이미, 먼저, 우리가 그것을 발견하기 전에
그런 생생하고 대립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다. 연출자는 그것을 찾아내고
충실하게 기록해야 한다. 그렇게 밝혀진 진실은 오래 기억되고 또 떨쳐 버리기 힘들다.
말하고자 하는 바에 자신감이 넘치고 그것에 지나치게 몰두해 힘이 들어가면 중간에 팍 꺽어지는 법이다. 주제로부터, 주장으로부터 몇 발짝 물러나서 진실을 서서히, 은연중에 드러나게 해야한다.
연출자는 주제로부터 자유롭게 이탈하기도 하고, 소재와 분리되거나 그것을 둘러싸고 회전도 하면서 운신의 폭을 넓힐 때만 주제와 소재의 포로가 되지 않고 그것의 주인이 될 수 있다.
4. 맺는 말
- 한국 방송 다큐멘터리의 새로운 정체성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지금까지 한국 방송 다큐멘터리의 정체성은 ‘① 각 편성 프로그램의 코드에 맞는 테마 또는 소재를 ② 언어적 논리에 치우친 해설로 평면적이고 단선적으로 구성하고 ③ 주제와 의도에 지나치게 경도해 엄숙주의와 건조 일색의 Tone & Manner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그 동안 몇몇 특집 다큐멘터리와 몇몇 연성 다큐멘터리 실험이 있긴 했지만 그것도 곧 매너리즘의 틀에 갇히는 상황이 되풀이 됐고, ‘전형’의 본질적인 변화는 요원한 실정이다.
이런 정체성의 정체(停滯)를 뛰어넘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다큐멘터리 제작자의 자기 혁신이 이뤄져야 한다. 이제 한국 방송 다큐멘터리의 혁신을 위해 전위에 설 다큐멘터리들은 정보와 의미 전달에 치우친 서술 방식을 과감히 버리고 ‘발견의 놀라움’과 ‘박진감 있는 드러냄의 미학, ‘현실의 자연스러운 감동’(극적 감동이 아닌)의 구조를 획득해야 한다. ‘현실’의 집요하고 세밀한 관찰, 폭로의 수준을 넘어서 사실들의 심층에 숨겨진 연결 고리를 찾는 상상력, 전위적인 영상언어와 새로운 영상문법, 다양하고 독창적인 관점, 파격적이고 다층적인 서사구조 (Narrative) 등의 실험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연출자를 제약하고 짓누르는 주제의 무거움과 코드의 교묘함을 벗어 던지고 생생한 현실․진실로 회귀, 환원해야한다. 지금까지의 다큐멘터리에 대한 모든 선입관과 판단에 괄호를 치고 가장 기본적인 ‘현실’ 그 자체로 돌진해야 한다.
한국의 시청자들은 이미 90년대와 2천 년 대 들어 널리 보급된 케이블․위성 채널을 통해 해외의 다양한 방송 다큐멘터리를 접해왔다. 세계화 시대에 맞춰 한국 방송 다큐멘터리 제작진 또한 우리 ‘다큐멘터리의 정체성과 변화 방향’에 대한 진지한 연구를 시작해야 할 때가 왔다.
위에서 든 한국 방송 다큐멘터리가 내부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획일성을
타파하고 새로운 정체성을 찾지 않으면, 한국 방송의 다큐멘터리는 시청자의 버림을 받거나, 아니면 새롭게 등장할 방송 장르의 위세에 눌려 근근히 명맥을 유지하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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