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글 이상엽 / 이미지프레스 |
백족(白族)을 찾아서 따리(大理)로 향했다. 윈난성 쿤밍에서 버스로 하루거리. 하지만 이제는 따리로 가는 항공기가 흔해져서 버스 여행객이 줄어들 정도라고 한다. 육로에 비해 35분이면 갈 수 있는 비행기를 거부하고 쿤밍의 북부여객터미널에서 따리로 가는 버스를 타고 백족을 찾아 나섰다. 급할 것도 없었지만 사람을 찾으러 가는 길이 하늘이라면 낭만이 없지 않은가?
따리하면 이름 그대로 대리석을 떠올린다. 그 옛날 황제들이 황궁을 지을 때 꼭 필요로 했다는 대리석이 이곳을 통해 중원까지 갔을까? 무협지작가 김용에 의하면 대리는 그 옛날에도 중원 못지않게 비중있는 지역으로 나온다. 대리국의 단씨 황제들에게 내려오는 절대필기 '일양지'가 그것이다. 그 때문일까 따리는 오늘날에도 그 절대고수들의 이야기를 따라 수많은 중국인들이 들르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버스가 도시로 접어드는 상당히 한화된 도시풍경이 나타난다. 하지만 조금 더 도심으로 들어가 보니 고대도시의 풍모를 지닌 대리 고성이 나타난다. 도성안의 모습은 그야말로 1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 느낌. 운남 특유의 낮은 기와 건물들과 수많은 골목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동서로 8개, 남북으로 5개의 길로 이루어진 계획도시의 면모를 갖추고 있는데다 돌로 깔린 길들을 걷다보면 골목마다 가득한 상점과 노점들을 구경하는 것도 고성을 보는 또 다른 즐거움이 되고 있다. 하지만 이곳도 대규모로 관광객들이 몰려오면서 하루가 다르게 그 면모를 잃어가고 있다고 현지인들은 아쉬워하기도 한다.
따리백족(白族)자치주의 중심소재지인 따리시는 중국의 국가급 풍경 명승구로 유명하다. 약 4천년 전에 백족의 선조들이 이곳에서 자리 잡고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켰다. 당대에는 남조국(南詔國)이 송대에는 대리국(大理國)이 건설되어 약 500년 이상동안 지속되었고, 운남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그 때문에 따리는 중국 서남부의 실크로드 도시 중 하나로 성장해 수많은 명승고적과 문화 인물들을 남길 수 있었다.
그 중 따리고성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백족 건축의 최고봉이랄 수 있는 삼탑이다. 당나라 때 지어진 절집의 일부로 오래전 파괴되고 이들 탑만이 남았다고 한다. 지금은 윈난을 대표하는 건축물답게 주변 부속건물들도 새로 들어서 있지만 75미터에서 45미터에 이르는 3개의 탑을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고 한다. 이곳을 찾는 여행객들을 위해 한 가지 팁을 준다면 삼탑사 경내로 들어가면 오히려 한눈에 삼탑을 보기 힘들다. 우연하게 산책을 하다가 삼탑을 잘 찍을 수 있는 곳이 있다기에 들어갔다. 삼탑사에서 왼쪽으로 1킬로미터 떨어진 호수 공원이다. 오전 일찍이라 아직 개장도 하지 않은 터라 살짝 찍고 나오겠다니 "안되요. 돈 내야 들어갈 수 있어요"라며 중년의 매표원이 일언지하 거절이다. 하긴 이 공원은 오직 사진 찍는데 그 가치가 있는 곳이니 그냥 들어가겠다는 우리가 도적이다. 결국 꽤 비싼 입장료를 물고 들어가 삼탑을 바라보면 호수에 반영된 아름다운 자태를 만끽할 수 있었다.
윈난은 중국에서도 소수민족이 많기로 유명하다. 타이족, 이족, 묘족 등 20개의 소수민족들이 모여살고 있다. 그중에서 따리는 백족의 세력권이라고 할 수 있다. 백족이 자리 잡은 이곳 따리는 북쪽으로 만년설이 뒤덮인 창산이 있고 남쪽으로는 얼하이라는 거대한 호수가 자리하고 있다. 어떤 방향에서도 외적의 침입을 막을 수 있을뿐더러 거대한 논이 펼쳐져 있어 나라를 경영하기 좋았을 법 했다. 산해경과 사기에는 이 지역 민족을 백만(白蠻)이라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래전부터 중원에도 잘 알려진 듯 하다. 창산의 만년설처럼 흰옷을 즐겨 입어 붙여진 이름일 것으로 추정된다. 언어적으로 볼 때 크메르어와 타이어, 티베트버마어 등과 상관성이 있을 뿐 중국어와는 거리가 있어 민족적으로 별개인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당나라 때부터 본격적인 중원의 한문화를 도입해 역사적인 기록이 풍부하고 백족 특유의 문화를 발전시켜 왔다. 주로 불교가 도입되어 지배층 종교로 자리 잡았지만 민중들은 번주(本主)라는 자연신이나 따리국의 왕자나 전설 속의 영웅 등을 숭배하는 종교를 믿고 있다. 종교와 함께 백족 고유한 문화를 발전시켜 천문, 역법, 기상, 의학, 문학 등 분야에서 많은 우수한 작품을 창조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따리에는 한족이 그리 많지 않으며 백족들의 경제권을 형성하고 있다. 외부에서 온 여행객들 앞에는 꼭 흰옷을 입은 백족 아가씨가 가이드를 하고 있다. 이곳의 원칙이라고 한다. 상점의 주인들도 백족들이라고 한다. 늘 한족들이 들어와 상권을 장악하는 다른 소수민족지치구들에 비하면 다행한 일이다. 백족 아가씨가 이끄는 관광객들을 졸졸 쫓아 고성 안을 어슬렁거렸다. 그러다 뒤를 보니 창산이 도시위로 거대하게 솟아 있었다. 만년설을 머리에 쓰고 있는 4000미터의 창산은 참 비현실적이었다. 그런데 저 산을 넘어 온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따리국을 멸망시킨 원나라 몽골인들이었다.
창산과 얼하이로 천혜의 요새를 구축했다고 자신했던 따라국 사람들은 경악했다. 완전히 허를 찔린 셈이었다. 백족의 지도부들은 이 어마어마한 기세와 말을 동원한 기미군단의 발굽아래 짓밟히고 말았다. 수많은 귀족들은 몽골군을 피해 식솔들을 데리고 오지 산간으로 피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서 중원의 정권으로부터 오랫동안 독립되어 있던 종사는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그 후 명대와 청대를 거치면서 윈난은 완전한 중국으로 종속되고 말았다. 하지만 역사의 복수는 여전히 남아있는 것일까? 몽골의 힘을 절대적으로 약화시킨 원인이 바로 이곳에 있었다.
바로 페스트였다. 흑사병으로도 불리는 페스트는 원래 이지역의 풍토병이었다. 들쥐로부터 전염되는 이병은 그러나 이곳 사람들에게 치명적인 병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 페스트균을 지닌 들쥐가 몽골군의 군마에 실려 초원으로 갔다. 그리고 초원에서 왕성하게 번식해 대규모의 흑사병을 일으켰다. 몽골의 초원은 삽시간에 초토화 됐다. 따리의 복수였던 것이다.
물론 원제국이 급속하게 쇄락한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흑사병의 창궐은 그중에서도 꽤 유력한 설 중 하나이다.
따리를 떠나 백족사람들의 작은 마을이 있다는 북쪽으로 길을 잡았다. 이곳에서 만나 곳이 샤핑(沙坪)과 샤시(沙溪)라는 백족마을이었다. 모두 사(沙)가 들어간 것은 티베트를 발원해 윈난을 지나는 진사강(金沙江) 때문인 듯 하다. 하지만 이 이름에 붙은 데는 이 마을 모두 진사강을 따라 티베트까지 이어진 차마고도(茶馬古道)라는 특별한 길 위에 있다는 이유도 있다. 차마고도는 서기 8세기 경부터 윈난의 특산인 차를 메주처럼 덩어리로 만들어 말에 싣고 리장을 지나 샹그릴라라고 불리는 중티엔을 거쳐 티베트로 날랐던 길이다. 굉장히 멀고 험한 길이어서 이 무역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중계무역을 했다. 즉 마을과 마을이 릴레이식으로 차를 날랐던 것이다. 상인들은 이 차를 구입하기 위해 말이 쉬어갈 수 있는 마을에 모여들었다. 그 마을들이 바로 샤핑과 샤시였다. 하지만 샤핑에 도착했을 때 그 옛 풍광을 떠올릴 말도 차도 없었다. 대형 트럭에 실려온 온갖 현대식 생필품들과 농산물들뿐이었다. 그렇다고 실망할 수는 없다. 그 옛날의 풍경이 고스란히 남아있으려니 생각하는 오늘날의 여행객이 몰염치한 것 뿐이리라.
하지만 월요일이면 장이 열린다는 샤핑은 외부인에게 재래식장터를 보여주는 즐거움이 있었다. 노천 이발관은 중국에서도 흔한 풍경이지만 노천 치과는 처음 보는 풍경이다. 이곳 사람들이 특히 많은 질병이 알카리성 물을 마셔 생기는 이빨 관련 질병들이었다. 초로의 노천 치과의사(?)는 주로 썩은 이를 드러내고 그 위에 아말감을 씌우거나 틀니를 해주고 있었다. 나 역시 어릴 적 병원에 가지 않고 동네 아저씨에게 이빨 치료하던 생각이 문뜩 났다. 어차피 세상은 비슷하게 돌아가고 발전하는 것인가 보다. 사진을 찍으려는데 "네 이빨도 봐 주련"하며 씩 웃는다. "쎄쎄!"를 연발하며 손사래를 치고 말았다.
샤핑에 비해 샤시는 너무나 고즈넉한 동네였다. 리장으로 가던 길을 벗어나 산속으로 한참을 간 후에 나타난 샤시마을은 별세계 같았다. 아직도 개발되지 않았고, 외부인의 발길도 거의 없는 곳이었다. 그나마 우리가 이곳을 알 수 있었던 것은 세계기념건축재단( world monument fund WMF)이 2001년 이곳을 조사한 후에 중국정부에 보존할 것을 권유했기 때문이다. 권유의 핵심은 이곳이 바로 차마고도의 중요한 통로였고 커다란 시장이 열렸기 때문이다.
천천히 걸어 1000년이 된 마을로 들어갔다. 단단한 돌을 촘촘하게 박은 이 길을 그 옛날 차를 실은 캐러밴들이 말을 타고 다녔을 것이다. 마을 중심은 사방가로 동서남북 길이 나있다고 곳이다. 이곳에 오래된 사찰이 있고 그 앞에는 텅 빈 광장만이 그 옛날의 추억을 겨우 떠올릴만한 흔적을 보여주고 있었다. 사방가에 서있는 거대한 고목은 그 옛날 캐러밴이 말을 묶어 놓았을지도 모른다. 사방가에서 다시 말을 몰아 멀리 리장 쪽으로 갔다는 북쪽 길을 볼 때 딸각거리는 말발굽 소리를 들었다. 환청인가 했지만 저 멀리서 볏단을 싣고 오는 농부의 말발굽 소리였다. 그 옛날 백족 캐러밴들의 모습은 사라졌지만 그들의 뒤를 쫓는 나의 여행은 여전히 설레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도 손님 맞기에 부산하다. 거리가 정비되고 깨끗한 푯말들이 붙었다. 한자와 함께 영문이다. 결국 이곳이 현대 중국에서 소수민족이 살아가는 모습인 것이다. 이곳도 결국 개발되면 백족들의 살림은 나아질 것이다. 하지만 마을의 풍경도 사람들의 문화도 변해 갈 것이다. 백족의 미래는 어렵잖게 예측할 수는 있지만 오늘의 모습이라도 남아있길 기대하는 것은 여행자의 이기심일까? 물론 그럴 것이다. 나는 다만 아쉬울 뿐이다.
백족
한족으로부터 민차(民家)라고 불려 왔으나, 신중국이 되면서 바이족(白族)으로 개칭되었다. 인구는 약 60만 명으로 1956년 다리바이족(大理白族) 자치주가 설립되었다. 언어계통은 몬크메르어·타이어·티베트버마제어설 등이 있으나 정설이 없다. 그들의 조상은 예로부터 이하이 주변에 세력을 쌓아, 당나라 때 남소국, 송나라 때 대리국의 주요 부족이었던 백만이라고 생각된다. 일찍부터 수도 경작하였고, 한문화의 영향도 깊으며, 당나라 때 전하여진 불교 신앙 외에 조상숭배, 마을의 시조에 대한 제사 등이 행하여진다.
숙박
중국의 다른 지역에 비해 윈난은 다양하고 저렴한 숙소가 있다. 보통 외국인은 중국에서 초대소 아니면 1성급 이상의 호텔에서 묵어야 한다. 쿤밍에서는 아무래도 호텔에 묵어야 하고, 따리는 게스트하우스에 머물 수 있다. 호텔은 200~300위엔, 따리의 게스트하우스는 대략 1인 20위엔에 침상하나이다. 싱글룸도 그리 비싸지 않다. 욕실도 완비되어 호텔에 비해 그리 낮은 수준도 아니다.
음식
운남지역의 음식은 한국인에게도 그리 힘들지 않다. 아침은 누룽지밥 같은 쌀죽과 쌀국수가 늘 거리에 대기하고 있다. 하지만 서구식 페스트푸드는 없다. 정 한국 맛이 그립다면 김과 김치정도는 준비해 가면 좋다. 많은 게스트하우스와 까페에는 서양식 요리도 준비되며 윈난 커피를 즐길 수 있다.
이동
윈난은 철도가 발달되어 있지 않다. 생각보다 고도가 높고 산악이 많아 차량 이동이 대부분이다. 도시의 버스 터미널에는 각지로 가는 버스들이 있다. 단 험한 길을 가는 탓에 100킬로미터 정도는 5~6시간 정도 걸린다고 생각해야 한다. 쿤밍에서 따리까지는 비행기가 오가고 있다. 왕복 20만원 정도.
건강
이곳에서는 약하지만 고산증을 느낄 수 있다. 윈난 북부는 평균 고도가 2000미터이고 올라갈수록 더 높은 지대가 나타난다. 비행기로 바로 도착하는 사람들은 현기증과 편두통을 겪을 수 있다. 물을 많이 마시고 천천히 여행하는 것이 좋다. 물은 어디를 가나 차를 마실 수 있어 좋다. 생수는 콜라보다, 맥주보다 비싸다. 가격은 서울과 다를 바 없다. 생수도 아껴먹는 것이 여행경비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이다.
쇼핑
중국에서 가장 질 좋은 물건은 의류, 가방 등이다. 옷은 이곳에서 미리 준비해 가는 것보다 현지에서 구입해 입고 다니는 것이 저렴할 정도다. 윈난성에서 가장 매력적인 상품이라면 '보이차'를 들 수 있다. 차의 고장답게 다양한 형태의 차를 구입할 수 있다. 관광지와 백화점 보다는 거리의 차 전문점에 지인과 함께 가면 서울의 백화점 보다 10배는 싸게 질 좋은 보이차를 구할 수 있다. 약간 발효시킨 보이차를 들어보면 왜 그 맛에 수많은 사람들이 빠져드는지 느껴 볼 수 있을 것이다. [Edition 54, 20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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